<130화〉회의
단출하다.
이 말만큼 섬서백가의 가주전에 어울리는 단어는 또 없으리라.
돈이 없어서? 아니다.
돈이라면 오대세가와 견주어도 부족하지 않을 정도로 벌고 있다.
가신들이 가주전은 가주의 위엄을 상징하는 곳이라며, 조금 더 꾸미자고 몇 번이 나 이 야기를 꺼 냈지 만, 그는 한사코 거 절했다.
모든 영광은 오대세가의 자리에 올랐을 때 누리겠다는 말과 함께.
굳은 의 지 가 그대 로 투영된 휑 한 가주전을 보며 그는 고개를 저 었다.
‘신념이랄지, 광기 랄지.’
좋게 말하면 신념이요, 나쁘게 말하면 광기에 가까운수준.
이에 감화된 가신들은 그에게 목숨 빼고 다 내어줄 수 있을 정도로 충성을 맹세했지만.
글쎄.
얻는게 있으면 잃는 게 있는법 아니던가.
가문에 대한 집착은 가주로서의 그를 최고로 만들었을지 모르나, 아비로 서의 그를 최 악으로 만들었다.
“왔느냐.”
“예.”
“앉거라.
상석에 앉아 있는 백영학은 가히 좋은모습이라고보긴 어려웠다.
화산파에서 백하현까지 사력을 다해 신법을 운용하여 부리나케 달려왔기 때문이었다.
“장보도를 손에 넣었다고 들었다.”
“예.”
“그 과정에서 매화검수들과 마찰을 빚었다고.”
“예.”
“처음부터 네가누구인지만 밝혔어도 됐을 일인데 굳이 마찰을 빚은 이유 는 무엇이냐.”
“한판 붙어보고 싶어서요.”
백우진이 가주전에 들어섰을 때부터 지금까지.
제 자식과 눈 한 번 마주치지 않고 있던 백영학이 처음으로 고개를 들어 그 를 정 면으로 바라보았다.
눈가에 덕지덕지 붙은 호승심이 장난처럼 던진 말이 사실임을 증명하고 있다.
“•••내가 없는 사이 흑풍대와청룡단을 안으로들인 게 너라고들었다.”
“예.”
“앞으로 어쩔 셈이냐.”
“혈수마녀 가 남긴 유산이 라는 걸 찾아봐야죠.”
무림맹과 사흑련.
두 조직은 배타적 인 느낌이 강하다.
자신들의 세력에서 고수가 나오는 건 좋아해도, 신진 고수나 세력이 등장 하는건 싫어한다.
이유는단순하다.
그들이 강성해지는 만큼 자신들이 누리고 있는 걸 빼앗길 염려가생길 테 니까.
그런 상황에서 그들이 혈수마녀의 유산을 개인이 온전히 차지하도록 두 겠는가.
‘절대 그럴 놈들이 아니지.’
.
......
...
백 영학은 이를 잘 알고 있다.
가문을 이렇게까지 키우기 위해 정파의 추악한 면을 수도 없이 봐온 그였 다.
제법 강성해진 지금도 오대세가 중 일부는 섬서백가의 힘을 억누르기 위 해 암암리에 방해 공작을 펼치고 있지 않던가.
‘독식은물건너간상황이다.’
조용히 몰래 먹을 수 있다면 모를까, 정보가 퍼질대로 퍼진 상황에서 혼자 먹으려 들었다간 몸집 커다란 두 호랑이 에게 배 가 찢어질 수도 있는 상황.
그러니 백우진이 두 세력을 받아들이고, 심지어 주도권을 가져온 것은 최 선의 선택이었다.
지닌 주도권을 이용하여 상황을 조율한다면 유산을 나누더라도 가장큰 걸 차지할 수 있을 터.
“그래, 알았다.”
그는 담담한 표정으로 제 아들의 얼굴을 살폈다.
“•••이만나가보거라.”
“예,그럼.”
자리에서 일어나고개를 꾸벅 숙인 뒤 밖으로 나가는 백우진.
그런 아들의 뒷모습을 보며 가주전에 혼자 남은 백 영학은 생각에 잠겼다.
타박하려 했다.
든든한 우군이 되 어주고 있는 화산파와 척 이 라도 지 게 되 면 어찌할 셈 이 었냐고.
그러나 할 수 없었다.
‘기괴할 정도로 빠르다.’
용봉비무제 이후로 처음 본 둘째의 성장세 가 믿을 수 없을 만큼 빨랐다.
과연 그것이 가능한가 싶을 정도로.
그러다 문득, 둘째가 태 어나던 순간부터 쏟아진 가신들의 찬사가 떠올랐 다.
뛰어난무재를 지녔다고, 둘째 도련님은 반드시 고수 중의 고수가될 거라 는 말들이.
그와동시에 백우진의 어린 시절의 모습이 떠올랐다.
여리디 여리고, 자그만 일에도 눈물을 터뜨리던 유약한 아이.
무가의 자식 으로서 응당 가져 야 할 투쟁 심 이 나 호승심 이 라곤 조금도 가 지지 못한 실패작.
“실패작…, 이라.”
그래, 실패작.
그는 아내와 자신 사이에서 태어난 자식들을 하나의 작품으로 여겼다.
평소 정 이 많아 두루두루 잘 챙 기 지 만, 무를 대 함에 있어서 놀랍도록 순수 한 투쟁심과 상승욕이 강한 첫째는 보기만 해도 흡족한 아이.
제 평생을 바쳐 반석 위에 올려둔 섬서백가를 맡아 오대세가의 위치에 올 려줄 성공작.
반대로 고수가 될 거란 모두의 기대를 배반한 둘째는 실패작으로 여겼다.
속빈강정.
겉모습은 그럴싸하니 정략혼인을 통해 다른 가문과의 사이를 돈독하게 만들 정도의 쓰임새.
그게 백영학이 가지고 있던 백우진의 전부였다.
분명 그랬는데.
“내 손아귀를 벗어났군….”
전혀 다른 사람이 인피 면구를 뒤집 어쓰고 있는 게 아닐까 싶을 정도로 달 라졌다.
성격만 달라졌다면 또 모르겠으나, 무력도 전에 비할 수 없을 정도로 강해 졌다.
자신과 비무를 펼쳐도 승패를 장담할 수 없을 정도로.
“허,허허.”
첫째에 대한 소식은 꾸준히 전해 듣고 있다.
무림맹에서 뛰어난 실력을 선보이며 윗사람들의 마음을 사로잡고 있다던 가하는.
그런 대 견한 첫째를, 둘째가 뛰 어넘 었다.
“복수심인가, 울분인가….”
과연 어떤 마음가짐으로 저토록 빠르게 성장하고 있는 것일까.
또 이를 어떻게 받아들여야 할까.
일찌감치 실패작이라 여긴 아들이 대성한 모습을 보고 후회하며 피눈물 을 흘려야 할까.
아니면 백우진이 섬서백가의 자식인 건 변하지 않으니 가문의 격이 높아 질 것을 기대하며 덩실덩실 춤이 라도 춰 야 하는가.
지금까지 느껴본 적 없던 감정과 혼란을 품은 채, 백영학은 시름에 잠겼다.
섬서백가의 가주 백영학이 돌아왔다는 말을 들었을 때.
청룡단주 만승은 조금 기대했다.
‘백우진은 말이 통하지 않을 녀석이다.’
어떻게든 좋은 분위 기로 첫날을 장식했으나, 그는 느꼈다.
근자에 떠도는 또라이 라는 소문이 전혀 과장된 것이 아니 라는 것을 말이 다.
이 대로라면 모든 일은 백우진이 주도하고, 청룡단과 흑풍대는 그의 뒤를 졸졸 따르는 신세가될 터.
백 가주님이라면 무림맹의 뜻을 충분히 이해해줄 터.’
막무가내 인 백우진과 달리, 백영학이라면 같은 정파의 마음을 헤아리고 이 상황을 개선시킬 수 있을 거라 생각했건만.
“이번 일에 대해서 나는 나설 생각이 없소이다.”
이른 아침, 만승과 도경을 맞이하여 차를 내어준 백영학은 그리 말했다.
“우진이에게 모두 일임하였으니, 차후의 일은 모두 녀석과 상의하도록 하 시오.”
기대는 덧없이 저물었다.
백우진이 커다란실수를범하지 않는이상에야, 이제는 따를수밖에 없는 상황이되었다.
사실 조금 강압적 으로 나가는 것도 생 각해보지 않은 것은 아니 다.
무림맹과 사문인 청성의 이름을 들먹여가며 잃어버린 주도권을 회복해볼 까 생각도 했으나.
‘느낌이 불안하다.’
짧지만 강렬한 만남을 통해 어느 정도 깨달은 백우진이라면.
어쩌면 자신들을 온전히 배제하고 사파와 일을 꾸밀지도 모른다는 불길 한생각이 들었다.
‘설마그럴 리가 있겠냐마는….’
돌다리도 두드려보고 건너라고 하지 않던가.
그래서 그는포기했고, 이는 그의 인생에서 가장올바른 선택이었다.
만약 만승이 그런 식으로 나왔다면 백우진은 정 말 사파와 어 깨동무를 할 인간이었으니.
정 오 즈음에 는 첫 회 의 가 시 작되 었다.
참석 인원은 신룡조장 백우진과 그의 참모인 제갈연지, 흑풍대에선 도경 과 잔추, 청룡단에선 만승과 그의 부단주까지 총 여섯이 었다.
“자아, 이제 슬슬 장보도를찾을 때가됐습니다.”
그렇게 말하며 그는 가슴에 고이 모셔둔 장보도를 꺼내어 탁자 위에 올려 두었다.
“다들 한번씩 살펴보십쇼.”
그의 허락이 떨어지자, 만승은 장보도를손에 쥐어 펼쳐보았다.
거무튀튀한 양피지에 짙게 새겨진 지도.
일부 선이 흐릿하지 만, 확실했다.
“이건 섬서를 나타낸 지도로군….”
그를 시 작으로 장보도를 한 번씩 확인한 모두가 확신했다.
섬서 어딘가에 혈수마녀의 유산이 잠들어 있음을.
도경까지 거친 후, 장보도를 돌려받은 백우진이 말을 이었다.
“여기를 대충 우리 유능한 참모양과 함께 특정을 해봤는데.”
백우진과 눈을 맞춘 제갈연지 가 자리에서 일어나 품에 꼬옥 안고 있던 하 얀 종이를 탁자 위 에 펼쳐보았다.
커다란종이 위에는 섬서 지역이 그려져 있었다.
그리고 그 위에는 붉은 점이 콕 찍혀 있다.
“여기가 바로 장보도에 나온 위치인데 ….”
섬서의 북동쪽.
감숙성과 인접해 있는 지역이 바로 혈수마녀의 유산이 잠들어 있다고 표 시된 곳이었다.
이 곳은 무언가 숨길만 한 건덕 지 라곤 없는 광활한 평 야 지 대 였다.
만승이 어두워진 안색으로 입을 열었다.
“혹 잘못 특정한 것은 아닌가? 이를테면 이곳 인근의 산인데 잘못 짚었다 거나 말일세.”
그러자 백우진은 제갈연지의 어깨를 붙잡고 잡아당기며 말했다.
“우리 유능한 참모가 그런 실수를 저지를 거라 생각하시는 겁니까?”
남녀의 은밀한 거리감과 불이라도 뿜어져 나올 듯한 눈빛에 만승이 입을 닫았다.
대신 도경이 코웃음을 치며 두 사람 사이를 끼 어들었다.
“흥, 사람은 누구나 실수할수도 있는 법 아닌가.”
심술이 덕지덕지 붙은 말투.
백우진은 이를 인정하듯, 고개를 끄덕였다.
“맞아, 사람은 누구나 실수를 하지.”
하지만.
“내 사람은 안해.”
“배백공자아….”
애 틋한 눈빛을 주고받는 두 사람.
그 모습을 보고 할 말을 잃어버린 도경은 고개를 휙 돌렸다.
“그…, 크흠.”
만승이 언짢음 가득한 헛기침 소리를 내고 나서야 떨어지는 두 사람.
어느 정도 상황이 진정된 후, 그가 말을 이었다.
“만약 정말이곳이라면….”
“예:
백 우진은 고개를 끄덕 이 며 환한 미소를 지 었다.
평 야 지 대 에 중요한 무언가를 숨기 려 면 답은 하나밖에 없다.
지저 (地底).
“땅 파야 할듯?”
물론 내가 아니고 당신들이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