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37 화〉함정
끌어올린 사기의 효과는 일시적이다.
아무리 북돋아도 시간이 지나면 가라앉고, 다시 밑바닥으로 처박히기 마 련.
그들의 의지가충만할때 빠른 속도로 이곳을 탈출해야했다.
“자아, 드가자!”
“예!”
모두가 한 마음, 한뜻으로 외친다.
백우진을 중심으로 똘똘 뭉친 이곳엔 정사의 구분 따위는 없어졌다.
이곳을 벗어나기 위해 몸부림치는 사람일 뿐.
그는 앞서나가며 새로이 마음을 다졌다.
‘죽게 두지 않는다.’
이곳을 빠져나가기 위해 함정 속으로 머리를 들이밀어야 하는 상황.
모두가 살아남을 확률은 극악.
그래도 백우진은 이들을 모두 살릴 생 각이 다.
아니, 살려야만 한다.
‘내가 책임져야지.’
자신이 희망을 준 장본인이기 때문이다.
극악에 가까운 확률속에서 자신이 나불댄 헛된 희망에 그들이 기운을 차 렸잖은가.
이는곧자신을 위함이기도 했다.
그런 사람들이 죽을 때면 꼭 그날은 꿈자리가 뒤숭숭해진다.
아주아주 옛날에 죽은 사람부터 하나둘씩 찾아와 자신의 속을 뒤집어 놓 는다.
질리 다시피 본 광경 이 라 이젠 그만 보고 싶다.
해이해진 정신을 무장하며 굳게 닫혀 있던 문을 호쾌하게 열어젖힌다.
조금 전보다 작은 공동.
그곳을 차지 하고 있는 것은 관이 었다.
그것도 무척 이 나 많은 숫자의 .
“아, 이거 딱 봐도 그건데.”
백우진이 눈살을 찌푸리며 말하자,도경이 물었다.
“그게 뭔데.”
“마인.”
“뭣…?”
그녀가채 놀라기도 전에 일이 벌어졌다.
텅 빈 것처럼 아무것도 느껴지지 않았던 관 안으로부터 맹렬한 기세가 흘러나왔다.
콰앙
갖가지 주먹과 발이 관을 덮은 뚜껑을 단숨에 부수고 나왔다.
이윽고 모습을 드러내 기 시 작하는 마인들.
백우진은 녀석들을 뒤로한 채, 등 뒤의 무사들을 향해 외쳤다.
“자, 봐라! 내 가 말한 그대로지 ?”
이곳에 들어오기 전, 그들의 사기를 끌어올린 백우진은 무사들을 쪼개어 몇 개의 조로 나누었다.
이유인즉, 지금처럼 마인이 무더기로 등장했을 때를 대비하기 위함이었다
•
“이 새끼들 공격 수단이 마인밖에 읎어요.”
뻔한 새끼들.
마기를 썼을 때부터 알아봤다.
그가 말한대로 일이 벌어지자 백우진에 대한 무사들의 믿음은 더욱 견고 해졌다.
“아까 정한 편제대로 마인 상대하도록 해. 내가 일러준 대로만 하면 저것 들별거아니야.”
“예,알겠습니다!”
믿음을 자신감으로 치환한 무사들의 외침이 격렬하다.
달려드는 마인들의 기세보다도 더.
거세게 타오르는 살의와 열의가 공동의 중앙에서 맞부딪친다.
일류의 무사들은 수비 위주로 마인의 공격을 차단하고, 절정의 고수는 그 들의 뒤에 숨어 기운을 정제하고 또 정제하여 검기를 날카롭게 벼린다.
“크와아악!”
“캬아아!”
단순한 방법 이 지 만, 명료하다.
오직 본능밖에 남지 않은 마인들은 이런 간단한 작전조차 파훼할수 없는 녀석들이니까.
그렇기에.
‘진미연을 일찍 죽여서 다행이야.’
당가의 숨어든 쥐새끼들 전부를 죽인 것보다 그녀를 죽인 게 더 다행이라 는 생각이 들었다.
오랜 시간이 걸렸지만, 마인의 개량은 이루어지는 중이었다.
그걸 그대로 두었다면 정말 큰 일이 났을지도 모른다.
당가를 생각하다보니 그녀의 얼굴이 떠오른다.
십수 년 만에 처음 만난 아비와 시간을 보내고 있을 당선영의 얼굴이.
‘당소저 보고싶다.’
너무 오래 참아 여자에 대 한 감각이 희 미했을 때는 오히 려 참기 편했는데 .
다시 알아버린 그 맛을 기억하며 홀로 밤을 지새우려니 죽을 만큼 힘들다.
“이쯤하면 됐나.”
제법 강한 개체들은 전부 죽였다.
백우진은 주변을 둘러보았다.
힘 겨워하는 이는 있어도, 죽을 것 같은 이는 보이지 않는다.
절정의 고수를 중심으로 뭉쳐 마인을 압박하는 무사들 사이에 몇몇이 홀 로 빛나고 있다.
신예화, 유화연, 도경, 제갈연지.
“어마어마하네.”
경쟁하듯 마인을 무찌르고 있는 신예화와 유화연.
서로죽일 듯이 싸우더니 확연히 강해진 모습이 눈에 띈다.
‘저렇게 강해지는 게 맞나….’
남들은 뼈가 빠지게 수련을 해도 벽을 뚫기는커녕 긁는 것조차 힘들다던 데.
‘역할이 가지는 힘인가.’
주연의 의미를 잊지 말라던, ‘NovelGod’이 남긴 말이 떠오른다.
| |.
!..
그녀들은 앞으로도 강해질 것이다.
남들이 한 걸음 겨우 나아갈 때, 대여섯 걸음씩 쭉쭉 나아가겠지 .
그리고 그 힘은 앞으로 험난한 싸움이 기다리고 있을 자신에게 큰 도움이 될 터다.
그렇지만.
“아잇, 몰라.”
언젠가 결론을 내 려야 하는 이 야기지만, 전쟁터에 서 할 생 각은 아니 었다.
그녀들로부터 떼어낸 시선을 도경에게로 옮겼다.
무언가 잔뜩 화가 난 표정을 한 채 기 다란 도를 난폭하게 휘 두르고 있다.
그 모습을 물끄러 미 보고 있으면 딱 하나만 떠 오른다.
“천재 맞네.”
같은 초식을 두 번 연달아 사용하면 첫 번째와 두 번째가 미묘하게 달라진 다.
남들은 수백 번 휘두르고 나서 야 깨닫는 그 미묘함을 그녀는 고작 한 번에 깨우친다.
그것도 본능적으로 말이 다.
그녀가 아예 무공을 수련하고 있는 이상, 강해지지 않으려 해도 강해질 수 밖에 없다는뜻.
“좋네.”
소설에도 등장했던 만큼, 그녀 또한 신예화 유화연 못지 않은 주역이 라는 얘기.
첫 단추를 그리 잘 꿰지는 못한 듯하지만, 그거야 앞으로 어떻게 하느냐에 따라달라지겠지.
“그나저나….”
가장 의 외 인 것은 제 갈연지 였다.
그녀의 기세가 조금씩 변화하고 있음을 느끼기는 했는데 설마 저 정도일 줄이야.
제일 성장한 건 판단력이었다.
이곳저곳을 오가며 적재적소에 초식을 운용하여 힘겨운 이들을 돕고 있 다.
최근에는 가문에서 보내준 서책에 몰두하고 있어 무공수련하기 쉽지 않 았을텐데.
그 모습이 매우 흐뭇하여 웃음이 절로 난다.
“와아아아!”
“이겼다아아아!”
마침내 모든 마인들이 쓰러지고, 상처 없는승리에 크게 흥분한무사들이 소리를 내질렀다.
정사 할 것 없이 서로를 얼싸안고 좋아하던 이들은 마지막으로 백우진의 곁으로 몰려들었다.
“백.우. 진!”
“백.우. 진!”
이 름을 또박또박 외 쳐 가며 환호하는 그들의 모습에 입꼬리 가 씰룩거 린다 •
“에헤이, 다들 그만.”
속으로는 더 했으면 좋겠다.
‘캬! 이 맛에 용사한다!’
환호성에 파묻혀 남들이 보지 못할 정도로 미세하게 입꼬리를 올리고 있 을때였다.
“다들 이게 뭐 하는 짓들이 야!”
조금 전부터 이쪽을 아니꼽게 쳐다보고 있던 도경이 결국 소리를 내질렀 다.
“앞으로 얼마나 남았는지도 모르는데 쓸데없는 일에 힘을 빼고 있어!”
백우진의 시선이 그녀의 두 눈과교차한다.
심술이 덕지덕지 묻어 있는눈동자.
자신의 부하들이 남을 환호하는 모습에 배 알이 꼴리 는 모양.
‘애네, 애야.’
어린애 같은 면모가 조금 우스웠으나 구태 여 표현하지는 않았다.
전쟁터에서 아군 심기 거슬리게 해봤자좋을 거 하나도 없다.
“자자, 도 대주의 말이 맞다. 앞으로 얼마나 더 싸워 야할지도 모르는데 이 런 일로 힘을 뺄 수는 없지.”
“예 엣!”
“다들 헤쳐모여!”
군기 가 바짝 잡힌 모습으로 백우진 앞에 도열하는 무사들.
“흥!”
아, 이런.
나름그녀의 눈치를본다고 한 말인데 오히려 그것이 마음에 들지 않았나 보다.
휙 하고 돌아서서 문앞으로 성큼성큼 다가가는 도경.
덜컹
분노한 손짓으로 문에 손을 가져가는 그녀의 발밑에 불길한 소리가 들려 왔다.
“아…!”
함정이었다.
당황한 그녀의 손이 허공에 허우적댄다.
무언가를 잡으려고 노력하는 듯했으나, 잡을 만한 것이 없는 상황.
뻥 뚫린 바닥으로그녀의 신형이 서서히 사라져간다.
“잠깐 여기서 휴식들하고 있어.”
백우진의 신형이 앞으로쏘아졌다.
“백 공자…!”
“우진아!”
“여,영웅님?!”
뒤에서 다급한목소리가 들려왔지만, 그는 아랑곳하지 않고 달려들어 그 대로 구멍 안으로 뛰 어들었다.
“금방올 테니까, 기다려!”
마지막 말을 남긴 채로.
떨어지고 있다.
끝이 어딘지 보이지도 않는무저갱 속으로.
떨어지고 있다.
그것도 아주 맹렬하게 .
“흐으읏…!”
가속도가 너무 붙어버 렸다.
‘칫,어쩔수 없지.’
살기 위해선 이 속도를줄여야만했다.
그녀는 벽을 향해 권기를 실은 주먹을 내 질렀다.
팔 하나부러질 각오로 벽에 주먹을 박아넣어 속도를 늦출 셈이었다.
하지만.
윽?!,,
벽에 기름이 잔뜩 흐르고 있다.
그녀와 같은 생각을 하는 이들을 막아서기 위함인 걸까.
“젠장…!”
조금 전까지만 해도 어떻게 살 수 있으리라 생각했던 마음을 공포가 잠식해간다.
‘이대로 죽는거야?’
무럭무럭 커가는 공포 속에서 죽음이 구체화한다.
바닥에 닿은 자신이 처참하게 짓뭉개 져 단숨에 숨이 끊어 지는 상상이 머릿속에 파도친다.
조금 전의 어리석었던 행동이 후회되기 시작했다.
‘내가 아니라 그 녀석이었다면 ….’
이런 함정쯤은 거뜬하게 올라오지 않았을까.
아니.
‘애초에 걸리지도 않았겠지.’
쓴웃음이 지어진다.
자신의 실수로부터 비롯된 일이다.
‘죽어도 싸구나.’
마땅한죽음이라는 생각이 들어 천천히 눈을 감을때였다.
무언가가 어깨를 콱 하고 붙잡았다.
있을 수 없는 일에 놀란 표정으로 고개를 들어 올리자, 그곳엔 백우진이 있 었다.
자신과 마찬가지 로 아니, 자신보다 빠른 속도로 하염 없이 추락하며.
“ 잡았다.”
입 가에 짙은 미소를 그리고 있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