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69 화〉연인이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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볼을 긁적이며 그림자 속 송희연을 들여다보는 백우진.
약간 그런 느낌이 들었다.
친하게 지내고 있던 직장 동료의 은밀하고, 음습한 취미 생활을 목격한 느낌.
‘이걸어쩐다.’
오만 생각이 다 들었다.
대체 연인들의 애정 행각은왜 저렇게 지켜보고 있는 건지.
아는 척을 해야 할지, 아니면 그냥 모르는 척 지나가야 할지.
‘조용히 돌아가자.’
아는 척하는 순간 서로 어색하게 변할 미래가 뻔히 그려진다.
지금의 상황을 본 순간부터 그녀를 볼 때마다 약간의 어색함은 어쩔 수 없 겠지만, 차라리 혼자 어색한 게 낫지.
‘야외라….’
서로 주고받는 손길의 농밀함을 점점 더 높여가는 이들을 마지막으로 일 별하는 백우진.
‘내 취향은 아닌데 !’
자신의 취 향은 정 말 아니 지 만!
만약 자신의 연인 중 누군가가 야외에서 해보고 싶다고 말한다면.
‘여 인을 만족시 켜 야 진정한 사내 니까!’
어쩔 수 없이 해야할지도!
그렇게 짧게 나마 제 갈연지 또는 당선 영과 야외 에 서 므흣한 행동을 벌 이 는 상상을 하다가.
눈을 마주치고 말았다.
잠시 그들에게서 눈을 떼고 주변을 둘러보던 송희 연과.
그의 눈에는 보인다.
온통 회색빛인 세상을 뚫고 빨갛게 변해가는 그녀의 얼굴이.
백우진이 겸연쩍은 표정으로 그녀를 향해 웃어 보이자.
스팟!
“끼 약!”
“으헉!”
그림자가 출렁거려 뜨거운 행위에 몰두 중인 연인들을 놀라게 하며 멀어 져간다.
‘어쩌지.’
저대로 둬 야 하나, 쫓아가야 하나.
잠시 고민하던 그는 그녀 가 떠 나가도록 내 버려 두었다.
곧장 대화를 거는 것보다 마음을 정리할 시간을 주는 것이 좋을 때도 있으 니.
“가, 가가. 방금 뭐였을까요?”
“글쎄…, 어쩌면 우리 연 매를보기 위해 찾아온밤손님이었을지도.”
“아이 차암!”
“…… ”
풍기문란한 행위를 하다가 요사스러운 일이 벌어졌음에도 불구하고 오히 려 더욱 뜨겁게 제 몸을 달구는 연인.
저것들, 대단하다.
백우진은 그들을 통해 혹시나 있을지도 모를 연인의 만족도를 높여주기 위해 야외 행각에 대해 공부한다는 명목으로 한동안그 자리에 머물러 있었 다.
그들은 매우 훌륭한 교보재 였다.
…
다른 조원들보다 조금 늦게 연무장에 다다른 백우진의 시선이 주변을 훑 었다.
그가 찾는 것은 어젯밤 좋지 않은 상황에서 마주한 송희 연이 었다.
있네.’
창피하다는 이유로 안 나왔을 수도 있겠다는 우려와는 달리, 그녀는 조원 들과 함께 열심히 땀을 흘리고 있었다.
운동과 운동 사이 에 잠깐 있는 휴식 시 간.
이 마에 흐르는 땀을 닦던 그녀 가 뒤 로 돌아섰다.
그리 고 백 우진과 눈을 마주쳤다.
안 그래도 붉어져 있던 얼굴이 두 배는 더 빨갛게 달아오른다.
어떡하지, 어떡하지 허둥대던 그녀는 백우진을 향해 넙죽 인사를 갈겨버 리곤 다시 몸을 돌린다.
“난감하구만, 이거.”
겸연쩍은 표정으로 볼을 긁적이는 백우진.
그녀의 상황이 이해가 가기는 했다.
밖에서 누가 그러고 있으면 훔쳐볼 수도 있다.
자신 또한 그들의 소리를 듣고 찾아가 한동안 발걸음을 떼지 못하지 않 았던가.
‘사실 한동안이 아니 라 끝날 때까지 지 만.’
아무튼.
충분히 있을 수 있는 일이란 거다.
본능이 살아있는 인간에게 가장 자극적인 것은 결국 야릇하고, 야시시한 것들인 법이니.
다만, 그녀의 경우는 조금 더 특수한 상황이다.
그냥 나무 뒤 라던가, 멀리서 훔쳐봐도 충분한 것을 구태 여 일족의 고유 능 력까지 사용해가며 이를 코앞에서 관람하고 있지 않았던가.
보는 이에 따라선 예전부터 능력을 사용하여 관음하는 것을 즐기는 중증 의 관음증 환자라고 생 각할지 도 모르는 수준.
더군다나 모르는 이한테 들켜도 창피함이 치사량을 넘 어서는 수준일 텐 데, 심지 어 아는 사람, 앞으로 숱하게 얼굴을 마주해 야 할 동료에 게 그 상황 을 보여졌다?
“어우야.
그저 상상만 했을 뿐인데 온몸에 소름이 돋는다.
백우진은 생 각했다.
그녀와 마주하고, 대화를 나누기 위해선 조금 더 시간이 필요하겠다고.
서서히 그녀를 향한 시선을 거두려 할 때, 귓가에 익숙한 숨소리가 들려왔 다.
고개를 돌리자, 당선영이 그의 뒤편에 서서 묘한 시선을 보내오고 있었다.
“깜짝이야.”
나날이 그녀들에 대한 경계도가 떨어지고 있다.
이제는 기감을 넓게 퍼뜨려도 제갈연지와 당선영의 기운은 아무리 가까 워져도 경계를 하지 않는 걸 보면 더욱 그러했다.
“잠깐 비켜봐.”
당선영이 다짜고짜 백우진을 밀어내고 그가 서 있던 자리에 그대로 섰다.
“어디 보자….”
그 뒤 , 그녀가 주변을 둘러보다가 어느 한 곳에 멈추었다.
“ 아하.”
무언가 알겠다는 듯한 추임새.
왜일까.
백우진은 갑자기 등골에 소름이 돋는 듯했다.
“이번에는 송소저인가?”
“무슨소리야, 그게.”
“여기서 송소저를빤히 쳐다보고 있었잖아. 아니야?”
“•••그건 맞는데.”
아무래도 뭔 가 오해를 하고 있는 듯했다.
“쳐다보고 있다고노린다거나하는게 아니거든…?”
“아항…, 그래?”
그녀가 다채로운 표정을 선보이며 한 걸음 더 다가왔다.
앞으로 풍만하게 튀 어나온 가슴이 백우진의 옷에 닿을 듯 말 듯했다.
그녀의 검지가 백우진의 가슴을 콕 찍었다.
“그럼 정말 안 건드릴 거야? 앞으로 쭉?”
당연하지, 라고 당당하게 내뱉으려던 순간.
이쪽을 힐끔힐끔 쳐다보는 송희 연의 얼굴을 보았다.
그림자 일족 특유의 살짝 까무잡잡하고 탄력 있는 피부.
그 위에 자리 잡은 순진무구한 얼굴.
어떤 색도 들인 적 없는 저 순백에 자신이 가장 먼저 색을 들이고 싶다는 충동이….
“자기.”
“헉.”
섬뜩한 음성이 뒷골을 때린다.
앞서 있던 당선영의 발 하나가 백우진의 발을 사뿐히 즈려밟는다.
“누차 말하지만, 나와의 사랑이 변치 않는다면 당신이 그 누굴 데려오든 상관없어.”
반달 모양으로 예쁘게 휜 눈웃음에서 짙은 한기가느껴지는것은 왜일까.
“그런데….”
가슴팍을 찌르고 있던 손가락에 점점 더 힘이 들어가기 시작했다.
그녀는 암기의 고수.
당가에 전해 내려오는 가문 비전의 지법 또한통달하고 있는 몸.
아릿한 통증이 가슴을 타고 흐르기 시 작할 즈음.
“나와 함께 있는데 다른 여자 생각하면 안 되 겠지 ?”
황급히 고개를 끄덕이는 백우진.
말 잘 듣는 강아지 같은 모습에 당선영의 웃는 얼굴에 섞 여 있던 한기 가 조 금은 누그러든다.
“잘못했으니까, 벌을 받아야지.”
그녀의 상체 가 앞으로 쏠린다.
까치발을 들고솟아오른 얼굴이 백우진의 귀에 당도해 속삭였다.
“오늘 밤, 기대해.”
한동안 다른 여자 생각은 안 나게 만들어줄 테니.
서서히 내려오는 그녀의 얼굴에 백우진의 볼에 가볍게 입을 맞춘 뒤 멀어져 간다.
열심히 땀 흘리고 있는 조원들의 대열에 합류하는 당선영을 보며 백우진 은결심했다.
“…오늘 점심, 저녁은 장어로 하자.”
조금이라도 대비를 해두지 않으면 내일 해를 못 볼지도 모를 테니. …
“다들고생 많았다.”
녹초가 된 이들의 발걸음이 하나둘씩 제 방으로 향할 때.
송희 연은 그곳에 멈춰 서서 무언가를 대비하려는 듯, 결연한 표정을 짓고 있는 백우진을 몰래 훔쳐보았다.
그녀에게 있어서 지금이란, 두 번째 삶이 었다.
첫 번째 인생에서의 이름은십영(十影)이었다.
일족을 이끄는 어른들에 의해 붙여진 별칭으로만불릴 뿐, 제 본명이 쓰일 일은 없었다.
오직 한계까지 회색빛 세상에 머물다가 다른 이와 교대하여 잠깐 숨을 몰 아쉴 뿐인 삶.
그야말로 어 떠 한 즐거움도 찾아볼 수 없는 무미 건조한 회 색 빛 삶이 었다.
인간 같지 않은 인간을 호위하기 위해 제 삶을 무채색 속으로 밀어 넣고 있을때.
그를 만났다.
‘내 인생 최고의 선택.’
그 사내, 백우진의 손을 잡기로 한것은그녀 인생 최고의 선택이었다.
앞으로 삶이 어떻게 흘러가고, 어떤 일이 벌어진다고 해도 그것만은 변하 지 않으리라.
그의 손으로 인해 자신과 동생은 구원받았다.
그리고.
쏟아지는 달빛 아래에서 그는물었다.
누구도 신경 쓰지 않았던, 오로지 십 영으로만 불려 자신마저도 잠시 잊고 있었던 제 이름을.
송희연 (宋喜緣).
바라마지 않던, 기쁜 인연이라는뜻에서 부모님이 지어준 이름.
그때 그가했던 말은그녀의 뇌리에 또렷하게 남아있다.
-앞으로 송희연으로 살아.
그때부터였다.
그녀가 자신의 현재를 두 번째 삶이라 생 각하기로 한 것은.
실제로 그리 생각하기로 한순간부터 자신을 둘러싼모든것들이 바뀌기 시작했다.
진정 동료라 부를 수 있는 이들이 제 주변을 가득 메웠다.
죽기 직전까지 힘든 상황에 내몰려도 의지할 수 있을 것만 같은 이들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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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주인님….’
그는 그렇게 부르는 것을 탐탁지 않게 여겼으나, 그녀에게는 가장 마음에 드는 호칭이었다.
자신에게 이 모든 것들을 안겨준 이가 아니던가.
그렇기에 그녀는 지금과 같은 상황이 너무나도 싫었다.
말도 안 되는 상황에서 그와 마주치고, 그의 시선을 외면해야 하는 이 어색한 상황이.
‘이 시간이길어져선안돼.’
그녀는 아주 어릴 적 동생과크게 싸웠던 때를 떠올렸다.
별것 아닌 사소한 일로 벌어진 다툼이 었으나, 무려 한 달이나 서로를 외 면 했던 때.
누가 먼저 사과하고, 얘기를 걸었으면 바로 풀릴 일이었는데도 그땐 왜 그 랬는지, 서로 말조차 하지 않으려 안간힘을 썼다.
그때 그녀는 느꼈다.
모든 것은 때라는 것이 있음을.
자신이 먼저 동생에게 말을 걸었으면 그렇게까지 오래 토라져 있지는 않았을것임을.
그러니 그녀는 먼저 용기를 내기로 했다.
부끄럽지만, 그와 이야기를 나누어 모든 상황을 잘 마무리하고 싶었기에.
땅바닥이 잡고 놓아주지 않는 발을 억지로 떼어가며 그에게로 향하는 송희연.
혼자 연무장을 정리하며 무언가를 중얼거리고 있는 그의 앞에 선 그녀가 입을 열었다.
“자, 잠깐 얘기를 나누고 싶습니다. 기왕이면 아무도 없는 곳에서 ….”
구름 뒤에 숨어 있던 달빛이 얼굴을 빼꼼 내밀고, 어둠에 가려져 있던 그녀 의 얼굴이 훤히 드러났다.
달빛에 드러난 그녀의 얼굴은, 봄에 피어나는 꽃처럼 연한 분홍빛을 띠고 있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