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70화〉연인이란
늦은 밤까지 이어졌던 훈련이 끝났다.
혼자 남게 된 백우진은 연무장 주변을 정리하며 중얼거렸다.
“좋아, 대비는 됐어.”
점심 엔 장어 가 잔뜩 들어간 국에 밥을 말아 먹 었고, 저 녁 엔 장어구이 를 먹 었다.
불끈불끈 솟는 정력에 자신감마저 가득 차오른 상황.
어떤 상황에 직면해도 오늘 밤은 무섭지 않을 것만 같은 느낌이 든다.
아니, 오히려 기대하게 된다.
자신을 쥐 어 짜내 려 다 오히 려 역으로 쾌 락에 허 우적 대 는 그녀를 볼 생 각 에.
“흐흐흐흐흐”
사내로 태 어 나 여 인을 만족시 켜주는 것은 의 무인 법 .
곧이곧대로 벌만 당하고 있지는 않으리라!
“저,저어….”
한참 열의를 불태 우고 있을 때 였다.
조금 더 시 간이 필요하리 라 생 각했던 송희 연이 쭈뼛거리 는 걸음으로 이 쪽 을 향해 다가오고 있었다.
백우진은 그녀의 얼굴을 보았다.
웃는 건지, 우는 건지 아니면 다른 어떠한 표정인지 모를 어색한표정.
이러한 상황에서 대체 어떤 표정을 지어야 할지 모르겠다는 듯한 모양새 다.
“자, 잠깐 얘기를 나누고 싶습니다. 기왕이면 아무도 없는 곳에서 ….”
“•••그래.”
잔뜩 긴장한 그녀의 입에서 이야기가 술술 나오려면 적절한 윤활제가 필 요해 보였다.
백우진은 그녀에게 학관 변두리에 있는 정자에 가 있으라 일러둔 뒤, 객잔 으로 향했다.
그곳에 서 적당히 먹 기 좋은 안주와 술잔을 챙 겼다.
“술은 이거면 되겠지.”
허리춤에 매달려 있는 호리병이 움직일 때마다 흔들리며 존재감을 과시한 다.
어지간히 술을 싫어하는사람이 아니라면 이 술이 마음에 들지 않는사람 은 없으리라.
안주가 식지 않도록 잘 감싼뒤, 정자로 향하는 백우진.
앞서 도착해 있던 송희 연은 복잡한 시 선으로 정자 앞에 드리워 진 연못가 를 바라보고 있었다.
딱히 뭐라고 말을 걸어야 할지 난감해진 백우진도 말 대신 헛기침으로 제 존재를 알렸다.
“흠흠!”
“아….”
황급히 이쪽을 돌아보는 송희 연.
백 우진은 정자로 올라가며 그녀에 게 이 쪽으로 오라고 손짓했다.
“어딜다녀오신겁니까…?”
그녀의 물음에 백우진은 품에 꼭 끌어안은 채 챙 겨온 보따리를 풀어 그 안 의 따끈따끈한 음식들을 보여주었다.
“내 생각에 송 소저가 지금 같은 상황에선 하고 싶은 말을 제대로 못할 것 같아서.”
말을 끝마침과 동시에 소매에 숨겨둔 술잔 두 개를 꺼내어 그녀에게 건네 주었다.
“술, 조금은 마실 줄알지?”
“아,예!”
그녀 가 쥔 술잔 위 로 호리 병을 기 울였다.
맑고 투명한 액체가 떨어져 술잔 안에 감기듯 자리 잡았다.
“술이라는 게 그렇거든.”
술이라는 건 양날의 검이다.
많이 마시면 건강도 나쁘고, 술버릇이 나쁘면 주변 사람들을 모두 피곤하 게 만든다.
“근데 적당하게 마시면 긴장감도풀리고, 기분도좋아지고…, 아무튼 여러 모로 좋아.”
지금과 같은 상황에서도 적당한 양의 술은 윤활제 역할을 한다.
긴장한 이의 긴장감을 덜어주고 얼어붙은 입을 녹여 가볍게 만들어준다.
세 상의 물건 중 하나에 만병통치 약이 라 이 름을 붙여 야 한다면 백 우진은 이 술에다가 붙일 것이다.
근심, 걱정이 만병의 근원인데 이를 덜어주니 만병통치약이라 할 만하지 않은가.
“그러니 한잔가볍게 하고,하고싶은 얘기 마음껏 해봐.”
그녀의 입가에 작은 미소가 그려졌다.
그 미소가, 얼굴 위에 짙게 내려앉아 있던 정체를 알수 없는 표정을 일부 분지워냈다.
“감사히 마시겠습니다.”
한결 가벼워진 손으로 술잔을 기울이는 송희 연.
“아…!”
술을 목으로 넘긴 그녀의 표정에 놀람이 가득 차올랐다.
“정말맛있습니다…! 처음에 제게 주셨던 술도 이것이었지요?”
“ 맞아.
“그때는 경황이 없어서 맛을 제대로 느끼지 못했는데, 정말 대단한 술인 것같습니다.”
“귀한술이긴하지.”
호리병을 흔들며 히죽 웃는 백우진.
그는 자신 외에 다른 이에게 이 술병을 자주 여는 편은 아니었다.
병 이 비 면 다시 차오르는 보패 라곤 하지 만, 어디 까지 나 무한으로 차오르 는것은 아니었다.
이것은 신선의 선술에 의해 주선의 술 창고와 연결되 어 있을 뿐이다.
말인즉, 창고의 술이 동나면 더 이상차오르지 않는다는의미기도 했다.
‘웬만해선 그럴 일은 없겠지만.’
만약의 상황 정도는대비해야했다.
자신이 너무나도 많은 술을 비워 내는 탓에 화가 난 주선이 창고를 일부러 비운다던가또는 정말로 창고를 텅 비게 만들 정도로 많이 마셨다던가 하는
이 술에는 대단한 재료는 들어가지 않았지만, 신선의 눈에 가장 깨끗하고 신선한 재료들만을 엄선하여 빚어낸 술이다.
이것만큼 깨끗하게 기운을 모을 수 있는 술은 지상에 존재하지 않을 테니, 주선이 곁에 없더라도 어느 정도 눈치는 봐가면서 풀어야 한다.
“한잔 더?”
“예…!”
쪼르륵
그렇게 그녀는 연거푸 석 잔을 내리 마셨다.
“푸하….
석 잔째를 마신 후 기분 좋은 숨을 토해낸 그녀의 표정은 많이 부드러워진 상태였다.
슬슬 때가 되 었음을 느낀 백우진이 넌지시 운을 떼었다.
“그래. 이제 하고 싶은 말 좀 잘 나올 것 같아?”
술기운에 잠시 잊고 있었던 그때의 상황이 떠오른 송희연은 웃고 있던 얼 굴을 살짝 굳히며 뻣뻣하게 굳은 목으로 고개를 끄덕였다.
“예:
술잔을 무릎 위에 올려놓은 채 한쪽 손으로 주둥이 부분을 매만지던 그녀 가 깊은 숨을 내쉬 었다.
“•••저는 지금이 정말로 좋습니다.”
송희연은제 이야기를 입에 담았다.
“생전 처음으로 진정한 제 삶을 느끼고 있다고 생각합니다. 다른 어떤 무 거운 짐을 모두 벗어던지고, 온전히 제 삶에만 집중할수 있음에 감사하고 있 고요.”
진미연의 호위 임무를 맡았을 때, 그녀가 차가운 표정을 짓고 있었던 건 단 순히 백우진에게 제 감정을드러내기 위함이 아니었다.
그것은 눈만 돌리면 넘쳐나는 죄 악의 흔적들을 보고 공포에 질린 제 모습 을 일족에게, 진미연에게 들키지 않기 위해서였다.
그랬던 그녀가 지금은 거리낄 것 없이 웃고, 부끄러울 땐 얼굴을 붉힌다.
“사실 주…, 도련님께 충성을 맹세했을 때에도 비슷했습니다.”
급박하게 돌아가는 상황 속에서 그녀가 백우진을 택한 이유는 두 가지였 다.
“첫 번째는 도련님께서 석이를 돌봐주겠다 하신 것 때문이 었고, 두 번째는 도련님이 적어도 진미연보단 나쁜 사람이 아니리라 생각했기 때문이었습니
다.”
그때의 그녀에겐 그 정도면 충분했다.
회색빛으로 죽어가는 동생을 살릴 수만 있다면, 매일 같이 펼쳐지는 지옥 도에서 빠져나올 수만 있다면, 그걸로 되 었다고 생 각했다.
“그때까지만 해도 이런 삶은 추호도 꿈꾸지 않았습니 다만…, 그때 도련님 께서 해주신 말이 저를 조금 더 자유롭게 만들었습니 다.”
!..
....
“그때?”
“학관의 규정을 어기고 가문으로 복귀하시던 날의 밤 말입 니다.”
“아,그때.”
그때라면 백우진도 또렷하게 기억하고 있다.
그도 그럴 것이 , 매 일 십 영 이 라 부르던 그녀의 본명을 처음으로 들은 순간 이기에.
“저는 그때 도련님 께 새로운 삶을 선물 받았습니 다.”
“•••내가?”
“예. 도련님께서 제게 앞으로는 송희연으로 살라고 하셨고, 누구에게도 불리지 않던 그 이름으로 살게 된다는 건 제게는 새로운 삶을 시작하는 거나 다름없었습니다.”
그때부터 그녀는 달라졌다.
그리고 달라지고자 했다.
“막상 새 삶을 시작하고 보니, 저는 모르는 게 참 많더군요.”
그녀 가 알던 세상은 좁디좁은 우물 안이 었다.
그걸 깨고 나오니 수백, 수천 배는 넓고, 모르는 것들이 가득한세상이었 다.
한 걸음 걸으며 주변을 둘러보면 모르는 게 서너 개씩은 튀 어나올 정도였 다.
“다행히 저를 돌봐주시는 선영 언니께서 곁에서 많은 것들을 알려주셨지 만….”
백우진의 귀 가쫑긋거렸다.
“잠깐만…, 언니라고? 언제부터 당소저를 언니라고불렀어?”
“아…, 대략 한 달쯤 된 것 같습니다. 정확한 의 미는 이해하지 못했습니다 만, 언니께서 우리는 언제고 가족이 될 사이니, 지금부터 친해져야 한다고…. ”
“…….”
호호호홋, 하고 입을 가리고 웃고 있는 당선영의 얼굴이 뇌 리를 스친다.
‘대체 어떤 그림을그리고 계신 겁니까, 선영 마망….’
지금은 그녀를 생각할 때가 아니다.
곧 있으면 만나게 될 테니 그 이야기는 그때 가서 물어보기로하고, 다시 송희연의 이야기에 정신을 집중했다.
“본격적으로 제가 왜 그림자에 숨어 그들을 지켜 봤는가를 말씀드리 자면….”
그녀의 얼굴이 붉어졌다.
“구,궁금해서 그랬습니다.”
“•••궁금했다고?”
창피 함으로 물든 얼굴을 작게 주억 거 리 는 송희 연.
“예….연인 사이에 나누는 감정이 어떠한느낌인지,궁금했습니다.”
자연스럽 게 드는 호기 심 이 었다.
모르는 것을 알아감에 있어 애정이라는 애틋한 감정은 그 무엇보다 간질 거리고, 궁금한 것이었을 테니.
더 군다나 제 갈연지 가, 당선 영 이 백 우진과 함께할 때 마다 더 없이 행 복한 미소를 짓는 것을 볼 때마다 그 궁금증은 배 가 되 었다.
“언니께 여쭤보기는 했습니다만, 왜인지는 모르겠지만 대답을 회피하시 더군요.”
“회피....”
충분히 대답할 수 있는 감정을 그녀는 왜 피했을까.
왜인지는 모르겠지만, 등골이 살짝 조여오는듯한기분이 든다.
“그래서, 그…, 혼자 알아보기 위해 연인들의 모습을 관찰한다는 게 그만
그녀는 나름대 로 노력 한 것 이 다.
남녀간의 애정이라는 것이 무엇인지 알아보기 위해 약간의 관찰을 가미 했을뿐.
“그, 그랬구나.”
그런 것치곤 애정 행각을 상당히 집중해서 쳐다보고 있었던 것 같지만.
아무튼 그녀의 의중은 파악했다.
관음을 즐기는 게 아니라, 단순히 그런 궁금증 때문이었다면 걱정하지 않 아도되 겠지.
백우진은 한시름 덜어낸 얼굴로 그녀에게 물었다.
“그래서, 그 궁금증은 해결했고?”
“아뇨, 아직 ….”
송희 연은 안색 을 흐리 며 고개 를 저 었다.
“낯뜨거운 행각을 벌이는 연인을 보고 있으면 몸이 뜨거워지는 듯한 감각 이 들긴 합니다만,그외에는 딱히….”
아, 그건 흥분인데.
아무리 모르는 사람도 남녀 가 옷을 벗고 헐떡 이는 걸 보면 정신은 몰라도, 몸은 반응한다.
그녀도 그랬다.
그저 뜨거워지는 거라 머리는 이해하고 있었겠지만, 그것은 단연코 흥분 했던것이다.
‘나중에 차차 알게되겠지.’
좀 야릇한 설명이 가미되지 않으면 딱히 설명할 방법이 없었기에 그냥 넘어가기로 했다.
“저 어 …, 실례 가 안 된다면 도련님 께 여쭤봐도 되 겠습니까?”
“뭘 ?”
“남녀간의 사랑 말입니다. 사랑이라는 건 대체 어떤 느낌이 드는 건지 알 려주십시오.”
난감해졌다.
마치 어린아이가천진난만한 얼굴로 ‘엄마, 아기는 어떻게 생겨요?’ 하고 물어보는 듯한 순수함이 느껴 진다.
머 릿속을 기 어 다니 는 야릇한 상상을 모두 배 제 한다.
그리고 최대한순수한 느낌의 사랑만을 기억하며, 그녀에게 일러주었다.
“사랑이란 건 말이지…, 언제나 같이 있고싶고, 같이 있어도보고 싶고,또 손잡고 싶은…? 그런 느낌이 드는 걸 사랑이라고 하는 거 야.”
“같이 있고 싶고…, 보고싶고…, 손잡고…, 그것이 끝입니까?”
“아니, 그건 아니지.”
그 뒤의 과정이 한참이나 남아있기는 하지만, 말할 단계가 아니다.
“그,뭐랄까…, 특정한 사람과 같이 있으면 다른 사람과 있을 때보다심장 이 평소보다빠르게 뛰고, 이유 없이 좋아지고 그럴 때가 있어.”
“아….”
“그런 사람이 있다면 십중팔구 그 사람을 좋아한다고 봐도 되는 거지,
백우진은 속으로 무척 이 나 뿌듯했다.
‘크으, 이거지!’
야릇한 말을 일절 내뱉지 않고 순수한 그녀에게 너무나도 명쾌하게 설명 을 해준 것 같다.
“그런 사람이…, 좋아하는 사람.”
자신이 한말을 되뇌는그녀의 표정이 심상치 않다.
마치 이미 그런 경험을 해본 사람 같았다.
“저,그러면 말입니다.”
그녀가 약간 난처하다는 눈빛을 보내왔다.
“그,그런 감정을 느끼는 사람이 말입니다….”
만약에.
“이미 연인이 있으면 어떻게 해야 합니까…? 가령,도, 도, 도련님처럼 ! 이 미 연인이 이, 있으신 분이라면…, 말입니다….”
“어,음.”
뭔가 느낌이 싸하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