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74화 蓬 요녕에서
요녕.
중원을 지배하는 한족과 이민족들이 뒤섞여 살아가는 지역.
무림 오대세 가 중 한 자리를 차지하고 있는 모용세 가의 권 역 이 기도 했다.
청해성과 마찬가지로 잦은 전투가 벌어지는 땅이 기도 했다.
한족과 함께 살아가기를 거부한 선비, 흉노 등 이종족들의 약탈로부터 방 어하기 위함이었다.
다른 점이 있다면 청해성의 전투는무인들이 중심이고, 이곳의 전투는 군 인들이 중심이라는 점일까.
“벌써도착하다니….”
“말도안되는 강행군이었어.”
요녕의 땅에 발을 들인 신룡조의 행색은 무척이나 남루했다.
그도 그럴 것이 , 약간의 휴식과 취침 시 간을 제외 한 모든 시 간을 달리는 데에 사용했다.
그들이 그렇게까지 서두른 이유는 단 하나, 백우진 때문이었다.
더 빨리, 더 많이 달리라며 그가 강요한것은 아니었다.
그는 평소대로 그들을 지휘했다.
다만 조원들이 이를 받아들이지 못했을 뿐이다.
‘가족이 변고를 당했는데 아무렇지 않을 리가 없다.’
그들은 그렇게 생각했다.
지금 백우진이 보이는 평소와 같은 모습들은 자신들이 동요하지 않도록 꾸민 모습이 라 여겼다.
싫은 소리도 잔뜩 듣고, 힘들기는 뒤지게 힘들었지만, 그는 자신들에게 베 풀었다.
자신들이 늑장을 부려 그의 형에게 더 큰 일이 벌어진다면, 하는 만약의 상 황을 배제할 수가 없었다.
“다들 고생…, 엄, 그래. 일단 빨리 객잔부터 잡자.”
뒤돌아본 조원들은 당장 죽어도 이상하지 않을 몰골을 하고 있었다.
고생했다는 말을 전하다가도 누구 하나 숨이 넘어갈 것만 같아 곧장 객잔 을 찾기로 했다.
객잔을 찾는 것은 그다지 어렵지 않았다.
그들이 주변을 두리번거리며 길거리를 돌아다니고 있는 사이, 웬 조그마 한 여 자아이 가 그들에 게 다가왔다.
“외지인 분들 맞으시죠? 객잔을 찾고 계신 거 아닌가요?”
맑게 개인 하늘처럼 청명한음성이 그들의 발걸음을 멈추게 했다.
“저희 객잔으로오시면 맛있는 것도 많고, 잠자리도 엄청 편안해요!”
아무래도 객잔에서 일하는 아이가 호객행위를 위해 밖으로 나선 듯했다.
백우진은 웃으며 여자아이의 머리를 쓰다듬어주었다.
“네 말이 모두 사실이면 거기로 가야지.”
그러자 볼을 부풀린다.
“정말이거든요!”
거짓말 취급당하는 게 어지간히도 싫은 모양.
“그래, 알았다. 그럼 그 객잔으로 안내 좀 해다오.”
“네 ! 이쪽으로 오세요!””
아이 가 환하게 웃으며 쪼르르 달려 가기 시 작한다.
속도는 그리 빠르지 않아 아빠 미소를 지으며 천천히 따라가고 있을 때, 별 안간 제갈연지가 옆으로 치고 올라오더니 귓가에 대고 무언가를 속삭였다.
“아이 좋아하시면…, 나, 낳을까요?”
훅 치고 들어오는 말에 볼이 다빨개질 지경.
백우진은 쓰게 웃으며 고개를 저었다.
“아이를 좋아하기는 하는데, 아직은 그럴 때가 아닌 것 같아.”
해야할일이 산더미다.
적어도 마교 놈들이 망하기 전까지 가정을 이루는 건 불가능하지 않을까.
‘가족이라.’
백우진은 고개를 돌려 어색하게 웃고 있는 제갈연지를 보았다.
그리고 뒤로 돌아보면 당선영이 송희 연과 두런두런 이야기를 나누며 따 르고 있다.
평생 함께하자는 말을 꺼내면 한치의 망설임 없이 받아들여줄 여인들.
자신이 조금 더 앞으로 나아가면 얼마든지 가족이 될 수 있건만.
‘왜 이렇게 멀게 느껴지냐.’
가족이라는두 글자가왜 이리도 멀게 느껴지고, 자신의 것이 아닌 것처럼 느껴 지는지 모르겠다.
한 번도 가족을 가져보지 못해서 그런 걸까.
“여기에요!”
상념에 빠져 있는 사이, 앞서가던 여자아이가 한 건물 앞에서 걸음을 멈췄 다.
세월감이 조금 느껴지기는 하지만 전체적으로 깨끗해 보이는 외형이 눈 에 들어온다.
“어서들어오세요!”
행여 도망이라도 칠까 두려운지 입구 앞에 선 아이가 손을 흔들며 재촉하 고 있다.
백우진은 웃으며 조원들과 함께 객잔 안으로 들어섰다.
내부도 외부와크게 다르지 않았다.
특별한 건 없지만, 적당한 세월감 속에 유지되고 있는 깨끗함이 그들을 반 겼다.
“아버지! 손님들 오셨어요!”
여자아이가 밝은 소리로 외치자, 주방쪽에서 중년의 사내가 걸어 나왔다.
그는 제 딸 뒤에 선 신룡조를 발견하고 급히 고개를 숙였다.
“어서들 오십시오. 제 딸이 또 멋대로 나가 호객행위를 했나 봅니다. 혹 불편하셨다면….”
연신 고개를 숙이 려는 사내를 향해 손사래를 치는 백우진.
“아닙 니 다. 마침 객잔을 찾고 있던 차였는데 , 아이 가 도움을 주었습니 다.”
“헤헤.”
아빠의 다리 뒤에 숨어 헤실헤실 웃는 여자아이를 보며 백우진은 결심했 다.
언제고 모든 여정을 끝마치고 자신에게 가정이 생기는 날.
‘무조건 딸이다.’
부디 딸을 낳게 해달라고 천지신명께 빌고 또 빌기로.
제갈연지 또는 당선영이 낳은 딸의 모습을 상상해 보았다.
‘천하제일미는 따놓은 당상이네.’
벌써부터 팔불출 딸 바보의 증세를 보이기 시작하는 백우진.
“그럼 객실은 어떻게 내어드리면 되 겠습니까?”
객잔주의 말에 백우진은 상상에서 빠져나왔다.
“인원수대로 일인실로 내 어주십시오.”
이 인실이 나 삼인실을 이용하면 그만큼 싸게 이용할 수 있을 테 지 만, 백우 진은 그러지 않았다.
그들이 이토록 강행군을 해온 것은 자신 때문일 터다.
한사코 괜찮다고 해도 곧이곧대로 받아들이지 못하고 자신을 생각하여 젖 먹던 힘까지 다 써가며 달려온 거겠지.
돈이 없다면 모를까, 굳이 있는 돈 아껴 가며 그들을 불편하게 하고 싶지는 않았다.
“예,그럼 금방준비해드릴 테니, 잠시만 기다려주십시오.”
그들은 식탁 의자에 둘러앉았다.
그런 그들을 향해 여 자아이 가 커 다란 쟁 반을 들고 다가왔다.
“차드세요!”
낑낑거리며 쟁반을 식탁위에 올려둔 아이가조원들의 앞에 찻잔을 내려 놓는다.
그 모습이 귀 여웠는지, 조금 전까지만 해도 축 늘어져 있던 여자 조원들이 득달같이 달려들었다.
“아유, 귀여워!”
“볼살 통통한 것좀 봐.”
“하아, 나도 이런 딸 낳고 싶다.”
마지막 말을 한 당선영이 이쪽을 흘끔 쳐다본다.
백우진은 찻잔을 쥔 채로 고개를 돌려 창밖을 바라보았다.
“날씨가 좋구먼.”
“지금 날씨 흐렸…, 컥!”
뻐억!
옆에서 눈치 없이 딴지를 거는 구왕수를 그대로 잠재워 버렸다.
“어휴, 광수야. 아무리 피곤해도 식탁 위에 엎드려 자면 되겠냐.”
아무래도 많이 피곤했던 것 같다.
“얘,이름이 뭐니?”
이를 피식 웃으며 쳐다보고 있던 당선영이 여자아이의 이름을 물었다.
그러자 여자아이가 방긋 웃는 얼굴로 말하기를.
“홍연이에요!”
“어쩜이름도귀여워라.”
“우리 연이 당과 먹을래?”
“네!”
당분을 보충하기 위해 몇 개 챙겨놓은 당과까지 서슴없이 꺼내는 여인들.
그런 그들을 보며 아빠 미소를 짓고 있는 사이, 위층에 올라갔던 객잔주가 내려왔다.
“준비 끝났습니다.혹, 식사는 어찌 하실 예정이신지.”
그의 물음에 백우진이 답했다.
“일단목욕물부터 부탁합니다. 저녁은그뒤에 내려와서 주문하지요.”
“예,그럼 위 에서 잠깐 쉬고 계십시오. 금방 준비해 드리겠습니 다.”
조원들이 하나둘씩 계단을 오르기 시작했다.
마지 막까지 아래층에 남아 있던 백우진이 객잔주에 게 은밀하게 말을 건 넸다.
“미 안하지만, 방 하나만 더 준비해 주십시오.”
“예? 아, 예.”
아직까지 남들에게 보이기 싫어하는 혈수마녀의 방을 따로 마련해두기 위함이었다.
이를 멀리서 지켜보고 있던 그녀가흐뭇하게 웃고 있다는 사실을, 백우진 은 알지 못했다.
…
더없이 피곤한 하루였다.
요녕에 도착하여 풀린 긴장감에 더해 따뜻한물로 씻고, 저녁까지 배불리 먹으니 그야말로 노곤함이 극에 달한 상황.
이를참지 못한조원들이 초저녁부터 흩어지기 시작했다.
단 두 명, 백우진과 신예화만 빼고.
“넌 안 자?”
백우진이 신예화에게 물었다.
“아,헤헤.몸은 피곤한데 잠이 안오네.”
“내일부터 바쁘게 움직여야할지도 몰라. 그러니까푹자두도록 해.”
그녀는 그저 기뻤다.
그저 조장이 조원에게 해줄 수 있는 가벼운 걱정임에도, 그가 자신을 걱정 해주고 있단 사실만으로 더없이 기쁘고 행복했다.
“응,알았어!”
기 운찬 목소리 로 대 답하는 그녀.
“그럼 난 잠깐 나갔다 올게.”
“어디 가게?”
“그냥, 여기저기 좀둘러보려고.”
“아…….”
잠시 잊고 있었다.
그가 이곳에 온 이유가 백무혁을 찾기 위해서라는 것을.
“그럼 나도같이 갈래.”
그녀가 자리에서 일어나며 말하자, 백우진은 그런 그녀의 어깨를 지그시 눌러 다시 앉혔다.
“피곤한몸으로 그러는 건 네 몸에도, 나한테도 민폐야.”
“그치만….”
좋아하는 마음을 바로잡았다고 한들, 백무혁이 신예화에게 중요하지 않 은 사람이 되는 것은 아니다.
그녀 에 게 도 백 무혁 은 오라버 니 나 마찬가지 였으니 까.
그럼에도 백우진은 그녀의 동행을 허락하지 않았다.
“네 마음 알겠지만, 지금은쉬어야할 때야.”
조원들은 만반의 준비를 갖춰 야만 했다.
늦은서찰의 의미 가백우진이 예상한그대로라면 이 미 이곳은적지 나다 름없다.
당장이 야 도시 한복판에 있으니 별다른 수를 쓰지 못할 테지 만, 앞으로는 점점달라질터.
편하게 쉴 수 있을 때 최대한으로 쉬어둬 야만 했다.
“알았어. 그럼 난쉬고 있을게….”
“그래, 다녀올게.”
백우진이 객잔을 떠나고 다시 혼자가된 신예화.
그녀는 깊은 한숨을 내쉬며 그를 배웅하기 위해 일어났던 몸을 다시 앉혔 다.
“하아….”
그와 두런두런 이야기를 나누는꿈같은 시간이 지나갔다.
이 윽고 찾아오는 것은 짙은 적 막과 외 로움.
그녀는 머릿속으로 조원들의 모습을 떠올렸다.
최근 그녀는 그들과 점점 멀리 떨어져 외 딴섬에 홀로 서 있는 듯한 느낌이 들었다.
다른 여인들이 이야기를 나누고 있으면, 그들 사이에 끼는 것이 불가능해 보일때가있다.
마치 그들과 자신 사이에 보이지 않는 단단한 벽이 놓여져 있는듯한 기분.
그런 기분이 들 때마다 조금씩 어 디론가 내몰리 고 있는 듯한 느낌 마저 든 다.
이대로 가다간 다른 조원들과는 물론이고, 그와도 영영 못 보게 될 것만 같은 그런 느낌.
“아니야, 아니야.”
애써 머리를세차게 젓는신예화.
그를 볼 수 없다는 생 각만으로 온몸에 소름이 돋았다.
“그럴수는 없어.”
자신은 백우진의 소꿉친구다.
어릴 때부터 지금까지 쭉 함께해온소중한 사이.
그런 자신이 그를 볼 수 없게 된다니, 그건 말도 안 되는 일이다.
“계속 곁에 있을거야.”
앞으로도, 평생.
소꿉친구를 넘어 오롯이 그의 것이 될 때까지.
죽어서도 한 자리에 묻힐 것이다.
하지만 그녀도 안다.
지금 이대로는 어렵다는 것을.
“어떡하지…, 어떻게 해야…?”
손톱을 물어뜯으며 걱정이 부풀어 오르고 있을 때였다.
“언니…,왜 안자고 있어요?”
객잔주의 딸아이, 홍연이 졸린 눈을 비비며 그녀를 향해 걸어왔다.
어린아이에게 제 못난모습을 보여주기 싫었던 신예화는 애써 웃으며 고 개를 저었다.
“그냥잠이 안와서 잠깐 있었어. 너는 자다가깼니?”
“네에.”
잠이 덕지덕지 묻어 있는홍연의 볼을 보며 그녀는 상상했다.
백 우진과 자신이 혼인하는 미 래를.
넓은 마당을 힘차게 뛰노는 자신과 그 사이에서 태어난 소중한 아이들.
| |....
!..
!.
.......
“언니, 잠깐만요….”
작게 하품을 하던 홍연이 주방으로 쏙 들어 가더니, 이내 찻잔을 들고 나왔 다.
“이거드세요.”
찻잔 안에는 연분홍빛 액체가 찰랑이고 있었다.
향긋한냄새가나는것이 차의 한종류인 듯한데.
“차예요. 뭔지는 아버지가 말해주셨는데 까먹었어요. 이거 마시면 잠이 잘 온대요….”
자신을 생각해주는 홍연의 마음이 고마웠던 그녀는 머리를 가볍게 쓰다 듬어주었다.
“고마워, 잘 마실게.”
“그럼 전 자러 갈래요…. 언니, 안녕.”
“안녕.”
눈을 비비고 손을 흔들며 멀어져 가는 홍연을 향해 똑같이 손을 흔들어준 신예화.
다시금 혼자가된 그녀는 제 앞에 놓인 찻잔을 손에 쥐었다.
천천히 입으로 가져가 한 모금 들이마시자 그윽한 향과 약간의 달콤한 뒷 맛이 입에 감돈다.
“좋네.”
그녀는 조금이나마 마음이 편해지는 것을 느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