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76 화〉모용세가
해가 떠오른 지 한참이 지나서야 조원들이 하나둘씩 모습을 비추기 시작 했다.
지 난 며칠간 가득 쌓인 피로를 하룻밤 사이 에 풀어내는 것 자체 가 쉽 지 않 았을 터다.
실제로 그들은 이제 좀 살 것 같은 표정을 하고 있었지만, 최상의 모습으 로 보이 지 는 않았다.
“식사부터 하자.”
그래서 일단밥부터 먹였다.
아침부터 든든하게 이것저것 시켜서 먹이고 나니, 음식을 나르는 홍연도 기뻐하고 조원들도 기뻐하기에 행복감이 두 배였다.
그들이 식사를 거의 끝마쳐갈즈음, 입을 열었다.
“오늘부터 슬슬 움직여볼 생각이니까 식사 마치면 간단하게 준비해서 내 려오도록 해.”
그의 지시에 당선영이 물었다.
“짐은 그대로두고?”
“여기 나쁘지 않은 것 같아서 잠시 거점으로 쓰려고.”
“흐응….
그녀의 시선이 객잔 곳곳을 오가는 홍연에게로 향했다.
“나쁘지않을것 같네.”
조원들도 모두 동의하는 듯했다.
입 에 왕창 집 어넣고 우물거 리고 있던 장삼이 억 지로 음식을 씹 어 삼킨 뒤 물었다.
“갈 곳은 정해졌소?”
“어, 간밤에 하오문에 들러서 정보를 좀 받아왔거든.”
두꺼운 종이 뭉치를 떠올린 백우진이 눈살을 찌푸렸다.
‘조금 묘해.’
하루하루비슷한행동이 반복되 는종이 뭉치를꼼꼼히 읽 어 내려간백우 진의 감상이었다.
전체 적으로 이상한 부분은 없었다.
다만 반복적 이 고, 지 루한 정보들을 계 속 훑다 보면 행 선 지 가 한 곳으로 귀 결된다.
작위 적인 느낌은 없지 만, 그래서 더욱 이상한 느낌이 라고 해야 할까.
‘근거가 없어서 더 애매하지만.’
깊게 생 각하지는 않기로 했다.
그곳이 유일한 실마리라서 어쩔 수 없이 그렇게 나온 것일 수도 있으니.
식사를 끝마친 조원들이 하나둘 제 방으로 향한다.
아침 일찍 일어나 모든 준비를 끝마치고 있던 백우진이 홍연과 가벼운 장 난을 치며 꺄르르 웃고 있을 때, 가장 먼저 채비를 마친 제갈연지가 옆에 다 가와 속삭였다.
“여,역시 낳을까요…?”
“•••아니.”
작게 혀를 차며 물러나는 그녀를 보니 쓴웃음이 절로 나온다.
그 사이, 나머지 조원들도 모두 내려왔다.
백우진은 볼을 간질이고 있던 홍연을 곁에서 살포시 떼어놓으며 자리을 털고 일어났다.
“오라버니, 다시 오실 거죠…?”
애처로운눈빛이 쏟아진다.
“이 영악한꼬마 같으니.”
가볍게 머리를 쥐어박는다.
“아얏!”
양손으로 머리를 감싸고 불퉁한 시선으로 쳐다보는 홍연.
“요 녀석아, 손님 갈까봐 그러는 거 모를 줄 알고?”
“ 앗.,,
속내를 파악당한 홍연이 베시시 웃는다.
미워 할 수 없는 아이 의 영 악함에 백우진은 졌다는 듯 머 리를 가볍 게 쓰다 듬어주었다.
“돌아올 테니 아버지하고 객잔잘지키고 있어.”
“헤헤…, 네!”
다녀오세요, 하고 손을 흔드는 홍연을 뒤로한 채 조원들을 이끌고 밖으로 나선다.
그때 가장 뒤에 있던 제갈연지와 당선영이 속닥거리는 내용이 귀를 때린 다.
“언니, 아무래 도 나, 낳아야 할까봐요 …!”
“흐응…, 그러게. 우리 그이가저렇게 아이들을 좋아할줄은몰랐는데. 어 떡하지? 난신혼을 좀즐긴 뒤에 아이를 낳고 싶었는데.”
“그,그럼 제가먼저….”
“쓰읍, 얘는. 찬물도위아래가….”
못 들은 걸로 해 야겠다.
이제는 어떤 작전마저 꾀하려는 두 사람이 대화를 편히 나누지 못하게끔 일부러 속도를 높여 앞으로 나아갔다.
요녕에서 가장 번화한 도시, 용성.
그곳에 자리 잡은 잡화점, 대장간, 객잔등이 빠르게 지나쳐 간다.
‘저기가 물품을 구매하던 곳, 저기 가 가끔 들러 식사하던 곳, 저기는….’
그와 동시에 백무혁을 비롯한 현무단이 들렀던 곳들을 떠올린다.
그러면서도 발걸음은 꾸준히 나아간다.
그렇게 닿은 곳은 이곳에서 둘째가라면 서러울 정도로 커다란 대저택.
그곳에 걸음을 멈춘 백우진.
이곳이 바로 하오문이 전달해준 정보에 유일하게 남은 실마리 였다.
요녕에 있는동안 현무단의 거점이 되어준 곳.
현판에 멋들어지게 써진 필체를 그대로 읽어낸다.
“모용세가.”
비록 말석이라곤하나, 오대세가의 일좌를 차지하고 있는 거대 무림 세가.
이곳이 바로 현무단의 흔적을 하오문보다 자세히 알고 있을 유일한 단서 였다.
백우진은 대문을 굳게 지키고 선 호위들을 향해 힘찬 발걸음으로 나아갔 다.
모용세가는 과거의 곤륜파와 비슷한 입장에 놓여 있다.
중원의 끝자락에 있어 세간의 관심이 쏠리지 않는 가문.
지금의 곤륜파는 인근의 청해성이 마교와의 격전지가 되며 위상이 크게 상승했지만, 모용세 가는 여전했다.
그들 또한 약탈을 일삼는 이 민족에 맞서 싸우고 있지 만, 반대편에 더 관심 이 쏠려 있다보니, 활약상자체가알려지지 않는 경우가 많았다.
정파 무림을 대표하는 오대세 가라는 이름은 한 번 얻었다고 해서 평생 가 져갈수 있는 이름은 아니었다.
오대세가의 자리에 남기 위해선 끊임없이 증명해야만 했다.
불세출의 고수를 배출하든, 중원에서 눈부신 활약을 보이든, 세력권을 넓혀가든.
무엇이 라도 보여주어 야 했고, 세 인의 평 가를 받아 인정받아야만 했다.
그런의미에서 모용세가는 다른 오대세가에 비해 불리했다.
지 리 적 이 점 이 라곤 하나도 없어 명 성을 퍼뜨리 기 가 쉽 지 않고, 남들이 십 만큼 하면 인정 받는 반면, 그들은 20, 30을 해 내 야만 겨우 비 슷한 수준으로 취급받을 수 있었기에 .
그래서 그들이 다른 오대세 가에 비해 힘이 약한가? 그건 아니다.
‘더 대단한 거지.’
수십 년 전, 어마어마한 위세를 떨쳤던 황보세가가 서서히 영락하기 시작 하자 그들의 자리를 꿰찬 가문이 모용세 가다.
그들은 그때부터 지금까지 매번 위태롭다는 얘길 들으면서도 오대세가 의 자리를 내려놓지 않고굳건히 지켜왔다.
불리함을 떠 안고도, 그들은 지금껏 증명해온 것이다.
그렇다면 그들은 무엇으로 증명했느냐.
“최근 중원에 명성이 자자한후기지수를요녕에서 보게 될 줄은몰랐네.”
백우진은 정중히 고개를 숙이며 포권을 취했다.
바로 이 사람이다.
머리카락한을 삐져나오지 않게 말끔하게 빗어서 튼 머리, 한치의 오차도 없이 좌우대칭이 완벽하게 정리된 수염, 한자루의 칼과같은 예기를 머금은 눈.
현 모용세가의 가주, 유성검(流星劍) 모용진천.
“모용세가의 가주님을뵙게 되어 영광입니다.”
남궁세 가의 가주와 비무를 펼쳐 수백 합을 겨루고도 승부를 내지 못해 다 음을 기약하게 만든 화경의 고수.
바로 그가, 모용세가를 지탱하는 두 기둥 중 하나다.
‘어마어마하네.’
다른 가문에 비해 활약의 여지가 없는 모용세가를 지탱하는 기둥다운 압 도적인 기세.
조금 더 시간이 지나면 모를까, 지금으로선 도저히 상대할 길이 보이지 않 는고수.
모용진천을 마주한 백우진의 담백한 감상이었다.
두 사람의 앞에 찻잔이 놓였다.
“들지.”
“예.”
모용진천을 따라 찻잔을 손에 쥐고 입에 머금는 백우진.
차에 조예 가 깊지는 않지 만, 중원 에 서 마셨던 것들과는 또 다른 풍미 가 입 을 개운하게 만들었다.
그렇게 목을 축이듯, 몇 모금 찻물을 더 입에 머금고 난 후에 야 모용진천이 입을 열었다.
“그래, 정무학관의 생도가 예까진 어인 일인가. 듣자하니 우리 가문에 도 움을 구할 일이 있다고 들었는데 .”
백우진은 말끔하게 비운 찻잔을 다과상에 도로 내려놓으며 답했다.
“예, 모용세 가에 도움을 받고자 실례를 무릅쓰고 뵙 기를 청했습니 다.”
“어려워 말고 말해보게. 불가능한 것이 아니라면 돕도록 하지.”
그의 너그러운 말투에 백우진은 고개를 갸웃거렸다.
의아했다.
‘너무호의적인데.’
백우진은 모용진천이 자신을 그리 반기지 않을 거라 생각했다.
그도 그럴 것이, 그의 가문인 섬서백가가 오대세가의 자리를 호시탐탐 노 리고 있기 때문에.
힘 있는 무림 세 가라면 그들의 머리 꼭대 기 인 오대세 가의 자리를 노리는 것은 당연했다.
다만, 이와 더불어 세간에 퍼진 하나의 소문이 문제가 되었다.
세인들이 말하기를,섬서백가가오대세가의 반열에 오르게 될 경우그자 리를 내려놓게 되는 것은 필시 모용세가일 거라고.
얼떨결에 섬서백가는 모용세가를 노리는 가문이 되었고, 모용세가는 섬 서백 가로부터 지위를 지켜야만 하는 입장이 되 어버린 것이다.
“내 가 너무 호의 적 이라 이상한가?”
그가 대뜸 물었다.
..
!.
.....
그의 얼굴에 잠시 나타났다가 사라진 의 아함을, 모용진천의 눈은 놓치 지 않았다.
감각적으로 그를 속이 기는 어려운 상황.
백우진은 솔직하게 대답했다.
“솔직히 말씀드리자면, 예.”
적어도 대놓고는 아니더 라도 어느 정도 불편한 티 정도는 낼 줄 알았는데 .
“그리 어렵게 생각할것 없네.”
모용진천의 입가에 옅은 미소가 그려졌다.
“자네의 가문과 우리 가문이 경쟁하고 있는 것은 사실이나, 그것은 어디까지나 경쟁일 뿐.”
두 가문은 조금 더 직접적 인 관계에 놓이 기는 했지 만, 중원 무림 에 가문을 세운 이상 권 력욕이 있는 이들이 라면 모두와 경쟁 관계 인 셈 이 다.
“철천지원수도 아니고, 단순히 경쟁 중인 가문의 사람에게 아무것도베풀 지 못할 만큼 속 좁은 인간은 아닐세.”
“아, 그렇게 생각한건 아니었습니다. 송구합니다.”
자칫 무례로 들릴 수도 있는 말이었기에 백우진은 황급히 포권을 취하며 사과를 건넸다.
그러자 모용진천은 가볍게 손사래를 치며 그의 행동을 막아섰다.
“나 또한그리 듣지 않았으니 과례는 넣어두게.”
“감사합니다.”
“이제 슬슬 말해보게. 내가도와줬으면 하는 게 무엇인지.”
잠시 다른곳으로 빠졌던 이야기가원래의 궤도를 되찾았다.
“지난몇 개월간현무단이 이곳에 머물렀던 것으로 압니다.”
“음, 그랬지. 딱히 비밀로한 것은 아니지만, 공공연하게 알려진 사실 또한 아니었을 터. 혹 자네의 형인 백무혁, 그 친구에게 전해 들었나?”
“이곳으로 파견을 나가겠단 소식까지 만 들었습니 다. 그 뒤는 제 가 직접 알아보았고요.”
백우진의 대답에 모용진천의 안색이 눈에 띄게 흐려졌다.
“그렇다면 자네는 형을 찾기 위해 이곳까지 온 게로군.”
“예.”
흐려진 안색을 보며 무언가 이상한 낌새를 눈치챈 백우진이 조금 더 강한 어조로 그에게 말했다.
“현무단의 행적에 대해 아시는 게 있다면 부디 말씀해주십시오.”
그의 단단한 어조에 모용진천이 작게 한숨을 내쉬 었다.
“그래 •••. 어쩌면 자네 가 도움이 될지도 모르지.”
무언가 결심한 듯, 그가 흐려진 안색을 굳히며 재차 입을 열었다.
“현무단은 현재 실종 상태일세.”