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78 화〉차라리
그녀는 오늘도 잠이 오지 않았다.
비 단 오늘뿐만 아니 라 요 며 칠 내 내 같은 상태 였다.
이유는 매우 복합적이 었다.
너무나도 많은 근심과 걱정들이 그녀의 어깨를 짓누르고 있었다.
유일하게 단 하루, 그녀가 잠을 편하게 잤던 적이 있다.
‘홍연이가 준 차가 효과가 있었어.’
잠에 취해 눈을 비비며 다가온홍연이 건네주었던 차를 마신 날.
그날만큼은 무엇의 방해도 받지 않고 숙면을 취할 수 있었다.
‘오늘도 마실 수 있으면 좋겠는데 .’
어떻게든 잠들어 보기 위해 누워 있던 그녀는 결국 침상에서 벗어났다.
혹시 나 하는 마음으로 내 려 가 본 아래 층.
그곳에는 홍연이 홀로 의 자에 앉아 방긋방긋 웃는 얼굴로 콧노래를 흥얼 거리고 있었다.
“연이, 안자?”
그녀가 제 존재를 알리기 위해 자그마한목소리로 말하자, 홍연이 뒤를 돌 아봤다.
그리고 밝은 얼굴로 그녀를 향해 손을 흔들었다.
“언니!”
신예화는 의자 하나를 끌어다 그녀의 옆에 놓고 앉았다.
“왜 안 자구 있어?”
“헤헤…, 기분이 좋아서요.”
“응? 좋은일이라도 있었어?”
홍연이 웃는 얼굴로 고개를 끄덕 인다.
“오라버니가 약속을 지켜서요.”
“오라버니…? 아, 우진이를 말하는 거야?”
오전에 이곳을 떠 나기 전에 백우진과 홍연은 약속했다.
저녁 즈음이 되면 다시 돌아오겠다고.
그것이 그리도 기뻤나보다.
늦은 밤에도 잠들지 않고 콧노래를 흥얼거리며 기뻐하고 있는 것을 보면.
백우진을 떠올리 며 방실방실 웃고 있는 홍연의 모습을 보고 있자니 , 옛날 생각이 났다.
“연이는 우진 오라버니를 좋아하는구나?”
“네! 오라버니는 마음이 참착해요.”
“응,그렇지.”
그는 변했다.
예전에 자신이 알고 있던 모습은 온데간데 없을 정도로 급격하게.
성격도 많이 변했다.
언제나 성실하고 착해빠진 성격은 과감히 버리고, 단호하고 결단력 있는 모습을 갖췄다.
그 숱한 변화 속에서도, 그가 잃지 않은 것이 있다면.
그것은 바로 착한 마음씨 리 라.
‘우진이는 여전히 착해.’
굉장히 냉정한 척하고, 이성적으로 행동하는 듯하지만, 그는 여전히 착했 다.
그저 그것을 베푸는 방식 이 달라졌을 뿐.
“근데 언니는 왜 안 자고 나왔어요?”
홍연의 물음에 상념에서 깨어나는 신예화.
“어? 나는…, 오늘도 잠이 좀 안와서.”
어색하게 웃으며 말끝을 흐리자, 눈치가 빠른 홍연이 이를 알아차렸다.
“헤헤, 언니 잠깐만요!”
신예화는 무언가 기쁘면서도, 부끄러웠다.
속내를 찰떡 같이 알아 차려 준 건 기쁘고 고맙지 만, 차 한 잔에 의 존해 야 겨우 잠이 오는 자신의 모습이 왠지 모르게 볼품없게 느껴졌다.
“하아….”
무기력한 얼굴로 땅바닥을 향해 한숨을 내쉬고 있을 때였다.
우당탕탕 하는 소리와 함께 2층에 서 누군가 빠른 걸음으로 내 려왔다.
백우진이었다.
“어? 우진…!”
그는 부를 틈도 없이 빠른 속도로 어디론가 걸어가버렸다.
“저긴 뒷마당 쪽인데….”
무슨 일이길래 그리도 급하게 가는 걸까.
문득궁금증이 일었다.
그녀는 의 자에서 일어나 조심스러운 걸음으로 그가 지나간 길을 따라갔 다.
조금 전 닫혔던 문을 천천히 열고 나가자, 조금 떨어진 곳에 선 백우진이 보였다.
신예화는곧장 어둠이 짙게 내려앉은 나무 그늘 안에 숨어 제 기운을 숨겼 다.
그리고 보았다.
달빛 아래, 붉어진 얼굴을 연신 식히려 애쓰는 백우진의 모습을.
“아….”
처음 보는 얼굴은 아니 었다.
그의 얼굴은그때와 같았다.
그에게 유화연이라는 약혼녀가 생겼을 때.
수줍게 웃는 그녀를 보며 붉어진 얼굴로 어찌할 바를 모르던 그때와.
그순간, 백우진의 입에서 작은목소리가새어 나왔다.
“엄청 부끄럽네.”
무언가를 회 상하는 듯한 얼굴.
“•••예뻤지, 음.”
가슴에서 불꽃이 튀었다.
‘누구야?’
그의 주변에 있는 여인들이 하나둘씩 떠올랐다.
제갈연지, 당선영, 송희연, 설수연.
그중 누군가와 방금 전 무슨 일이라도 겪은 것일까.
‘대체 누가….’
그의 마음을 저리도 흔들었을까.
자신은 무엇을 해도 하지 못하는 것을, 그녀는 과연 어떤 식으로 해낸 걸까 •
“이러다 진짜 반할지도 모르겠네.”
수줍은 마음을 허공에 날려 보내며 세상 행복한 표정을 짓고 있는 그를 보 는 순간.
마음속에 무언가가 싹 텄다.
그녀는 저도 모르는 사이 앞으로 나섰다.
“누구한테 반해…?”
자신의 존재를 알아차리지 못했는지, 당황 가득한 표정을 짓는 백우진의 앞에 그녀는 스스로 걸어 나왔다.
신예화임을 확인한 백우진의 얼굴에 당혹감이 서렸다.
“•••안 잤어?”
“응.”
싫다.
자신을 보기가 무섭게 어색한 표정을 짓는 그의 모습이.
조원들 중에서 자신을 가장 부담스럽고, 불편하게 여기는 듯한 그의 행동 이.
싫어….’
옛날에는 분명 세상에서 가장편한관계였는데,왜 이렇게 된 걸까.
어디서부터 잘못된 걸까.
점점 자신이 없어지기 시작했다.
어떻게든 곁에 있으면 그와의 관계를 다시 회복할 수 있을 거라 생각했는 데.
이제는 그럴 것 같지 않다는 절망적인 생각만이 가득 차오른다.
이미 그의 곁에는 두 명의 연인이 생겼다.
제갈연지와 당선영.
그들은 행복해하고 있다.
앞으로도 더, 지금보다 더 행복한 모습을 보여주겠지 .
그 모습을 보며 한없이 절규하느니, 지금이라도 떠나가는 게 맞지 않을까.
‘지금 떠나면….’
그에게서 멀어지는 상상을 하는 순간.
“흐으윽…!”
심장이 거세게 조여들었다.
상상조차 불허한다는 듯, 이루 말할 수 없는 고통이 뒤따랐다.
그녀의 신형이 무너져내렸다.
“예화!”
당황한 백 우진 이 벼 락같은 빠르기 로 그녀 에 게 다가갔다.
“갑자기 왜 그래? 어디 아파?”
귀를 때리는 그의 따스한 음성.
보인다.
흐린 시야 너머로.
어색함이라곤 전혀 느껴지지 않는, 오직 자신을 걱정하는 마음 한가득인 표정.
‘역시안돼….’
다시 한번 느꼈다.
그의 곁을 떠날수 없음을.
시간이 지날수록 가슴에 쌓이는 게 오직 상처와 슬픔뿐이라고 해도 어쩔 수없다.
그로부터 멀어지는 순간, 그대로 죽을 것이기에.
| |..
....
..
“괜... 찮아.”
그녀는 억지로 몸을 일으켰다.
백우진은 그런 그녀의 어깨를 감싸며 몸을 부축해주었다.
“방으로 돌아가자.”
“응…, 그래야겠다.”
두 사람은 느릿한 걸음으로 왔던 길을 되 돌아갔다.
그러다 2층으로 올라서는 계단 앞에서 서성이고 있는 홍연과 마주쳤다.
“어…? 언니!”
백우진의 부축을 받으며 들어오는 신예화를 보고 화들짝 놀라는 홍연.
“언니, 왜 그래요…? 어디 아파요?”
걱정어린 표정에 그녀는 애써 웃는 얼굴로 고개를 저 었다.
“아, 아니 야. 그냥 잠깐 어지러워서 그래.”
“히잉...,언니 아프면 안돼요…!”
당장에라도울음보를 터뜨릴 것처럼, 홍연의 눈에 눈물이 차올랐다.
그녀는 어찌할 바를 모르겠다는 듯, 허둥대는 시선으로 주변을 살폈다.
조금 전 앉아 있던 식탁위에 김이 피어오르는 찻잔이 놓여 있다.
“저 차…, 언니 주려고 가져온 거지?”
“훌쩍…, 네에.”
“언니 저 거 마시고 푹 자면 다 나을 것 같은데, 가져다 줄래?”
“네에….”
홍연이 쪼르르 달려가 찻잔을 들고 돌아와 그녀에게 건네주었다.
이를 지켜보고 있던 백우진이 물었다.
“무슨 차야?”
“응…, 이름은 모르겠어. 홍연이가 준 건데, 마시면 잠이 잘 오는 차래.”
“맞아요! 우리 아빠도 가끔 잠이 안 올 때 이거 마시고 주무세요!”
“그렇구나.”
신예화는 조용히 찻물을 삼켰다.
그리고 빈 찻잔을 홍연에게 돌려주었다.
“고마워, 연아. 언니 오늘도 잘 자겠다.”
코를 훌쩍 이 던 홍연의 얼굴에 미소가 돌아왔다.
“내일은 아프면 안돼요…?”
“그래, 알았어.”
백우진은 홍연의 머리를 쓰다듬어주었다.
“연이도 어서자.”
“저도이제잘 거예요!”
“그래, 얼른들어가서 자라.”
“오라버니, 언니도 안녕히 주무세요!”
인사를 마친 백우진은 신예화를 부축하여 그녀가 머무는 방까지 데려다 주었다.
좀처럼 몸을 가누지 못하는 그녀를 침상에 눕히고, 이불을 덮어주었다.
“고마워, 우진아….”
살포시 웃으며 고맙다고 말하는 그녀를 향해 백우진 이 물었다.
“내일떠날수 있겠어?”
“응, 걱정 마. 자고 일어나면 괜찮아질 것 같아.”
“•••그래. 내일 보고 결정하자.”
백 우진은 묘한 기 분에 사로잡혔다.
평소에는 언제나 자신을 향해 뜨거운 열망 같은 것이 번뜩였는데, 지금은 아니었다.
이쪽을 쳐다보는 신예화의 눈빛이 너무나도 차분했다.
마치 무언가를 크게 깨닫고 해탈한 사람처럼 보이는 것 같기도 하고.
“그럼 푹 자.”
“응….”
“그럼 난이만.”
돌아서서 멀어져가는 백우진.
이를 지켜보던 신예화가 저도 모르게 손을 뻗으려다 이내 그만두었다.
지 금 잡아봤자, 그가 보여줄 표정은 예 의 어 색 한 표정 일 테 니 .
문이 닫히고, 이윽고 혼자가된 신예화는 멍하니 천장을 바라보며 생각에 잠겼다.
난우진이를 떠날수 없어.’
오늘 그것을 절실히 깨닫게 되었다.
‘맺어질 자신도 없어….’
이제는 인정해야만 했다.
이대로 가면 그가 자신을 돌아봐줄 일 따위는 없으리라는 걸.
즐거웠던 추억은 이제 쓸모없는 과거가 되 어버렸음을.
‘아무것도 할수 없다면….’
떠날 수도 없고, 맺어지는 것도 어렵다면.
차라리.
‘차라리….’
그녀의 생각은 거기에서 더 나아가지 못했다.
난데없이 찾아온 강렬한 수마가 그녀의 온몸을 뒤덮었기에. …
이른 아침.
조원들은 평소대로 빠르게 일어나 떠날 채비를 마쳤다.
백우진은 제 앞에 도열한 조원들을 일일이 바라보다, 신예화에 이르러 시 선을 멈추었다.
어제만 해도 몸조차 가누지 못했는데, 지금은 상태가 나쁘지 않아 보였다.
아니, 오히려 더 좋아보인다.
그녀의 말대로 단순한 현기증이었을 뿐일까.
백우진은 주변을 둘러보았다.
홍연에게 인사라도 하고 싶었는데 어디에도 보이지 않았다.
‘아쉽지만 어쩔수 없지.’
인사를나누지 못하는건 아쉽지만,시간이 다됐다.
“출발하자.”
백 우진을 필두로 한 신룡조가 객 잔을 나섰다.
그들의 첫 번째 행선지는 모용세가였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