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80화〉초원
자갈타이 가 정신을 차린 것은 그로부터 한 시진 정도 흐른 뒤 였다.
“크으으…!”
얼굴 한쪽에 서 지독한 통증이 느껴 졌다.
혓바닥으로 입 안을 굴려보니 이 빨 또한 왕창 뽑혀 나간 모양.
심지어 팔과 다리는 옴짝달싹 못할 정도로 꽉 묶여 있다.
‘내가왜…, 아.’
끊겨져 있던 기억이 되살아나기 시작했다.
무림인으로 보이는 젊은 남녀들의 침입.
나름대로 전쟁터에서 굴러먹은 부족의 전사들이 추풍낙엽처럼 쓰러져 가
느 I그스
드누버.
마지막.
아리따운 여인이 거침없이 월도를 휘둘러 제 대도를 박살 내고, 얼굴을 후 려갈기는 것까지.
‘우리 부족민들은 무사한가?!’
그는 황급히 고개를 들어 올렸다.
“어,어….”
참혹한 광경 이 뒤 따를 거라 생 각했던 것과는 달리 , 눈에 보이는 부족은 제 법 평온해 보였다.
자신과 함께 약탈에 나서는 전사들이 한데 묶여 있다는 것만 제외하면 그 랬다.
그 외의 아이, 노인, 아녀자들은 곳곳에 서 있는 무림인들의 눈치만슬쩍 볼 뿐, 부족 내를 자유롭게 돌아다니며 저녁을 준비하고 있었다.
이게 대체 어찌 된 일이지.
의 아해하는 그의 머리 위로 짙은 그림자가 드리워졌다.
“어,일어났네.”
고개를 들어 올리자 보이는 것은 재수 없을 정도로 잘생긴 사내였다.
그는 새 빨갛게 익은 사과 하나를 들고 오물거 리 며 이쪽을 내 려 다보고 있 었다.
겉으로 보기에는 중원에서 좀 사는 집안의 자제로 보이는데.
‘뭐뭐냐.’
느껴지는 존재감이 심상치 않다.
당장에라도 네이놈 하면서 내지르려 했던 윽박은 쏙 들어갔다.
“누,누구시오.”
“그건 그다지 중요치 않을 것 같은데.”
사실 그건 그렇다.
중원에 대한지식이 전무하다시피 한그가젊은 사내의 이름을 알아봤자 알지도 못할 테니.
그는 골똘히 생 각하다 이 내 다음 질문을 입밖으로 내뱉 었다.
“원하는게 무엇이오.”
젊은 사내, 백우진의 입가에 짙은 미소가 그려진다.
그 모습이 꼭 정답을 얘 기했다고 칭 찬하는 듯한 느낌 이 었다.
백우진은 자갈타이의 앞에 쭈그리고 앉아 그와의 눈높이를 맞추었다.
“크게 바라는 건 없고, 그냥 내가하는 질문에 솔직하게 답만해주면 돼.”
“질문…, 질문 말이지.”
대수로울 것 없지 않냐는 듯한 그의 말에 자갈타이의 이마에 핏줄이 돋아 났다.
“고작 질문 몇 개 때문에 우리 부족을 침략해왔단 말인가!”
“그런데.”
“이,이…, 간악한 놈들!
“뭐?
분노어 린 절규를 토해내 는 자갈타이.
백우진은 그런 그의 모습을 조금도 이해할 수 없었다.
그의 분노는 아직 끝나지 않았다.
“평화롭게 해결할수도 있는 일이었다! 굳이 이렇게 우리를 짓뭉개지 않아 도 충분히 나눌 수 있는 이 야기 였단 말이 다!”
“허허, 이거 아주 웃긴 새끼네.”
“뭐가웃기 단말이냐.”
허허롭게 웃던 백우진의 시선이 더없이 날카로워졌다.
그의 눈빛이 자신을 향하는 순간, 자갈타이는 날카로운 칼에 온몸을 난자 당하는 듯한 느낌에 정신이 아찔해졌다.
“느그들은 약탈할 때 우리 약탈해요〜! 하고 와서 약탈했냐?”
지구에 그런 말이 있다.
내로남불.
내가하면 로맨스, 남이 하면 불륜.
자기 한테 는 한없이 관대 하고, 남에 게 만 엄격한 잣대를 들이 미는 인간들 에어울리는말.
지금의 자갈타이에게 딱잘맞는느낌 아닌가.
“내 가 이 자리에 있는 모두를 죽여도 너는 할 말이 없어야 하지 않을까 싶 은데.”
기괴한 표정이 그에게로 향했다.
입은환하게 웃고 있는데, 눈은 조금도 웃고 있지 않은.
“어떻게 생각하냐?”
“크윽…!”
자갈타이는 자신의 행동이 잘못되 었음을 깨달았다.
부족 전체가무력화된 상황.
모두가 인질로 잡힌 거나 다름없는 상황 속에서 화를 억누르지 못했음은 크나큰 실책 이 었다.
말 한마디에 기분이 나빠진 이들이 부족민 전체를 도륙할 수 있음을 왜 미 리 깨닫지 못했단 말인가.
사색 이 된 그가 다급하게 외쳤다.
“내,내가잘못 생각했던 것 같소.그대의 자비에 무한한감사를표하오… !”
그는 넙죽 몸을 엎드렸다.
칼자루를 쥐고 있는 것이 눈앞의 사내임을, 뒤늦게 깨달은 것은 후회하며.
고개를 푹 숙이는 자갈타이를 물끄러미 바라보고 있던 백우진이 입을 열 었다.
“그럼 내 물음에 답할 준비는 됐나?”
“내가 아는 거라면 무엇이든 답하리다.”
이후, 질의응답 시간이 이어졌다.
때때로 인근 부족의 정보를 팔아먹어야하는 질문에도, 그는 망설임 없이 답했다.
그들과의 관계를 중요시하는 것도 자신의 부족이 온전할 때나 가능한 일 이니.
그는 살아남기 위해 최선을 다했다.
그리고 살아남는 데에 성공했다.
…
자갈타이 부족에 서 말을 타고 반나절 조금 안 되는 거리 에는 바르탄 부족 이 자리 잡고 있다.
원래도 인근 초원 에서 강하기로 유명한 부족이 었으나, 늙은 부족장의 사후 새롭게 권력을 잡은 젊은 부족장의 인도 아래에 더욱 강성해져가고 있 는이들.
그 탓에 자갈타이가 관계 개선을 위해 가장 공을 들이고 있는 부족이기도 했다.
말을 제 수족처럼 다루며 초원을 내달린 그는 높다란 목책 앞을 굳건히 지 키고선 두 전사의 앞에서 멈춰 섰다.
그의 뒤로 부족의 전사들도 함께 말을 세우며 자갈타이의 뒤로 도열했다.
“누구냐!”
난데없는 타 부족의 등장에 전사가 날 선 반응을 보인다.
자갈타이는 익숙하다는 듯, 양손을 들어 전투 의사가 없음을 밝히며 입을 열었다.
“이보게들, 나일세. 자갈타이 부족장.”
“아…, 자갈타이님이셨군요.”
그를 향해 겨누어져 있던 창끝이 거두어졌다.
“내 바르탄 부족장에게 전할 말이 있어 급히 왔네 만, 부족장은 안에 계신 가?”
“예,조금 전에 약탈을 마치고돌아오셨습니다.”
“아…, 그런가.”
자갈타이의 시선이 제 뒤에 도열해 있는 전사들의 눈치를슬쩍 살핀다.
눈썹 이 꿈틀거리긴 하지만, 그 이상을 내비치는 않고 있다.
그는속으로 가슴을 쓸어내리며 입구를 지키고 선전사들에게 말했다.
“그럼 바르탄 부족장께 기별을좀 넣어주게.”
“예,잠시만 기다려주십시오.”
전사중하나가부족장에게 기별을 넣기 위해 안으로 들어섰다.
얼마 지나지 않아 안으로 들어섰던 전사가 걸어나왔다.
그는 혼자가 아니 었다.
전사의 뒤에는 어마어마한 체구를 지닌 거한이 곳곳에 돋아난 빳빳한 털 을 휘날리 며 성큼성큼 걸어오고 있었다.
그가 바로 이곳 부족의 부족장, 바르탄이 었다.
“오, 자갈타이 부족장! 열흘 만이구려. 오늘은 어쩐 일이시오? 뒤에는 전 사들인 듯한데 …, 혹 우리 부족에 선전포고를 하러 온 것은 아니겠지? 껄껄 껄!”
커다란 배에 장착된 울림통이 어마어마한지, 그가 웃을 때마다 하늘이 쩌 렁쩌렁 울렸다.
귀를 찌르르 울리는 웃음에 자갈타이는 인상을 찡그렸으나, 그 와중에도 웃음을 잃지 않았다.
“하하, 그럴 리 가 있겠습니 까. 오늘은 바르탄 부족장과 친분도 나눌 겸 전 할 얘기도 있어 찾아뵙게 되 었지요.”
“오! 그러시오? 안 그래도 술 상대 가 없어서 적적했는데, 잘 됐구려 ! 어서 들어오시오.마침 약탈을마치고온터라먹을게 쌓여 있으니,껄껄!”
바르탄은 자갈타이와 그를 호위하는 전사들을 모두 데리고 부족 안으로 들어섰다.
“자자, 전사들은 전사들끼리 마시게 두고, 우리는우리끼리 한잔합시다.”
그가 제 체구에 걸맞는 어마어마한 크기의 움막 안으로 들어서려 할 때, 자갈타이 가 제 뒤에 있던 전사 한 명을 앞으로 끌어당기며 말했다.
“바르탄부족장,술자리에 우리 전사하나를끼워도되겠습니까? 이 친구 가 우리 부족 내 에서 술을 가장 잘 마시 기에 부족장과 좋은 승부가 될 것 같 아서 내 일부러 데려왔습니다.”
“호오, 자갈타이 부족 제 일의 술꾼이라!”
전사들에게는 눈길 한 번 주지 않던 바르탄이 자갈타이의 옆에 선 전사를 바라보았다.
“굉장히 젊은친구구려! 헌데 실력이 제법,으음!”
그의 눈에 호기심이 차올랐다.
젊은 전사에게서 느껴지는 기세가 제법 상당했다.
바르탄의 삶은 단 세 가지로 정리가 가능하다.
술, 여자, 전사.
그중 눈앞의 젊은 전사는 실력 있고 술까지 잘 마신다고 하니 관심 이 가지 않을 수가 없었다.
| |.....
!.
......
.....
그의 시선을 받은 젊은 전사가 고개를 숙이며 자신을 소개했다.
“우진타이라고 합니다.”
우진타이!
그는 자갈타이 부족의 전사로 위장한 백우진이었다.
사로잡은 자갈타이 에 게 백우진이 물은 것은 인근 부족에 대 한 이 야기들 이었다.
마교도에게 이용당하고 있다면 그 부족의 세력이 갑작스럽게 강해졌을 것은 당연지사.
인근 부족 중에서 최근세력을 크게 확장한 부족이 있냐고 물었고, 자갈타 이는대답했다.
바로 이곳, 바르탄부족이 최근 가장크게 세력을 확장해오고 있음을.
‘기세가심상치 않은놈이야.’
실제로 마주하게 된 바르탄은그실력이 남달라보였다.
또한기묘했다.
실력과는 별개로 몸 전체가 꺼림칙했다.
‘저 지저분한털때문인가.’
그게 저 털 때문에 일어나는 혐오감인지, 아니면 마교도와손을 잡고 무언 가를 얻어내서 일어나는 혐오감인지.
그와 자리를 함께한 상태로 알아볼 요령 이 었다.
그는고개를슬쩍 들어 빛나는 제 눈을 바르탄에게 보이며 재차 입을 열었 다.
“제 게 바르탄 부족장과 대 작할 수 있는 영광을 주시 겠습니까?”
바르탄은 느꼈다.
사내의 정중한 말투 속에 잠들어 있는 호승심을.
“으하하하하! 젊은 전사답게 굉장히 호기롭군, 그래!”
바르탄은 그런 전사가 마음에 들었다.
“좋소! 이렇게 셋이서 술을 마셔봅시다. 마지막 한 사람이 남을 때까지 마 시는 거요!”
“하하…, 이 거 참, 제 가 제 일 먼저 뻗 겠습니 다, 그려.”
거대한움막이 세 사람을 집어삼켰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