소설리스트

무협지 속 주정뱅이가 되었다-184화 (184/215)

<184화〉흔적

백우진의 안색이 굳어가는 것을 본 조원들의 걱정이 이어졌다.

“배,백공자. 무슨일 있어요…?”

제갈연지의 물음에 퍼뜩 정신을 차린 백우진.

그는 불이 난 곳을 가리키며 입을 열었다.

“저곳, 하오문지부가 있던 자리야.”

그러자 장삼이 물었다.

“조장이 며칠 전 들렀다던 하오문 지부 말이오?”

“그래.”

“하오문 지부에 불이 났다, 라….뭔가석연찮은 기분이 드는군.”

“누군가…, 계획 적으로 불을 지른 걸지도 모르겠네요.”

장삼의 의문에 제 갈연지 가 추측하자, 당선영 이 또 하나의 추측을 입 에 담았다.

“아니면 녀석들이 직접 불을 질렀을지도모르지.”

그녀의 추측 또한 일리가 있었다.

불이 타오른 곳에선 그 어떤 불쾌한 냄새도 새어 나오지 않고 있었다.

인간의 시체가 불에 타오를 때 나오는 그 역한 냄새가 말이다.

그렇다는 건 하오문 지부는 불이 날 때부터 비어 있는 상태 였음을 의미한 다.

공교롭게 그들이 자리를 비웠을 때 불이 났을 가능성도 있지만, 어쩌면 그 들이 스스로 불을 지르고 도망쳤을 가능성도 배제할 수는 없었다.

그렇다면 여기서 드는 의문은 하나.

‘대체 왜?’

왜 그들은 도망쳐야 했고.

‘누구로부터?’

누구에게서 도망을 치려 했던 것일까.

“아우, 머리야.”

백 우진은 제 관자놀이 를 손가락으로 꾹꾹 누르며 눈을 감았다.

짜증이 팍 치솟았다.

안 그래도 신경 쓸 게 한두 가지 가 아닌데, 무엇 하나 확실하게 답은 안 나 오고 의문만 거듭해서 쌓여 가고 있으니.

“괜찮으세요…?”

이를 지켜보던 설수연이 걱정스럽다는 투로 물었다.

“괜찮아.그냥좀 짜증이 났을 뿐이지.”

“그렇다면 다행이지만….”

설수연의 목소리 가 작아졌다.

그녀는 최근 자신의 입지에 대해 많은 고민을 하고 있었다.

무공을 배우고는 있지만 기존의 조원들에 비하면 한참모자란수준이었 고, 특기 중 하나인 천문을 읽어 영웅인 백우진의 앞길을 비춰보려 했건만, 그 것마저도 지금은 불가능했다.

‘대체 뭘까…?’

요녕에 들어온 순간부터 천문을 읽을 수가 없게 되 었다.

분명 밤하늘에 별이 반짝이고, 또 격렬하게 움직이고 있는데도 의미를 파 악할수가없었다.

머릿속에 먹구름이 잔뜩 끼어 있는듯한느낌만받을뿐.

현천문의 전대 문주였던 스승의 말에 따르면 천문을 읽지 못하는 데에는 두 가지 이유가 있다고 했다.

첫째는 천기를 읽 어 들여 그것으로 사사로운 이 익을 취 하거 나, 그 자체 에 심취하여 능력을 남발하는 경우.

‘이건절대 아니야.’

그녀는 사사로이 천기를 누설한 적도 없고, 그 자체에 심취하여 능력을 남 발해본 적 또한 없었다.

그렇다면 남은 두 번째인데.

‘두 번째는…, 무언가로부터 방해를 받고 있을 때라고 하셨는데 ….’

문제 는 그 무언 가를 특정하기 가 매 우 어 렵 다는 것이 다.

때로 무언가는 사람이 될 수도 있고, 어딘가에서 현묘한 기운을 뿜어내는 물건일수도 있다.

주변에 널린 게 사람이고,물건이니 이를 어찌 파악할수 있을까.

그렇기에 그녀는요녕에 왔을 때부터 묘하게 침울해진 상태였다.

무언가 그에 게 도움이 되 었으면 싶은데 , 이 거다 싶은 게 없으니.

“하아….”

답답한속을 내뱉으며 고개를 들어 올리자, 어느덧 며칠간 머물렀던 객잔 에 당도해 있었다.

백우진이 입구로 들어서 자, 짧은 다리로 바삐 움직 이고 있던 홍연이 반색 하며 달려들었다.

“오라버니이!”

힘차게 달려드는 홍연을 그대로 안아서 들어 올리는 백우진.

“어이구, 힘도좋다.”

“헤헤! 오셔서 정말 기뻐요!”

“왜, 객잔에 돈 퍼다줄 사람이 와서 기쁘냐?”

백우진이 짓궂은 표정으로 묻자, 홍연이 볼을 부풀렸다.

“그런 거 아니에요오!”

“하하하! 농담이다, 농담.”

설수연은 이를 지켜보며 상상의 나래를 펼쳤다.

먼 훗날, 백우진이 영웅으로서의 소명을 다하고 어느 한적한 시골에 멈춰 선날.

하하호호 웃으며 마당을 뛰노는 두 아이와 이를 쫓아다니는 백우진.

그리고 이를 지켜보며 웃는 자신.

“헤,헤헤…, 아, 스읍.”

입 가에 흐르는 침을 소매로 닦아낸 그녀가 퍼뜩 정신을 차렸다.

‘이,이럴때가아닌데.’

백우진에게 도움이 될 것이 뭐가 있을까고민해야할와중에 이런 헛된 망 상이 나 하고 있다니 !

백우진을 비롯한조원들은 간단하게 여정에 더러워진 몸을 씻어낸 뒤, 저 녁을 함께했다.

오랜만에 맛있는 것들로 든든하게 배를 채우고 방으로 돌아온 그녀는 헤 실헤실 웃으며 침대에 누우려다가 이내 몸을 일으켰다.

“아아, 이게 아니야!”

자꾸만 행복에 젖어가는 몸을 억지로 일깨우는 설수연.

“너무 행복한것도 문제구나….”

그녀는 지금의 삶이 더없이 행복했다.

죽은 스승과 마찬가지로 산속에서 쓸쓸히 늙어 죽어가는 건 아닐까 걱 정하던 때와는 비교도 할 수 없을 만큼.

‘영웅님은 정말 좋은 분이야.’

남들보다 몇 배는 많이 먹어도 뭐 라고 하기는커 녕, 많이 먹 으라고 등을 쓸 어내 릴 때마다 얼마나 행복한지.

‘그러니 나도 도움이 되어드려야해!’

다시 한번 고민하는 설수연.

그녀는 자신이 가진 것들 중에 무엇이 그에게 효과적일까 생각을 해보았 다.

“ 아!”

그리고 떠올렸다.

현천문에서 배운 비장의 기술이!

“그래, 그거라면…!”

피로에 찌든 백우진에게 큰도움이 될 수 있으리라!

드디어 도움이 될 것을 찾아낸 그녀의 발이 바삐 움직였다.

목표는 가장끝에 위치한백우진의 방.

똑똑!

“영웅님…?

문을 두드리 며 그를 불렀지만, 안에선 아무런 대답도 들려오지 않았다.

똑똑!

“영웅니임…!”

조금 더 세게 두드리고, 크게 불러보아도 마찬가지.

그녀는 의아한 마음에 고개를 갸웃거리며 조심스레 문을 열어보았다.

드륵

잠겨 있을 거란 예 상과는 달리, 너무나도 쉽 게 열리는 문.

“실례할게요….”

그녀는 그리 말하며 문을 활짝 열어젖혔다.

그녀의 방과 별반 다를 것 없는 내부.

그 안에 백우진은 없었다. …

저녁을 먹고 방으로 돌아왔던 백우진은 곧장 밖으로 향했다.

신법을 운용하여 도착한 곳은 조금 전 불길이 크게 치솟았던 하오문 지부 의심처.

그의 뒤로 또 다른 인영이 내 려앉았다.

“신경이 많이 쓰이는가 보구나.”

혈수마녀 였다.

“아무래도 그렇죠.”

신경을 쓰지 않으려야 않을 수가 있나.

하필이면 정보를 구매한 곳에서 불이 났으니, 무언가 꺼림칙한 기분이 들 었다.

제갈연지와 당선영의 말대로 누군가의 방화일까, 아니면 자작극일까.

불에 타 검에 그을린 땅을 내려다보고 있던 백우진이 앞으로 나아갔다.

“직접 확인해볼 셈이냐?”

“예.”

그들의 심처는 불에 타폭삭 내려앉은 건물의 안쪽에 숨어 있다.

백우진이 안으로 들어서기 위해 입구를 가로막은 나뭇더미들을 하나둘씩 치우고 있을때.

“그래서야 언제 들어 가겠느냐.”

혈수마녀 가 그를 뒤로 물리 며 앞으로 나아갔다.

“흐음.

그녀를 중심으로 주변의 기운이 요동치 기 시 작했다.

그와 함께 입구를 가로막고 있던 나뭇더미들이 일제히 하늘 위로 둥실 떠 올랐다.

허공섭물(獸空益物).

내공을 사용할 수 있는 무인이라면 누구나 사용하는 기공술의 기초 중의 기초.

그와 동시에 사용자의 경지에 따라그 힘이 천차만별로 달라지지는 기술.

수백 근은 가뿐히 뛰어넘는 잔해들이 그녀의 손짓 한 번에 옆으로 이동한 다.

그와동시에 가로막혀 있던 입구가 드러났다.

오랜만에 선배로서의 위 엄을 제대로 선보였음을 직감한 혈수마녀가 자신 만만한 태 도로 돌아섰다.

“자, 이러면 안으로 들어갈….”

이쪽을 빤히 쳐다보는 백우진의 표정 이 뭔 가 이 상하다.

넋이 나간 것 같기도 하고, 헤실거리며 웃고 있는 입을 보면 아닌 것 같기도 하고.

“왜 그리 쳐다보느냐.”

그녀가 묻자, 백우진이 소매로 입가를스윽 닦으며 대답했다.

“아니, 너무 예쁘고 멋있으셔서 그만.순간적으로반할뻔했지 뭡니까.”

달빛 아래에서 붉은 머리칼을 휘날리며 허공섭물을 전개하는 그녀의 모 습은 그야말로 이름난 화공이 공들여 만든 대작을 보는 듯했다.

가감없이 솔직한그의 대답에 혈수마녀의 얼굴이 제 머리칼처럼 붉게 물 들었다.

“이, 이놈이 또헛소릴…!”

얼굴이 화끈거렸다.

혈수마녀는 황급히 등을 돌렸다.

“헛소리 말고해야할일이나하거라!”

백우진은보았다.

등을 돌리는 그녀의 얼굴이 붉게 물든 것을.

그의 입가에 장난기 짙은 미소가그려졌다.

“어, 지금 혹시 부끄러워서 등 돌린 겁니까? 맞네, 맞아!”

건수 하나 잡았다고 신나게 놀려대기 시작하는 백우진에게 무언가가 쏜 살처럼 날아왔다.

조금 전 그녀 가 띄워 옮겼던 나뭇더 미 중 하나였다.

퍼억!

“켁 으

배를 얻어맞고 그대로 침몰하는 백우진.

“어디 한번만 더 깐족거려 보거라.”

살벌한 표정을 지으며 이쪽을 내려다보는 혈수마녀의 등 뒤로 나뭇더미 들이 재차 떠올랐다.

아까와다른 점이라면 명령 한번에 앞으로쏘아져 나갈것 같은모양새 정 도일까.

백우진은 빠르게 백기를 들었다.

|  |....

!..

.....

“살려주십쇼.”

杼! 조심하거라.”

“옙.

99

다신 깝치지 않겠다고, 그는 속으로 다짐했다.

그녀와 맞붙을 수 있는 경지에 오르기 전까지는 말이다.

욱신거리는 배를 부여잡으며 안으로 들어서는 백우진.

그는 검을 뽑아 상점 가장 안쪽의 바닥을 모조리 잘라냈다.

서걱!

이윽고 드러난 것은 또 다른 바닥이 아닌, 아래로 향하는 계 단.

“흥, 하오문 놈들은 예나 지금이나 지하로 숨어드는 걸 좋아하는구나.”

하오문의 문도들을 싸잡아 비 난하는 듯한 말투에 백우진 이 고개 를 갸웃 거리며 물었다.

“하오문과 안 좋은 일이 라도 있으셨습니 까?”

“ 있다마다!”

기 다렸다는 듯이 대 답하는 혈수마녀 .

그녀 가 열변을 토해 냈다.

“하오문 놈들이 내 정보를 팔아먹 지 만 않았어 도 그리 힘 든 상황까지 는 가 지도 않았을 게다!”

아.”

아무래도 무림공적이 되어 쫓기는 혈수마녀의 위치에 대한 정보를 어지 간히도 팔아먹은 모양이다.

잔뜩 흥분한 그녀를 달래 며 계 단 아래로 내 려 간 백 우진은 곧장 하오문 지부장과 마주했던 곳으로 향했다.

화마에 의한피해는그리 크지 않아보였다.

애초에 흙과 돌로 이루어 진 벽 이 다 보니 , 탈 만한 거 라고 해봐야 나무로 된 의 자나 탁상이 전부였으니 .

백우진은 자세를 낮췄다.

희미하지만 바닥에 여러 사람이 바삐 오간 발자국들이 이리저리 어지럽게 찍혀있다.

그것을 그대로 기억에 담아 머릿속에 재현한다.

보폭이 좁지 않은 걸로 보아선 성큼성큼, 또는 다급한 걸음이 었던 모양인 데.

심처 곳곳을 돌아다니던 발걸음이 일제히 한곳에서 끊어졌다.

가장 깊숙한 곳에 있는 석벽 앞.

백우진은 석벽에 손을 대고, 그 안으로 내공을 밀어 넣었다.

적잖은 두께.

하지만그 뒤로 뻥 뚫려 있었다.

“안 봐도 뻔하다. 비 밀 통로일 테 지 . 그 쥐 새끼 같은 놈들은 도망치 기 위 한 수를꼭 남겨뒀지.그래서 죽이지 못한놈들이 수두룩….”

살벌한 말이 계속해서 이어지기 전에 백우진은석벽을 향해 냅다주먹을 내질렀다.

콰앙-!

커 다란 소리 가 메 아리 치듯 울려 퍼 지고, 무너져 내 린 석벽 뒤 로 긴 통로가 드러났다.

벽에 걸린 횃불이 모두 꺼져 있어 어두웠으나, 그 정도 어둠은 두 사람에 게 아무런 해도 되지 않았다.

제법 길게 이어진 통로의 끝.

그곳은 조양 밖의 깊은 산속이 었다.

혹 문제가 생겨 도시에 갇힐 때를 대비해 이렇게 탈출구를 만들어둔 듯했 다.

‘이러면 자작극일 확률이 높아진 건가.’

비 밀 통로 그리고 방화.

어쩌면 그들은 도망치기 위해 일부러 불을 지르고 비밀 통로로 달아났을 지도 모르겠다.

‘그렇다면 누구로부터냐가문제인데.’

문제는 바로 그것이다.

대 체 누구한테 이 리도 도망쳐 야만 했는가.

문득 백우진은 그런 생 각이 들었다.

‘혹시 나인가.’

어쩌면 그들이 도망치려고 했던 대상이 자신일지도 모르겠다는 생각.

하지만왜?

굳이 자신에게서 도망을 쳐야 하는 이유는 무엇이란 말인가.

‘놈들이 내게 원한을 살 만한 일은…, 단 하나.’

정보.

만약 그들이 건네준 정보에 거짓이 섞여 있었거나, 고의로 누락시킨 부분 이 있었다면?

그렇다면 충분해진다.

자신으로부터 그들이 도망쳐야만 하는 이유가.

‘별 이상한 부분은 없었는데….’

하지만 정보자체에 꺼림칙한부분은 없었다.

백우진은 그 정보를 토대로 조사를 진행했고, 바르탄이라는 단서까지 잡 아들이지 않았나.

지금으로선 알 수 없다.

비 밀 통로를 빠져 나온 이 후의 산길에도 요란한 족적 이 희 미하게 남아 있 다.

‘일단따라가보자.’

이 흔적을 따라가다 보면 또 무언가 발견할 수도 있겠지.

백우진은 그들이 남긴 마지막 단서를 따라 걷기 시작했다.

허나, 그것도 생각보다 빠르게 끝이 났다.

울창한 숲속, 그곳에서 그들의 흔적이 끊겨 있었기에 .

“뭐지.”

마지막 걸음이 찍혀 있는곳의 땅을 가볍게 헤집자, 코끝으로 미약하게나 마 비릿한 냄새가 스며들었다.

분명 혈향이었다.

흙 위 에 남은 그들의 흔적은 적어도 며칠 이상은 지난 것이 분명했다.

그럼에도 혈향이 이토록 묻어나 있다는 것은.

‘여기서 다죽었구나.’

그때 였다.

퍼엉

무언가 터 지는 듯한 소리와 함께 주변 이 자욱한 안개 로 뒤 덮이 기 시 작했 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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