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85 화〉함정
몰아치는 자욱한 연기 속.
다리에 내공을 실어 높이 뛰어오르며 백우진은 스스로를 자책했다.
‘너무순진했어.’
심처에서부터 이곳까지 남아 있는 흔적은 누군가가 일부러 남긴 듯했다.
함정을 파둔 이곳까지 유인하기 위해서.
높이 뛰 어올라 자욱한 연기를 뚫고 올라온 백우진은 빠르게 주변을 살폈 다.
“미쳤네, 이것들.”
주변 일대가 온통 연기 천지다.
신법을 운용해도 단숨에 빠져나가기 어려울 정도.
순간 뱃속이 찌르르 울렸다.
‘이미 조금 마셨어.’
연기가 터진 걸 확인하고 곧장숨을 멈춘 뒤, 팔로 입을 가렸지만 그 사이 에 약간 콧속으로 스며든 듯했다.
언제나 태연자약한 표정을 하고 있던 백우진의 얼굴에 긴장이 스쳤다.
초절정 에 오른 몸은 웬만한 독에 도 끄떡 없어 야 정상인데 , 뱃속에 서 느껴 지는 기운이 심상치 않은 탓이었다.
‘대체 뭐가들어 있는거야?’
몸속으로 들어오기가 무섭게 체내에 끈적하게 달라붙은 기운을 건드려 보았다.
그러자 놀라운 일이 벌어졌다.
몸에 붙은 기운을 건드려보기 위해 다가갔던 자신의 내공이 힘을 잃고 흩어지는 게 아닌가.
이 러한 효과를 낼 수 있는 독은 백 우진이 알기로 단 하나밖에 없었다.
‘산공독.’
체내의 기운을 흐트러뜨려 일시적으로 내공을 사용하지 못하게 만드는 독.
| |..
!.
!.
......
허나그것뿐만이 아니었다.
단전 근처까지 내려온 기운이 주변으로 퍼지기 시작했다.
퍼진 기운은 주변의 감각을 둔하게 만들고, 활동 자체를 멈추게 했다.
‘마비독인가.’
독에 대한 조예가그리 깊지 않아 정확히는 모르겠지만, 몸을 마비시키는 독인 것만은 틀림없었다.
이를통해 알아낸 사실이 하나 있다면.
‘날 죽일 생 각은 없는 것 같은데 .’
자신을 죽일 목적이었다면 여기에 생명을 빼앗을 정도로 강력한 독 하나 정도 더 심었을 테니 말이다.
하늘 높이 치솟았던 신형이 자욱한 연기가 퍼진 땅에 떨어졌다.
체내에 들어간 기운은 지독하지만, 그 양이 미미했다.
내공을 조금 더 쏟아부어 압박하자 이를 이겨내지 못하고 자연스레 소멸 할 정도.
‘숨을 참은 상태로 이곳을 탈출하면 ….’
•••라고 단순하게 생각했던 적도 있었으나, 아무래도 그건 불가능할 듯했 다.
희뿌연 연기 속에서 수십은 족히 되어 보이는 검은 인영(人影)이 이쪽을 향해 다가오고 있었기에.
안개 속에서 모습을 드러낸 이들은 얼굴을 무언가로 꽁꽁 감싸고 있었다.
제 정체를 가리 기 위 함이 기도 하나, 이 연기를 막아내 기 위 함으로도 보였 다.
‘최악이구만.’
그야말로 최 악이 었다.
숨을 참고 움직 여 야 하니 격하게 움직 일 수도 없고, 시 간은 한정적이 다.
그런 상황에서 나타난 적의 경지 또한 낮지 않으니.
‘외통수네.’
걸리는순간끝인, 걸려서는 절대로 안되는함정에 걸리고만셈.
복면인들 중 가장 앞서 있던 사내가 그를 향해 무심한 눈길을 던지며 말했 다.
“백우진, 순순히 투항하라.”
흉흉한 눈빛이 경고를 보내왔다.
순순히 투항하지 않으면 최소 팔하나쯤은 가져갈요령인 듯했다.
뭐라 대답하고 싶지만, 그랬다간 연기가 입으로 들어올 테니 그럴 수도 없 는 상황.
하는 수 없이 백우진은 그들을 향해 제 중지를 들어 올려 보여주었다.
그러자 이를 본 복면인들의 눈매가 꿈틀거렸다.
참이상한일이지.’
분명 중지를 들어 올리는 행위는 지구에서나 통하는 욕일 텐데.
판타지 세계도그렇고, 이놈의 무림도그렇고.
대체 왜 통하는 건지.
그냥 모양 자체 가 기 분이 나빠서 그런 가.
우두머리로 보이는 사내가 꿈틀거리는 눈가를 애써 진정시키며 나지막이 입을 열었다.
“굳이 피를 보아야겠다면, 응해주지.”
그 말을 끝으로 그는 등을 돌렸다.
그것이 일종의 신호였는지,그의 뒤에서 대기하고 있던 부하들이 일제히 칼을 뽑아 든 채로 이쪽을 향해 성큼성큼 다가오기 시작했다.
앞서 말했듯, 이것은 안 걸리는 게 가장좋은 외통수다.
치열하게 싸운다 한들, 필패가 예정된 싸움이라는 뜻이기도하다.
그럼에도 백우진의 신색이 그리 나빠보이지 않는것은.
‘혼자라면 그렇단 거지.’
이 단순하지 만 완벽한 함정 속에 서, 애 석하게도 자신은 혼자가 아니 기 에.
그의 등뒤에서 때마침 바람이 불어닥쳤다.
자연적인 바람과는 거리가 먼, 인간이 만들어낸 거대한 바람이.
후우우웅!
크윽!”
“갑자기 웬 바람이 …!”
자욱하게 가라앉은 연기를 이리저리 날려 보내는 바람 속에서 날카로운 목소리 가 들려왔다.
“같잖은 수를 쓰는 걸 보아하니 .”
날카로운 음색과 달리 차분하게 걸어 나온 그녀, 혈수마녀의 시선이 그들 모두를 옥죄었다.
“네 놈들 또한 같잖은 놈들이 틀림 없으렷다.”
압도적인 기세를 발산하는 그녀의 등장에 등을 돌리고 연기 속으로 사라 져가던 우두머리가 걸음을 멈춰 재차뒤로돌아섰다.
“•••귀하는 누구시오.”
감히 범접할 수 없는 기세에 사내의 말투가 자연스레 공손해졌다.
‘대체 저 괴물은뭐란 말인가.’
처음에는 그저 여성 편력이 심한 백우진의 여자중 하나일 줄 알았건만.
이제 보니 모든 계획을 어그러뜨릴 재앙이 아닌가!
혈수마녀의 싸늘한 시선이 우두머리 사내에게 집중되었다.
“네놈은 본녀에 대해 알 자격이 없다.”
이로써 그는 확신했다.
자신을 비롯한 부하들의 죽음은 확정되 었음을.
살기를 포기한 우두머리 사내의 마지막명령이 부하들에게 하달되었다.
“전원 산개 !”
한 사람이 라도 살리 고자 내 린 마지 막 명 령.
그의 말이 떨어지기 가 무섭게 부하들은 사방팔방으로 흩어져 생을 도모 하려 했으나, 거기까지 였다.
“부하를 살리고자 하는 노력은 가상하다만.”
그녀의 손아귀에 핏빛 강기가 맺혔다.
“본녀에게서 벗어날수 있을 성싶으냐.”
혈수마녀가 손을 가볍게 털어낼 때마다 강기로 이루어진 기의 조각들이 전방위 로 쏘아졌다.
퍼억! 퍽! 퍼적!
손톱만큼이나 작은 조각들이 도망치는 이들의 몸에 닿을 때마다 커다란 폭발을 일으켰다.
폭죽 터지듯 부하들의 몸이 터졌다.
그들의 몸에서 나온 피가 비처럼 쏟아져 내렸다.
이 압도적인 광경을 목도한 백우진은 마른 침을 삼키며 그녀의 별호를 떠 올렸다.
혈수마녀 (血手魔女).
‘닉값오지네, 진짜.’
누가 지 었는지 몰라도 별호 하나는 기 가 막히 게 잘 지 었다.
“크윽...j”
백우진과 마찬가지로 두 눈으로 제 부하들이 끔찍하게 죽어 나가는 것을 두눈으로확인한우두머리 사내의 눈에 원망의 빛이 서렸다.
그러자 혈수마녀가 입꼬리를 말아 올렸다.
“웃기는 놈이로구나. 남을 죽이려거든, 제 목숨 또한 버릴 각오를 해야 하 거늘.”
“닥치시오.”
거칠게 말을 씹어 뱉은 사내 가 검을 뽑아 들었다.
허나, 이 모든 것은 위장이 었다.
당장에라도 달려들 것처럼 거친 기세를 뿜어내던 사내의 우측 턱이 미약 하게 들썩거렸다.
“ 아!”
“이런!”
이를 확인한 백우진과 혈수마녀가 빠르게 달려들었지만, 이미 늦었다.
“끄믉…!”
사내의 입에서 피가줄기차게 쏟아졌다.
무림에서 패배한 복면인이 턱을 들썩거릴 일이야 뻔했다.
만약의 상황을 대비해 이빨 사이에 숨겨둔 독단을 씹고 자결을 시도한 것 이다.
혈수마녀와 백우진이 황급히 몸 곳곳을 두드리며 독의 진행을 막아보려 했지만, 이마저도 실패했다.
독의 진행 속도가 어 마어마하게 빨랐다.
현경의 고수마저도 손을 쓸 수 없을 정도.
“지독한 독이로구나….”
혈수마녀가 숨이 끊어진 사내를 내려다보며 혀를 내둘렀다.
죽어간 제 부하들의 복수를 위해 발버둥이라도 치나 싶었건만, 자결을 택 할줄이야.
그때의 분노는 진짜였다.
그럼에도 그는 제 분노를 억누르고 냉정한 판단을 내린 것이다.
화가 난 백우진은 거칠 손길로 놈의 얼굴에 씌워져 있던 복면을 벗겼다.
뱉어낸 피 아래로 드러난 외모는 평범했다.
“제길.”
지나치게 평범해 무언가를 특정하기 어려운 외모였다.
기실 정체 따위는 궁금하지 않았다.
십중팔구 놈들은 마교에서 보낸 놈들일 테니.
녀석이 한 치의 망설임도 없이 자결을 택했음은 그가 자신에게 유용할 만 한 정보를 알고 있다는 뜻일 터.
그중에는 현무단에 대한 정보도 있었을 것만 같아 못내 아쉬웠다.
“그…, 미안하구나.”
이 를 지 켜보던 혈수마녀 가 쭈뼛 거 리 며 사과를 입 에 담았다.
“내 가 조금 더 빨리 알아차렸다면 살릴 수 있었을 터인데 ….”
이에 놀란 백우진이 눈을 휘둥그레 뜬 채로 손사래를 쳤다.
“농담으로라도그런 말씀 마십쇼. 선배님 아니었으면 저 여기서 죽었습니 다.”
그저 아쉬운 마음이 들었을 뿐, 그녀를 탓하고자 할 의도는 조금도 없었다
•
그녀가 곁에 없었다면 꼼짝없이 이 자리에서 죽었을 텐데 어찌 그런 마음 을 품을까.
“선배님 덕에 살았습니다. 이에 대한보답은 무엇으로든 꼭 치르겠습니다
“무,무엇으로든…, 말이냐?”
“예,원하시는 게 있다면 뭐든 말씀하십쇼. 제가 할 수 있는 거라면 뭐든지 •••,엉?”
당찬 목소리로 말을 내뱉던 백우진의 신형 이 풀썩 내려 앉았다.
“어라.”
억지로 몸을 일으키려 했으나, 실패했다.
몸에 힘이 들어가지 않는다.
“ 아.”
무언가를 깨달은 듯한 표정으로 주변을 둘러보는 백우진.
혈수마녀가 만들어낸 바람에 의해 저 멀리 사라졌다고 생각한 연기가 군데군데 남아 있었다.
놈의 자결에 당황한 나머지 백우진은 그것을 마신 것이고.
“괘,괜찮은게냐?”
“어 ..., 몸이 마비되고, 내공을 사용하지 못하는 걸 제외하면 딱히 …?”
혈수마녀가 고개를 저으며 제 이마를 짚었다.
“그게안괜찮은것아니냐.”
백우진이 흐릿하게 웃으며 그녀에게 말했다.
“저좀 업어주시렵니까?”