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무협지 속 주정뱅이가 되었다-186화 (186/215)

<186 화〉심정

혈수마녀는 제 등에 업혀 있는 백우진을 보며 또 한 번 생각했다.

세 상 참 오래 살고 볼 일이 라고.

‘내가 사내를 업게 될 줄이야.’

그야말로 상상조차 못 했던 상황이 아닌가.

‘참으로 오묘한 느낌이 로다 • • •.’

등으로 느끼는 사내의 감촉은 참으로 오묘했다.

가장 먼저 딱딱했다.

얇은 살갗 너머로 전해지는 근육의 단단함이 여성의 몸과는 전혀 달랐다.

지금도 발에 수도 없이 차이는 돌덩이와 다를 것 없는 단단함인데, 왜 이리 도 묘한 긴장과 함께 이 질감과 촉감을 계속 느끼고 싶다는 중독성이 이는지.

그뿐만이 아니었다.

그의 몸에서 물씬 풍겨 나오는 체취가그녀의 정신을 혼란케 했다.

처음 맡는 것은 분명 아니 었다.

고수인 그녀의 오감은 매우 뛰 어났기에 언제나 맡았던, 익숙한 냄새였다.

그저 거 리 가 가까워 진 만큼 농도가 짙 어졌을 뿐이 다.

분명 그뿐일진대, 어찌 이리도 사람의 코와 마음을 싱숭생숭하게 하는지!

“으음…!”

제 등에 온몸을 착붙인 채 얼굴을 비벼대고 있는 백우진.

‘그래.’

혈수마녀는 비로소 백우진이라는 인간에 대한 정의를 내릴 수가 있게 되 었다.

‘아편, 이놈은 아편 같은놈이다.’

몸에 해로울 걸 알면서도호기심에 의해 손을 대게 만드는.

한 번 손을 댄 순간부터 절대 빠져나가지 못하게 전신을 끈적하게 옭아매 중독시키고, 마침내 인간을 밑도끝도 없는제 구렁텅이에 빠트려 평생 허우

적거리게 만드는.

머릿속에 경종이 울린다.

‘조심하지 않으면 나도 당하겠구나.’

흔히들 잘못 알고 있는 사실이 있다.

인간을 초월하여 화경, 나아가 현경에 이른 고수들은 정신 또한 단단하여 온갖 미혹에 시 달리 지 않는다고들 말하는데 , 이는 사실이 아니 다.

육신의 단단함이 여느 인간과 다르고, 정신의 건강함이 또 여느 인간과 다 른 것은 사실이다.

허나그것이 그들을 모든것으로부터 초연하게 만들어주는 것은 아니다.

그랬다면 모든 고수들은 현경에 오른 순간부터 지금까지 맺어온 모든 연 으로부터 초탈해야 정상이 아닌가.

허나그들은 여전히 제 가문에, 제 사문에 머물러 그들의 뒤를 받쳐주고 있다.

또 누군가는 여전히 복수심 에 사로잡혀 있고, 다른 누군가는 여전히 세상 에 대한 야욕을 조금도 숨기 지 않고 드러내 고 있다.

선계에 올라 인간이라는 껍데기를 벗어 던지지 않는 한, 미혹에 사각지대 란 있을수 없다.

그렇기에 그녀는 신경이 쓰였다.

업혀 있으면 가만히 있을 것이지,왜 자꾸만제 얼굴을 등에 비비적대고 있 는건지.

“가만히 있지 않고왜 자꾸 얼굴을본녀의 등에 비벼대는 게냐.”

“아,신경쓰이셨습니까?”

등에 한쪽볼을 찰싹붙이고 있던 백우진이 고개를 슬쩍 들어 올리며 겸연 쩍은 투로 말했다.

“여자의 등에 업혀 있으니까 약간 옛날생각이 나서요.”

“옛날...생각 말이냐.”

“예. 옛날에도한번 이렇게 업혔던 적이 있었는데,그때 생각이 좀.”

이곳이 아닌, 판타지 세계에서의 추억이었다.

빙의 1회 차인 그때의 백우진은 지금보다더 저돌적인 인간이었다.

앞뒤 분간못하고 일단들어가서 파헤치다가위기를 겪은게 한두번이 아 니다.

‘지금도좀그렇기야하지만….’

그때를 생 각하면 지금은 정 말 나아진 셈.

아무튼 그날도 지금과 비슷했다.

적들이 작정하고 판 함정에 걸렸다가 세 번 정도 죽을 뻔한 위기를 넘고 살 아남았다.

너무 지쳐서 쓰러졌다가 깨어났을 즈음엔 누군가의 등에 업혀 있는 상태 였다.

온몸으로 느꼈던 갑옷의 단단함과 시릴 듯한 차가움은 지금도 뇌리에 생생하게 떠오른다.

멀리서 들려오는 괴물의 낮은 울음과 지척에서 들려오는 여인의 숨소리.

짙은 피와 땀 냄새, 이를 넘어서는 여체의 향긋한 살냄새까지 모두.

앞뒤 전부 따지면 그야말로 최 악 중의 최 악의 상황이었지만, 정신을 잃고 깨어났던 그 순간만큼은 가장 아름답고 행복한 순간으로 기 억되 어 있다.

“참 좋았는데….”

나지막이 읊조리는 그의 말에, 혈수마녀는 이루 말할수 없는 측은함을 느 꼈다.

‘어렸을 적 어머니에게 안겨 있던 때를그리워하고 있는 게냐.’

그녀는 백우진이 말한 옛날이 어린 시절이라고 생각했다.

가슴이 뭉클해졌다.

“시,신경이 쓰이는 건 아니니 네 편한대로하거라.”

혈수마녀가 보기에 백우진은 더없이 쓸쓸한 인간이었다.

겉으로 드러 난 수려 한 외 모 뒤 에 무수히 많은 상처 를 안고 홀로 끙끙 앓고 있는 사내.

그것이 자꾸만 그녀의 모성애를 자극했다.

가능하다면 그를 보듬어주고 싶다는 생각이 절로 일게 만들 정도로.

“흐흐.”

등 뒤에서 난데없이 웃음 소리가 새어 나왔다.

“왜 웃는게냐.”

그녀가 묻자, 백우진은 제 볼을 다시 등에 찰싹 붙이며 뭉개진 발음으로 대답했다.

“그냥…, 선배님이 계셔서 다행이라는생각이 들어서요.”

혈수마녀는 콧방귀를 뀌며 시큰둥한 투로 답했다.

“흥,내가 이 자리에 없었으면 네놈은분명 죽었을 게다.”

“아뇨, 그것 말고요.”

물론 그것도 고맙다.

목숨을 빚졌는데 고맙다는 말로도 부족하지.

하지 만 백 우진은 비 단 그 상황을 떠 올리 며 말한 것 이 아니 었다.

“말씀드렸듯 선배님 이 잠들어 계신 곳이 마교 놈들의 함정이 었잖아요.”

“그랬지.”

그녀는 인상을 찡그렸다.

그때를 떠올리면 여러모로 이 가 갈린다.

백유성의 술수에 넘어가 이백 년이나 잠들어 있던 것이며, 여지껏 살아 있 는 마교 놈들이 제 가 잠든 곳을 함정으로 이용하려 했던 것까지.

무엇 하나 마음에 드는 게 없다.

“그 함정에 걸리지 않았다면 제가선배님을 깨우지 못했을 거 아닙니까.”

말투가 참으로 묘했다.

그녀는 백우진을 향해 넌지시 물었다.

“흠흠…, 네놈은 그때 본녀를 깨운 것이 더없는 행운이었겠구나.”

혈수마녀의 등위에 축늘어진 그의 입가에 짙은 미소가그려졌다.

은근한 기대가 느껴진다.

이게 바로 여자들의 오의 중 하나인 ‘답정너’인가.

“예, 아주 큰 행운이 라고 생 각합니 다.”

“크흠흠! 그러냐.”

백 우진은 애 써 웃음을 삼켰다.

억지로 헛기침을 하며 웃음을 참아내는 게 뻔히 보인다.

도란도란 이야기를 나누며 걷다보니 어느덧 객잔 앞이었다.

그녀는 백우진을 등에 업은 채로 힘껏 뛰어올라 미리 열어두고 나갔던 백우진의 방 창문을 통해 안으로 들어섰다.

혈수마녀는 침상 위에 백우진을 눕혀주었다.

“고생하셨습니다.”

“흥,고생은 이제부터가 아니냐.”

猌,,

자신을 방까지 데려다주었으니 그대로 떠나갈 거라 생각했건만, 그녀는 예상 밖의 행동으로 백우진을 놀라게 했다.

혈수마녀는 떠나지 않고 그대로 침상에 걸터앉아 그의 명치에 손을 올렸 다.

“윽….”

명치를 통해 뜨거운 기운이 파고들어 사지백해로 뻗어 나가기 시작했다.

온몸에 아교처 럼 들러붙은 독기 가 그녀 가 불어넣은 내 공에 의 해 짓눌려 사라져간다.

얇게 뜬 그의 눈동자에 혈수마녀의 얼굴이 맺혔다.

이마에서 시작된 땀이 뺨을 타고 흐른다.

‘무리하고 계시네.’

그녀는 어떻게든 비밀로 하려는 듯했지만, 수백 번이나 그녀의 공격을 받 아낸 백우진은 알고 있다.

그녀가 예전 같지 않다는 것을.

어찌 보면 당연한 일이다.

이백 년.

무려 이백 년을 잠들어 있다가 깨어났다.

심지어 가슴에 칼을 꽂은 채로 말이다.

제아무리 거대한 빙옥이 그녀의 신체를 보호하고 있었다곤 하나, 그것이 이백 년 세월을 무색하게 할 만큼완벽한 것은 아니었기에.

조금 전 수십의 복면 인들을 불귀 의 객으로 만들어 버 린 한 수는 어 마어 마 했다.

그러나 그만큼 내공의 소모 또한 적지 않았을 게 뻔한데 그 상황에 서 타인 의 신체에 내공까지 불어넣어 몸을 다스려준다는 건 그 사람에게 제 피와살 을 내 어주는 것과 다름없었다.

‘이러다진짜큰일 나겠네.’

자꾸만 마음이 움직이는 게 느껴진다.

언제나 자신의 곁에 있어주겠다는 말을 들었을 때부터 지금까지 쭉.

느리지만 확실하게 그녀에게로 향하고 있음을.

좋아하는 게 문제가 되지는 않을 터다.

당선영은 생 각보다 그쪽으로 너그러운 편이고, 제 갈연지 도 말이 통하지 않을 상대는 아니니.

다만 좋아하는 대 상 그 자체 가 문제 일 뿐.

당선 영과 제 갈연지 는 적 어 도 쌍방이 었다.

자신이 그녀들에게 마음을 내어준 만큼, 그녀들 또한 자신에게 마음을 내 어주었다.

하지만 혈수마녀는 어떤가.

‘짝사랑은 싫은데.’

그녀 가 과연 자신을 좋아할까.

확신이 서질 않는다.

지금까지 마음을 준 여인들과는 궤를 달리 하는 여인이었기에.

‘ 아, 모르겠다.’

체내에 눅진눅진하게 달라붙은 마비독들이 점점 해소되기 시작하면서 안 정을 되찾기 시작하는 몸으로부터 짙은 피로감이 전해졌다.

백 우진은 그대로 눈을 감았다.

혈수마녀 가 눈을 뜬 건 그로부터 얼마 되 지 않았을 무렵 이 었다.

“후유...”

급한 불은 껐다.

..

!.

!....

.......

체내에 미약한독이 남아 있기는 하지만, 그 정도라면 백우진 스스로도 처 리할수있을 터.

‘마음 같아선 완벽하게 제거해주고 싶다만….’

지금으로선 무리 였다.

‘그때 왜 그랬는지.’

혈수마녀는 조금 전 복면인들을 참살할 때 사용했던 무공을 떠올렸다.

수십 에 달하는 강기 다발을 일제히 쏘아내 던 한 수는 그녀 가 익힌 무공의 오의에 준하는 초식이었다.

굳이 사용하지 않아도 되 는 상황이 었다.

조금 시간이 걸리더라도 한 놈씩 확실하게 숨통을 끊었어도 아무런 문제 도 없었을 터.

그럼에도 구태여 그것을 사용한 이유는 그 순간, 화가 났기 때문이다.

그것도 아주 몹시.

동시에 두려웠다.

그는 이 세상에서 자신을 기억하고 있는 유일한 사람.

그를 잃을지도 모른다는 생각에 몸이 먼저 반응하고 말았다.

“네놈이 참으로골치로구나.”

그녀는 고이 잠든 백우진의 이마를 손가락으로 콕 내 려찍으며 쓰게 웃었 다.

약관을 간신히 넘긴 사내놈에게 이리도 휘둘릴 수 있다는 게 그저 놀라울 따름.

“이 빚은톡톡히 받아내고 말 것이니라.”

웃음기 머금은 마지막 한마디를 남긴 채, 그녀는 사라졌다.

다음날아침.

백우진은 좀처럼 말을 듣지 않는 몸을 억지로 일으켜 모용세가로 향했다.

그리고 충격적인 소식을 전해 들었다.

“지금…, 뭐라고 하셨습니까.”

딱딱하게 굳은 얼굴로 되묻는 백우진.

그를 맞이하러 나온 모용진천은 한껏 어두워진 안색으로 조금 전 했던 말 을 그대로 다시 들려주었다.

“바르탄이 죽었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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