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88화〉다시 초원으로
백우진은 그날 하루를 모용세가에서 묵으며 떠날 채비를 마쳤다.
객잔에 머무르고 있을 조원들에게 시간을 주기 위함이기도 했고, 물심양 면으로 돕겠다고 말을 꺼낸 모용진천의 주머니를 털어먹기 위해서이기도 했 다.
그래봤자 야영에 쓰일 물품들을 최상품으로 준비해 달라는 것 외에는 딱히 할수 있는 게 없었지만.
동이 트기 직전, 백우진은모용세가를 나섰다.
다시 한번 초원으로 향하기 위해 성문에 다다랐을 즈음, 그는 성문의 양옆 에 꾸물거리는 두 마리 애벌레를 보았다.
“•••뭐야, 저건.”
자세히 보니 모포를 머리끝까지 뒤집어쓰고 있는 사람이었다.
의아하다.
낯선 모포에 서 익숙한 느낌이 나는 것은 왜 일까.
묘한 이끌림에 근처까지 가보았지만, 모포를 푹 뒤집어쓰고 있어 정체를 알수 없는 상황.
실례를 무릅쓰고 모포를 살짝 내려볼까 하던 찰나.
“아오, 이놈의 모기! 내 오늘 네놈들과 사생 결단을 내고 말리 라!”
모기의 습격을 받은 애벌레 가스스로 모포를 벗어 던지며 몸을 일으켰다.
짤랑! 짤랑!
모기를 잡겠다고 커다란 봇짐 에서 꺼 내 든 것은 움직 일 때마다 짤랑거 리 는 소리 가 요란하게 퍼 지 는 방울이 었다.
사내, 장삼은 방울을 이 리 저리 흔들어대 며 제 피를 노리는 모기 들과 싸우 다 자신을 한심하게 쳐다보고 있는 백우진의 존재를 뒤늦게 확인했다.
“•••뭐 하냐?”
어이 없다는 투의 물음에 장삼은 제 봇짐에 조금 전까지 덮고 있었던 모포 와 방울을 도로 집 어넣고선 짐을 꾸려 자리 에 서 일어 났다.
“거 사람이 그러는 거 아니오.”
그는 백우진을 향해 다짜고짜 따지기 시작했다.
“조장과 나는 약조하지 않았소. 나는 조장에 게 도움이 되고, 그 대 가로 조 장은 내게 영술서를 찾아주겠다고 말이오.”
“그랬지.”
“그러니 별 수 있나! 가시밭길이라도 따라가는 수밖에.”
“목숨을 잃을 확률이 아주 높은데도?”
그가 떠보듯 묻자, 장삼은 콧방귀 를 뀌 며 답했다.
“내 보기에 조장은 지옥의 문턱을 밟아도 살아돌아올 인간이오.”
장삼에게는 보인다.
숱한위기를겪으며살아남아더없이고귀해진그의 영혼이 .
“또 천지신명께서 말씀하시길, 우리 조원 중 누구도 이 땅에서 죽는 이 없 을 거라 하셨소.”
그 말을 들은 백우진의 표정이 떨떠름하게 변했다.
“참듣기 좋은 말이기는하다만…, 네가하니까 영 신빙성이 없다야.”
“어허, 믿으시오. 믿는 자에게 복이 있다지 않소.”
문득 떠오르는 생각에 백우진의 눈살이 찌푸려졌다.
천지신명이라 함은 곧 신과 다를 것 없는 말일진대, 그 말은 곧 신을 믿으 라는 뜻아닌가.
이곳의 신은 ‘NovelGod’인데, 그놈을 믿으라고?
지금 이 고생을 누구 때문에 하고 있는데!
열 이 오른 백우진 이 부리부리 하게 뜬 눈으로 장삼에 게 경고를 남겼다.
“신 얘기 한번만 더 꺼내 봐, 팍씨.”
“크흠흠!”
황급히 고개를 돌리는 장삼.
백우진은 잠시 오른 열을 가라앉히며 장삼이 누워 있던 곳 맞은편에 똑같 이 모포를 둘러싸고 있는 사람을 가리켰다.
한쪽이 장삼이 었으니, 다른 한쪽은 안 봐도 뻔했다.
“저건 그럼 광수겠네.”
“왜 그리 생 각하시오?”
장삼이 순수한궁금증을 얼굴에 띄우며 물었다.
뻔하지, 뭘』
“흠…, 때로는 뻔해 보이는 것이 뻔하지 않을 때도 있소만.”
백우진은 장삼의 말을 싹 무시한 채 모포로 만들어진 또 다른 애벌레를 향 해 다가갔다.
“야,광수야. 이제 일어나라.”
처음에는 점잖게 이야기로 깨워보려 했으나, 모포는 꼼짝도 하지 않았다.
“일어나래도?”
여전히 씹혔다.
이 정도면 들었을 법도 하건만, 여전히 미동조차 않는 구왕수의 모습에 백 우진은 하는 수 없이 팔을 뻗 어 모포를 단숨에 끌어 당겼다.
“어….”
장삼의 말이 맞았다.
둘이 워낙에 잘 붙어다녀서 당연히 반대편에는 구왕수 있을 줄 알았건만.
예상했던 구왕수는 없고 설수연이 곤히 잠들어 있었다.
“우으응…, 추워요….”
“어,미안.”
팔을 비비며 추워하는 그녀에게 모포를 다시 덮어준 뒤, 잰걸음으로 원래 있던 자리로 돌아가 장삼의 멱살을 틀어쥐 었다.
“야, 이 자식아. 설소저가 왜 저기에 있냐?”
“케헥! 내, 내기에서 져서 그랬소!”
“내기? 무슨 내기인데 아녀자를 모포 하나만 달랑 들고 밖에서 재우는데 ?”
“조,조장이 언제 떠날지 얘기를 안해줘서 그런 거 아니오!”
백 우진 이 제 할 말만 하고서 떠나간 뒤, 그들은 별다른 회의 없이 곧장 답 을 내렸다.
가장먼저 당선영과 제갈연지가그의 뒤를 따르리라 공언했다.
두 여인은 백우진과 혼인만 올리지 않았다 뿐이지, 부부나 다름없는 관계 였으니 당연했다.
그 다음은 신예화였다.
그녀에게도 그를 따를 이유야 충분했다.
오히 려 그녀는 자신만 그와 함께 갈 테니 모두 학관으로 복귀 하라고 으름 장을 놓았다.
자신은 백 가의 두 형제와 모두 소꿉친구이 니, 남이 아니 라는 이유를 대 면서.
물론 받아들여지지 않았다.
설수연과 송희 연도 뒤를 이 었다.
한쪽은 영웅을 위해 200년 만에 세상에 모습을 드러낸 현천문의 신녀였 고, 또 다른 한쪽은 그를 생명의 은인으로 여기고 있었기 에.
구왕수와 장삼 또한 장고(長考) 없이 생 각보다 빠르게 답을 내 렸다.
장삼은 위와 같은 이유에서 그를 따르기로 마음먹었고, 구왕수는 그의 뒤 를 따르면 원하는 모든 것을 얻게 해주겠다는 말을 여전히 믿고 있다고 말했 다.
“그렇게 다 따라가기로 마음은 먹었는데, 조장이 언제 떠날지를 알 수가 없지 않겠소.”
“그래서?”
“처음에는 조장을 찾아가 언제 떠날지 물어보려고 했는데, 당 소저가 이 를 막아섰소.”
“아니, 왜?”
“당소저가그러더구려.조장이 말은 그렇게 하고 미련 없이 떠난 것처럼 보이지 만, 속으로는 자기들이 따라올까, 안 따라올까, 마음 졸이고 있을 거 라고.”
“허,내가?”
속으로 뜨끔했다.
’날 거기까지 파악하다니….‘
그야말로 요물이 아닐 수가 없다.
“당소저가 괘씸하다고 했소. 어차피 따라갈 거 뻔히 알면서 굳이 자기들 을 시험하고 있다고, 만나면 바가지를 박박 긁어버린다고도….”
“크흠, 그건 됐고.”
백우진은 등골이 오싹해짐을 느꼈다.
안 그래 도 최 근 당선 영과 제 갈연지 의 잔소리 가 나날이 늘어 가고 있다.
틈틈이 술을 마시고 있노라면 어딘가에서 날카로운 시선이 느껴지더랬다.
놀라 주변을 살피 면 꼭 그 두 사람이 었다.
“그래서 내기를 한 거요. 누군가 성문 앞에서 밤을 보내다가 조장이 보이 면 연락을 취하기로 하고 말이오.”
“그 내 기에서 너와 설 소저가 패한 거고?”
“그렇소.”
구태여 자신에게 떠나는 시간을 묻지 않은 이유가 참으로 날카롭지만, 어 이 가 없기는 매 한가지 였다.
어쨌든 납득은 했다.
그런데 다른 쪽으로 잘 납득이 가지 않는 부분이 생겼다.
“야, 보통 여인이 이런 거에 걸리면 사내가 나서서 대신 하고 그러지 않 냐?”
“흠…, 아무래도그렇지 않겠소?”
“근데 광수는 설 소저를그냥 저리 내보내고 있냐.”
백우진이 고개를 저으며 그리 말하자, 장삼이 얼굴을 굳혔다.
“말에어폐가 있소.”
그의 진중한 태도에 백우진이 고개를 갸웃거렸다.
“어디에 어폐가 있는데.광수는 대신 오려고 했는데 설 소저가 거절하기라 도한건가?”
“그런 것이 아니오.”
그럼?”
“광수, 그 친구는 애초에 보통이라는 범주에 들어가는 인간이 아니라는 걸말하고 싶었소.”
아.”
단숨에 이해가 갔다.
장삼이 말을 이었다.
“어쨌든출발할때가되었으니 조원들을 불러 오겠소.조장은 저기 자고 있는 설 소저나 좀 깨워주시구려.”
“ 알았다.
장삼이 객잔을 향해 걸어가고, 백우진은 모포를 뒤집어쓴 채 고이 잠든 설 수연에게 향했다.
“잘도자네….”
웬만한 사내들도 딱딱한 바닥에서 잠들면 몸이 배겨서 몇 번씩 깨는 게 보 통인데, 설수연은 제가 누운 곳이 침상 위라도 되는 것마냥 아주 깊게 잠들어 있다.
“산에서 살다와서 그런가.”
자연을 벗삼아 살아온 그녀라서 그런 걸지도 모르겠다.
백우진은 모포 위로 그녀의 어깨를 잡고 천천히 흔들었다.
“설 소저, 이제 일어날 시간인데.”
“우우웅…, 조금만더 잘래요….”
아무래도 아침잠이 많은 체질인 것 같다.
그는 하는 수 없이 비장의 수단을 꺼 내들었다.
모용세가에 요청하여 준비한 야영 물품 중 하나, 육포.
그것도 맛과 향이 기존의 것과는 비교할 수 없을 정도로 뛰어난 최고급 육 포를 그녀의 얼굴에다 대고 살랑살랑 흔들었다.
반응은 매우 신속했다.
곤히 잠들어 있던 그녀의 코가 먼저 잠에서 깨어났다.
“킁,킁…, 헤에, 좋은 냄새….”
몇 번인가 허공에 다 손을 허우적대 던 그녀 가 마침 내 눈을 떴다.
“지금 일어나면 이거 줄게.”
“네에.”
아무런 반동 없이 상체를 스르륵 일으키는 설수연.
그 모습이 꼭 귀신이 몸을 일으키는 것만 같아 살짝 소름이 돋을 뻔했다.
“육포주세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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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눈을 비비며 내밀어진 한쪽 손.
그 귀 여운 모습에 백우진은 쓰게 웃으며 커다란 육포 한 조각을 그녀의 손 에 올려주었다.
도토리 먹는 다람쥐 처럼 육포를 손에 쥐고 오물거 리 던 그녀의 눈이 삽시 간에 커다래진다.
“어, 엄청 마시써여…!”
최 고급 육포가 마음에 쏙 든 모양이 다.
그렇게 그녀가 육포 한 조각에 잠을 쫓아내고 있을 때, 멀리서 음산한 기 운이 느껴졌다.
고개를 돌려 그곳을 확인하니, 장삼의 뒤를 따라 걸어오고 있는 여인들에 게서 나오는 기운이었다.
“엄….”
각양각색의 원망어린 눈빛이 돋보인다.
이러지도, 저러지도 못하는 사이 다가온 당선영이 까치발을 들어 그의 귀 에다 대고 무언가를 속삭였다.
“자기…, 자꾸 이렇게 나오면 재미없을줄 알아.”
“넵,명심하겠습니다.”
깍듯한 그의 대 답에 나름 만족하며 지 나쳐 가는 당선 영.
소나기는 피하는 것이 최선이 라고 했다.
문제는 그 소나기 가 하나가 아니라는 것.
“백 공자….”
평소와 같은 말투.
그러 나 그 안에 서 느껴 지 는 소름끼 치 는 감각은 무엇인 가.
“난죽어서도 백 공자와함께할 거예요…. 백 공자도 그렇죠?”
“무,물론이지.”
“흐흥…, 좋아요.”
정해진 답변을 얘기하는 것으로 겨우 살아남은 백우진은 이마에 흐르는 땀을 닦아내 며 가슴을 쓸어내 렸다.
조원들은 하나 같이 짐을 잔뜩 등에 지고 있었다.
굳이 확인해 보지 않아도 준비는 철저히 했음이 보인다.
어느덧 제 앞에 도열한 조원들을 보며, 백우진은 마지막으로 당부의 말을 남겼다.
“다들죽을 각오는 하고 왔나?”
유쾌하지만, 비장한그의 물음에 답한이는오직 한사람뿐이었다.
“아,글쎄 천지신명께서 우리는 죽지 않을 거라고 말씀을….”
“콱 그냥.”
“흠흠.”
분위기 좀 잡아보려 했더니 도움을 안준다.
백우진은 고개를 설레설레 저으며 등을 돌렸다.
“그럼 출발한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