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91화〉홍성
쇠창살 안에서 걸어 나온 마인의 수는 서른하고도 둘.
백우진은 벽을 손으로 짚으며 힘겹게 일어나는 백무혁을 곁눈질로 살폈다
‘몸이 많이 상했어.’
고초를 겪은 그의 몸 상태는 그리 좋지 않아 보였다.
내공을 운용하는 것조차 힘겨운 걸 보면 산공독에 중독된 듯하다.
말인즉, 마인을 상대 할 수 있는 사람은 자신뿐이 라는 뜻.
“내 뒤에 있어.”
“•••미안하다.” 백무혁은 순순히 그의 말에 따랐다.
마음 같아선 어떻게든 힘이 되어주고 싶었으나, 그럴 수 있을 만한몸 상태 가아니었다.
이런 몸뚱어리로 함께 싸우겠다고 덤벼들었다간 백우진에게 오히려 더 큰 부담이되리라.
상황은 최악이다.
유일한 퇴로는 서른둘의 마인이 막고 있고, 이곳을 어찌어찌 빠져나간다 고 해도 그 뒤는 이민족이 기다리고 있을 터다.
“후우.
작게 숨을 내뱉으며 이민족에 대한 사실은 일단 잊기로 했다.
눈앞의 마인들을 해치우는 것만으로도 벅찬 상황.
굳이 머릿속을 더 복잡하게 하고 싶지는 않았다.
유일하게 백우진에게 웃어주는 건 지형이다.
폭이 그다지 넓지 않은 기다란 길 하나가 전부인 곳이었기에 한 번에 들이 닥칠 수 있는 마인의 수는 한정적 이다.
백무혁을 등에 둔 채로 앞서 달려드는 마인들을 빠르게 처리할 수만 있다 면.
“크아아아!”
비대하게 부풀어 올라 있는 마인들의 근육이 꿈틀거린다.
녀석들이 땅을 박차는순간, 백우진의 얼굴이 사정없이 일그러졌다.
“이 새끼들이.”
단순한뜀박질이 아니었다.
오직 본능에 의존해 움직이는놈들의 움직임에 신법의 구결이 녹아 있다.
그것이 의 미하는 바는 명확했다.
“결국 사고를 쳤구나.”
누구에 의해서인지 알수 없으나, 결국 마인을 개량하는 데에 성공했다는 것.
그것도 아주 까다로운 방향으로 말이 다.
“캬아악!”
날카로운 손톱이 쇄도한다.
구 할에 가까운 본능 속에 일 할의 무공 구결이 녹아 있다.
그 정도면 충분했다.
놈들은 그 일 할로 예 전보다 훨씬 위 협적 이고, 까다로운 상대 가 되 었으니.
혼돈속의 질서라는 게 어쩌면 이런 걸 말하는 게 아닐까.
마구잡이로 휘둘러대는 손톱 속에 검법의 묘리가 느껴졌다.
뻔히 보이는 궤적에 마음을 놓고 피하다 보면 어느 한순간 번뜩인다.
약점은 금세 드러났다.
‘완급조절이 안돼.’
공격이란 본디 때에 따라서 빠르고 느림을 조절해야 할 줄 알아야 하는 법 인데, 녀석들은 오직 크고 강하게 휘두르는 것밖에 할줄몰랐다.
허공을 수직으로 양분하는 맹렬한 공격을 피해내는 순간, 놈의 목은 무방 비 상태가되었다.
서걱-
나무에 주렁주렁 열린 열매를 따듯, 백우진의 검은 놈의 목을 손쉽게 베어냈다.
한놈, 두놈, 세 놈.
짧은시간에 마인의 목을 세 개나더 베어낸 그는생각했다.
‘생각보다위협적이진 않아.’
마인이나 마물을 사냥하는 데에 애를 먹는 이유는 기형적으로 변화한 그 들의 신체 또한 한 몫 한다.
헌데 눈앞의 녀석들은 근육만 부풀어 올랐을 뿐, 자유자재로 휘 어지는 촉 수라던가 강철보다 단단한 피부 같은 것들은 지니고 있지 않다.
그 대신이라고 해야 할지, 무공의 구결 일부를 몸에 녹일 수 있게 되어 공 격의 날카로움은 조금 살아났을지 모르나, 더욱 날카로워진 무기를 제대로 휘둘러야 할 놈의 머리에 아무것도 들지 않으니 이래서야 무기만 아까울 따 름.
그렇다고 해서 눈앞의 마인들이 실패작은 아니다.
‘과도기라고 봐야하겠지.’
마인을 더욱 개량하기 위한 과도기에 놓인 상태 라고 보는 게 옳을 터.
더 많은 실험을 통해 마인의 몸에 더 많은 것들을 녹이게 된다면, 그땐 정말 정파와 사파가 힘을 합쳐도 마교를 이기지 못하는 상황이 벌어질지도 모른다.
‘대체 누구지?’
지칠 줄 모르고 달려드는 마인들을 상대하며 백우진은 생각에 잠겼다.
저 마인들을 만들어낸 놈은 누구일까.
‘반드시 죽여야해.’
그의 눈에 짙은 살기가 꼈다.
마교도 백 명 아니, 천 명을 놓쳐서라도 놈을 죽일 수 있다면 능히 그래야 할 정도로, 마인의 개량은 꼭 멈춰 야만 한다.
마인을 베어 넘기는 속도가 점차 빨라진다.
눈앞에 없는 이 에 대 한 분노가 마인들에 게로 쏟아지 기 시 작한 것.
목이 떨어져 나간 마인의 수가 열다섯을 넘어갈 무렵.
짤랑- 짤랑-
청 아한 방울 소리 가 들려왔다.
소리가 퍼질 때마다 아주 미약한 기파(氣波)가 파도치듯 넘실거린다.
기파가 마인에게 닿자, 누구의 말도 듣지 않을 것만 같던 녀석들이 일제히 멈춰 섰다.
백우진은 방울 소리가 들려오는 곳을 향해 안력을 돋웠다.
야트막한 어둠 속에 서 한 사내 가 걸 어 나왔다.
짐승의 털로 만든 이민족의 복장을 하고 있지만, 이민족 특유의 느낌은 전 혀나지 않는사내.
언뜻 쾌활해 보이는 미소는 이 상황과 너무나도 동떨어져 있어 더없이 불 길하고, 꺼 림칙한 느낌을 안겨준다.
“한창싸우는데 미안합니다.”
그는 사뭇 정중한 태도로 말을 걸어왔다.
“오랜만에 성공을 거둔 실험체들이 다 죽는 걸 보고 있을 수만은 없어서 말입니다.”
방울 소리를 듣고 우뚝 멈춰 선 마인들을 뚫고, 사내 가 천천히 앞으로 걸어 나왔다.
이 를 물끄러 미 쳐 다보고 있던 백우진은 의 아함을 느꼈다.
냄새가 난다.
반듯하게 서 있는 코가 당장에라도 비뚤어질 것만 같은.
사내가 발걸음을 내밀어 다가올수록 그 냄새는 더욱 심해져 갔다.
백우진은 사내의 허리춤에 매여 있는 주머니를 보았다.
그것은 향낭이 었다.
“큭!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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참을 수 없는 웃음이 새어 나왔다.
향낭 따위로 이 냄새를 숨길 수 있을 거라 생각한 걸까.
사내의 몸에서 나는 냄새는몸에 배어 있는 냄새 따위가 아니다.
그보다 더 근본적인 곳에서 묻어 나오기에, 세상에 존재하는 무엇으로도 가릴 수 없음을 모르는 듯했다.
그런 냄새를 향낭으로 가리려고하니, 어찌 웃음이 나오지 않을 수 있을까.
백 우진 이 속으로 무슨 생 각을 하는지 도 모르고, 웃으며 걸어온 사내 가 가 볍게 목례를하며 그에게 인사를 건넸다.
“반갑습니다, 백우진 공자. 소생은….”
그의 말이 채 끝나기도 전에 백우진은그를 향해 말을 건넸다.
“오랜만이야.”
사내의 얼굴이 의문으로 가득 차오르기 시작했다.
신룡조원들은 크고 작은 부족들을 복속시킨 뒤, 자갈타이 부족에 모여들 었다.
“어서들 오시오!”
처음에만 해도 자신들을 역병 바라보듯 하던 자갈타이는 언제 그랬냐는 듯, 환하게 웃으며 그들을 반겼다.
...
그럴 만도 했다.
“다들 고생들 많았소! 술과음식이 많으니 마음껏 드시고 피로들 푸시오! 으하하핫!”
고작하루 사이에 자갈타이 부족 아래 무려 세 개의 부족이 복속됐다.
그만큼 그의 권력이 한층 강해졌음은 물론이요, 언제나 적당한 수준으로 유지되고 있던 술과음식이 더없이 풍족해졌다.
이 모든 것이 그들이 이루어낸 성과인데 어찌 그들에게 베풀지 않을 수 있 을까!
고된 일을 마치고 돌아온그들의 앞에 술과음식이 가득 쌓였지만, 그들은 누구 하나 기쁜 표정으로 왁자지껄 떠들어대며 먹고 마실 수가 없었다.
“이보게, 삼이! 이거 한번 먹어보게! 아주 별미야, 별미!”
“오오, 어떤 맛이길래…,우옷!?”
장삼과 구왕수를 제외하면 말이다.
그들이 침울해 있는 이유는 단하나, 백우진 때문이었다.
그는 하무르 칸의 부족을 정찰하겠단 목적으로 말을 타고 떠났다.
홀로 떠나려는 그에게 제발 정찰만 하고 돌아오라고 신신당부하긴 했지 만, 글쎄.
말을 잘 듣는 듯하면서도 결정적 일 때 반대로 행동하는 청 개구리 같은 면 모 또한 지니고 있음을 알기에,그녀들은 쉬 이 마음을 놓을 수가 없었다.
짝짝!
가라앉은 분위기 속에서 고개를 숙인 채 음식을 깨작거리고 있던 그들의 귀에 박수 소리가 들려왔다.
박수를 친 이는 당선영이 었다.
“우리 너무 걱정하지 말자. 평소에는 가끔…, 아니, 많이 실없는 사람처럼 보이긴 하지만, 이런 상황에서 우리를 실망시킨 적은 없잖아?”
그녀의 옆에 꼭 붙어 있던 제갈연지가 이에 동조하듯, 고개를끄덕이여 입 을 열었다.
“마, 맞아요. 우린 우리대로 할 일을 하고 있으면, 백 공자도 금방돌아올 거예요….”
두 사람의 적극적인 독려에 조원들도 조금씩 안정을 찾기 시작했다.
먼 곳에서 이를 지켜보고 있던 혈수마녀는 한쪽 입꼬리를 말아 올리며 콧 방귀를 뀌었다.
제 갈가와 당가의 여식이라 했던가.
가문 좋고, 얼굴 예쁘고, 무가의 여식답게 실력 또한출중하다.
거기에 조원들을 다독이기까지 하는 모습으로 보아 통솔력까지 제법 갖 춘듯하다.
제갈가의 여식은 당가의 여식에 비해 좀 떨어지는 듯하지만, 그녀는 보았 지 않나.
저 의복 안에 숨은 여인의 또 다른 자존심 덩어리들을!
“흥…, 여자는 잘골랐구나, 썩을 놈.”
괜히 배알이 꼴렸다.
한 명만 가져도 사내로서 성공한 삶이라 자부할 만한데, 양손에 쥐고 있지 않은가.
더군다나 송희 연과 설수연, 그들도 낌새 가 보인다.
조만간 백우진과 침상 위를 뒹굴 것만 같은 불길한 낌새가 말이다.
그녀는 이내 눈을 감았다.
계 속 보고 있으려 니 자꾸만 이 상한 생 각이 들어 차라리 안 보는 게 나을 듯했다.
물론 그녀들을 지켜봐 달라는 백우진의 부탁을 들어주기 위해 귀는 활짝 열어두었다.
그렇게 밤이 서서히 깊어갈무렵이었다.
양껏 먹어 든든하게 배를 채운 설수연은 조원들에게서 떨어져 나와 하늘 을 바라보았다.
“영웅님의 별이.…
당선영과 제갈연지의 말에 어느 정도 걱정을 덜어내긴 했지만, 아예 털어 내기란쉽지 않은 일이었다.
그래서 그녀는 별을 찾았다.
백우진을 뜻하는 영웅지성을 찾아 그것을 보는 것으로 불안한 마음을 달 래려 했다.
수많은 별들 사이에서 그녀는 어렵지 않게 별을 찾았다.
가장 크고 찬란한 별, 그것이 바로 영웅지성이기에.
“아,저기 있…, 어, 어어…?”
영웅지성을 본 그녀의 얼굴이 삽시간에 거무죽죽하게 변했다.
밝고 찬란한 빛을 흩뿌리는 별 주변으로 불길한 붉은색을 흩뿌리는 흉성 이 다가왔다.
그뿐이라면 모를까, 붉은 흉성의 빛이 서서히 영웅지성의 찬란함을 잠식 해가고 있다.
그것이 의 미하는 바는 명확했다.
“여,영웅님에게 무슨 일이 생긴 거야…!”
과거 백우진 이전의 영웅에 대한 서사를 기록한 비록에도 남아있다.
붉은 흉성이 영웅지성의 빛을 잠식할 때, 영웅이 커다란위험에 빠졌었다 고.
그때 현천문이 나서서 그를 돕지 않았다면 중원은 끔찍한 최 후를 맞이했 을지도 모른다고 말이 다.
“아아…!”
그녀는 절규를 토해냈다.
당시의 크고 거대했던 현천문과 달리, 지금의 현천문은 고작 자신밖에 존 재하지 않는 영락할대로 영락한 문파에 불과했다.
자신의 목숨을 내던져 그를 구할 수 있다면 얼마든 구하겠지만, 과연 제 목숨 따위 로 그를 구할 수 있을까.
짙은 회의와 절망이 그녀를 감싸 안고 구렁텅이로 밀어 넣으려 할 때였다.
“그 말이 사실이냐.”
별안간그녀의 앞에 웬 여인이 나타났다.
붉은 머리칼을 휘 날리며, 아주 심각한 표정을 지은 채로.
“느 느구... ”
“본녀의 말에 대답이나하거라. 지금 네 말이 사실이냐고물었다.”
“트,틀림없어요. 현천문의 기록에 따르면 붉은흉성은 언제나 영웅지성을 파멸로 이끄는 가장 위험한 적이 나타났을 때라고….”
점점 더 흉흉하게 피어오르는 그녀의 기세에 설수연은 말끝을 흐렸다.
“본녀가 녀석을 구해올 것인즉, 너는 아무렇지 않은 것처럼 행동하고 기다 리고 있거라. 알겠느냐?”
정 체도 모르는 이 에 게 그의 목숨을 맡겨 야만 하는가.
그 물음에 그녀는 생 각보다 빠르게 답을 내 렸다.
다른 조원들에 비해 무공의 수위 가 낮은 그녀도 알 수 있을 정도로, 혈수 마녀의 주변에서 들끓고 있는 기세는 근처에 서 있는 설수연의 피부가 따끔 거릴 정도로 강렬했다.
그런 그녀가 구할 수 없다면, 조원 전체 가 달려들어도 불가능한 일이 었기 에.
그녀는 무겁게 고개를 끄덕였다.
“아, 알겠어요.”
설수연이 대답하기가 무섭게 혈수마녀의 신형이 온데간데없이 사라졌다.
후우웅-
“아…!”
그녀가 떠난 자리에 뒤늦게 거센 바람이 불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