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94화〉홍성
여느 때와 다름없이 어둠 속에 자리한 천마는 만남의 때를 기다리며 회상 에 잠겼다.
천마신공(天魔神功).
역대 천마들을 단 한 사람도 빠짐 없이 천하제 일인으로서 군림하게 만든, 세상에 존재하는 그 어 떤 무공과도 견줄 수 없는 고금제 일의 무공.
그 천마신공의 구결이 적힌 비서의 가장 끝자락에는 무공과는 전혀 연관 이 없는글귀가하나남겨져 있다.
그것이 무엇인고 하니.
[먼 훗날 나타나는 영웅에 의해 천마는 덧없이 바스라질 운명이니, 살고자 한다면 그를 찾아 죽여라.]
언제, 누구에 의해 쓰였는지조차 모르는, 불길한 미래를 암시하는 글귀.
이를 확인한 천마들의 반응은 대동소이했다.
무시하거나, 조롱하거나.
비서의 끝자락에 도달했음은 천마신공을 극성으로 익혔다는 증거다.
이는 곧 자신이 천하제 일인이 되 었다는 뜻인데, 대체 누가 자신을 죽일 수 있으랴.
“어리석은 놈들.”
당대의 천마또한 조롱했다.
비서에 적힌 글귀가 아니라, 이를 무시한 역대의 천마들을 말이다.
어쩌면 이는 비단 사람의 잘못만은 아닐지도 모른다.
천마신공을 대성한순간, 전능감에 사로잡힌다.
체내에 들끓는 미증유의 기운으로 세상을 제 뜻대로 다룰 수 있을 것만 같은, 정말 신이라도 된 것 같은 기분.
의지만 먹으면 능히 사람을 죽일 경지에 오른 때에 보게 된 불길한글귀, 그것이 무에 대수일까.
“참으로 짓궂은 장난이지.”
천마는 그것이 누군가의 짓궂은 장난처럼 보였다.
비서의 첫 장에 이를 적어두기만 했어도, 역대 천마중 일부는 다른 결말을 맞이했을지도 모른다.
그런데 굳이, 가장 힘에 도취해 있을 때 그런 글귀를 남기지 않았나.
“그럼에도 역시 어리석다.”
천마신교의 역사는 짧지 않다.
기나긴 시간동안 영웅에 의해 덧없이 죽은 천마의 수 또한 적지 않을 터.
힘에 취해 되풀이되는 역사를 간과했으니, 어찌 어리석지 않다 말할수 있 을까.
당대의 천마가 이리도 자신 있게 선대를 욕할 수 있는 이유는 단 하나.
아무런 방비도 하지 않고 덧없이 죽어간그들과는 달리, 천마는 찾았기 때 문이다.
자신을 죽음으로 몰고 갈 영웅을, 그것도 한창 성장 중일 무렵에 말이다.
“백우진….”
최근 무림을 떠들썩하게 만드는 그 이름.
그래, 바로 그다.
그자가 자신을 죽일 영웅임을 천마는 확신했다.
후기 지수들 중 가장 명성 이 드높은 독고천 이 라던 가, 그와 견줄 만한 흑산 도가의 여식이라던가.
그 외 그들보다 앞서 무림에서 활약하고 있는 젊은 고수들까지.
후보군은 많았다.
그럼에도 천마는 그들 모두를 제치고 백우진을 꼽았다.
이유는단 하나.
그가 가장 이 질적 이 기 때문이 다.
다른 이들은 어릴 때부터 차곡차곡 그 기대를 드높여 비로소 그 명성을 터 뜨렸다면, 그는 말 그대로 난데 없이 나타났다.
심지어 불과 2,3년 전만해도 학관 생도들에게 멸시받는 인물이었다.
그랬던 그가 죽을 뻔한 위 기를 겪고 난 이후 달라졌다고 한다.
마치 다른 사람이 된 것처럼 말이다.
“참으로공교롭지 않은가.”
죽을 뻔한곳에 기연이 있었고, 이를 얻어 몰라보게 강해진다?
무림을 동경하는 이들에 의해 꾸며진 소설과도 같은 이야기 같지 않은가.
그렇기에 천마는 그를 자신을 죽일 영웅 후보 일 순위에 올려두었다.
그러 나 아직 이를 확정 지은 것은 아니 다.
언제나 변수는 존재하고, 이는 언제나 커다란 차이를 만들기에.
그래서였다.
제 부하들에 게 그를 죽이지 말고, 제 앞으로 데 려오라 한 것은.
소문이나 정보가 아닌, 직접 마주한 백우진이란 인간이 어떤 인물인지 알 아보기 위해.
그런데.
“…제법 늦는군.”
백우진이 하무르 칸의 부족에까지 당도했을 때, 천마는 직접 그를 찾아가 려 했으나 부하들이 이를 막아섰다.
그중 가장 격렬하게 반대하고 나선 것이 진미연, 그녀였다.
죽었다고 보고 받았는데 뜬금없이 반쯤 마인이 되 어 나타난 그녀는 말했 다.
신의 귀한 발걸음이 그런 곳에 허비되 어선 안 된다며.
그러고선 자기가 직접 그를 데려오겠다고 보내달라 간청하기에 그리하라 일렀더니, 여태 돌아오지 않고 있다.
“무슨일이 생긴 것이겠지.”
천마는 단언했다.
그렇지 않고서 야 충성심 하나만큼은 누구와 견주어도 밀리지 않는 그녀 가이토록돌아오지 않을 리가없을 테니.
천마는 곧장 기감을 넓혔다.
끝을 모르고 광범위하게 뻗 어나간 기운이 그곳의 상황을 눈으로 지켜보 고 있는 것처럼 생생하게 전해주었다.
그중 한개의 기운이 천마의 호기심을 자극했다.
“호오.”
당장은 기력이 쇠한 듯하나, 체내에 잠들어 있는 경지가 심상치 않다.
“멀찍이서 보았던 삼존이라는 것들도 저리 강하지 않았거늘.”
충격적인 발언이 었다.
삼존이 어떤 이들인가.
현 무림 최고를 일컬을 때 일마, 일황과 더불어 거론되는 고수 중의 고수이 자 정파를 지탱하는 세 개의 기둥이 아닌가.
“재미있겠어.”
호기심이 동했다.
그것이면 충분했다.
하루하루 무료함에 시 달리는 천마를 움직 이는 데 에는.
‘누,누이라니…!’
난생 처음 들어보는 단어에 그녀는 얼굴을 붉히며 어쩔 줄 몰라 했다.
모르겠다.
그저 어린 녀석이 자신을누이라불렀을 뿐인데 왜 이리도속절없이 기분 이 좋은지.
그러 나 그것도 잠시 .
한껏 떠올랐던 그녀의 감정은 그 어느 때보다 싸늘하게 가라앉았다.
불안해하고 있다.
독안개와 수십 명의 복면인에게 포위당했을 때도 겉으로는 무덤덤한 표정을 짓고 있던 녀석이, 처음으로 제 속의 불안을 여과 없이 드러내고 있단 말이다.
‘최악이다.’
그녀의 말대로였다.
백우진은 지금 더없이 불안하고, 께름칙한 기분에 사로잡혀 있었다.
머리가 아닌 온몸이 경고하고 있다.
빨리 그 자리에서 벗어나라고.
‘그때와 비슷해.’
예전에도 한 번 있었다.
육감이 불안에 사로잡혀 미쳐 날뛰었던 때가.
그때 수없이 많은 사람이 죽었고, 그중에는 동료들도 다수 포함되어 있었 다.
대다수 무리해서 그의 대업에 한손 거들기를 자처한 이들이었다.
잊고 싶지만, 잊어서는 안될, 잊을 수도 없는 기억.
만약그때의 상황이 한번 더 되풀이된다면.
‘내가미치지 않을수 있을까.’
장담할수 없기에, 피하고 싶다.
“무엇이 너를 그리도 불안하게 만드는 게냐.”
그녀 가 낮은 소리 로 물었다.
백우진은 처량하게 웃으며 그녀를 가리켰다.
그러자 혈수마녀는 크게 당황했는지, 어색한 말투로 되물었다.
“보, 본녀가 너를 불안하게 만들었다는 게냐? 어째서?”
“지난번에도 그렇고, 지금도, 저 때문에 더없이 무리하고 계시잖습니까.” 묘하게 타박하는 말투에 그녀는 울컥했다.
“그, 그건 다 네놈을 구하기 위해서 …!”
“그러니까요.”
울분에 찬 그녀의 말을, 백우진이 잘라냈다.
그리고 한껏 어색한 미소를 피워올리며 말을 이 었다.
“웬만해선 그러지 마십쇼. 누이의 희생으로 내가 살아남는다고 한들, 아 무런 의미가 없어요.”
그는 자신이 없다.
동료들의 죽음을 딛고 설 힘 따위, 이제는 남아 있지 않았다.
“무리하지 않는 선에서만노력하시다가, 안되겠으면 그냥포기하시라, 이 겁니다.”
그랬으면 좋겠다.
자신이 위험에 빠졌을때, 동료들이 적당히 노력하다가 안되겠다싶으면 포기했으면 싶다.
혈수마녀 가 음울한 눈으로 그를 쳐 다보며 애 처로운 목소리 로 물었다.
“네놈은…, 그게 가능할성싶으냐.”
백 우진은 작게 한숨을 쉬 며 등을 돌렸다.
“안 되는 거 아는데, 그랬으면 좋겠다고 생 각은 합니 다.”
바라고 있지만, 바라지 않는 일이기도 했다.
그것이 가능하려면 대체 몇이나 되는 동료를 잃어야 할지, 여전히 감도 잡 히지 않기에.
혈수마녀는 그의 뒷모습을 보며 측은함을 느꼈다.
유독 그의 어깨가 무거워 보였다.
대체 등에 무엇을 짊어지고 있기에 젊은 놈의 어깨가 저리도 축 처져 있는 지.
또 아스라이 멀어져가는 저 한숨에는 뭐가 그리도 많은 것들이 담겨 있는 건지.
“아무튼, 일단 여기부터 벗어나죠.느낌이 너무 안좋아요.”
“•••그래.”
두 사람은 이야기를 일단락 지었다.
지금까지 봐온 백우진은 사소한 일에 이리도 호들갑을 떨 인물이 아니었 기에, 그가 저러는 데에는 필시 이유가 있을 거라고, 그녀는 생각했다.
혈수마녀의 압도적인 기세에 얼어붙어 있는 진미연의 뺨을 두드려 깨운 뒤, 부족을 나서려 할때였다.
“가긴 어딜 간단 말이냐』
이들을 물끄러미 지켜보고 있던 하무르 칸이 앞으로 나섰다.
그는 망설이고 있었다.
제 부하들을 절반이 나 죽고 다치 게 만든 천재 지변 같은 년을 이대로 붙잡 아야 할지, 보내줘야 할지.
그들이 떠나기 직전이 되어서야 그는 결심을 내렸다.
“네놈들은 살아서 이곳을 나갈수 없다.”
이곳은 강자만이 지배의 자격을 갖추는 초원.
그리고 자신은 이 초원의 지배자가 될 칸, 하무르다.
난데 없이 쳐들어와 제 부하들을 무참히 찢어발긴 원수를 그대로 보내준 다는건고민조차해선 안될 일이었음을,뒤늦게 깨달았다.
혈수마녀는 결의를 다진 하무르 칸을 보며 눈살을 찌푸렸다.
“정녕 더 많은 피를쏟아야 정신을 차릴 테냐.”
그녀가 경고하자, 하무르 칸은 아무렇지 않다는 듯 되 받아쳤다.
.
!....
!..
.
“걱정 마라. 이제부터 보게 될 피는 너희 두 년놈들의 것일 테니.”
그가 이죽거리며 도끼를 들어 올리자, 전사들 또한 기다렸다는 듯 기세를 끌어 올렸다.
백우진은 작게 한숨을 내쉬며 백무혁을 바닥에 조심스럽게 내려놓았다.
머리가 지끈거린다.
당장이라도 이곳을 벗어나고 싶은데 저들의 기세를 보아하니 그건 글러 먹은듯했다.
검을 뽑으며 앞으로 나선 백우진이 혈수마녀를 향해 말했다.
“최 대 한 무리 하지 말고 공격 만 흘려 내 요.”
딴에는 걱 정 이 되 어 한 말이 었으나, 혈수마녀는 콧방귀 를 뀌 며 고개를 돌 렸다.
“흥, 본녀를뒷방늙은이 취급할셈이라면 아직 멀었느니라.”
긴장감이 고조되기 시작했다.
조금이 라도 움직 이면 그것이 기폭제 가 될 것처럼 모두가 바짝 날이 서 있 을때.
별안간세 상천지가 요동쳤다.
“멈추어라.”
목소리의 근원지는 하늘이었다.
그러나 누구 하나 위 를 올려 다볼 생 각조차 하지 못했다.
모든 것이 얼어붙었다.
그들의 움직 임은 물론이요, 끊임없이 고조되 던 긴장감도, 가슴에서 치솟 던 감정들까지도 전부.
애초부터 없었던 것처럼 사라지고, 새로운 감정이 들어차기 시작했다.
공포.
그것은 형언할 수 없는 압도적 인 공포였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