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95 화〉천마
모든 것이 공포에 짓눌렸다.
그 흔한풀벌레 소리마저 지워진 적막 속에서.
털썩 ! 털썩 !
사람들이 하나둘씩 쓰러지기 시작했다.
무공을 익히지 못한 사람들부터 경지가 낮은 무인들까지.
하늘에 떠 있는 이는 무엇도하지 않았는데도, 단순히 존재감을 버티지 못 하고 정신을놔버린 것이다.
불합리하고, 불가해한 상황.
“후우….
정신을 잃지 않고 겨우 버텨낸 이들 중 가장 먼저 제 몸을 움직일 수 있게 된 이는 혈수마녀였다.
뻣뻣하게 굳어 있던 몸이 제 의지대로 서서히 움직이기 시작한그녀는조 금 전 하무르 칸이 자신에게 했던 말을 떠올렸다.
‘천재지변 같은 년이라고했던가.’
그녀는 쓰게 웃으며 고개를 들어 올렸다.
까만밤하늘위에 별처럼 고고하게 떠 있는눈부신 여인.
자연은 두 가지 얼굴을 지니고 있다.
평소엔 경외를 품을 만큼 아름다우면서도, 때때로 돌변해 닿는 모든 것들 을 소멸시키는재앙이 된다.
눈앞에 떠 있는 여인이 그러했다.
고혹적 인 외모 뒤 에 숨죽이 고 있는 파멸.
입가에 띤 호인의 미소와 인자한 눈빛을 한 이를 보며, 혈수마녀는 저도 모 르게 읊조렸다.
“저것이야말로천재지변이 아니더냐.”
어쩌면 저것이 현경 너머에 존재하는, 이름조차 제대로 붙여지지 않아 생 사경 이 니 , 자연경 이 니 제 멋대로들 부르고 있는 경지 가 아닐까.
만약눈앞의 여인이 진정 현경을 넘어 다른 세상에 발을 들인 상태라면, 그 녀는 능히 그것을 자연경 이 라 부르리 라 생 각했다.
그만큼 그녀는 자연에 가까웠고, 버금갔다.
“처음보는 얼굴인 듯한데, 그대는 누구인가?”
하늘에 떠 있는 여인, 천마가그녀에게 물었다.
고작 말 한마디에 내부가 진탕되는 느낌.
그녀의 말투에 내기가실려서? 아니다.
경외감을 느낀 탓이다.
고작 목소리에 끝없이 펼쳐진 바다나 붉게 타오르며 떠오르는 태 양을 정 면으로 바라볼 때 느꼈던 경외감을 느끼며 제 몸이 스스로굴복하려 했기에.
“크으….”
혈수마녀는 온통 그녀의 존재감에 짓눌려 있는 주변에 제 기세를 억지로 퍼뜨렸다.
겨우 숨 쉴 만한 자리를 마련한 뒤, 언제나 그렇듯 날카로운 말투로 쏘아 붙였다.
“너는본녀의 이름을 알자격이 없다.”
천마의 입가에 그려진 미소가조금 더 짙어졌다.
속이 뒤틀리는 와중에도 스스로를 관철해낸 그녀를 대견하게 느낀 까닭 이었다.
“호오…, 그대의 이름을 알 자격이 적어도 힘으로 쟁취하는 것은 아닌가 보군.”
은연중에 자신을 깔보는 듯한 말투에 혈수마녀는 이를 악물었다.
난생처음 겪는 굴욕이 었다.
천마의 말투 때문이 아니다.
그 말에도 아무런 반박조차 할 수 없는 스스로가 굴욕을 느낄 뿐.
“그래, 알려주기 싫다면 구태여 강요할순 없겠지.”
천마는 예상외로 제힘을 앞세우지 않고, 오히려 순순히 받아들였다.
그녀는 제 입가에 싱그러운 미소를 피워내며 물었다.
“혹본좌가 누구인진 아는가?”
그녀의 물음에 혈수마녀는 감은 눈을 파르르 떨다가 이내 눈꺼풀을 들어 올리며 고개를 주억거 렸다.
이 미 한 차례 이 러한 존재 감을 겪은 바 있었기 에.
혈교와의 전쟁 이후, 쇠약해진 중원 무림을 노리고 침략해온 천마.
그가 승리를 자신하며 하늘에서 광소를 터뜨렸을 때.
그때 느낀 압박감과 지금 느낀 압박감이 매우 흡사했다.
말인즉, 눈앞의 여인이 그와 같은 존재라는 뜻.
“천마가 아니냐.”
| |....
!...
“후후….
흡족한 표정으로 내려다보고 있던 천마가 입을 열었다.
“그래, 맞다. 본좌가 바로 천마니 라.”
새삼 이름이 가지는무게가 그녀의 가슴을 짓누른다.
이미 예상하고 있었음에도, 그 이름을 직접 들으니 더없이 마음이 무거워 졌다.
혈수마녀는 그러한 마음을 애써 숨긴 채 무심한 말투로 천마에게 물었다.
“십만대산에 처박혀 있어야할괴물이 왜 예까지 와서 난리를피우는게냐 ” •
당당한 태도와는 달리, 그녀의 속은 안절부절못한 채 떨고 있었다.
그녀는 처음으로 신께 빌었다.
제발 천마의 목적이 자신이 생각하는 최악과는 거리가 멀기를, 간절히 기 도했다.
그녀는 알까.
이 세상의 신이란 것이 얼마나 부질없고, 철없는 존재 인지를.
아무리 간절하게 빌고 또 빌어도 절대로 닿지 않을 것임을.
속절없이 타들어 가는 속을 아는 듯, 천마는 웃었다.
아주 진하고, 음흉한 속내를 가감 없이 드러내며.
“본좌가 이곳에 온이유라….”
알고 있는 게 분명했다.
그렇기에 천마는 더욱 제 입을 느릿하게 놀렸다.
혈수마녀가 애써 쌓은 무덤덤한 표정이 시시각각 깨져가는 모습을 보며 즐기기 위해.
그러나 그녀의 즐거움은그리 오래가지 않았다.
“날 보러 온 거잖아.”
그녀를대신해 다른이가올바른 답을 입에 담았기에.
…
말도 안 되는 존재 감이 하늘에 서 내리쬐 어 사지 가 뻣뻣하게 굳어 가고 있 던 순간, 백우진은 직감했다.
‘올 것이 왔구나.’
제 육감이 그토록 경 계하고, 마주쳐선 안 된 다고 울부짖 었던 존재 가 도착 했음을.
사지가 딱딱하게 굳고, 머릿속에 벌이라도 쏘다니는 듯 웽웽거리고 있긴 하지만.
이 상하게도 마음은 더 없이 편 안해졌다.
무엇이 닥쳐올지 모르기에 더욱 불안했던 미지(未知)가, 구체화하여 나타 났기에.
형체가 없는 것은 불안을 먹이 삼아 끝없이 부풀어 오르지만, 구체화한 공 포는 실체 이상으로 커질 수 없잖은가.
때마침 두 여인의 대화가시작됐다.
불안을 애써 억누르며 대담한 척하는 혈수마녀와 평온하기 짝이 없는 여 인.
귀 가 사르르 녹아내릴 것만 같은 음성으로 천마라는 이름을 입에 담는 순 간, 백우진의 눈이 번쩍 뜨였다.
‘천마!’
짐작하고 있음에도 직접 들으니 눈이 번쩍 뜨인다.
긴장이 풀리니 재보다잿밥에 관심이 많아졌다.
천마가 얼마나 강한가에 대해서는 안중에 없어지고, 어떻게 생겼을까에 대한 의문만이 남아그의 머릿속을 가득 메웠다.
‘일단여자야.’
죽어가던 태백호가 말했던 것처럼, 일단 천마는 틀림없이 여자다.
아니, 여자여야만한다.
저 목소리로 남자면 이 세 상은 존속할 가치 가 없어질 테니.
‘그땐 내가직접 부숴버린다.’
흉흉한 생 각도 잠시 .
귀를 간질이는 천마의 음성에 다시 귀 가 쫑긋거린다.
과연 어떤 모습을 하고 있을까.
이 위급한 상황에서도 백우진은 그것이 궁금하여 참을 수가 없었다.
이게 다웹소설의 폐해다.
과거 대여점 종이책 시절에만 해도 언제나 위 엄 있고, 강인한 남성 그 자체 였던 천마를 매력적인 여자로 그려낸 이들이 누구인가?
바로 웹소설 작가들이다!
‘그러니 난잘못 없어, 음음.’
이 급박한상황에서 천마의 얼굴이 궁금한 건 현대인으로서 상식이니까.
의 지 가 발하면 기 가 발한다고 했다.
천마의 압박에 꽁꽁 묶여 있던 기운들이 엉킨 실타래 풀리듯 조금씩 흘 러나오기 시작했다.
그녀의 존재감은 남궁세가의 제왕검형이나 자신이 사용하는 공간검과 비 슷하다.
다른 점이 있다면 그저 무의식 적으로, 내공이 아닌 존재 감만으로 발휘되 고 있다는 것 정도.
풀려라, 풀려!’
백우진은 서서히 움직이기 시작한 내기를 몸에 둘렀다.
아주 얇게 뿜어내어 공간을 가득메운 그녀의 존재감을 일부 덜어낸다.
아예 없앨 필요는 없다.
어차피 지금 상황에서 그녀가 자신을 죽이고자 한다면 꼼짝없이 죽은 상 황이니 , 거북하게 나마 움직일 수 있을 정도면 충분했다.
‘됐다!’
무거운 돌덩이처럼 내려앉은 압박감이 서서히 풀리기 시작했다.
그 증거로 손가락 끝을 움직일 수 있게 되 었다.
세상 모든 일은 처음이 어려운 법.
한 번 감을 잡기 시작한 백우진은 맹렬한 속도로 제 몸에 걸린 부하를 풀 어냈다.
“십만대산에 처박혀 있어야할괴물이 왜 예까지 와서 난리를피우는게냐 ” •
혈수마녀가 그리 묻고.
“본좌가 이곳에 온이유라….”
천마가 그리 대답하고 있을 때.
마침내 그는 몸 전체를 느리게 나마 움직 일 수 있게 되 었다.
옆에 있는 혈수마녀의 속이 타들어가는 것이 뻔히 보였기에, 백우진은 천 마의 대답을 가로챘다.
“날 보러 온 거잖아.”
엉거주춤하게 굽어 있던 허리를 펴고, 옆에 있던 혈수마녀를 향해 고개를 돌렸다.
놀란 듯, 동그랗게 뜨인 그녀의 눈이 보였다.
“우,움직일수 있는게냐?”
그녀의 물음에 백우진은 힘겹게 고개를 끄덕였다.
“조금은요.
“•••네놈은 참 알다가도 모르겠구나.”
혈수마녀는 혀를 내둘렀다.
화경에도 채 오르지 못한 것이 천마의 존재감으로부터 해방될 수 있다는 게 그저 놀라울 따름이었다.
“헌데…, 널 보러 온 거라니, 그게 무슨 말이냐. 천마가 예까지 온 이유가 너 를보기 위해서란 것이냐?”
“애석하게도, 예.”
이 는 진 미 연에 게 직 접 들은 사실 이 었다.
그녀에게 자신을 직접 데리러 오라고 명했다고했는데 오질 않으니 직접 행차한 것일 테지.
왜 자신을 보자고 했을까.
그에 대한물음은 이제 직접 들으면 되겠지.
“후우….”
더없이 긴장된다.
과연 이 세상 천마는 어떤 얼굴을 하고 있을 것인가.
‘사실 예쁘기만 하면 얼굴이야 어떻든 상관없지.’
그래, 예쁘기만하면 얼굴쪽에 더 이상 무언가를 바라지 않는다.
다만한 가지.
‘핑챙이기만하면 돼.’
머 리 가 분홍색 이 기 만 하면 된 다.
어여쁜 벚꽃을 닮은 아름다운 분홍색을 가지고만 있으면.
가슴 깊은 곳에서 진한 감동이 밀려오게 만드는 그 단어.
핑챙 천마를눈으로볼수 있게 된다!
‘가즈아아아아!’
한껏 기대를 품으며 그는 고개를들어 올렸다.
뚝뚝 끊기며 무겁게 올라간 시야가 비로소 하늘에 떠 있는 천마를 눈에 담 은순간.
백우진은 그대로 눈이 멀어버릴 것만 같아 저도 모르게 눈꺼풀을 닫았다.
‘미쳤다….’
그는 잠시 생각했다.
‘아름답다는 말보다 더 아름답고 고귀 한 단어 가 뭐 였더 라.’
그런 게 있기는 했던가.
더 없이 뛰 는 심 장을 애 써 진정시 키 며 그는 다시 눈꺼 풀을 들어 그녀를 바 라보았다.
“와….”
눈, 코, 입이 전부 들어가는 게 신기할 정도로 조막만 한 얼굴.
여유로운분위기 속단호함이 느껴지는 길게 찢어진 타원형 눈매.
세상 모든 것을 빨아들일 것만 같은 검은 눈동자.
날카로운 턱선과 부드럽게 굴곡져 내려가는 목덜미와 쇄골 아래 자리한 두 개의 커다란 봉우리까지.
넋을 놓고 바라보는 백우진의 시선을 느낀 것일까.
천마가 가볍게 웃는 얼굴로 고개를 흔들자, 그 움직임을 따라 머리카락도 찰랑거렸다.
검푸른 밤하늘보다 더 까만….
“어,검은머리…?”
자신이 잘못 봤나 싶어 양손으로 눈을 비비고 다시 보았지만.
“검 •••은, 머리….”
여전히 검은 머리다.
급격하게 생기를 잃어가는그의 두눈.
“핑챙 천마가…, 아니야…?”
이를 본 천마와 혈수마녀의 얼굴이 동시에 당황으로 물들어가고 있을 때.
비인간적인 신의 농간에 백우진은 두 손으로 제 볼을 감싸 쥐며 소리를 내 질렀다.
“끼야아아악!”
신은 죽었다.
아니, 곧 죽여버릴 예정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