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202화 蓬 미■경
스물과 하나.
그들 사이의 널따란 공간이 긴장으로 채워 지고 있던 찰나.
“가게 두어라.”
난데없이 하늘에서 들려온 목소리 하나에 모든 것이 사그라들었다.
백우진이 하늘을 올려다볼 때, 그를 둘러싸고 있던 무사들은 일제히 무릎 을 꿇었다.
“교주님을 뵙습니다!”
천마였다.
십만대산 내에 그녀의 감각이 닿지 않는곳은 없었다.
조금 더 자세히 말하면 그녀는 천마신교 안을 들쑤시고 다니는 백우진의 일거수일투족을 계속해서 보고 있었다.
그녀의 무덤덤한 시선이 백우진에게로 향했다.
“마경으로 가려는 것이냐.”
말투 또한 조금 더 위 엄있게 변했다.
주변의 인물들을 신경 쓰는 모양.
그들의 시선을 어느 정도 신경 쓴다는 것은 쓰임새를 생각해두고 있다는 것일텐데.
‘년 대체 뭘 꾸미는 거냐.’
그녀는 이들로 대체 무엇을 하려는 걸까.
백 우진은 궁금한 속내를 감추며 웃는 얼굴로 고개를 주억 거렸다.
“잠깐볼일이 좀 있어서.”
“죽은 땅에 볼일이 있다라….”
“당장도망칠 생각은 없으니 좀 내보내줘.”
백 우진이 당당하게 요청하자, 천마는 미소 지 었다.
“최소 사흘에 한 번은 돌아와야 할 것이 다.”
그녀가 그리 말하자, 백우진도 따라 웃었다.
“그래.”
천마의 시선이 무릎을 꿇은 채 고개를 숙이고 있는 무사들에게로 향했다.
“철혈보위대는 듣거라.”
철혈보위대.
그들이 속한 무력 단체의 이름이 었다.
총 천 명으로 이루어진 천마신교 내의 수호를 담당하는 무력 단체.
남문 수호를 담당하는 스무 명은 그중에 서도 고수로 평 가받는 이 들이 었 다.
“이자에게 남문출입의 권한을 내릴 터이니, 그의 출입을 허하도록하라.”
“명을 받듭니다!”
그들은 어떤 의문도 품지 않은 채 그저 고개를 조아리며 외쳤다.
백우진이 보기에 비정상적인 행동이지만, 그들의 관점에서는 어찌보면 당 연한일이었다.
그녀는 그들에게 있어서 신이나 다름없는 존재.
어느 날 자기가 믿는 신이 찾아와 지시를 내리는데 이를 어찌 거절할 수 있 을까.
그들간의 불화를 말 한마디로 불식시킨 천마의 시선이 재차 백우진에 게 로 향했다.
“무엇 때문인지는 모르겠으나, 어디 한번 마음대로 해보거라.”
백우진은 희 게 웃으며 대답했다.
“안그래도 그러려고.”
잠시 지 만 오로지 두 사람만이 가능한, 남들은 조금도 알 수 없는 감정의 교류가 이루어졌다.
…
애증(愛뮿).
사랑과 증오를 아울러 이르는 말.
어린 시절의 그녀는 이 단어만큼 불가해한 단어는 또 없다고 생각했다.
사랑은 말 그대로 모든 걸 내어주고 싶을 만큼 좋아한다는 것이고, 증오는 상대방이 미워 무엇도 함께하고 싶지 않은 사람 아닌가.
사랑하는 거면 사랑하는 거고, 미워하면 미워하는 거지.
어떻게 한사람에게 극과극의 감정을 동시에 느낄수 있단말인가.
강인한 여기사를 꿈꾸며 하루의 대부분을 검과 함께 보내는 탓에 인간관 계에 서투른 그녀는 도저히 이해할 수 없었다.
그리고 영원히 이해할수 없으리라 생각했다.
그 일이 벌어지기 전까지는.
“어째서….”
이안 발데스.
그녀가 가장 사랑하는 사람의 이름.
빛을 받으면 푸른빛이 감도는 흑청색의 머리카락, 온기를 머금은 다정한 눈빛.
자신이 좋아해 마지않던 그의 속에 다른 사람이 들어있음을 알게 되었을 때.
그녀는 깨달았다.
애 증은 고작 시 작에 불과하다는 것을.
한 사람에게서 헤아릴 수 없을 만큼 많은 감정을 동시에 느낄 수 있다는 것을.
“내가좋아하는건….”
그런 생각이 들었다.
서로의 마음을 확인했던 그때.
그가 만약 자신이 이안 발데스가 아님을 털어놓았더라면, 어떻게 되었을 까.
그 답을 찾는 데에는그리 오랜 시간이 걸리지 않았다.
그것을 알았더 라면 아마 그 순간 그와 맺 어 지 지 는 못했을 것이 다.
자신이 털어놓은 마음은 그가 아닌, 자신의 추억 속 이안 발데스에 게 향한 것이었으니.
“하지만….”
결과적으론 그와 맺 어졌으리 라 확신했다.
그만큼 그는 좋은 사람이 었기 에 .
그래서 그가 찾아오기를 기 다렸다.
만약 그가 자신을 믿지 못한 데 에 대한 용서를 구하고, 다시 고백 한다면 그와 평생을 함께하리 라.
그러나그는 오지 않았다.
아니, 영영 볼 수 없는 곳으로 떠 나갔다.
실의에 빠졌다.
| |..
!.
......
고작 그것밖에 안되는 사랑이었던가.
아팠다.
옆구리를 크게 베여 내장이 쏟아졌던, 제 인생 최악의 고통을 겪었던 그때 보다도 훨씬.
그녀의 인생은 망가졌다.
문고리를 잡고 돌려 밖으로 나가기만 하면 온갖 영예와 영광을 누릴 수 있 음에도, 그녀는 제 방에서 한 발짝도 떼지 못하고 더욱 깊은 어둠으로 스며 들었다.
바로 그때.
누군가가 그녀를 찾아왔다.
남자인지, 여자인지.
노인인지, 어린아이인지.
그보다 사람인지, 아닌지조차 기억나지 않는 존재.
단하나, 만변하는 얼굴속에서 유일하게 불변했던 조소만이 기억에 남았 다.
아무것도 없는 허공에서 난데없이 나타난 그는 그녀가 무어라 말하기도 전에 제멋대로 제안을 건넸다.
이곳이 아닌 다른 세상에 서 자신이 원하는 대로 움직 여주면 그 또한 원하 는 것이 무엇이든 들어주겠다고.
처음엔 거절하려 했다.
그런데 뒤이어 내뱉어진 말이 그녀의 마음을 변하게 만들었다.
그곳에, 그가 있다는 말.
그녀는 궁금했다.
어째서 자신을 찾아오지 않았는지, 정녕 그 정도밖에 안되는 얕은 사랑이 었는지.
자신을 구하기 위 해 몇 번 이고 죽을 고비 를 대 신 겪 어온 그였다.
그런 그가 자신을 고작 그 정도밖에 사랑하지 않았다는 게 믿기지 않았기 에.
직접 물어보고 싶었다.
그렇게 제가살던 세상에서 벗어나, 이곳에 왔다.
천마(天魔).
그야말로 자신이 살던 세상에서의 마왕이나 다름없는 이가 되었다.
이 몸으로 그녀 가 해 야 할 일은 그녀 가 평 생토록 갈고 닦은 가치 관과는 정 반대되는 일.
그러나.
“•••상관없다.”
그러한 것들은 금세 빛이 바랬다.
그와 헤어진 이후, 죽지 못해 살아가고 있던 자신이 아니던가.
그녀는 때가 되면 아무 거리낌 없이 일을 행하리라 결심하며, 천마로서의 삶을 받아들였다.
“슬슬 다가오고 있구나.”
그리고 마침내.
그때가 다가오고 있다.
천마는 제 감각 속에서 노니는 그의 기운을 느꼈다.
그는 십만대산 곳곳에 숨어 있는 연구실을 전부 부수고 있었다.
“진미연이었나….”
충성심이 하도 깊어 기억하고 있는 이름.
그러나 천마는 그녀를 썩 좋아하지는 않았다.
마인인지, 뭔지.
인간을 그 이하의 존재로 영락시키고, 그것을 또 개량하겠다고 연구하고 있는꼴이 역겹다.
어 찌 나 많은 사람을 죽였는지 몸에 서 썩 은 내 가 났다.
마음 같아선 베어버리고 싶지만, 그녀의 밑에서 천마신교를 실질적으로 움직이는 장로 및 호법들이 그녀를 총애하기에.
연구소란 연구소는 죄 다 부순 그가 향한 곳은 마경으로 향하는 남문이 있 는 곳이었다.
“흐음…?
실랑이 가 벌어졌다.
남문을 수호하는 이들과 이를 지나가려는 백우진 간의.
평소 같았으면 그가 무슨 일을 하든 그냥 두었을 테 지 만, 이 번만큼은 궁금 함을 참을 수가 없었다.
마기와 이에 잠식당한 마인이 전부인 땅에 그가 가고자하는 이유가무엇 인지.
그래서 곧장 날아가 그들을 중재했다.
그리고 짧은 문답 속에서 그녀는 그의 목적이 무엇인이 어렴풋이 알게 되었다.
“너도느꼈나.”
그는 모른다.
자신이 무엇을 이루고자 하는지.
그러나그의 본성은 어렴풋이 깨달은 것 같다.
누구 하나 마음을 꺾지 않는다면 언제고 서로를 향해 칼을 겨누게 될 것임 을.
“발버둥이라도쳐볼 셈인가?”
그가 이안 발데스였던 시절을 떠올려보면 마경은 수련을 위해 찾아갔을 확률이 높다.
그는 조급할 때마다 더욱 제 몸을 갉아먹으며 수련에 박차를 가하는 경향 이 있다.
마경 또한 이를위해서일 터.
“으음.
그녀는 눈살을 찌푸렸다.
느껴진다.
마경을 헤매는그의 모습이.
어두운 보랏빛 안개를 헤치고 나아가다가 어느새 기척이 끊겼다.
자신의 권역 밖으로 나가버린 것이다.
기척이 끊기 기 전, 마지막 그를 느낀 천마는 몹시 애 달파졌다.
“아프다….”
대체 무슨 요술을 부리는지 몰라도 그는 강해지고 있었다.
그리고 그만큼 빠른 속도로 제 몸을 갉아먹 었다.
마기에 짙게 물들어버린 그의 기운은과거 사경을 헤매던 그를 연상케 했 다.
당장에라도그를데리러 가고 싶었으나, 참아야했다.
이 곳에 서 그와 자신은 어 디 까지 나 적 이 기 에 .
그리고 자신이 진정 원하는 바를 이루기 위해선 제 손으로 직접 그를 베어 야만 하기에.
“익숙해져야겠지….”
할수있느냐, 없느냐.
그런 단계는 이미 지나갔다.
그녀의 눈빛에 독기가서렸다.
“해야만한다.”
이는 반드시 해야만 하는 일이 기 에.
그녀는 조용히 제 가슴에 품은 칼을 갈고 닦았다.
그가 무사히 돌아오기를 기원하며.
…
마경 으로부터 넘 어오는 마기를 막아내 기 위 해 온갖 진법으로 무장한 남 문을 넘어서는 순간.
백우진은 숨이 턱턱 막히는 듯한 느낌을 받았다.
“이건진짜최악인데….”
쓴웃음이 절로 나왔다.
숨을 들이마시고 있는데도 온몸이 산소가 부족하다며 비명을 내지른다.
허공에 흐르는 공기에 짙은 마기가 녹아 있는 탓이 었다.
“후우….”
천천히 숨을 고르며 앞으로 나아갔다.
조금씩 더 깊은 곳으로 파고들수록, 주변에서 수상한 기척이 느껴지기 시 작했다.
크르르르…
맹수와도 같은 소리를 내며 서서히 다가오는 존재들.
온갖 기형적인 형태를 하고 있는 마인, 마물들이 었다.
지금껏 상대해온 그 어떤 마인들과도 비교할 수 없을 만큼 강한 존재감을 드러내는 녀석들을 보며.
백우진은 미소 지 었다.
“찾았다.”
-4- -4- -4- -4- I
으으으으!
절체절명의 상황에도 그는 웃음을 멈추지 않았다.
“이귀여운 녀석들.”
그의 눈에는 그것들이 흉측한 괴물이 아닌, 걸어 다니는 영약으로 비추어 지고 있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