소설리스트

마교전선 비룡십삼대-1화 (1/359)

죽음에서 돌아온 나는 스스로 다시 지옥으로 걸어 들어갔다.

나를 무인으로 만들어줬던 그곳, 대 혈마교 전선으로.

이번 삶에서는 아무것도 잃지 않으리라.

친구도, 가족도, 내 생명도.

그리고 부숴내고 말리라.

내게서 모든 것을 강탈해갔던 혈마교를.

마교전선 비룡십삼대 / 겨울반디

1화 鮮于勢家(선우세가)-1

삼검분광.

슈하악!

점창파 분광십팔검의 절초가 빛을 분할하며 세 명의 목을 떨궈 냈다.

청풍파랑

샤아악!

청성파 청풍검법의 절초에 덮쳐 오던 인영들의 가슴이 촤악 갈라지며 피가 튀었다.

하지만 나를 덮쳐 오던 자들은 몸이 갈라져 죽어 가면서도 전혀 비명을 지르지 않았다.

그들을 그렇게 만든 나 또한 전혀 기뻐하지 않았고 말이다.

오히려 나는 비통한 눈물을 흘리고 있었다.

그들 모두가 적이 아닌 내 식구, 바로 선우세가의 식솔들이기 때문이었다.

내 가족, 내 친구, 내 부하들.

“크하하하! 재밌는 놈이로다! 선우세가의 가주라면서 청성과 점창의 무공만 주야장천 쓰고 있구나! 그 유명한 선우십삼검은 잊어버리기라도 한 것이냐?”

혈마교의 마두, 흑혈환마 두당.

선우세가의 식솔들을 꼭두각시로 만들어 습격하게 만든 장본인인 놈이 나를 놀리고 있었다.

“아하! 생각해 보니 그건 이 녀석까지만 전수됐었지? 잊고 있었구나?”

그의 옆에는 내 바로 이전에 선우세가의 가주였던 동생, 선우기가 멍한 표정으로 뻣뻣하게 서 있었다.

혈마교의 습격으로 행방불명됐었다고 들었는데, 저렇게 두당의 꼭두각시가 되어 있었다니.

그뿐이 아니었다.

“자기 식솔들을 잔혹하게 도살하고 있다니, 거참 독한 놈이로구나. 비룡대 출신이라지? 하여간 비룡대 놈들이란. 쯧쯧.”

혀를 차던 두당은 멍하니 서 있는 내 가족들을 둘러보며 말했다.

“자, 누굴 보내야 차마 죽이지 못하고 항복할까? 옳지, 이 아이로 해야겠구나?”

그의 시선이 바라본 곳에는 바로 그 아이가 있었다.

내가 선우세가의 수치, 무능한 돼지라고 불리던 때에도 끝까지 내 편이 되어 주었던 내 여동생, 연하가.

제발 저 아이만큼은 건드리지 않기를 바랐는데….

내 표정이 많이 일그러졌던 모양인지 두당이 박수를 치며 환하게 웃음을 터트렸다.

“옳지! 내가 잘 고른 모양이구나! 자, 어디 이 아이도 한번 잔인하게 죽여 보아라! 선우세가의 마지막 가주 선우진이여!”

내 동생 연하가 나를 포위하고 있던 혈마교도들을 지나쳐 내게로 천천히 다가오고 있었다.

그 손에는 내가 선물해 줬던 그 아이의 애검 백로를 들고서….

문득 주위를 둘러봤다.

사방의 모든 방향을 혈마교도들이 포위하고 있었고, 그들이 만든 벽 뒤에 선 두강은 꼭두각시로 만든 선우세가의 사람들을 내게 보란 듯이 세워 놓고는 한 명씩 보내면서 박수를 치며 좋아하고 있었다.

이제 아무런 희망도 없었다.

눈을 질끈 감았다.

‘미안합니다, 조장. 나는 결국 당신처럼은 될 수 없었던 모양입니다.’

폐인에 불과했던 나를 한 명의 무인으로 만들어 줬던 은인, 내 영원한 조장인 광풍비룡 설풍의 얼굴이 문득 떠올랐다.

그가 내게 해 줬던 말들도….

그는 내가 좌절해 있을 때마다 늘 웃으며 내게 이렇게 말하곤 했었다.

‘진, 또 그렇게 쭈그러져 있는 건가? 늘 말했지만 넌 이미 네가 할 수 있는 최선을 다했다. 그거면 됐어. 그 결과까지는 너의 책임이 아니다. 그러니 이제 그만 어깨를 펴라.’

다시 번쩍 눈을 떴다.

내 눈에 다시 힘이 깃들어 있었다.

조장은 항상 얘기했었다.

마지막 순간까지 할 수 있는 것을 하라고.

끝까지 포기하지만 않는다면 설사 패배했어도 패배자가 아니라고.

그래, 그 말이 맞았다.

이길 수 없다고 해서 패배자가 될 수는 없었다.

나는 오늘 저들을 이길 수 없을 것이고, 당연히 살아남을 수도 없을 것이다.

하지만 아직은 할 수 있는 일, 해야 할 일이 있었다.

이대로 저들에게 붙잡힌다면 내 가족들이 그렇듯 내 몸도 두당의 꼭두각시가 될 것이었다.

그리고 언젠가 저자는 내게 했던 일을 조장에게도 반복하려 하겠지.

그렇게 둘 순 없었다.

내 존재가 조장, 친구들에게 부담이 된다는 건 끔찍한 일이었으니까.

‘그래, 어차피 죽어야 한다면 내 의지로 깔끔하게 죽을 것이다!’

그렇게 결심했다.

검을 역수로 잡아 가슴 앞으로 들었다.

파사의 기운을 가졌다는 선우세가 가주의 상징 홍연검이 내 심장을 향하고 있었다.

그러자 두당의 얼굴에서 드디어 웃음이 사라졌다.

“네놈, 뭘 하려는 것이냐?!”

아마 이번엔 나 또한 제대로 된 선택을 한 모양이었다. 사납게 웃으며 놈에게 말해 줬다.

“나를 죽일 수는 있어도 내 시체를 이용할 수는 없을 것이다. 그리고, 두당. 절대 네놈을 살려 두지 않겠다. 귀신이 되어서라도 어떻게든 네놈을 죽이고 말겠다!”

말을 마침과 동시에 홍연검의 검 끝이 내 심장을 꿰뚫었다.

푸욱!

가슴을 불로 지지는 듯한 통증이 온몸을 관통했다.

하지만 고통스럽지는 않았다.

오히려 정신이 흐릿해지는 가운데에도 약간의 안심이 됐다.

선우세가의 오랜 역사 속에서 신검이라고 불렸던 홍연검이 심장을 꿰뚫었으니 놈도 내 시체를 사용할 수는 없을 것이라고.

그리고 후회도 됐다.

이럴 줄 알았다면 좀 더 열심히 살아 볼 것을.

형제들과 싸우기 싫다는 핑계로 도망만 다니지는 말았을 것을.

그리고, 좀 더 마음껏 재능을 펼쳐 볼 것을….

***

몽롱한 정신 속, 누군가 지르는 째지는 목소리가 내 귀를 찔렀다.

“꺄아악! 살인이야!”

그래, 살인을 했었지.

많이 죽이기도 했고 자살도 했다.

그러니까 좀 조용히 해 주겠어?

시끄러워서 죽어 있을 수가 없잖아.

“살인이에요! 선우진 공자가 단하상 공자를 죽였어요!”

죽어서 그런지 머리가 엄청 무거운데도 그 목소리를 듣자 인상이 팍 찡그려졌다.

단하상? 대체 언제 적 얘기를 하는 거야?

안 그래도 그 일만 생각하면 아직도 잠이 안 오는구먼.

하지만 주변이 점점 시끄러워지며 사람들이 몰려오는 소리가 들리자, 그제야 내 의식이 뭔가 이상하다는 것을 눈치챌 수 있었다.

슬며시 눈을 떠 봤다.

그러자 놀랍게도 눈이 떠졌다.

“응?!”

당황스러웠다.

나는 분명 죽었는데,

눈이 떠지네?

왜지?

그리고 눈을 뜨자마자 들어온 광경은 엉망으로 널브러져 있는 술병과 음식들, 그리고 맞은편 자리에서 엎어져 있는 한 젊은 남자의 시체였다.

등에 검이 꽂혀 죽어 있는 남자의 시체.

나는 그를 매우 잘 알고 있었다.

그의 이름은 단하상.

내 여동생인 연하의 남편이 되어 주기로 약속했다가, 십여 년 전 내가 스물한 살이 되던 해에 죽었던 남자였다.

그런데 그가 지금 내 눈앞에 죽어 있는 것이 아닌가.

“이게, 대체 무슨…?”

멍한 눈으로 그를 바라봤다.

도무지 이게 무슨 일인지 파악이 되지 않았다.

머리가 멍한 이유가 술기운 때문인지, 아니면 도무지 이해할 수 없는 이 사태 때문인지도 구분도 되지 않았다.

문득 내 손을 바라봤다.

포동포동하게 살찐 곰 발바닥 같은 손이었다.

“이건… 내 손이 아니잖아?”

눈이 저절로 찌푸려졌다.

이 포동포동한 손은 적어도 지금의 내 손은 아니었다.

스물두 살 때 살을 뺀 이후로 영영 헤어진 줄 알았던 손이었는데….

“이건 꿈인가? 대체 뭐가? 어디까지가?”

멍하니 중얼거릴 때 사람들이 우르르 방 안으로 몰려들었다.

그들이 시체를 보고 깜짝 놀라더니만 내게 소리쳤다.

“선우 공자! 대체 왜 단 공자를 살해한 겁니까?!”

그 말을 들으며 멍하니 시체의 등에 꽂힌 검으로 시선을 옮겼다.

단하상, 그의 등에 꽂혀 있는 검은 바로 내 검이었던 것이다.

***

붙잡혀 온 나는 꽁꽁 묶인 채 넓은 대전의 중앙에 꿇어앉혀졌다. 그런 나를 선우세가의 장로, 식솔들이 주변에 멀찍이 선 채로 지켜보고 있었다.

뚱뚱한 몸으로 무릎을 꿇고 있으려니 이 와중에도 다리가 무지하게 저려 왔다.

‘아, 이거 설마, 진짜 꿈이 아닌 모양인데?’

너무나도 선명한 현실감에 침을 꿀꺽 삼켰다.

그때 내 앞 대전의 단상 위에 서 있던 중년인이 불을 뿜는 듯한 목소리로 호통을 쳤다.

내 아버지, 귀주 선우세가의 가주인 선우중이었다.

“진이, 이놈! 할 말이라도 있느냐?!”

아니요, 전혀.

할 말이 없었다.

변명할 말이 없어서라기보다는 이 상황이 너무 황당해서 할 말이 없단 얘기였다.

스물한 살 때 마지막으로 뵙고는 영영 뵙지 못했던 아버지가 내게 호통을 치고 계셨던 것이다.

그것도 그때의 기억 그대로의 모습과 내용으로.

“아무 말도 하지 않겠다는 건 네가 단가의 삼공자이자 네 매제가 될 사람을 죽였다는 걸 인정하겠다는 뜻이냐?!”

아니요, 전혀.

그건 절대 인정할 수 없었다.

스물한 살 때는 너무 당황한 데다 취중이라 스스로를 믿을 수 없어 아무 말도 하지 못 했었지만, 그 후로 몇 년간을 잠도 못 자고 생각한 끝에 결론을 냈었다.

‘그는 절대 내가 죽인 것이 아니야.’

그랬다.

나에겐 그를 죽일 이유도 없었고, 능력도 부족했다.

그는 가문의 수치 취급을 받던 나와도 허물없이 어울려 주던 나의 유일한 친구였다.

또한 그 덕분에 여동생인 연하와도 인연이 돼 혼약을 맺을 예정이었다.

그러니 그가 내 매제가 되는 날만을 손꼽아 기다리던 내가 대체 왜 그를 죽인단 말인가?

또한 그는 제법 전도유망한 무가의 자손인 반면, 이때의 나는 그저 돼지에 불과했었다.

아무리 취중이라도 내 능력으로 그를 죽이는 것은 어려운, 아니 불가능한 일이었던 것이다.

그리고….

‘다른 무엇보다도 내가 죽인 게 아니라는 확실한 증거가 하나 있지.’

그날 나는 술자리에 검을 들고 가지 않았었다.

기억력 하나로 어려서 신동이라고 불렸던 나인 만큼 그것만큼은 확실하게 장담할 수 있었다.

결론적으로 단하상의 죽음은 음모가 확실했다.

그를 죽이고 내게 덮어씌우려는 음모.

하지만 이 모든 것에도 불구하고, 내 입에서 나간 말은 방금의 생각들과는 전혀 다른, 스물한 살의 그때와 똑같은 말이었다.

“기억나지… 않습니다.”

당연하게도 그 대답은 아버지 선우중의 분노에 더 기름을 부었을 뿐이었다.

격분하신 아버지께서 소리치셨다.

“이 멍청한 놈! 그걸 말이라고 하느냐?!”

그러자 선우중의 옆에 서 있던 젊은 청년들, 오랜만에 보는 내 형제들이 어이없다는 듯 웃으며 말했다.

“저 바보가 술 취해서 사고 친 게 한두 번은 아니지만 이런 대형 사고를 칠 줄은 정말 꿈에도 몰랐는걸?”

“그래? 난 알고 있었는데. 지난번엔 불을 질렀으니 이번엔 또 어떤 개망나니 짓을 해서 가문에 수치를 줄까 생각해 봤더니, 아무래도 술 취해서 사람 하나 죽이는 것밖엔 없겠더라고. 설마 매제가 될 사람을 죽일 줄은 몰랐지만 말야.”

“그나저나 저는 좀 놀랍군요. 형님의 돼지 같은 손으로 검을 쥘 수 있을 줄은 몰랐거든요. 심지어 사람까지 죽일 수 있을 줄이야.”

그렇게 말하며 킬킬거리는 형제들의 눈에는 숨길 수 없는 경멸의 빛이 담겨 있었다.

내 기억과 아주 똑같은 광경이었다.

나는 냉정한 눈빛으로 그들을 쓱 훑었다.

‘아마 저들 중에 있겠지. 단하상을 죽이고 내게 누명을 씌운 이가.’

지금 말한 걸로만 봤을 땐 이미 알고 있었다고 말한 둘째 형, 선우혁일 가능성이 제일 높아 보였다.

하지만 나는 그보단 다른 사람을 의심하고 있었다.

그때 아버지 선우중이 다시 소리쳤다.

“대체 네놈을 어떻게 벌해야 좋을지 모르겠구나! 어찌해야 단가장에게 속죄할 수 있을까?! 네놈을 죽이고 그 시신을 보내면 되겠느냐?!”

나는 그저 고개만 푹 숙인 채 가만히 있었다.

이게 정말 과거로 돌아간 상황이라면 내가 말을 하건 하지 않건 결과는 정해진 것일 테니까 말이다.

그러자 아니나 다를까 형제들이 비릿한 미소를 지으며 의견을 내기 시작했다.

“죽여서 보내면 그들의 화가 풀리겠습니까? 폐인을 만든 후 살려서 보내시지요. 그들이 직접 분노를 풀 수 있도록 말입니다.”

첫째 형인 선우성의 말.

“굳이 우리가 수고할 필요가 있겠습니까? 그냥 절연하고 내쫓아 버리면 그들이 알아서 할 텐데요.”

둘째 형 선우혁의 말이었다.

하지만 결정적인 말은 역시 내 기억대로 넷째인 선우기로부터 나왔다.

“이렇게 하시는 건 어떻습니까? 셋째 형을 전선으로 보내는 겁니다.”

“응?”

“뭐라고?”

그 의견이 너무나도 의외였기에 다른 형제들은 물론 아버지 선우중도 눈을 크게 뜨고는 선우기를 바라봤다.

그가 계속해서 말을 이었다.

“안 그래도 얼마 전 맹에서 요청이 들어오지 않았습니까? 직계 한 명을 전선으로 보내 달라고. 그러니 셋째 형을 그곳으로 보내는 겁니다.”

그러자 아버지 선우중이 침중한 얼굴로 물었다.

“진이의 무공으로 전선으로 나갔다간 마인들에게 당장 죽고 말 텐데?”

“상관이 있습니까? 어차피 죽을 목숨, 그렇게 죽는다면 명예로운 죽음일 텐데요. 가문의 명예도 높이고, 죗값도 치르고, 일석이조가 아니겠습니까?”

그가 말을 끝내자 나는 그가 말하지 않았던 한 가지 이유를 더 입 속으로 중얼거렸다.

‘그리고 너희 중 한 명이 전선으로 나가지 않아도 될 테고 말이지?’

전선이란 운남성을 차지한 혈마교와 대치 중인 경계선을 뜻했다.

지금으로부터 십여 년 전, 혈마교가 구대문파인 운남성의 점창파를 무너뜨리고 중원으로 진출하려고 한 적이 있었다.

그때 무림맹은 토벌대를 조직해 그들과 정면으로 충돌했었으니, 그것이 바로 정혈대전이었다.

그때 무림맹은 당시의 맹주가 사망하는 악전고투 끝에 혈교의 중원 진출만큼은 간신히 막아 낼 수 있었다.

하지만 이미 그들이 차지한 운남성까지는 어쩔 수가 없었다. 점창파의 영역이었던 운남성은 그대로 혈마교의 차지가 되어 버리고 말았던 것이다.

그 후로 무림맹은 운남성 인근의 의기 있는 무인들을 모집해 혈마교의 중원 진출을 감시하도록 했고 사람들은 그곳을 대 혈마교 전선이라고 불렀다.

‘하지만 그건 벌써 십여 년 전의 얘기일 뿐이지. 지금은…. 쯧.’

시간이 흐르며 처음엔 의협심 넘치는 무인들이 앞다퉈 자원하는 곳이었던 전선은, 이제 위험하기만 하고 명성도 이득도 없는 곳으로 전락하고야 말았다.

그래서 결국 강제로 무인들을 지원받아야 유지할 수 있는 그런 곳이 되었던 것이다.

그런 이유로 무림맹에 속한 귀주성의 문파들은 이번에 의무적으로 대 혈마교 전선이 펼쳐져 있는 운남성에 직계 한 명씩을 보내야만 했다.

우리 선우세가 또한 마찬가지였다.

‘원래는 무공이 약한 내가 아닌 나머지 세 형제 중 한 명이 갔어야 했겠지. 하지만! 지금 이 일을 명분으로 죽어도 상관없는 나를 보낼 수 있게 되었단 말이지?’

그러니 내 형제들에게 있어 이보다 더 좋은 일은 없을 것이었다.

수천, 수만 번 이때의 일을 회상해 봤던 나는 그래서 음모를 꾸민 것이 넷째 선우기일 확률이 가장 높다고 생각했었다.

장내의 의견은 곧 하나로 모아졌다.

누구도 손해 볼 것이 없는, 아니 남은 형제들에게 너무나도 이득인 그런 결정이었으니까.

단가장에겐 적당히 물질적인 보상을 하기로 했고, 나는 최대한 빨리 운남성의 전선으로 이송되는 것으로 결론이 났다.

십여 년 전, 스물한 살 때와 똑같은 결정이었다.

그 후, 나는 뇌옥에 갇혔다.

까만 밤하늘에 파리하게 빛나는 달이 요요히 홀로 빛을 머금고 있었다.

운남에 가서도 한동안 밤마다 떠올렸던 고향의 마지막 달이었다.

문득 그때의 생각이 떠올랐다.

‘예전엔 저 달을 보며 하염없이 울곤 했었지.’

하지만 다시 돌아온 지금은 그렇지 않았다.

오늘 밤 두 사람이 나를 방문할 것이라는 사실을 이미 알고 있었기 때문이었다.

그리고 나는 그 두 명 중 한 명에게 무언가를 얻어내야만 했다.

그중 한 명이 벌써 조심스럽게 다가오고 있었다.

늘 가시밭같이 불편했던 내 집에서 유일하게 내게 안식처가 되어 주었던 내 착한 여동생, 연하였다.

“진 오라버니, 괜찮으세요?”

녀석의 얼굴을 보자 과거로 돌아오기 바로 직전 혈마교의 꼭두각시가 되어 있던 그 모습이 떠올라 더 애틋하게 느껴졌다.

부드럽게 웃으며 대답해 주었다.

“괜찮다, 연하야. 너는 별일 없느냐?”

“제가 무슨 별일이 있겠어요? 오라버니야말로 힘내세요. 저는 오라버니가 범인이 아니라고 믿고 있어요.”

그때도 저 착한 아이는 저렇게 얘기해 줬었다.

그땐 그저 울며 고맙다는 말만 반복했었는데.

이젠 자신 있게 말할 수 있었다.

“맞다, 연하야. 오라버니는 범인이 아니란다.”

그러자 연하가 놀란 표정으로 반문했다.

“네?”

“응? 왜 그러느냐?”

“아뇨, 그저. 왜 그렇게 확신하시나 싶어서….”

응? 왜 그렇게 확신하냐고?

“내가 유일한 친구이며 너의 남편이 될 그를 죽일 리가 없지 않으냐? 무엇보다 나와 단 형은 서로 마주 보고 술을 마시고 있었다. 그런데 검은 단 형의 등에 꽂혀 있더구나. 그것도 내가 들고 간 적도 없었던 검으로 말이다.”

그러자 연하가 침을 꿀꺽 삼키며 대답했다.

“그, 그렇군요. 하면 오라버니, 아버님 앞에서는 왜 그런 얘기를….”

“세가를 떠나 전선으로 가는 것이 내게 더 나은 선택일 것 같았기 때문이다.”

“네?!”

그랬다.

지난 삶을 돌아보건대 내 삶은 전선 투입 이전과 이후로 나뉠 수 있었다.

그중 이전의 삶, 그러니까 세가에서의 삶은 아무리 좋게 보아도 무인답다고 볼 수 없는 것이었다.

‘아니, 무인답기는커녕, 사람답지도 않았었지.’

그때의 기억은 정말이지 떠올리는 것만으로도 가슴이 답답해져 올 정도였다.

선우세가의 형제들 중 어머니가 안 계신 건 나뿐이었다. 아주 어려서 돌아가셨기 때문이었다.

하지만 사실 그건 별로 중요한 게 아니었다.

중요한 건 내게 힘 있는 외가가 없다는 점이었으니까.

어린 시절의 나는 뛰어난 기억력 덕분에 신동으로 이름을 떨쳤던 적이 있었다.

그리고 그때부터 깨달아야만 했다.

‘능력을 펼쳐 보이면 보일수록 더 미움을 받게 될 것이고, 더 삶이 짧아질 것이라는 사실을 말이지.’

다른 형제의 어머니들이 보내오던 차가운 시선들.

점점 조여 오던 숨 막히는 압박감.

어렸지만 나는 그것들을 너무도 잘 느낄 수 있었다.

그래서 어쩔 수 없이 선택해야만 했다.

능력을 감추고 바보가 되는 길을….

하지만 그러던 어느 날, 바보인 척을 하던 나는 문득 깨달을 수 있었다.

내가 진짜 바보가 되어 버리고 말았다는 것을.

게으른 모습을 보이려다 진짜 게을러졌고, 놀기만 하는 모습을 보이려다 정말 아무것도 익히지 못했었다.

선우세가의 수치라는 소리를 들으면서도 헤헤거렸고, 늘 주색잡기를 즐기며 나 자신을 망쳐 왔었다.

그게 지난 이십일 년간의 삶이었다.

문득 허탈한 웃음이 흘러나왔다.

‘그래, 솔직히 돼지 새끼라고 욕을 먹어도 싸지.’

그러니 그것을 바꾸려면 세가를 벗어나야만 했다.

그리고 전선으로 가 그를 만나야만 했다.

선우세가의 수치였던 나를 무인으로 바꿔 줬던 내 우상, 광풍비룡 설풍을.

그게 내가 아무 말도 하지 않고 누명을 덮어쓴 이유였다.

물론 이번 삶에서도 그 누명을 끝까지 뒤집어쓸 생각 따윈 없었지만 말이다.

0