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화 鮮于勢家(선우세가)-2
내가 일부러 전선으로 가기 위해 누명을 뒤집어썼다는 얘기를 들은 연하는 좀 당황하는 표정을 짓고는 돌아갔다.
그 모습이 내 기억과는 뭔가 좀 느낌이 달라 찝찝했다.
‘뭐지? 뭐가 다른 거지?’
그땐 연하가 하염없이 우는 나를 계속 달래 주기만 했었는데….
이번엔 내가 울지 않았기 때문에 그때와 느낌이 다른 것일까?
그런 생각을 골똘히 하고 있을 때였다.
기다리던 두 번째 방문객이 찾아왔다.
타닥!
내 예상보다 훨씬 더 빠른 방문이었다.
지붕에서 소리 없이 날아내린 그의 신형에 깜짝 놀라 소리쳤다.
“아버님?!”
두 번째 방문객의 정체는 내 아버지인 선우중이었다.
그가 무거운 표정으로 나를 바라보고 있었다.
‘뭐지? 아버지마저도 그때와 느낌이 다른데?’
내가 달라졌기 때문일까?
내게 방문하신 시간도, 나를 바라보는 표정도, 그때의 기억과 전혀 달라 당황스러웠다.
그땐 체념한 듯한 표정으로 찾아오셔서는 마지막으로 부탁할 것이 없냐고 물어보셨었는데 말이다.
그때 나는 그냥 도망치게 해 주시면 안 되겠냐는 한심한 부탁을 드렸었고, 아버지는 한숨을 내쉬며 고개를 저으시고는 그냥 돌아가셨었다.
저런 무거운 표정도, 아무 말도 없이 바라보고만 계신 모습도 과거와는 전혀 달랐다.
긴장된 표정으로 아버지를 바라보고 있을 때, 문득 아버지께서 무겁게 입을 열어 물으셨다.
“정녕 누명을 쓴 것이더란 말이냐?”
놀란 내 눈이 크게 확대됐다.
아까 연하에게 했던 얘기를 들으셨던 모양이었다.
그러면 아까부터 와 계셨다는 얘기?
그럼 설마 과거에도?
대체 왜?
질문에 대답하지 못하고 그저 아버지의 얼굴만 바라보고 있자, 다시 무겁게 말씀하셨다.
“진이 네가…. 재능을 숨기고 바보 노릇을 하고 있다는 건 알고 있었다. 하지만, 세가를 벗어나고 싶어 하는 줄은 몰랐구나. 진작 알았더라면….”
그렇게 말씀하시는 아버지의 얼굴에는 깊은 회한이 담겨 있었다.
그 표정이 너무도 의외여서 당황스러웠다.
그리고 다시 열린 아버지의 입에서는 내가 그분께 들으리라고는 상상치 못했었던 말이 흘러나왔다.
“미안하구나, 진아. 못난 아비 때문에 네 삶이 엉망이 되고야 말았구나.”
머릿속이 엉망으로 헝클어졌다.
뭐야? 이게 대체 뭐지?
아버지는 그동안 나를 완벽하게 방치하셨었다.
내가 하는 일을 방해하지도 않았지만, 형제들과 어머니들이 나를 괴롭히는 것도 막지 않으셨던 것이다.
그 결과 나는 세가에서 완전히 고립됐었고, 그래서 나를 이렇게 만든 아버지를 무척이나 원망했었다.
근데 이 상황은 대체 뭐란 말인가?
설마?
지난 삶에서는 전혀 생각해 보지 못했던 어떤 그림이 머릿속에서 맞춰지고 있었다.
선우세가 내에서 나를 제외한 세 형제의 외가가 갖고 있는 영향력은 매우 막강했다.
가주이신 아버지도 늘 그들과 의견을 조율해야 할 정도로 말이다.
그러니까 만약 아버지께서 누군가 한 명을 챙긴다면 나머지 외가들을 제어할 수 없게 되는 거였나?
그래서 모두를 방치해야만 했고, 따라서 외가가 없는 나는 아무도 지켜 줄 수가 없었던?
아니, 방치하는 것이 오히려 나를 지켜 주는 거였나?
‘그렇다면, 설마?!’
늘 원망했고, 그래서 한 번도 그리워한 적이 없었던 아버지의 얼굴이 오늘만큼은 새롭게 보이고 있었다.
물론 내 생각은 어디까지나 가설일 뿐이고, 그 긴 시간 품어 왔던 원망이 한순간 사라진 것도 아니었다.
하지만 깊은 회한이 담긴 아버지의 표정만큼은 너무나도 선명한 현실이었다.
아버지께서 물으셨다.
“혹시 부탁하고 싶은 것은 없느냐?”
문득 정신이 번쩍 들었다.
아버지의 진심이 뭐였든 간에 기다려 왔던 이 기회를 놓칠 수는 없었으니까.
침을 꿀꺽 삼키고는 진중한 말투로 물었다.
“가주 전용 서고에 들어갈 수 있게 해 주시겠습니까? 하루면 됩니다.”
그러자 아버지께서 의외라는 표정으로 되물으셨다.
“서고? 고작 하루 동안 말이냐?”
마음속으로 적당한 말을 골라 천천히, 그리고 진중하게 입을 열었다.
어떻게든 서고에 들어갈 수 있도록 아버지를 설득해야만 했다.
“소자, 부끄럽게도 그간 수련을 게을리하여 가문의 무학조차 알지 못합니다. 전선에 투입되기 전에 조금이라도 가문의 무학을 익히고 싶습니다.”
그랬다. 지난번 삶에서 가장 아쉬운 부분 중 하나가 바로 이것이었다.
직계 형제들이 다 죽고 실종돼 어쩌다 보니 떠밀려 가주가 됐었지만, 방탕했던 과거 때문에 선우가의 무학을 조금도 알지 못했던 것이다.
그래서 운남성의 전선으로 갔던 나는 밑바닥부터 아주 힘들게 무공을 익혀야만 했다.
‘그것도 남의 무공을 훔쳐 배워 가며 말이지.’
그 힘들고 더러웠던 시절의 기억들이 떠올랐다.
아예 전력 외로 취급을 받고는 전선의 동료들에게조차 무시받고 따돌림받던 그 시절의 기억들이.
그러니 구대문파가 없는 귀주성에서 오랜 시간 다섯 손가락 안에 꼽히는 문파로 존재해 온 선우세가, 그 절기인 선우십삼검을 익힐 수만 있다면 예전보다 훨씬 더 빨리 치고 올라갈 수 있을 터였다.
적어도 어깨너머로 다른 대원들의 무공을 훔쳐 배워야 했던 지난 삶보다는 말이다.
아버지께서 복잡한 표정으로 물으셨다.
“무공을 고작 하루 동안, 그것도 책을 보고 익히겠다는 말이냐?”
“하지 않는 것보단 나으리라 생각합니다.”
그러자 잠시 뭔가를 생각하시던 아버지께선 고개를 끄덕이셨다.
“알았다. 그렇게 해 주마.”
됐다!
순간 주먹을 불끈 쥐고는 환호성을 지를 뻔했다.
드디어 지난 삶의 아쉬움을 채울 수 있게 된 것이다.
하지만 아버지의 말은 끝난 것이 아니었다.
“하지만!”
“네?”
갑작스러운 아버지의 말에 살짝 긴장했을 때, 그분의 입에선 이번에도 상상치 못한 말이 흘러나왔다.
“내공심법을 혼자서 익히는 건 매우 위험한 일이니, 내가 직접 가르쳐 주마. 지금 바로 가부좌를 틀도록 해라.”
“네? 네, 네! 알겠습니다, 아버님!”
당황하긴 했지만 바로 가부좌를 틀었다.
그러자 내 등에 닿은 아버지의 손바닥에서 따뜻한 기운이 흘러들어 오며 나를 이끌어 주기 시작했다.
“너에게 전수할 것은 혼원무극공이다. 구결을 몇 번 암송해 줄 테니 잘 듣고 모두 외우도록 해라. 태초에 음과 양, 그리고 혼돈이 있었다.”
혼원무극공이라고?!
엄청나게 놀라 하마터면 소리를 지를 뻔했다.
혼원무극공은 선우세가의 가주와 소가주만이 익힐 수 있는 심법이었던 것이다.
그러니까 아버지께선 지금 선우세가 최고의 비기를 내게 전수해 주고 계시다는 얘기였다.
정말 놀랍고 기쁜 일이어야 할 텐데, 어쩐지 기분이 좀 이상했다.
새 무공에 대한 흥분과 환희로 벅차올라야 하는데, 이상하게도 지금 등에 닿아 있는 아버지의 손바닥이 전해 주는 뜨거운 온기가 더 감격스럽게 느껴지고 있었던 것이다.
너무도… 따뜻했다.
내 평생 가족에게 느껴 본 온기 중 가장 따뜻한 느낌이었다.
***
다음 날 나는 가주 전용 서고로 들어갈 수 있었다.
형제들이 그건 절대 불가하다고 반대를 표시했지만, 아버지께서는 내가 아무것도 못 한 채 마인들에게 죽게 된다면 오히려 세가의 명예를 실추시키게 될 것이라며 일축하셨다.
그래서 결국 두 번의 삶 중 처음으로 가주 전용 무고에 들어온 나는, 손가락을 뚜둑 꺾으며 음흉하게 웃음 짓고 있었다.
“으흐흐.”
하루면 되냐고?
충분하지!
나는 오늘 무공을 익히는 것이 아니라 그냥 외울 생각이었다.
무조건 머릿속으로 쑤셔 박는 것. 내가 가진 능력 중 가장 자신 있는 능력이 바로 그것이었으니까 말이다.
어린 시절 기억력 하나로 신동 소리를 들었던 나는, 전선에 투입된 이후 살아남기 위해 그 기억력을 더욱 더 발전시켜야만 했다.
아는 무공이 없었기에 동료들의 무공을 잠깐 보고 그것을 흉내 내어 익혀야만 했던 것이다.
나중에 설풍 조장은 내 능력에 감탄하며 그것에다 이렇게 이름을 붙여 줬었다.
‘장면 기억술’이라고.
그저 한 번 둘러본 것만으로 숲에 있는 나뭇잎의 개수까지 다 기억해 그려 낼 수 있는 인간 복사기가 바로 나였던 것이다.
그러니 자신 있게 말할 수 있었다.
‘오늘 여기 있는 너희들은 모두 다 내 머릿속으로 들어올 운명이란 얘기지. 그러니 얌전히 포기하고 들어오거라, 그럼 서운하지 않게 사용해 주마, 으흐흐!’
가주 전용 서고는 사면이 모두 책꽂이로 가득 차 있는 작은 방이었다. 그리고 그곳에 있는 대부분의 책이 다 무공서였다.
그 많은 무공들이 다 내 머릿속으로 들어올 거라고 생각하니 밥을 먹지 않아도 배가 부른 기분이었다.
물론 모두가 다 도움이 될 거란 기대는 할 수 없었다. 그중엔 삼재검법, 육합권과 같은 기본서부터 오금희 같은 건강 체조법까지 포함돼 있으니까 말이다.
‘하지만 그러면 좀 어때? 지난 삶처럼 없어서 못 익히는 것보단 백만 배 더 낫지.’
일단 어제 아버님께 배운 혼원무극공과 가문의 절기인 선우십삼검부터 꺼내어 순서가 헷갈리지 않도록 세 번씩 꼼꼼히 읽기 시작했다.
외우는 것이야 완벽했지만 역시 이미 배웠던 혼원무극공과 아직 전혀 모르는 선우십삼검의 이해도는 차이가 극명했다.
솔직히 선우십삼검은 무슨 내용인지 하나도 이해가 안 갔던 것이다.
‘역시 대충 그려진 그림과 글자만으로 무공을 익히는 건 말도 안 되는 얘기였군. 무협지를 보면 혼자 비급 보고 수련해도 잘도 고수가 되더만.’
역시 무협지는 무협지인 모양이었다.
하지만 그럼에도 계속해서 무공들을 머릿속에 쑤셔 넣었다.
전혀 이해는 안 가지만 나중에 언젠가 도움이 될 것이라고 믿으며.
시간이 물처럼 흘러가고 있었다.
서고의 책 반 정도를 세 번씩 꼼꼼히 읽고 나니 어느새 오후가 되어 있었다.
그때쯤 머리는 참을 수 없이 지끈거렸고, 몸은 완전히 녹초가 되어 버린 상태였다.
‘죽을 것 같군. 이젠 더 이상 무리다.’
기억 과식 상태에 도저히 버틸 수 없었던 나는 일단 서고 밖으로 나와 바람을 좀 쐬기로 했다.
몸을 일으키자 세상이 빙빙 도는 기분이었다.
그리고 밖으로 비틀대며 걸어 나와서는 결국 서고 앞 풀밭에서 그대로 픽 쓰러지고 말았다.
“아이고, 죽겠다!”
대자로 누워 멍하니 하늘을 올려다봤다.
조금 살 것 같았다가, 아직도 절반이나 남았다는 생각을 떠올리자 다시 머리가 지끈거렸다.
문득 유혹이 몰려왔다.
‘그냥 여기까지만 할까?’
어차피 읽어도 당장 도움이 되는 것도 아니지 않은가. 태반은 이해도 못하고 있고 말이다.
혼원무극공을 익히고 선우십삼검의 초식을 알게 된 것만으로 성과는 충분하지 않을까?
그런 유혹들이 머릿속을 떠돌고 있었다.
그때였다.
누군가의 목소리가 들려왔다.
“흥! 그럼 그렇지! 저 주제에 무슨 무공을 익힌다고!”
“그러게 말입니다. 아무 곳에서나 늘어지는 돼지 같은 성품은 어쩔 수 없나 봅니다.”
문득 고개를 들어 보니 내 세 형제들이었다.
그들이 웬 아름다운 소저 두 명을 안내하듯 데리고 정원을 지나가고 있었던 것이다.
문득 자연스럽게 그녀들에게로 시선이 향했다.
둘 다 대단한 미인인 듯했다.
하지만 한 명이 앞머리로 눈을 깊숙이 가려 약간 음침한 느낌이 드는 것에 비해, 다른 한 명은 슬쩍 본 것만으로도 눈이 번쩍 뜨일 것 같은 엄청난 미모였다.
침을 꿀꺽 삼킨 나는 문득 내가 아는 최고의 미인과 그녀를 비교해 봤다.
‘저 정도면 당 소저와 비교해도 밀리지 않겠는걸?’
비룡십삼대의 조장 중 한 명이었던 당여은 소저는 사천당문의 직계였었다.
물론 직계라고는 해도 당가의 많고 많은 형제 중 거의 끝자리에 위치한 막내급이어서 전선에 투입되었던 건데, 그곳에서도 그녀는 뛰어난 암기술과 신법, 독술은 물론 당가인답지 않은 엄청난 검술로 놀라운 활약을 보이며 당가검봉이라는 별호를 얻게 됐었다.
무공과 미모를 겸비한, 앞으로 무림을 이끌어 나갈 것이라 인정받은 여인들에게만 주어지는 봉황의 칭호를 받게 되었던 것이다.
근데 그 당 소저와 비견될 정도의 미모라니, 나도 잠시 그녀에게 눈을 빼앗길 수밖에 없었다.
그런데 내 형제들의 눈엔 그게 거슬렸던 모양이었다.
맏형 선우성이 도끼눈을 뜨고는 내게 소리쳤다.
“더러운 돼지 새끼가 어딜 감히 제갈 소저를 쳐다보느냐?! 불쾌하게 해 드려 죄송합니다, 제갈 소저.”
제갈 소저?
설마 천혜검봉 제갈서율 소저를 말하는 건가?
세력과 지혜에 비해 무공 쪽에선 별로 인정받지 못했던 제갈세가에 검의 천재가 한 명 등장했다는 소문은 나도 들어 본 적이 있었다.
‘듣자 하니 제갈세가에서도 그녀에게 경험을 쌓게 해 주기 위해 여러 무가를 순회시키고 있다던데…. 그래서 우리 세가에까지 온 건가?’
문득 이 시기쯤 제갈세가에서 사람들이 방문한다는 얘기를 들었던 것 같은 기억이 떠올랐다.
나랑 상관없다는 생각에 워낙 신경을 안 써서 기억도 못 했던 모양이었다.
하지만 어찌 됐든 얼른 시선을 돌렸다.
남자란 놈들이 미인 앞에서 어떤 상태가 되는지 잘 알고 있기 때문이었다.
특히 내 형제들 같은 성품이 덜된 녀석들이라면, 미인에게 잘 보이려고 무슨 짓을 저지를지 알 수 없었다.
서둘러 서고로 돌아가는 것이 현명할 것 같았다.
그때 아마도 제갈서율 소저일 그녀가 물었다.
“저분은?”
가슴이 덜컥 내려앉았다.
이보시오, 소저!
지금 누굴 죽이려는 거요?
내게 관심을 보이면 안 된단 말이오!
그러자 형제들이 앞다퉈 대답했다.
“제 부끄러운 셋째 동생입니다.”
“보시다시피 사람보단 돼지에 가깝지요.”
“내일 대마교전선으로 가야 해서 아버지께서 무공을 익히라고 특별히 시간을 줬는데도 저러고 있군요.”
그녀가 놀란 표정으로 되물었다.
“대마교전선으로 간다구요?”
그러곤 호기심 어린 눈빛으로 다시 나를 바라봤다.
‘아이고! 소저, 제발!’
눈을 질끈 감았다.
아니나 다를까 형제들의 눈빛이 사납게 변하더니만 나를 잡아먹을 듯 노려보기 시작했다.
“소저께서 관심을 두실 놈이 아닙니다.”
“맞습니다, 보시다시피 돼지 같은 놈이니까요.”
“전선에도 죄를 지어서 그 죗값을 치르기 위해 가는 것에 불과합니다.”
“아아.”
하지만 알겠다는 듯 고개를 끄덕이면서도 그녀들의 시선은 내게서 떨어지지 않았다.
그러자 그게 마음에 안 들었던지 인상을 찡그렸던 막내 선우기가, 문득 비릿한 웃음을 지으며 내게 다가오기 시작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