4화 다시 戰線(전선)으로-1
선우연하는 방에서 거울을 보며 치장을 하고 있었다.
만족스러울 만큼 충분히 예쁘고 화사한 모습이었지만 문득 아까 봤던 제갈서율의 아름다운 모습과 그녀를 보던 오라버니들의 넋 나간 표정이 머릿속에서 잊히질 않았다.
우두둑!
그녀가 손에 쥔 머리빗을 으스러뜨리고는 이를 갈며 중얼거렸다.
“흥, 나도 조금만 더 자라면….”
그래, 자신은 아직 덜 자랐기에 제갈서율만큼 화사해지지 않았을 뿐 조금만 더 자란다면 충분히 그녀만큼 아름다워질 것이다.
지금도 귀주성에서 손꼽히는 미녀라고 사람들이 칭송하고 있지 않은가.
선우연하가 그렇게 자신을 달래고 있을 때였다.
문득 방 밖을 지나가는 시녀들의 말소리가 들려왔다.
“어머, 정말?! 넷째 공자님이 셋째 공자님께 얻어맞고 부상당하셨다고?”
“그래! 그래서 셋째 마님께서 난리가 나셨다니까!”
순간 선우연하의 움직임이 우뚝 멈췄다.
“근데 그게 가능해? 그 돼지 공자님이 어떻게?”
“듣기엔 우연히 뻗은 손에 넷째 공자님이 스스로 와서 부딪치셨다던데?”
“정말?! 킥킥킥! 그거 진짜 웃겼겠다!”
“더 웃긴 건 뭔지 알아?”
“뭔데, 뭔데?”
“넷째 공자님이 그랬던 이유가 제갈 소저 앞에서 잘 보이려고 했던 건데, 결국 그 소저 앞에서 기절해 버렸다는 거지!”
“뭐어?! 호호호호! 진짜 웃기다!”
그때 선우연하가 문을 확 열어젖혔다.
쾅!
“에구머니!”
“아, 아, 아가씨?!”
선우연하가 무서운 눈빛으로 그녀들을 바라보며 말했다.
“지금 뭐라고 했지? 기 오라버니가 진 오라버니에게 맞고 부상당했다고? 기절을 하셨어?”
평소에 쉽게 볼 수 없었던 그녀의 살벌한 눈빛에 시녀들은 덜덜 떨며 고개를 숙였다.
“네, 네. 아가씨. 맞습니다.”
그러자 선우연하가 이를 악물었다.
분노한 그녀의 눈빛이 위험하게 번뜩이고 있었다.
“감히….”
***
선우세가의 화려한 객실을 배정받은 천혜검봉 제갈서율은 자신과 같은 방에서 자기로 한 친구 해청연에게 밀봉된 서신을 건네며 말했다.
“자, 네가 부탁했던 선우 삼공자의 자료야. 근처 하오문에서 구입했대.”
“그래, 고마워. 대금은 바로 갚을게.”
해청연의 고저 없는 목소리의 대답에 제갈서율이 피식 웃으며 대꾸했다.
“대금은 무슨, 우리 사이에. 그나저나 그 뚱뚱한 공자의 자료는 왜 구해 달라고 한 거니? 난 진짜 깜짝 놀랐지 뭐니? 세상에, 무가의 사람이 그런 몸을 할 수도 있다니. 아까 봤니? 살에 파묻혀서 눈도 일자로 보이더라니까. 세상에.”
그러자 해청연이 무신경한 목소리로 대답했다.
“그래, 그렇더라.”
그러곤 손으로 만지작거리고 있던 자신의 인형을 슬쩍 바라봤다.
안에 솜을 넣어 만든 곰 인형은 푹신푹신한 공과 같은 모습이었는데 얼굴의 눈이 일자로 찍찍 그어져 있었다.
문득 그 인형을 본 제갈서율이 풋 웃음을 터트렸다.
“푸후후! 그러고 보니 그 사람, 네가 애지중지하는 그 인형이랑 좀 닮긴 했다. 너 혹시 그래서 자료를 조사해 달라고 한 건 아니지?”
그러자 해청연이 다시 아무렇지도 않은 목소리로 대답했다.
“그럴 리가. 아까 사공자를 기절시킬 때 보여 준 한 수가 심상치 않아 보였을 뿐이야. 과거를 좀 알고 싶어지더라고.”
“응? 그 한 수? 그거 우연 아니었어?”
의아한 제갈서율의 질문에 해청연은 무감정하게 서류를 읽으며 대답했다.
“글쎄.”
“흠, 뭐, 하긴. 무공은 내가 높아도 안목은 네가 더 높으니까. 근데 그렇다고 해도 겨우 고 정도 움직이고 지쳐 쓰러지는 돼지에 대해 신경 쓸 필요가 있을까?”
하지만 서류를 읽는 데 집중해서인지 돌아오지 않는 대답에 제갈서율은 그냥 포기해 버렸다.
“하긴, 네 엉뚱한 호기심이야 해 대협께서도 포기하신 건데. 그걸 내가 어찌 이해하겠니?”
그러고는 집중해서 서류를 읽고 있는 친구를 바라보다가 문득 다시 물었다.
“늘 신기하게 생각했던 거긴 한데 그렇게 눈을 가렸는데도 글씨가 보여?”
앞머리를 거의 코 중간까지 내려서 눈을 완전히 가린 해청연은 겉으로 보기엔 도저히 앞이 보일 것 같지 않은 모습이었다.
하지만 그 질문에도 그저 높낮이 없는 대답만 돌아올 뿐이었다.
“보이니까 읽겠지?”
해청연이 하나에 집중하면 다른 것에 전혀 신경을 쓰지 않는다는 점은 알지만, 그럼에도 조용히 있는 것을 견디지 못했던 제갈서율이 다시 말을 걸었다.
“그 앞머리는 언제 넘길 거야? 왜 그 미모를 숨기는 건지 난 정말 이해가 안 된다니까?”
그러자 다시 고저 없는 반문이 돌아왔다.
“내가 앞머리를 넘겼으면 좋겠어?”
해청연의 질문에 잠시 생각에 잠겼던 제갈서율은 결국 고개를 저었다.
“아니, 그건 싫어. 내게 올 주목이 분산되는 것도 싫지만, 만약 혹시라도 네가 더 주목받게 되면 내가 널 질투하게 될지도 모르잖아? 그건 상상만 해도 끔찍해.”
“그렇지? 그럼 됐지 뭐.”
그러자 제갈서율이 결론에 만족한 듯 환하게 웃으며 고개를 끄덕였다.
“그렇구나. 네가 주목받기 싫어해서 참 다행이다. 난 너와 친구라서 참 좋아, 청연아.”
그 말에 해청연이 처음으로 눈을 돌려 그녀를 바라보며 대답했다.
“나도 제갈세가 사람 같지 않은 네가 참 좋단다, 서율아.”
내용과 달리 무척이나 평이한 말투였지만, 그 말에 제갈서율은 환하게 웃음 지었다.
자신의 독특한 친구의 입에서 그런 말은 좀처럼 나오지 않는다는 걸 잘 알고 있었기 때문이었다.
***
다음 날은 드디어 내가 세가를 출발하는 날이었다.
대문 밖에는 아침 일찍부터 나와 함께 갈 낭인들이 기다리고 있었다.
운남성 전선까지 나를 호위해 줄 이들이라고 아버지께서 설명해 주셨지만, 내가 중간에 새지 않게 감시할 이들이라는 것은 누가 봐도 알 수 있었다.
나를 배웅하러 나온 세가의 인원들은 매우 단출했다.
시종들을 제외하면 아버지와 연하 둘뿐이었으니까.
“세가의 명예를 위해서라도 몸 건강히 활약하길 바란다.”
아버지는 예전처럼 권위적이고 딱딱한 표정으로 말씀하셨다.
하지만 나는 이제 그 눈빛에서 어렵지 않게 안타까움과 애틋함의 감정을 찾아낼 수 있었다.
예전엔 왜 몰랐는지 이해가 안 될 만큼 쉽게 말이다.
“소자, 꼭 세가의 명예를 드높이고 다시 찾아뵙겠습니다.”
땅바닥에 무릎을 꿇고 큰절을 올리자, 아버님은 그저 고개만 끄덕이셨다.
그 눈시울이 살짝 붉은 빛을 띠고 있었다.
다음으로 인사한 것은 연하였다.
“고맙다, 연하야. 이렇게 아침 일찍부터 나와서 배웅해 주다니.”
그러자 연하가 걱정스러운 표정으로 내게 말했다.
“아니에요, 오라버니. 오라버니께서 먼 길 가시는데 당연한 일이죠. 그리고 이것.”
연하가 내게 잘 싸인 작은 봇짐 하나를 내밀었다.
“이건?”
“주먹밥이에요. 가시는 길에 드시라고 준비했어요.”
깜짝 놀라서 되물었다.
“주먹밥이라고? 네가 직접 싼 것이냐?”
“네, 맛은 장담할 수 없지만요.”
그녀의 말에 웃으며 감사의 인사를 전했다.
“고맙구나, 연하야. 역시 너밖에 없다. 잘 먹으마.”
그 인사를 끝으로 준비된 말에 오르며 우리는 선우세가를 출발했다.
그리고 잠시 후 세가가 완전히 눈에서 보이지 않게 되자 나는 말을 세우고 다시 땅으로 내려섰다.
그러자 낭인 중 한 명이 내게 물었다.
“갑자기 무슨 일이오, 공자? 아직 휴식할 때가 아닌데.”
고용한 낭인들의 우두머리인 장강성이라는 자였다.
인상을 찡그린 표정을 보니, 내가 벌써 못 가겠다고 강짜를 부릴까 걱정하는 모양이었다.
그에게 굳건한 어조로 말해 줬다.
“난 지금부터 운남까지 뛰어서 가겠소.”
“…예?”
“뛰어서 가겠단 말이오. 살도 뺄 겸.”
내 대답에 낭인들은 입을 떡 벌린 채 말을 잇지 못하고 있었다.
“아, 아니. 거, 거기가 어디라고 공자가 그 몸으로 뛰어서 가겠다고….”
황당해하는 것이야 물론 이해가 됐다.
그것도 매우 잘.
하지만 지금 내게 가장 긴급한 일이 있다면 바로 살을 빼는 것이 아닐까?
머릿속에 아무리 절기들이 들어 있다 해도 그걸 펼칠 몸 상태가 안 된다면 그저 지식일 뿐일 테니까 말이다.
그래서 생각한 것이 운남까지 뛰어서 가는 것이었다.
말을 타고도 삼 일은 족히 가야 하는 거리니까, 만약 뛰어간다면….
음, 잘 모르겠군.
아무튼 지난 삶에서 내가 전선에 도착했을 때, 비룡십삼대의 모든 조장들은 경악한 얼굴로 내 몸뚱이를 쳐다봤었다.
당연히 아무도 자기 조로 데려가고 싶어 하지 않았었고 말이다.
물론 그래서 설풍 조장이 웃으며 나를 데려갔던 거긴 하지만, 굳이 이번 삶에서도 그 부끄러움을 반복할 생각 따위는 전혀 없었다.
아니, 절대 그럴 수 없었다.
그곳엔 설풍 조장뿐 아니라 아직 살아 있을 그녀도 있을 테니까.
‘이번 삶만큼은 그녀에게 좋은 첫인상을 주겠어. 그래서 이번에는 기필코…!’
주먹을 불끈 쥐며 전의를 불태우고 있을 때, 낭인들의 우두머리인 장 무사가 곤란한 얼굴로 내게 말했다.
“그…. 공자의 각오는 잘 알겠지만 말이오. 우리도 계약을 했단 말이오. 공자의 도착이 늦어지면 아무래도 그 날짜만큼의 손해가 생길 텐데, 우리가 굳이….”
그가 주저리주저리 곤란함을 얘기하고 있을 때 단도직입적으로 물었다.
“내 말은 어떻소?”
내가 타고 있던 말을 가리키며 그렇게 묻자, 그가 일순 이해가 안 된 듯 되물었다.
“저 말 말이오? 무척 좋은 말이구려. 근데 그게 어쨌단 거요?”
“저 말을 여러분께 드리겠소. 저 정도 말이라면 제값만 치러도 꽤 돈이 되지 않겠소?”
그러자 낭인들이 동시에 말을 향해 고개를 돌렸다.
유심히 말을 살피는 그들의 눈이 유난히 반짝이고 있었다.
저 말은 아버지께서 특별히 날 위해 골라 주신, 세가에서도 손꼽히게 좋은 말이었다.
아마 말을 좀 볼 줄 아는 사람에게 판다면 부르는 게 값이겠지.
그러니 저들이 지금 무슨 생각을 하고 있을지는 뻔했다. 아마도 횡재했다고 속으로 만세를 부르고 있겠지?
잠시 그 말을 바라보던 장 무사가 헛기침을 하더니 입을 열었다.
“저 정도라면 뭐, 충분히 값어치는 할 것 같구려.”
고작 값어치를 할 정도밖에 안 된다고?
뭐, 하긴. 그렇게 말하리라 생각하긴 했다.
이제 다시 안 볼 낭인들인데, 날름 먹어 버리는 게 그들로선 이득일 테니까.
하지만 잠시 망설이던 그는 이내 푹 한숨을 내쉬고는 다시 말했다.
“그냥 솔직히 말씀드리겠소. 공자가 말에 대해 잘 모르시는 것 같은데 저 정도 말이라면 부르는 게 값이라오. 우리 의뢰비로 받기엔 너무 과하구려.”
“호오.”
매우 의외의 반응이었다.
호구를 물었다고 좋아할 줄 알았는데.
다른 낭인들도 대체 무슨 짓을 하냐는 눈빛으로 잡아먹을 듯이 그를 노려보고 있었다.
나는 헛웃음을 지었다.
아무래도 그를 오해했던 모양이었다.
어차피 낭인이니 돈만 밝히는 사람일 거라 생각했는데 말이다.
진중한 얼굴로 그에게 포권하며 다시 말했다.
“장 무사께 사과드리겠소. 무사님은 아무래도 내 생각보다 훨씬 더 정직한 분이신 모양이구려. 이런 훌륭한 무사분과 여정을 함께할 수 있게 되어 영광이오.”
그러자 내 칭찬에 그가 오히려 놀란 얼굴이 되고 말았다.
“예, 예? 아니, 나는 그저….”
“저 말의 값어치는 사실 나도 잘 알고 있소. 솔직히 말씀드리면 어차피 전선에 가면 제값을 받고 팔지는 못할 걸 알기에 그냥 드리는 거라오. 저 말이 여전히 내 것이면 뛰어가려는 의지가 약해질까 걱정되기도 하고 말이오. 그러니 서로 상부상조하는 셈 치고 장 무사께 저 말을 드리는 대신 앞으로의 여정에서 편의를 좀 부탁드려도 되겠소?”
그렇게 말하며 그에게 손을 내밀자 그가 잠시 내 손을 바라보다 말에서 내려 그것을 굳게 잡으며 말했다.
“삼공자는 소문과는 전혀 다른 분이시군요. 알겠소. 공자께서 큰 값을 치르셨으니 우리도 최선을 다하겠소이다.”
그렇게 나의 달리기가 시작됐다.
귀주성 귀양에서 운남성까지.
말로 쉬지 않고 가도 삼 일은 족히 걸릴 거리였다.
지금의 나로선 엄청나게 힘들 것임에 틀림없었다.
하지만 이 달리기가 나를 새로 태어나게 해 줄 자양분이 될 것임을 나는 확신하고 있었다.
그래, 이번 삶에서 나는 달라질 것이다.
반드시!
그리고 반각(일각=약 15분)이 지난 후.
바닥에 엎어진 나는 구토를 하고 있었다.
“우웨에에에엑!”
장 무사가 한심한 눈빛으로 내 등을 두드려 주며 말했다.
“공자. 혹시 가기 싫어서 이러시는 건 아니겠지요?”
“무슨 그런 말을, 우웨에에엑!”
잠시 후 다시 일어난 나는, 이번에는 반의 반각도 못 간 후 다시 쓰러져 바닥에 대자로 드러누워야 했다.
하늘이 노랗게 보이고 있었다.
“하아, 하아, 하아.”
낭인들이 한심한 눈빛으로 내가 판 말을 힐끗힐끗 쳐다보는 것을 보니, 아마 저 말이 그 정도의 값어치가 있을까를 고민해 보는 모양이었다.
무척 부끄러웠지만, 부끄러운 것의 몇십 배로 힘들어서 어쩔 수가 없었다.
그때 문득 노랗게 변한 하늘 아래로 손수건 하나가 내밀어졌다.
“응?”
깜짝 놀라 고개를 돌려 보니 웬 소저가 내게 손수건을 내밀고 있었다.
제갈 소저와 함께 있던 앞머리로 눈을 완전히 가린 그 소저였다.
그녀가 내게 말했다.
“땀 닦으세요.”
음정에 고저가 없는 무감정한 말투였지만, 어쩐지 앞머리 아래로 보이는 볼이 발갛게 상기된 것처럼 보이고 있었다.
…착각인가?
아무튼 그 순간 부끄러움이 힘듦을 압도한 나는, 힘껏 몸을 일으켜 그녀에게 말했다.
“으으윽! 청연 소저시군요. 소생이 못난 꼴을 보였습니다.”
그러자 그녀가 놀란 표정으로 물었다.
“저를…. 알아요?”
그 질문에 어색하게 웃으며 대답해 줬다.
“어제 제갈 소저께서 이름을 부르시는 걸 들었습니다.”
“아아, 역시 기억력.”
그렇게 중얼거린 그녀가 다시 손수건을 내밀며 말했다.
“닦으세요. 저는 몇 개 있어서 그냥 가지셔도 돼요.”
너무 당당히 내밀어서 거절하기도 뭐했다.
본능적으로 손수건을 받고는 대충 땀을 닦았다.
그러자 그녀가 다시 말했다.
“힘내세요. 응원할게요.”
그러고는 휙 뒤돌아 걸어가 버렸다.
뭐랄까, 한바탕 뭔가가 휩쓸고 지나간 것 같았다.
사람이라기보다는 자연 현상 같은?
아무튼 두 번의 삶 중 처음으로 여인에게 손수건을 받아 본 순간이었다.
기분이 묘했다.
지켜보고 있던 낭인들도 그녀가 사라지자 환호성을 터트렸다.
“오오! 선우 공자! 대단하시구려!”
“저렇게 아름다울 것 같은 여인에게 손수건을 다 받다니, 부럽소이다!”
이상한 말이로구먼.
아름다우면 아름다운 거지 ‘아름다울 것 같은’이라니.
하긴 뭐 얼굴의 반밖에 안 보이니 어쩔 수 없는 일이긴 하지만.
물론 저들이 생각하는 그런 건 당연히 아닐 것이다.
저 소저의 행동을 착각하기엔 내가 지금 내 주제를 너무나 잘 알고 있으니까.
얼마나 안쓰러워 보였으면 그랬을까.
무척 착한 소저인 모양이었다.
‘뭐, 그래도 어깨가 으쓱해지는 것은 사실이군.’
남들 앞에서 여인 덕분에 어깨가 으쓱해지다니, 생각해 보니 이런 느낌도 두 번의 삶 중 처음이었다.
문득 힘이 불끈 솟아난 나는 다시 벌떡 일어나 호기롭게 소리쳤다.
“자, 다시 갑시다!”
내 뜨거운 투지에 낭인들도 함성으로 화답해 줬다.
“오오오!”
물론 이번에도 반각을 버티지는 못했다.
“우웨에에엑!”
낭인 무사들은 이제 해탈한 얼굴로 하늘을 바라보고 있었다.
잠깐 가다 한참 쉬고, 또 잠깐 가다 한참 쉬기를 반복한 끝에, 우리는 점심이 될 무렵 간신히 귀양을 벗어날 수 있었다.
애써 짜증을 참는 낭인들을 보니 말을 그들에게 넘긴 건 다시 생각해도 참 잘한 일이었던 것 같았다.
장 무사가 소리쳤다.
“자, 식사나 하고 가지! 아무래도 야외에서 먹을 일이 많을 것 같군!”
음, 아무래도 나 들으라고 한 얘기인 것 같군.
민망했다.
그들에게서 고개를 돌린 채로 연하가 준 봇짐을 열어 보았다.
작고 예쁘게 뭉친 주먹밥들이 눈에 들어오고 있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