5화 다시 戰線(전선)으로-2
낭인들이 익숙하게 불을 피우고 죽을 끓이는 모습을 멍하니 바라보다 문득 몸을 일으켜 다가가 말했다.
“저도 같이 좀 얻어먹을 수 있겠습니까?”
그러자 장 무사가 흔쾌히 허락했다.
“물론이오. 근데 아까 아름다우신 여동생분께서 식사를 싸 주시지 않았소? 그걸 드실 줄 알았는데 말이오.”
그의 질문에 쓴웃음을 지으며 대답해 줬다.
“여동생이 외모에 비해 아직 요리 솜씨는 별로라서요. 사람이 먹을 만한 게 아니더군요.”
내 말에 낭인들이 폭소를 터트리며 말했다.
“응? 푸하하하하! 하긴 그렇겠구려! 그렇게 아름다운 명문가 따님이 요리까지 잘하면 불공평하긴 하지!”
“와하하하! 여동생분과 혼인할 공자가 누군지 고생 좀 하시겠구려! 식사를 차려 준다고 할 때마다 얼마나 난감할까?! 크하하하!”
“공가, 네 녀석처럼 말이냐?”
“뭐, 인마?! 그래, 사실 내 얘기가 맞긴 하지. 그래서 난 일이 없어도 맨날 빨리 나와서 늦게 들어간다고. 밤에만 보고 싶거든. 크하하하!”
왁자지껄하게 웃으며 떠드는 낭인들 사이에서 나는 문득 주먹밥을 버린 풀숲 쪽을 바라보았다.
그곳엔 던져 준 주먹밥을 먹은 다람쥐와 벌레들이 수북이 죽어 있었다.
전선에서 근무하는 동료들의 생존율은 삼 년 기준으로 삼 할 정도였다.
그러니까 삼 년 정도가 지났을 때 내가 살아 있다면 내 옆에 있던 두 명이 죽는다는 얘기였다.
‘뭐, 그것도 지금부터 오 년 후까지의 기준이기는 하지. 그 이후는 일 할 이하로 떨어졌었으니까.’
아무튼 그렇게 죽는 두 명 중 한 명이 혈교의 마두나 마인들에게 죽는 것이라면, 나머지 한 명은 동료들에게 죽곤 했다.
언제 당했는지도 모르게 적에게 섭혼된 동료들에게 말이다.
그래서 우리는 반드시 동료들을 주시해야만 했다.
그들이 평소와 달라진 점은 없는지, 혹시라도 뒤에서 나를 습격하지는 않을지를.
어제 나를 찾아왔던 연하는 내 기억과 무척 다른 모습이었다.
그리고 오늘 마중 나온 것 또한 지난 삶의 내 기억과는 다른 점이었고 말이다.
지난 삶에선 마중도 나오지 않았었던 연하가 이번 삶에선 어쩐 일인지 평소에 안 하던 요리까지 해서 마중을 나왔다. 충분히 주의를 기울일 만한 일이었다.
무엇보다도 연하의 눈.
나를 걱정하는 듯 말하는 그 아이의 눈이 말과는 전혀 다른 감정을 담고 있었다.
연유를 알 수 없는 증오와 경멸 같은 것들을.
혈교에 의해 섭혼된 자들은 눈에 감정이 사라진다.
그러니 연하가 달라진 것은 섭혼됐기 때문은 아닐 것이었다.
이제는 인정해야 했다.
연하가 달라진 게 아니라, 그때의 바보 같은 내가 알아차리지 못하고 있었다는 걸.
처음부터 그 아이는 나를 위해 줬던 것이 아니었다는 걸 말이다.
생각하면 단하상을 죽일 가능성이 있는 사람은 내 남자 형제들만은 아니지 않겠는가.
“후우우.”
깊은 한숨을 내쉬었다.
가슴이 답답했다.
지난 삼십 년간 유일한 진짜 가족이라고 생각했던 아이를 잃어버린 기분이었다.
기껏 아버지의 진심을 깨닫고 한 명을 얻었다고 생각했더니 다시 한 명을 잃어버리다니.
아무래도 나는 가족을 한 명밖에 가질 수 없는 팔자인 모양이었다.
쓴웃음이 흘러나왔다.
답답한 마음에 몸을 일으키고는 장 무사에게 물었다.
“혹시 도 하나만 빌릴 수 있겠습니까?”
“응? 도 말이오? 예비용으로 들고 다니는 건데 저걸 쓰시구려. 근데 공자는 검을 쓰시지 않았소?”
“하하, 사실 검도 잘 못 씁니다. 감사합니다.”
식사가 준비되는 동안 도를 휘두르기 시작했다.
내 몸은 지금 검이든 도든 전혀 익숙해지지 않은 상태, 이 몸으로 절기를 펼쳐 봐야 굼벵이에 불과할 것이 뻔했다.
진정한 고수들은 절기가 아닌 기본기가 강하기 때문에 고수라던가?
실제 내가 봤던 고수들은 기본 베기와 찌르기만으로도 하수들을 쉽게 학살하곤 했었다.
그러니 나는 살을 빼는 것과 동시에 기본기도 단련해야만 했다.
그리고 경험상 마음이 답답할 때는 찌르기보다 베기가 훨씬 더 개운했었다.
그 후의 여정 또한 수련의 연속이었다.
이동 때마다 계속 뛰었고, 뛰는 것이 좀 익숙해진 후에는 도와 검을 휘두르며 뛰었다.
휴식 중이나 취침 시간에는 잠을 줄여 가며 심법을 연마했다.
점점 가까워지는 전선을 생각하면 단 일각도 낭비할 수가 없었다.
그곳은 말 그대로 사지, 지난 삶에선 너무 약했기에 열외를 받아 위험을 넘어갔던 경우도 꽤 많았었던 걸 생각하면, 이번 삶에선 오히려 더 일찍 죽을 확률도 있었다.
그러니 죽기 싫다면 최선을 다해야 했다.
그런 나를 며칠간 지켜보던 장 무사가 식사 중에 문득 얘기를 꺼냈다.
“내 살다 살다 공자처럼 지독하게 수련을 하는 사람은 처음 봤소. 처음에는 얼마 못 갈 거라 생각했었는데, 새삼 나 자신이 부끄러워지는구려. 공자를 보니 나도 이제 좀 열심히 살아야겠다는 생각이 드오.”
다른 낭인들 또한 이제 호의가 가득 담긴 눈빛으로 고개를 끄덕이고 있었다.
그저 어색하게 웃으며 대꾸해 줬다.
“죽기 싫어서 발악하는 것뿐입니다. 원래부터 이렇게 살았다면 살은 왜 쪘겠습니까?”
하지만 장 무사가 고개를 저으며 대답했다.
“내가 비록 이 나이 먹고도 이류의 경지밖에 되지 못했지만, 그간 먹은 칼밥 덕분에 보는 눈은 좀 있다오. 공자가 검과 도를 휘두르는 모습을 보면 마치 초보 무사가 아닌 은퇴한 노고수들 같더구려.”
그 말에 다른 낭인이 궁금한 듯 물었다.
“그건 무슨 말이오, 형님?”
“공자가 휘두르는 도는 비록 느리기는 하지만 이미 그 길을 알고 휘두르는 모습이었단 얘기다. 초보들처럼 그저 무작정 휘두르며 모르는 것을 하나하나 익혀 가는 것이 아니라 이미 알고 있는 길을 다시 반복하는 것이니 발전이 빠를 수밖에.”
“아아아.”
“하긴, 선우 공자가 도를 휘두르는 걸 보면 이상하게 노련해 보이긴 합디다.”
장 무사가 다시 나를 보며 말했다.
“무슨 사정이 있었는지는 모르겠지만, 공자의 삶도 쉽지는 않으셨던 모양이오. 명문가 공자의 삶이란 우리와 좀 다를 줄 알았는데 말이오.”
어쩐지 현기가 느껴지는 그의 말에 나는 쓰게 웃으며 그저 고개를 한 번 숙여 주었다.
그의 말대로 나는 빠르게 달라지고 있었다.
말을 타면 이틀이면 왔을 거리를 일주일 만에 오기는 했지만, 그 짧은 사이 살은 몰라보게 빠졌고, 검, 도, 권각을 휘두르는 것도 만족스럽진 않아도 꽤 능숙해진 상태였던 것이다.
그때쯤이었다.
출발한 지 칠 일쯤 됐을 때, 헉헉거리며 뛰고 있던 내게로 갑자기 화살 하나가 날아들었다.
피잉!
“웃!”
뭘 하든 주변에 감각을 열어 놓는 것은 비룡대원의 기본 중 기본. 아무리 힘들다 해도 곡선으로 날아온 화살에 맞을 정도로 정신을 놓고 있지는 않았다.
충분히 검으로 튕겨 낼 수 있었지만 혹시 몰라 몸을 굴러 그것을 피해 냈다.
푸욱!
‘음, 이런 유려한 구르기라니.’
새삼 많이 날렵해진 내 몸이 뿌듯했다.
그때 웃음소리가 들려왔다.
“푸하하하하! 저건 뭐냐?! 꼭 곰이 굴러가는 것 같구나?!”
“그러게 말입니다, 두목님! 정말 곰도 구르는 재주가 있지 말입니다!”
갑작스러운 습격과 목소리에 장 무사를 비롯한 낭인들이 칼을 뽑으며 외쳤다.
“누구냐?! 어떤 놈이 강호의 도의도 모르고 이렇게 습격을 하느냐?!”
그러자 주변의 숲에서부터 병장기로 무장한 사람들이 튀어나오기 시작했다.
“으하하하! 곧 죽을 놈들이 강호의 도의를 찾고 지랄이구나! 얌전히 무기나 버리고 항복하거라!”
모두 삼십여 명이나 되는 인원들이었다.
특히 그중 가장 덩치가 크고 험악하게 생긴 남자는 호피를 걸치고 큰 도끼를 들고 있었는데 딱 봐도 무명소졸이 아닌 듯했다.
장 무사가 신음처럼 중얼거렸다.
“녹호대부 막구삼? 녹호채가 왜 여기에?”
녹호채라고?
그들이라면 나도 들어 본 적이 있었다.
여기서 좀 떨어진 흥인 녹호산 쪽에 위치한 산채였는데 그 채주의 괴력과 난폭한 성정이 귀주에 꽤 유명했었다.
일반적으로 삼류 떨거지들에 불과한 산적 중에서 드물게 제대로 무공을 익힌 이류 끝자락의 무인이었던 것이다.
장 무사가 포권을 하며 소리쳤다.
“녹호채주의 위명은 익히 들어 왔소이다! 이렇게 만나 뵙게 되어 영광이오!”
아마 대화를 시도해 보려는 모양이었다.
삼십여 명인 저들에 비해 우리는 여섯 명이니 수적으로 열세인 데다, 개개인의 무위도 저들보다 위라고 말할 수 없으니 당연한 일이었다.
하지만 이미 저들은 나를 맞힐 목적으로 화살을 날렸던 자들, 대화할 생각 따위가 있을 리 없었다.
“크하하하! 이 어르신을 만나서 영광이라니, 죽게 되면 더 영광이겠구나?!”
“크하하하하! 그러게 말입니다, 두목님!”
“아무래도 빨리 죽여 줘야겠습니다, 두목님!”
난폭하게 웃고 떠드는 그들의 대응에 장 무사가 이를 악물고는 다시 소리쳤다.
“원하시면 통행세를 낼 용의가 있소! 대화로 풀면 될 것을 왜 어렵게 피를 보시려는 거요?!”
그러고는 작은 목소리로 내게 말했다.
“공자, 싸움이 벌어지면 저 말을 타고 도망가시오. 우리도 오래 시간을 끌지는 못할 거요.”
그 말에 나는 진심으로 감동했다.
보통 낭인이란 자들은 자기 이득만 생각하고 뒤통수도 예사로 치는 인간들이 대부분이었는데, 나는 무슨 복으로 이런 사람들을 다 만났단 말인가.
아마 아버지께서 신용 있는 자들을 애써 골라 주셨던 거라고 짐작할 수 있었다.
장 무사의 제안에 막구삼이 코웃음을 치며 소리쳤다.
“통행세라고?! 통행세 좋지! 통행세는 네놈들의 전 재산이다! 그 옷과 말, 칼, 가진 것 모두 다! 여기서 다 홀딱 벗어 놓고 도망친다면 뒤를 쫓지는 않으마!”
“크하하하하! 빨리 벗어야 할 거다!”
“두목, 뒤태가 탐스러우면 덮쳐도 됩니까?! 크하하하!”
대화의 여지가 없다는 것을 깨달은 장 무사가 내게 황급히 속삭였다.
“공자! 어서 말을 타시오! 시간이 없소!”
하지만 나는 그의 말을 따르지 않았다.
오히려 앞으로 걸어 나가며 소리쳤다.
“이놈! 네놈이 감히 선우세가의 삼남인 나를 습격하다니! 정녕 깡그리 멸살당하고 싶은 모양이로구나!”
그러자 그들이 웃음을 뚝 멈추고는 나를 바라보았다.
이게 무슨 개소리냐는 표정이었다.
막구삼이 인상을 찡그리며 내게 물었다.
“어이, 곰탱아! 네놈이 선우세가의 삼남이라고?!”
“그렇다! 녹호대부 막구삼! 네놈이 감히 나를 습격해 네 무덤을 파려는 것이냐?!”
지난 삶에 얼핏 들었던 적이 있었다.
전선으로 향하는 무가의 자제들 중 만만해 보이는 자들만 골라서 습격했다는 산적들에 대한 얘기를.
내가 이미 전선에 도착한 후 활동을 시작했었는데, 꽤 많은 무가의 자제들을 습격해 죽였다가 결국 꼬리가 밟혀 몰살당하긴 했었다.
전선으로 가는 중소 무가의 자제들이 자신의 무력을 믿고 소수로 움직이는 데다, 오랜 시간 집에서 떨어져 있을 생각에 돈도 넉넉히 가져간다는 점을 노렸던 것이었다.
‘그러니 증인을 남길 생각이 없는 거겠지.’
아무리 중소무가라도 그들에게 원한을 사고 싶지는 않을 테니까 말이다.
어쨌든 저들은 아무나 습격하지는 않았다.
최대한 탈이 안 날 것 같은 만만한 사람들만 습격했었다.
물론 지금은 내가 그렇게 보였다는 얘길 테고 말이다.
지금도 봐라.
선우세가의 삼남이란 말을 들은 저들이 당황하고 있지 않은가.
나는 다시 한번 그들에게 호통을 쳤다.
“왜 말을 못 하느냐?! 네놈이 정녕 선우세가의 삼남인 이 몸을 습격한 것이냐고 묻지 않느냐?!”
그러자 똥 씹은 표정이 된 놈이 내게 소리쳤다.
“곰탱이처럼 생긴 네놈이 선우세가의 삼남이란 사실을 어떻게 믿느냐?! 거짓이 아니라면 증명해 봐라!”
그의 말에 내가 코웃음 치며 대꾸했다.
“명백한 선우세가의 사람인 내가 그걸 왜 증명한단 말이냐?! 그리고 뭘 어떻게 증명하라는 거냐?! 가주이신 아버님이라도 모시고 오라는 거냐?!”
그러자 놈이 분노한 목소리로 소리쳤다.
“당장 증명해야 할 것이다! 만약 못한다면 네놈이 선우세가의 삼남이고 장남이고 간에 이 자리에서 죽을 테니까 말이다!”
그의 말에 찔끔한 표정을 지은 나는 주섬주섬 품을 뒤져 동패 하나를 꺼내 보여 줬다.
“세가의 상징인 이 동패면 되겠느냐?!”
하지만 오육 장 정도 떨어져 있는 놈이 동패를 알아볼 수 있을 리 만무했다.
놈이 내 동패를 가리키며 소리쳤다.
“그것을 내게 던져라! 확인해 보겠다!”
하지만 놈의 말에 내가 말도 안 된다는 듯 소리쳤다.
“가문의 상징을 달라니! 무슨 말도 안 되는 소리냐?! 안 보이면 네가 직접 와서 보면 될 것이 아니냐?!”
그러자 놈 또한 인상을 팍 쓰며 소리쳤다.
“장난하느냐?! 네가 와서 보여 주거라!”
금방이라도 폭발할 것만 같은 그의 분노한 호통에 몸을 움찔한 나는, 살짝 떨리는 목소리로 물었다.
“내가 그쪽으로 가면 갑자기 공격하려는 것이 아니냐?!”
그러자 그가 버럭 화를 내며 소리쳤다.
“당장 오지 않으면 지금 공격하겠다!”
망설이던 나는 결국 비척거리다가 어쩔 수 없다는 듯 그에게로 다가갔다.
하지만 놈의 앞 이 장쯤까지 갔을 때 도저히 안 되겠다는 표정으로 다시 말했다.
“그, 그냥 여기서 던져 주마! 대신 꼭 보고 돌려줘야 한다!”
겁먹은 듯 주춤거리며 다가오고 있던 나를 한심하다는 표정으로 보고 있던 그가 짜증이 가득한 목소리로 대답했다.
“빨리 던지기나 해라!”
“그, 그래.”
나는 동패를 힘껏 위로 던져 줬다.
그러자 힘을 약간 과하게 줬던지 하늘 높이 올라갔던 동패가 놈의 머리 바로 뒤쪽으로 떨어졌고, 그것을 잡으려고 놈이 고개를 뒤로 젖혔다.
“엇차!”
터억!
그리고 그것을 잡은 놈이 문득 동패에 쓰인 글자가 읽었다.
“응? 귀양… 반점?”
놈은 잘 모르겠지만 귀양의 명물인 귀양반점에서도 단골손님들에게만 지급해 주는 동패였다.
그 순간이었다.
푸우욱!
“커어어억!”
이 장의 거리를 단숨에 좁힌 내 검이 놈의 심장을 꿰뚫었다.
점창파 문도들이 세상에서 가장 빠른 찌르기라고 자부하던 사일검법의 절초 일시사일이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