6화 다시 戰線(전선)으로-3
나는 놈에게 다가가는 동안 내 몸에 깃든 이십 년의 내공을 잔뜩 끌어올린 채 기습을 준비하고 있었다.
그러곤 놈의 시선이 위로 향한 사이 기습을 감행했던 것이다.
그 갑작스러운 사태에 놈의 부하들이 경악한 비명을 질러 댔다.
“뭐, 뭐냐?!”
“두, 두목!”
하지만 놈들은 비명을 지르기보다는 공격부터 했어야 했다.
내가 거기서 멈출 생각이 없었으니까 말이다.
막구삼의 가슴에 박힌 검을 그대로 놓아 버리고는, 몸을 휙 돌리며 등에 메고 있던 도를 뽑아 휘둘렀다.
슈학!
한 줄기 도광이 공간을 수평으로 가르자 바로 옆에 있던 놈의 목이 단칼에 날아갔다.
푸하악!
“으아아악!”
“장오야!”
피가 사방으로 뿜어져 나갈 때서야 놈들이 소리쳤다.
“기, 기습이다!”
“놈을 막아!”
슈아악!
“크아아악!”
피를 온몸에 뒤집어쓴 채 또 한 놈의 사타구니부터 어깨까지 올려 베며 생각했다.
‘막아’가 아니라 ‘쳐라’겠지.
멍청한 놈들.
푸하악!
“크아아악!”
세 번째 놈의 가슴을 사선으로 베어 버렸을 때에서야 놈들은 제대로 내게 도를 겨누고 있었다.
“이, 이놈!”
“감히!”
비웃음이 흘러나왔다.
대응이 너무 늦잖아?
겁먹은 얼굴로 도를 내밀고 있는 놈들에게 들고 있던 도를 확 집어 던졌다.
일부러 회전시킨 도가 붕붕거리며 날아가자 놈들이 깜짝 놀라며 그것을 간신히 막아 냈다.
“우와아앗!”
채챙!
하지만 그 순간 나는 이미 막구삼의 가슴에 꽂힌 검을 뽑으며 놈들에게 돌진하고 있었다.
그리고 한순간,
빛의 날개가 펼쳐지듯 허공에 검광이 비산했다.
슈하아악!
“으아아악!”
“끄아아악!”
두 번의 삶 중 처음으로 펼쳐 본 선우십삼검의 일초 신응비상이었다.
그때쯤 나와 함께 온 낭인들도 움직이기 시작했다.
내 기준으론 좀 늦긴 했지만, 그들로선 서둘러 돌진해 왔던 것이었다.
“돌격! 선우 공자를 지원해라!”
“우와아아!”
산적들은 이제 지리멸렬할 수밖에 없었다.
어차피 두목인 막구삼을 제외하면 나머진 다 내공도 사용하지 못하는 삼류에 불과한 잡졸들, 그들을 묶어 줄 구심점이 없는 상황에서 죽음을 무릅쓰고 덤벼들 이유가 없었던 것이다.
“사, 살려 줘! 도살자다!”
“도망치자! 모두 흩어져!”
무모하게도 전투 중에 등을 돌린 놈들을 학살하며 사납게 웃음 지었다.
내 혼이, 다시 돌아온 전장의 공기에 기뻐하고 있었다.
전투는 오래가지 않았다.
여섯 명에 불과한 우리가 모든 산적을 잡을 수는 없었기에 장내에 흩어진 산적들의 시체는 모두 열일곱, 대략 열다섯 명의 산적들이 도망친 듯했다.
그제야 긴장이 풀린 내가 검까지 던져 버리고는 풀썩 바닥에 드러누워 앓는 소리를 냈다.
“에고, 죽겠다!”
하지만 그런 나를 보는 낭인들의 눈빛은 전처럼 한심한 눈빛이 아니었다.
그들의 눈빛에 서려 있는 것은 선명하게 새겨진 놀라움, 그리고 두려움의 감정이었다.
장 무사가 잠시 망설이다 내게 물었다.
“선우 공자, 혹시 반로환동한 고인이시오?”
전혀 예상치 못한 황당한 질문에 지친 얼굴로도 웃으며 대답해 줬다.
“에이, 그런 게 어딨습니까? 그리고 설사 있다고 해도 반로환동한 고수가 무슨 이 정도 싸웠다고 지쳐 쓰러지겠습니까?”
그러자 그가 고개를 설레설레 흔들며 말했다.
“물론 그야 그렇겠지만, 그 나이에 그렇게 망설임 없이 살인을 하기는 쉽지 않기에 말이오. 게다가….”
그가 문득 주변을 둘러보며 말을 이었다.
“이 시체 가득한 곳에서 편히 늘어져 쉬고 있는 공자를 보자니 그런 황당한 생각도 드는구려.”
그의 말에 문득 주변을 둘러보니 온통 시체와 피로 범벅이 되어 있기는 했다.
사실 주변보다 내 몸이 더 피 칠갑을 하기는 했지만 말이다.
너무 익숙한 광경들이라 나도 모르게 편안해졌던 모양이었다.
그래도 그런 말을 대놓고 할 수는 없어서 어색하게 웃으며 변명해 줬다.
“너무 힘드니까 눈에 뵈는 게 없었나 봅니다. 조금만 더 쉬고 자리를 옮기시지요.”
그 와중에도 조금만 더 쉬겠다는 내 말에 낭인들이 황당하단 눈으로 나를 쳐다보고 있었다.
***
내가 쉬는 동안 낭인들은 전리품을 수거하고 막구삼의 수급을 베었다.
아마 현상금이 걸려 있을 테니 관청에 가져가면 꽤 쏠쏠할 터였다.
그리고 자리를 옮겨 식사 시간이 되어서야 우리는 다시 대화를 나눌 수 있었다.
장 무사가 슬쩍 눈치를 보더니 내게 물었다.
“그, 선우 공자께선 혹시 일류무사시오?”
웃으며 고개를 저었다.
“아닙니다. 아직 이류지요. 내공이 이십 년 정도밖에 안 되거든요.”
“하지만 아까 보니 검이 뿌옇게 보이는 것이 혹시 검기가 아닌가 싶던데….”
“선우십삼검의 초식입니다. 원래 환검 계열의 초식이라 잔영 때문에 그렇게 보였을 겁니다.”
그러자 귀를 쫑긋 세우며 듣고 있던 낭인들이 감탄성을 토해 냈다.
“아아아, 그 유명한 선우십삼검?!”
“역시, 귀주성을 대표하는 절기라더니만!”
장 무사가 살짝 부러운 표정으로 말했다.
“역시 명문의 검법은 다르구려. 이류의 경지로 사용하는 검법이 그런 위력을 내다니 말이오. 공자가 일류의 경지에 오르게 되면 더욱 대단하겠구려.”
그 말에 그냥 빙긋이 웃어 주었다.
사실 나도 기대가 되긴 했다.
일류의 경지, 검기를 방출할 수 있게 됐을 때 환검인 선우십삼검이 진정한 위력을 보여 줄 것이니까 말이다.
‘하지만, 아직은 먼 얘기에 불과하지.’
그렇게 생각하며 쓴웃음을 지었다.
검기를 방출하기 위해선 최소한 내공이 삼십 년, 그러니까 반 갑자 이상은 되어야만 했다.
삼십 년 이상의 내공을 지닌 이류무사가 ‘검기상인’의 경지. 즉, 깨달음을 얻어 방출한 기로 사람을 상하게 할 수 있을 때 그를 일류 무사라고 부르는 것이다.
나야 그 깨달음은 이미 갖고 있는 것이니 상관없긴 하지만, 삼십 년의 내공만큼은 어쩔 수가 없었다.
부족한 내공을 쌓기 위해선 앞으로도 부단히 노력해야만 할 것이었다.
장 무사가 한숨을 내쉬며 말했다.
“내 나이 사십에 이제껏 쌓은 내공이 이십 년인데 아직 이십 대 초반인 선우 공자의 내공이 이십 년이라니, 새삼 더 열심히 살았어야 했다는 후회가 드는구려. 그저 부끄러울 뿐이요.”
그 말에 나는 그저 씁쓸하게 웃음 지었다.
굳이 그에게 할 얘기는 아니지만, 지금 그나마 이십 년 내공을 쌓은 것도 그제 밤에 아버지께서 영약을 섭취시켜 주셔서 가능한 거였다.
아니었으면 아마 십 년 내공도 채 안 됐겠지.
아버지는 그러고 나서도 두 개의 같은 영단을 더 주셨었다.
하지만 동시에 절대 지금 섭취하면 안 된다고 신신당부하시기도 했다.
그 이유는 물론 나도 잘 알고 있었다.
지금 내 몸에 쌓인 내공의 절반은 직접 쌓은 것이 아닌 외기를 받아들인 것이기 때문이었다.
‘주화입마에 걸리기에 딱 좋은 상태라는 뜻이지.’
그러니 당분간은 최대한 직접 내공을 쌓고 외기를 정순하게 만들기 위해 노력해야만 했다.
그때 문득 생각난 것을 장 무사에게 물었다.
“장 무사님은 혹시 무슨 심법을 익히셨습니까?”
떠돌이 낭인인 그가 제대로 된 심법을 익혔을 것 같지는 않아 물어본 거였다.
그러자 그가 민망한 듯 대답하며 헛기침을 했다.
“뭐, 그냥 육합심법이라오. 구할 수 있는 게 그것뿐이어서…. 흠흠.”
“아아, 육합심법이요.”
내 눈빛이 안쓰럽게 변했다.
좋은 심법을 익히진 못했을 거라 생각하긴 했지만 하필 익힌 것이 육합심법이라니, 안타까운 일이 아닐 수 없었던 것이다.
그건 그야말로 저잣거리의 헌책방에서도 쉽게 구할 수 있는 삼류심법이었다.
‘오히려 육합심법으로 이십 년 내력을 쌓았다니, 그게 더 대단하군.’
그냥 하는 말이 아니라 정말 대단했다.
정말 부단히 노력하지 않고는 이룰 수 없는 성취였을 테니까 말이다.
내 눈빛이 안쓰러워지자 그가 내 눈을 피하고는 자리를 털며 일어났다.
“자자, 이제 슬슬 출발합시다! 날이 어두워지기 전에 좀 더 가지 않으면 사흘 안에도 도착하지 못하겠소.”
그에게 더 이상의 얘기는 할 수 없었다.
나도 익힐 수 있는 무공을 구하지 못해 남의 무공을 베끼고 구걸했던 적이 있다고 말해 봐야 그에겐 동정으로만 들릴 테니까.
그를 보는 내 눈빛이 깊어지고 있었다.
***
사방으로 흩어져 도망쳤던 녹호채의 잔당들은 선우진 일행이 지나가고 한참을 지나서야 서로 다시 뭉칠 수 있었다.
사건이 있었던 곳으로 돌아온 이들은 살해당한 두목과 동료들의 시체가 한곳에 쌓여 있는 것을 보고는 분노를 터트렸다.
“이 잔인한 놈들! 아무리 적이라도 땅에 묻어 주지도 않다니!”
“보라고! 소지품도 다 가져갔어! 이 더러운 강도 같은 놈들!”
“똥물에 튀겨 죽일 놈들! 모두 다 혈마교의 마인들에게 잡아먹혀 버려라!”
그들이 한참을 선우진 일행을 욕하며 분노를 풀고 있을 때, 문득 그들 중 한 명이 잠시 외면하고 있던 현실에 대해 말을 꺼냈다.
“근데…. 우리 이제 어떻게 하지?”
“어떡하긴 뭘 어떡해? 녹호채로 돌아가서 다시 두목을 뽑아야지.”
“…우리 중에서 두목을 뽑는다고 제대로 영업을 할 수 있을까? 우리 중 이류의 무인은 두목뿐이었잖아?”
뼈를 강타하는 차가운 현실에 그들 모두가 입을 다물고 말았을 때였다.
문득 길 저쪽에서 누군가 말을 타고 오는 것이 보였다. 말은 한 마리뿐, 사람도 한 명이었다.
모두가 본능적으로 그쪽을 쳐다봤다.
그러다 눈이 가장 좋은 한 명이 침을 꿀꺽 삼키며 나지막이 속삭였다.
“여자다.”
그러자 깜짝 놀란 동료들이 황급히 속삭이듯 되물었다.
“뭐?!”
“여자라고?!”
“여자 혼자?!”
“예쁘냐?!”
손바닥을 내밀어 동료들을 기다리게 한 그는 잠시 후 눈을 빛내며 다시 속삭였다.
“앞머리로 얼굴을 가려서 잘은 모르겠지만, 아마 예쁠 것 같다. 일단 몸매가 좋아. 체격이 좀 작은 것이 아마 십 대 후반 정도인 것 같은데?”
그러고는 동료들을 향해 침을 꿀꺽 삼키며 물었다.
“어떻게 하지?”
그러자 긴장된 눈빛으로 시선을 교환하던 중 한 명이 말을 꺼냈다.
“여자 한 명이서 당당하게 오고 있다니, 고수면 어떻게 하지?”
그 말이 끓어오르던 그들의 열정에 물을 끼얹고 말았다.
여자와 노인을 조심하라.
무림의 오랜 격언이었다.
문득 그들의 눈에 두려움의 빛이 떠올랐다.
아까 선우진에게 당했던 일이 생생하게 다시 떠올랐던 것이다.
몸서리가 쳐졌다.
“여, 역시 안 하는 게 좋을까?”
겁먹은 말투로 한 명이 입을 열었을 때, 처음 그녀를 봤던 눈이 좋은 자가 다시 몰래 그녀 쪽을 바라봤다.
앞머리로 눈을 가렸지만 이제 그 밑으로 분명하게 보이는 계란형의 턱선, 아무리 봐도 미인일 것 같았다.
저런 미인을 그냥 보내야 한다는 안타까움에 고뇌하던 그가 문득 떠오른 생각에 입을 열었다.
“근데, 십 대 후반의 여자애가 고수일 수 있을까? 너무 어리잖아?”
그 말이 다른 산적들의 머리에 다시 광명을 선사해 주었다.
과연 그랬다.
아무리 여자 혼자가 위험해도 십 대 후반의 여자애가 강하면 얼마나 강하겠는가?
물론 구대문파의 직계 제자나 오대세가의 자식들, 무림의 절대자들인 일제 이왕 삼성 사마 오괴의 자식, 제자들이라면 그럴 수도 있을 것이다.
하지만 그런 사람이 이곳에 왜 온단 말인가?
결국 결론을 낸 그들은 말을 타고 지나가는 그녀를 향해 과감하게 뛰쳐나가고 말았다.
“멈춰라, 이년! 어딜 감히 허락도 없이 이 호걸님들의 영토를 지나간단 말이냐?!”
“당장 말에서 내려라! 그리고 옷부터 벗도록 해라! 크하하하!”
“아니! 말 위에서 벗어도 된다! 크하하하하!”
자신들이 말하고 자기들끼리 웃음을 터트리는 산적들을 물끄러미 바라보던 그녀는, 문득 산적들에게 물었다.
“혹시 여기 선우진, 선우세가의 삼공자라는 사람이 지나갔나요?”
그 이름을 들은 산적들은 순간 웃음을 잃었다.
너무 놀라 딸꾹질을 했을 정도였다.
“네, 네가 그놈을 어떻게….”
“너, 너도 혹시 그 인간 백정 같은 놈의 일행이냐?”
그 반응을 본 그녀의 입꼬리가 만족스럽게 호선을 그렸다.
“지나간 모양이군요. 지나간 지는 얼마나 됐나요?”
아까의 끔찍한 기억에 잠시 겁에 질렸던 산적들은 이내 다시 인상을 굳혔다.
놈이 지나간 것은 어차피 아까 전이고, 저 어린년이 혼자라는 사실이 변하는 것도 아니지 않은가.
“차라리 잘됐어! 두목의 목숨 빚을 이년에게 받아 내자고!”
“그래, 맞아! 아까 지나간 놈이 다시 돌아올 것도 아니잖아?”
그렇게 산적들이 다시 투지를 되살리는 사이 원하는 정보를 다 얻어 낸 해청연이 중얼거렸다.
“아까 지나갔단 말이지? 곧 만나겠네.”
그러고는 말 위에서 가볍게 몸을 솟구쳤다.
휘익!
산적들은 물 찬 제비처럼 가볍게 공중으로 솟구치는 그녀의 신형을 멍하니 바라봤다.
그 모습은 너무나도 표홀하고 또 아름답기까지 했다.
그러곤 우아하게 공중에서 한 바퀴 회전한 그녀는 산적들을 향해 벼락처럼 내리꽂혔다.
휘리릭!
“…!”
말을 꺼낼 새도 없었다.
한순간 거미줄 같은 검광이 공간을 가득 채우자, 멍하니 그것을 보고 있던 산적들의 몸이 쩌억 갈라져서는 분수처럼 피를 뿜어냈던 것이다.
푸하악!
사방으로 피가 튀었을 때 그녀는 이미 공중으로 다시 몸을 띄워 말안장으로 돌아가는 중이었다.
검기를 방출해 단 일 초 만에 열다섯 명을 격살한 그녀가 간단히 검에서 피를 털고는 납검했다.
그리고 아무 일도 없었다는 듯이 말을 몰아가기 시작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