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2화 飛龍十三隊(비룡십삼대)-2
“하아, 하아.”
턱까지 차오른 숨과 너무 지쳐서 멍해져 버린 정신 속에서 비사영은 문득 사문을 뛰쳐나오던 마지막 날을 떠올렸다.
‘대사형! 제가 전선으로 갈게요! 대사형마저 가 버리면 우리 비종문은 정말 망해 버릴지도 모른다고요!’
‘시끄러워! 비종문은 이미 망했어! 그 복수를 하는 것이 대사형인 나의 의무란 말이다!’
그 말을 마지막으로 비사영은 사문을 뛰쳐나와 전선으로 향했었다.
비룡십삼대 칠 조원인 비사영의 사문, 비종문은 몰락한 상태였다.
아직 본문에 사숙 한 명과 몇 명의 사제들이 남아 있기에 완전히 멸문됐다고 볼 수는 없었지만, 앞으로 곧 그렇게 될 것이라는 것만큼은 틀림이 없었다.
무황총 혈사에서 돌아오지 못한 스승, 사숙들과 함께 비종문의 내공심법이 절전되어 버렸으니까.
딱히 이름 높은 절정 고수가 있던 것은 아니었지만 경공술의 뛰어남이 가히 무림일절이라고 평가받던 비종문에게 있어 내공심법의 소실은 사형 선고나 다를 바가 없었다.
내공심법이 없는 경공술은 그저 보법에 불과할 뿐이니까 말이다.
비사영이 전선으로 가겠다고 자원한 것은 사실 어린 사제들을 보낼 자신이 없었기 때문이었다.
어차피 내공심법이 소실된 비종문도들로선 혈교의 마인들에게 살아남을 수 없을 것이고, 이왕 죽어야 한다면 대사형인 자신이 제일 먼저 죽는 것이 맞다고 생각했으니까.
그리고 또 한편으론 망해 가는 사문을 붙들고 있기보다는, 단 한 놈의 마인에게라도 복수를 하고 싶다는 생각을 하기도 했었다.
하지만 그는 한 가지만큼은 생각하지 못했었다.
전선에 혈교도만큼이나 증오스러운 점창파 문도들이 있을 거라는 걸, 심지어 그들과 같은 전대, 같은 조가 되어 싸워야 할 거라는 걸 말이다.
점창검비 주태경을 처음 만나 그가 오만한 표정으로 자신을 점창파 제자라고 소개했을 때, 비사영은 굳은 얼굴로 말했었다.
‘나는 비종문의 제자다’라고.
그러자 그가 표정 하나 바꾸지 않고 되물었었다.
그런 문파가 있었냐고.
욕이 치밀어 올랐지만 거기까지는 참아 냈다.
정말 모르는 걸 수도 있었으니까.
그래서 분노를 억누르며 다시 말했었다.
‘내 사부님, 사숙님들이 무황총 혈사 때 돌아가셨다.’
무황총 혈사.
그것은 무림 각지에서 발견된 무황총의 지도를 따라 운남성으로 몰려갔던 무림인들이, 뒤늦게 끼어들어 그것을 독차지하려고 했던 점창파의 탐욕에 단합해서 대항하다가 결국 무황총의 붕괴로 모여들었던 무림인들은 물론 점창파마저도 몰살당하고 말았던 끔찍한 사건이었다.
또한 그렇게 약화된 점창파는 결국 기다렸다는 듯 공세를 펼친 혈교의 공격에 본산을 빼앗기고 운남성을 통째로 혈교의 영역으로 내주고 말았었다.
그 모든 것이 결국 혈교의 음모였던 것이다.
점창파가 탐욕을 부리고 끼어들 것이란 점을 정확히 예측했던 음모.
하지만 이 모든 것이 혈교의 음모라고 해도 무황총 혈사와 관계된 자들에게는 점창파 또한 혈교와 다를 바가 없었다.
운남성 안에서 발견된 무황총은 자신들의 것이라며 뒤늦게 끼어들어 수많은 무림인을 살해했던 것도, 대항하는 무림인들을 무황총 안으로 몰아넣어 그 참상을 겪게 만든 것도 점창파였으니까 말이다.
결국 비사영에게 있어서 점창파는 혈교와 똑같은 사문의 원수이자 혈교에게 운남성을 내준 원흉이었던 것이다.
하지만 이 모든 사실에도 불구하고 비사영은 많은 것을 바란 것이 아니었다.
현실적으로 일류의 경지에 도달한 점창파 검사에게 사과를 받아 내기 힘들 것이란 점은 알고 있었으니까.
이런 생각 자체도 치욕적이었지만 그래도 미안하다는 말까지는 아니어도 죄책감을 느끼는 표정만이라도 봤다면 그나마 위안이라도 느낄 수 있을 것 같았다.
하지만 그런 비사영에게 주태경은 비웃는 표정으로 이렇게 되물었을 뿐이었다.
‘그래? 네 사문 어른들이 분에 넘치는 욕심을 부리다 죽은 자들이란 얘기로군. 근데 그게 어쨌단 거냐? 그걸 자랑이라도 하겠다는 거냐?’
그 비릿한 웃음과 목소리를 듣는 순간, 비사영은 그만 이성의 끈을 놓고 말았다.
그는 짐승처럼 울부짖으며 놈에게 달려들었었다.
‘네놈들 때문이 아니더냐?! 너희 점창파 놈들 때문에 그 참사가 일어났단 말이다!’
그러자 주태경은 코웃음을 치며 기다렸다는 듯이 비사영에게 반격했다.
내공이 제대로 실린 매서운 일격이었다.
짧은 순간이었지만 비사영은 주태경이 진짜 자신을 죽이려 한다는 것을 느낄 수 있었다.
하지만 주태경의 수도가 검처럼 자신의 목에 박히려는 순간, 그걸 막지 못하는 자신이 무력하게 죽음을 기다리고 있던 때에 설풍 조장이 끼어들어 주태경의 손을 막아 줬었다.
그야말로 죽다 살아난 순간이었다.
설풍 조장의 매서운 시선을 받은 주태경은 흥이 식었다는 듯 코웃음을 치고는 추종자들을 데리고 자리를 떠났다.
‘다시 점창파를 모욕하면 그땐 반드시 죽여 주겠다’라는 말을 남긴 채….
비사영은 좌절했다.
스스로가 그렇게 무력하고 한심할 수가 없었다.
그날 이후의 삶도 그리 다르지 않았다.
기껏 이류에 불과한 자신의 경지로는 주태경은커녕 마인 한 마리 해치울 수 없었으니까.
가장 흔한 하급 간귀라도 하나 해치우려면 최소한 일류, 검기상인의 경지에는 올라야 했던 것이다.
하지만 기초 심법만 익힌 비사영의 경지로는 평생을 수련해야 이류 정도가 한계일 것이 뻔했다.
모든 것이 너무도 불공평하고 또 무의미하게만 느껴졌다.
물론 설풍 조장이 자신을 단련시켜 주겠다고 제안한 적이 있긴 했다.
하지만 단호하게 거절했었다.
약자라고 동정받는 건 죽기보다 싫었으니까.
비사영은 그런 상태로 살고 있었다.
아니, 산다는 것이 목표를 갖고 그것을 추구하는 것이라면, 자신은 살고 있다기보단 그저 숨 쉬고 있는 것에 불과했는지도 모른다.
그러던 한 달 전, 자신의 조에 웬 미친놈이 들어왔다.
비사영 자신과 같이 고작 이류에 불과한 무인, 그것도 후덕하게 살이 쪄 도무지 무인이라고는 믿기지 않는 그런 놈이 말이다.
하지만 그 미친놈은 정말 정신이 나갔는지 들어온 첫날부터 주태경과 충돌하는 모습을 보여 주었다.
놈이 가장 싫어하는 점창검비라는 별호로 자극하고 한두 달이면 충분히 이길 수 있다는 말로 도발하면서.
실로 화끈하게 미친놈이 아닐 수 없었다.
하지만 그 미친 행동이,
비사영에게는 너무나도 통쾌하게 느껴졌다.
어쩌면 그래서였는지도 모른다.
녀석의 도발에 넘어가는 척 훈련에 동참한 것은.
하지만 바로 다음 날부터 깨달을 수 있었다.
그건 정말 멍청한 짓이었다는 걸.
그때 그러지만 않았다면 지금 이렇게 죽을 듯이 힘들지는 않았을 텐데 말이다.
나뭇가지 위에서 좌절한 자세로 숨을 헐떡거리고 있는 비사영의 눈에, 삼십 관의 강철을 매단 조끼를 입고 심지어 눈까지 가린 설풍 조장이 나무 위를 가볍게 날아 멀어져 가는 것이 보였다.
내공은 부족했지만 적어도 짧은 시간 동안의 경공만큼은 절정 고수들에게도 꿀리지 않을 거라고 자부했던 비사영으로선 죽도록 자존심 상하는 일이 아닐 수 없었다.
하지만 어쩔 수 없었다.
한 달간 죽을힘을 다해 따라가 보려 했지만, 고작 십 관을 짊어진 자신이 조장의 뒤를 간신히 따를 수 있는 시간은 아직도 반 시진(한 시진=약 두 시간) 정도에 불과했으니까 말이다.
“허억, 허억, 허억, 씨발.”
죽을 만큼 힘들었지만 절대 포기할 순 없었다.
포기하는 건 정말 죽기보다 더 싫었으니까.
더군다나 저 뒤에선 그 미친놈이 따라오고 있지 않은가.
“하하하! 사영! 자네 또 반 시진 만에 좌절해 있는 건가?! 이제 곧 따라잡을 수도 있겠는걸?! 하하하하!”
선우진 저놈은 진짜 미친 게 틀림없었다.
나무 위를 달리다가 떨어져 매달리기를 반복하며 처절하게 따라오고 있는 그의 모습은, 벌써 몇 번이고 나무에서 떨어진 듯 온몸이 흙투성이가 된 상태였다.
심지어 오늘은 얼굴로 떨어진 듯 면상마저 잔뜩 진흙투성이가 된 모습, 그 진흙을 잔뜩 바른 얼굴에 눈만 벌겋게 핏발 선 채로 아득바득 나무 위를 달려오고 있었다.
대체 저 상태로 어떻게 웃을 수 있는지 이해할 수가 없었다.
하지만 그를 본 비사영은 이를 악물고 몸을 일으켰다.
저놈에게만은 절대로 질 수 없었다.
선우진의 몸은 한 달 전에 비해 몰라볼 정도로 날렵해진 상태였다.
이젠 완전한 평균 체형이 된 상태. 그런데 놈은 그 빠진 체중을 보충하겠다면서 그만큼의 강철을 조끼에 매달아 달리기 시작했었다.
자신과 같은 이류에 불과한 놈에게, 그것도 자신보다 무거운 강철을 달고 뛰는 놈에게 진다는 걸 비사영은 죽으면 죽었지 절대 용납할 수 없었다.
더군다나 저놈은 자신에게 비종신법을 배우고 있는 놈이 아니던가.
선우진은 처음 훈련을 시작한 지 사흘 만에 자신을 찾아와 도움을 요청했었다.
‘비형, 솔직히 말하면 나는 제대로 된 경신법을 배운 적이 없다오. 그래서 조장의 훈련을 어떻게 따라가야 할지 솔직히 막막하구려. 그러니 비형이 나를 좀 도와주실 수 없겠소?’
안 그래도 마음에 드는 녀석이 자신에게 고개를 숙이며 도와 달라고 찾아오다니, 꽤 기분이 좋아졌었다.
그래서 어떻게 도와주면 되겠냐고 물었더니 놈이 조심스럽게 물었었다.
‘혹시 비형의 비종신법을 좀 가르쳐 주시면 안 되겠소? 아아! 물론 비기를 가르쳐 달라는 건 아니오. 어디까지나 기본 신법 정도를 말하는 거라오! 그리고 공짜로 달라는 것도 아니오. 내가 꽤 괜찮은 내공심법을 하나 알고 있다오. 신법 대신이라면 뭐하지만 혹시 그걸 알려 드리면 안 되겠소?’
그 말을 들은 비사영은 깜짝 놀랐었다.
자신에게 꼭 필요한 것이 심법이었으니까 말이다.
너무 귀가 번뜩 뜨이는 제안이었지만, 오히려 그렇기에 바로 대답할 수가 없었다.
자존심이 상했으니까.
그러자 선우진이 풀 죽은 표정으로 말했었다.
‘역시 그 정도로는 안 되나 보구려. 꽤 괜찮은 심법이긴 하지만 비종신법 같은 절기와 바꾸기엔 아깝겠지요. 충분히 이해하오.’
비사영은 문득 흐뭇한 웃음이 나올 뻔한 것을 간신히 참아야만 했다.
사문의 신법을 이렇게 인정해 주는 사람은 솔직히 처음 만나 봤던 것이다.
그래서 헛기침을 하고는 풀이 죽어 있는 선우진에게 얘기해 줬다.
‘사문의 신법이 워낙 뛰어난 것이다 보니 마음대로 전하기가 좀 어렵기는 하오. 하지만 사문 어르신들이 많이 돌아가셔서 내가 거의 장문인에 가깝기도 하고, 또 우리는 전우이기도 하니 뭐 기본 신법 정도라면….’
그러자 선우진은 정말 뛸 듯이 기쁜 얼굴로 비사영의 손을 잡고는 몇 번이고 고맙다는 말을 반복했었다.
비사영은 그렇게 선우진에게 비종신법을 전수하며 ‘쾌의심법’이라는 제대로 된 내공심법을 익힐 수 있었다.
그것은 몇십 년 전에 멸문된 쾌의문의 심법으로, 그곳 또한 경신법으로 유명했던 일문이었기에 비사영이 익히기에는 최적화된 심법이었다.
사실 이것은 설풍과 선우진이 몰래 의논해 서로 알고 있는 심법들 중 비사영에게 적당한 것을 미리 선정했던 것이었지만, 비사영으로선 그 사실을 전혀 알 리가 없었다.
그리고 선우진이 이미 지난번 삶에서 그에게 비종신법을 배웠었다는 것도 말이다.
아무튼 비사영은 선우진에게만은 절대 질 수 없다는 오기로 다시 몸을 일으켜 달리기 시작했다.
그 자신은 잘 느끼지 못하고 있지만 제대로 된 내공심법을 배우며 그간 정체되어 있었던 비사영의 경지 또한 다시 상승하기 시작한 상태였다.
설풍의 새벽 훈련은 보통 한 시진 간의 나무 위 질주, 그 후 한 시진을 또다시 초고속으로 질주하며 손발을 놀려 지나가는 벌레들을 잡는 것으로 이루어졌다.
하지만 나머지 사람들에겐 앞의 한 시진까지가 한계였다.
그래서 설풍이 다시 이 차로 출발하면 나머지 사람들은 운기조식을 한 후 공터에서 병기술을 연마했는데, 이것 또한 선우진 때문이었다.
처음 일주일 정도는 운기조식을 한 후 휴식을 가졌었는데 일주일쯤 지나자 살이 좀 빠진 선우진이 이쯤은 별거 아니라며 아득바득 일어나 다시 검을 휘두르기 시작했던 것이다.
때려죽여도 못 움직일 것 같았던 비사영은, 선우진이 검을 휘두르며 안쓰러운 눈빛으로 던진 한마디에 이를 갈며 다시 일어설 수밖에 없었다.
‘비 형, 배 형, 많이 지치셨소? 보기보다…. 음….’
뒷말을 잇지는 않았지만 실망한 눈빛의 그가 무슨 말을 하고 싶은지는 모를 수가 없었다.
울컥한 비사영은 벌떡 일어나며 소리쳤었다.
‘이쯤이야! 하나도 안 지쳤소!’
‘나, 나도 그렇소!’
신기한 건 죽을 것 같다가도 그렇게 일어나니 몸이 또 움직여진다는 것이었다.
그렇게 병기술을 수련하고 있으면 질주 훈련을 마친 설풍이 돌아와 조언을 해 주곤 했다.
하지만 비사영이 진짜 하기 싫었던 건 오전 수련보다도 식사를 한 후 오후부터 시작하는 외공 수련이었다.
비사영은 예전부터 자신의 친구이긴 하지만 배종관의 외공 수련이 쓸데없다고 생각하고 있었다.
맨손으로 나무를 찢고 바위를 부수는 마인들 앞에서, 심지어 최소 검기를 발현하지 않으면 흠집도 나지 않는 그놈들 앞에서 피부 좀 단단하게 한다고 무슨 소용이 있겠는가 말이다.
더더군다나 이상한 냄새가 나는 약재를 몸에다 바르고 끝이 갈라진 대나무부터 시작해 몽둥이로 자신의 몸을 자해하는 외공 수련은 남 보기에도 부끄럽기 그지없었다.
그래서 비사영은 이것만큼은 선우진의 도발에도 절대 넘어가지 않으려고 했었다.
‘이해하오. 비 형이 참기엔 너무 고통이 큰 수련인 것 같구려.’
‘흥! 도발하지 마시오! 아무리 그래도 그것만큼은 못 하오!’
그러자 선우진은 고개를 끄덕이고는 배종관에게 말했다.
‘역시 비 형도 우리가 부끄러운 모양이구려. 어쩔 수 없는 일이오. 원래 부끄러움을 나누는 일은 진정한 친구가 아니면 할 수 없는 일이 아니겠소?’
비사영은 그 말에 입을 떡 벌릴 수밖에 없었다.
배종관이 서운한 눈빛으로 자신을 바라보고 있었기 때문이었다.
‘아, 아니, 나는 부끄럽다기보다는….’
하지만 거짓말을 하는 것이 남자답지 못하다고 생각하는 비사영의 성격상 차마 뒷말을 이을 수는 없었다.
사실 부끄러운 것이 맞았으니까.
문득 선우진의 말이 맞다는 생각도 들었다.
남들처럼 부끄러워하지 않고 그 부끄러움마저도 함께해 줄 수 있는 것이 진정한 친구이자 남자가 아니겠는가?
결국 비사영은 떨쳐 일어날 수밖에 없었다.
‘에이, 씨! 같이 하자! 같이 하면 되잖아!’
그때부터 십삼대 사람들은 서로의 맨몸을 향해 대나무를 찰싹찰싹 때리며 비명을 지르는 세 남자의 모습을 볼 수 있었다.
더군다나 입이 귀까지 걸린 채 흐뭇하게 웃으며 친우들에게 대나무를 찰싹찰싹 휘두르는 배종관의 모습은 보기만 해도 눈살이 찌푸려지는, 실로 변태적인 광경이 아닐 수 없었다.
‘으하하하하! 역시 같이 수련하니 훨씬 쉽고 빠르게 할 수 있군! 심지어 즐겁기까지 하지 않나?! 고맙네, 친구들! 자네들은 역시 내 진정한 친구들이라네! 으하하하하!’
대나무에 찰싹찰싹 얻어맞으며, 또 살에 벌겋게 줄이 그어져 부풀어 오르는 것을 바라보며 비사영은 진심으로 같이한다고 말했던 자신을 후회했다.
찰싹! 찰싹! 찰싹!
‘윽! 아윽! 까으윽!’
하지만 여기서 그만두겠다고 말할 수는 없었다.
여기서 포기하면 진정한 친구가 아니라고 인정하는 게 되는 거였으니까.
눈물이 나올 것만 같았다.
다시 식사를 한 후 저녁 훈련은 설풍 조장, 그리고 동료들과 함께한 대련이었다.
이것만큼은 비사영도 감사하고 있었다.
절정 고수인 설풍 조장이 직접 상대해 주며 조언을 해 주는 기회는 이곳이 아니었다면 절대 얻을 수 없는 소중한 것일 테니까 말이다.
하지만 정작 대련에서 진짜 많은 것을 배우게 된 것은 의외로 설풍 조장이 아닌 선우진에게서였다.
설풍에게 패하는 것은 그리 충격적이지 않았다.
그는 절정 고수이고 자신의 실력으로 따를 수 없는 것이 당연했으니까.
하지만 선우진의 싸움을 지켜보며 비사영은 뼈저리게 느낄 수 있었다.
자신이 약한 것은 내공이 약하기 때문이 아니라 그저 싸움을 못하기 때문이라는 것을.
정확한 판단과 적절한 대응만 있다면 이류의 경지로도 얼마든지 절정의 고수를 상대로 훌륭한 싸움을 펼쳐 보일 수 있었던 것이다.
선우진이 그걸 몸으로 증명해 주고 있었다.
그건 비사영과 배종관 둘 모두에게 큰 충격이 아닐 수 없었다.
선우진이 왜 일류의 무인인 주태경을 도발했는지도 알 수 있었다.
그는 정말 자신이 있었던 것이다.
비사영은 그동안 실전된 내공심법 핑계만 대며 수련을 게을리했던 자신을 반성했다.
그건 알에서 깨어나는 것과도 같은 깨달음이었다.
그리고 지금, 실로 오랜만에 비사영은 자신이 살아 있다고, 아주 생생하게 살아 있다고 느끼는 중이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