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6화 蛛鬼(주귀)-1
부조장 나서유 소저가 설풍 조장에게 말했다.
“자, 이제 제 눈을 똑바로 쳐다보세요.”
하지만 그 말에도 조장은 차마 나 소저를 쳐다보지 못하고 이리저리 눈을 돌리며 안절부절못하는 모습만 보일 뿐이었다.
우리 조의 남자 조원들은 그 모습을 즐겁게 웃으며 구경하고 있었다.
내가 웃으며 말했다.
“눈을 못 쳐다보는 걸 보니 조장이 섭혼당하지 않은 건 확실한 것 같은데?”
그러자 비사영도 맞장구쳤다.
“그러게. 완전한 평상시의 조장이로군. 조장, 어째 섭혼이라도 좀 당해야 하는 거 아니오? 장가는 가셔야 할 것 아니오?”
그 말에 배종관이 웃으며 끼어들었다.
“사영, 너도 여인들 앞에서 말 잘 못하잖아. 그럼 너도 섭혼당해야 장가가는 거야?”
그러자 비사영이 발끈했다.
“뭐, 뭐, 뭔 소리야?! 나는 말을 못하는 게 아니라 굳이 하지 않았던 거라고! 할 필요가 없었으니까!”
그 말에 내가 피식 웃으며 반문했다.
“오, 진짜?”
“당연하지!”
그때 나서유 소저가 비사영에게 말했다.
“잘됐네요. 그럼 다음 사람은 비 공자로 하죠. 자, 이리 와서 제 눈을 좀 보세요.”
“흥! 내가 못할 줄 아시오?!”
우리는 지금 숙소에서 남자 조원들이 섭혼당했는지의 여부를 조사해 보는 중이었다.
비룡 십대 쪽에서 섭혼당한 피해자가 나와 전 비룡대원들을 모두 확인해 보라는 공문이 내려왔던 것이다.
이처럼 전선에선 때때로 혈교에게 섭혼당하는 이들이 생기곤 했다.
그리고 그것은 마인들이나 마두들이 나타나는 것보다 훨씬 더 끔찍한 일이었다.
믿었던 동료를 잃는 것과 동시에 자신들의 손으로 그 동료를 죽여야만 했으니까.
혈교의 섭혼을 푸는 방법은 아직도 전혀 밝혀지지 않은 상태였기 때문이었다.
“자, 제 눈을 똑바로 보세요.”
“봐, 봤소.”
“에이, 그게 뭐예요? 그렇게 힐끗 보지 말고 계속 보고 있어야죠.”
“그래, 사영. 계속 보고 있어야지. 아까의 당당함은 다 어디로 간 거야?”
“그러게, 아까는 나를 그렇게 놀리더니만, 어째 나랑 똑같아 보이는군?”
“아, 아니! 솔직히 이 정도면 섭혼당하지 않았다는 건 확인된 거 아니오?! 안 그렇소, 부조장?”
“네, 뭐, 제 눈을 못 마주치는 걸 보니 비 공자도 멀쩡한 건 확실한 것 같네요.”
“무슨! 나는 마주치긴 했단 말이오!”
“그러긴 했죠. 아아주 잠깐은요.”
섭혼당했는지의 여부는 보통 눈빛을 보고 판단했다.
섭혼된 자들의 눈빛에선 생기가 사라지기 때문이었다.
또한 그것을 판단하는 역할은 보통 남자보다는 여인들의 몫이었다. 평소와 어딘가 달라진 동료들의 모습에 여인들이 훨씬 더 민감했기 때문이었는데, 전선의 모든 조가 혼성으로 조직된 것도 사실 이런 이유 때문이었다.
“자, 이제 선우 공자 차례예요.”
나 소저의 말에 침을 꿀꺽 삼키고 앞으로 나섰다.
음, 나 소저와 눈을 마주보고 있어야 한단 말이지?
가슴이 쉴 새 없이 쿵쾅거리고 있었다.
기분 같아선 잠깐은 물론 한 시진도 할 수 있을 것 같았다.
옆에서 비사영과 배종관이 내게 말했다.
“흥! 진 너는 어디 얼마나 당당한가 한번 보자고!”
“힘내, 진!”
친구들의 말에 나는 문득 웃음 지었다.
힘을 낼 필요가 어디 있단 말인가.
나 소저와 눈을 마주칠 수 있는 기회인걸.
이 기회에 나 소저의 얼굴이나 마음껏 바라봐야지.
하지만 그런 내 생각은 나 소저가 생긋 웃으며 부드러운 눈빛으로 나를 바라보는 순간 바로 사라지고 말았다.
그녀의 미소가 내 눈을 통해 심장까지 푹 파고들었다.
끝이 아래로 쳐진 강아지 같은 순한 눈매, 세상 모든 걸 다 이해하고 받아들여 줄 것만 같은 부드러운 미소.
비록 당여은 소저 같은 초절정의 미인은 아닐지 모르지만 한없이 사람을 기분 좋게 만들어 주는 선하고 예쁜 얼굴이었다.
펑!
순간 내 안에서 뭔가가 터진 것 같았다.
그러자 흥미진진한 얼굴로 나를 지켜보던 동료들이 곧장 폭소를 터트렸다.
“푸하하하하! 저게 뭐야?! 사람 얼굴이 어떻게 저렇게 빨개질 수가 있지?”
“하하하! 진, 아무리 그래도 얼굴을 보기 전부터 그렇게 빨개져 버리면 어떻게 하나?!”
“미안해, 진. 힘을 조금만 내라고 할걸.”
나는 그제야 무슨 일이 벌어진 것인지를 깨닫고 내 얼굴을 만져 봤다.
그러자 태양처럼 뜨겁게 불타고 있는 내 체온을 느낄 수 있었다.
나 소저가 웃음을 참으며 내게 말했다.
“굳이 눈을 볼 필요도 없겠네요. 조장보다 더한 남자가 있을 줄은 상상도 못했는데요?”
네, 네?! 자, 잠깐! 눈을 안 봐도 된다니!
안됩니다, 소저!
나는 황급히 그녀를 만류하려 했다.
“아, 아니, 저는….”
하지만 그녀는 부드럽게 웃으며 내게 말했다.
“너무 무리하지 말아요, 선우 공자. 힘들었을 텐데 장난쳐서 미안해요.”
“아니, 그러니까 그게….”
그렇게 나 소저의 얼굴을 정당하게 바라볼 수 있는 기회는 하늘로 날아가 버리고 말았다.
세상이 무너진 기분이었다.
무슨 이런 말도 안 되는 사태가….
그렇게 내가 좌절해 있을 때 비사영이 문득 물었다.
“그나저나 부조장, 청연 소저의 눈도 확인해 봤습니까?”
그 질문에 좌절해 있던 나도 문득 고개를 들고 나 소저를 바라봤다. 나 역시 무척 궁금했기 때문이었다.
지금이야 청연 소저가 여자 조원들과도 많이 친해졌지만, 그럼에도 청연 소저와 가장 가까이 있는 건 나라고 할 수 있었다. 내가 뭘 할 때마다 그녀가 늘 나를 따라오곤 했으니까.
하지만 그런 나조차 그녀의 코 위쪽은 한 번도 본 적이 없었다. 왜 앞머리를 내리고 있냐는 물음에도 흉터가 있어 보여 줄 수 없다고만 말했을 뿐이었다.
흉터라….
그게 사실이라면야 어쩔 수 없는 일이긴 한데.
어쩐지 사실이 아닐 것 같았다.
‘제 이름은 청연. 성이 청, 이름이 연입니다.’
그녀가 조원들에게 자신을 소개하며 했던 말이었다.
분명히 따로 성이 있을 텐데도 이렇게 소개한 것이나, 무림맹의 총군사인 제갈지강, 그 따님인 제갈서율 소저의 친구인 점을 볼 때 꽤나 명문의 여식임이 분명함에도 출신을 숨기는 것. 이런 걸 보면 얼굴도 의도적으로 숨기는 게 아닐까 싶었던 것이다.
그러니 청연 소저가 나 소저에게 눈을 보여 주었는지는 내게도 무척 궁금한 것이 아닐 수 없었다.
청연 소저의 눈을 봤냐는 질문에 나 소저는 문득 뭔가를 떠올리는 듯했다.
그러곤 멍하니 고개를 끄덕이더니 중얼거렸다.
“네, 봤었죠. 그건 정말이지….”
“정말이지?”
우리가 궁금한 눈으로 그녀에게 시선을 집중하자 퍼뜩 정신을 차린 나 소저가 황급히 웃으며 고개를 저었다.
“아, 아니에요. 주은이랑 같이 봤는데 연이는 얼굴을 가릴 수밖에 없었더라구요.”
“예? 왜 말입니까?”
“그야… 가리지 않으면 큰 혼란이 생길 테니까?”
“…예?”
그 이해할 수 없는 말에 우리는 인상을 찌푸렸지만 나 소저는 그 이상 말해 줄 생각이 없는 모양이었다.
“뭐, 그런 게 있어요. 아무튼 다들 고생했어요. 아, 조장님은 바로 나가실 건가요?”
그녀의 질문에 설풍 조장이 빙그레 웃으며 고개를 끄덕였다.
“그럴 생각이오.”
그러자 나 소저가 걱정스러운 표정으로 말했다.
“부디 조심하세요. 이번에 출몰한 주귀가 한 마리가 아닐 수도 있다고 하더라구요.”
“걱정해 줘서 고맙소, 소저. 방심하지 않도록 주의하겠소.”
설풍 조장을 비롯한 십삼대의 절정 고수들은 바로 출동이 예정되어 있었다.
현재 밀림에서 가장 위험한 마인, 주귀를 수색하기 위해서였다.
사람의 정혈을 흡수하며 점점 강해지는 마인 주귀는 원래 일류 최상급 정도의 능력을 지니고 있지만, 놈들이 세 명 이상의 정혈을 흡수했을 때 절정 고수급까지 성장한다고 알려져 있었다.
‘물론 강기를 사용하는 건 아니지만 신체 능력은 오히려 절정 초입의 고수들을 능가하지.’
심지어 성장할수록 머리까지 점점 좋아져 놈들을 발견하기조차도 쉽지 않았으니, 그야말로 최악의 마물이 아닐 수 없었다.
그런데 그 주귀가 이번에 십삼대의 동쪽에 위치한 십사대 쪽에서 최소한 다섯 명 이상의 정혈을 흡수하고는 우리 쪽으로 이동했다는 정보가 들어왔던 것이다.
우리로서는 비상이 걸리지 않을 수 없었다.
“절정 고수들은 모두 다 나가는 거죠?”
“아아, 어차피 다섯 명 이상을 흡정한 주귀라면 절정들밖에 상대할 수가 없을 테니까 말이오.”
“부디 조심하십시오, 조장.”
“그래, 고맙네.”
우리는 설풍 조장이 방을 나가는 뒷모습을 무거운 눈으로 지켜봤다.
지난 삶 때도 그랬듯, 간귀 떼 습격 사건 이후 마인들의 등장 빈도와 위험성이 훨씬 높아져 있었다.
원래는 몇 달에 한 번 나타날까 말까 했던 주귀가 이제 달마다 한두 마리씩 나타나곤 했던 것이다.
그러니 간귀나 효귀들의 등장은 말할 것도 없었다.
문득 나 소저에게 물었다.
“천주은 소저…. 아니, 소저들은 뭘 하실 예정입니까?”
“저희요? 이런 분위기에 숲으로 들어가긴 그러니까 숙소 근처에서 수련을 하려구요.”
“네, 그러시군요.”
그녀의 말에 속으로 안도의 한숨을 내쉬었다.
지난 삶의 기억을 떠올려 보건대, 당시엔 우리 조가 아니었던 천주은 소저가 죽었던 것이 바로 이때쯤이었던 것 같았기 때문이었다.
당시의 내가 워낙 다른 사람들에게 신경 쓸 정신이 없어 정확히 기억은 안 나지만, 나와 비슷한 시기에 왔던 그녀가 숲에서 간귀 떼에게 뜯어 먹힌 시체로 발견돼 더 두려움에 떨었던 것만큼은 분명히 기억이 났다.
하지만 이번엔 그녀가 우리 조인 데다 나 소저, 청연 소저와 늘 붙어 다니니 그런 일이 없을 것 같긴 했다.
그래도 혹시 몰라 주의를 줬다.
“혹시라도 소저들끼리 숲으로 들어가거나 위험한 곳에 가지는 마셔야 합니다. 조장이 없을 때 소저들이 위험해지시면 저희가 조장을 볼 면목이 없지 않겠습니까?”
그러자 나 소저가 생긋 웃으며 대답했다.
“염려 마세요. 저희도 그럴 생각은 없으니까요. 그리고 걱정해 줘서 고마워요, 선우 공자.”
이때까지는 이 정도면 될 거라고 생각했었다.
하지만 그때 죽은 사람이 천주은 소저만이 아니었다는 걸, 그때 아직 신출내기였던 그녀가 그 위험한 시기에 숲에 들어갔던 이유가 따로 있었을 거라는 걸 떠올린 건 좀 더 시간이 지난 후였다.
오후 시간, 내가 비사영, 배종관과 함께 외공 수련을 하고 있을 때였다.
문득 사 조의 부조장인 매여경 소저가 무언가를 찾는 듯 두리번거리며 급히 지나가고 있었다.
나는 그녀를 발견하고선 눈을 뗄 수 없었다.
그녀는 내가 당여은, 마유겸과 함께 주목하고 있는 사람 중 한 명이었기 때문이었다.
그녀는 바로 멀지 않은 미래에 주귀에게 살해당해 사 조 조장 마유겸을 폐인으로 만들어 버렸던 원인이 될 사람이었다.
물론 그건 지금이 아닌 정혈회담 이후에 일어나는 일이었지만 그래도 신경이 쓰이는 것은 어쩔 수가 없었다.
대충 상의를 걸치고는 그녀에게 다가가 물었다.
“매 소저, 누구를 그렇게 찾고 계십니까?”
그러자 예쁜 얼굴에 비해 다소 음울해 보이는 인상의 그녀는 흠칫 놀라더니만 약간 경계하는 태도로 대답했다.
“아, 저희 조원을 좀 찾고 있어요. 손하랑이라고. 요즘 너무 힘들어해서 신경을 쓰고 있었는데 아까부터 보이질 않는군요.”
“아, 그러시군요. 손하랑 소저라고요? 만나게 되면 매 소저가 찾고 있다고 전해 드리겠습니다.”
“네, 감사합니다.”
그녀가 지나가자 배종관이 문득 입을 열었다.
“손하랑 소저면 지난번 쌍삭칠흉에게 죽었던 정 공자의 정인이지?”
그 말에 비사영이 씁쓸한 얼굴로 대답했다.
“맞아. 듣기엔 그 후로도 정인을 잊지 못해 무척 힘들어하고 있다더군.”
나로선 처음 듣는 얘기에, 처음 듣는 이름이었다.
그들에게 급히 물었다.
“그게 무슨 소리야? 정인을 잃은 사람이라고?”
“아아, 진, 너는 잘 모르겠군. 너 오기 바로 직전에 있었던 일인데, 쌍삭칠흉이란 마두들에게 손 소저의 정인이 살해당했어. 서로 애틋하게 아껴 주는 걸로 유명했던 연인들이었는데, 그 후로 손 소저가 무척 힘들어한다는 것 같더라고.”
안타까운 얘기였다.
하지만 전선에선 그리 드물지 않은 얘기기도 했다.
전선의 근무자들은 수없이 연인들을 잃고 또 다른 사람들과 교제하며, 그렇게 살고 있었던 것이다.
오죽하면 전선에서 연애할 때의 철칙 중 하나가 과거의 연인에 대해서는 절대 상관하지 않는다는 것일까.
그 과거의 인연이 죽었든 살아 있든 말이다.
“그렇군. 안타까운 얘기네.”
고개를 끄덕거리며 발걸음을 돌리던 나는, 문득 떠오른 생각에 우뚝 발걸음을 멈췄다.
‘가만있자. 지난 삶에 천 소저가 몇 조였었지?’
잘 기억이 나지 않았다.
하지만 희미한 기억 속에서 그런 얘기는 분명히 들었던 것 같았다.
그녀가 힘들어하는 동료를 달래 주려고 같이 숲에 들어갔다가 변을 당했었다고.
그럼… 이게 혹시?
내가 제 자리에 우뚝 선 채 심각한 표정으로 뭔가를 생각하고 있자 비사영이 물었다.
“뭐야, 진? 갑자기 또 왜 그래? 불안하게?”
“그러게. 설마 꿈도 꾸지 않았는데 선인께서 또 뭘 알려 주신 거야?”
지난번 간귀 떼 습격 사건 때 선인이 내 꿈에 나와 알려 줬다고 말한 이후로 이들은 내 말을 정말 철석같이 믿어 주곤 했다.
그러니 이들을 설득하는 것은 그리 어렵지 않았다.
“느낌이 안 좋아. 아무래도 그 손 소저라는 분을 좀 찾아봐야 할 것 같은데?”
그러자 비사영과 배종관이 서로 시선을 마주하더니 내게 물었다.
“진이, 네 느낌이라면야 신뢰할 수 있긴 하지만…. 어디서 손 소저를 찾는다는 거야?”
그 질문에 나는 서쪽 숲을 가리키며 말했다.
“저쪽 숲으로 한번 가 보자.”
조장들이 주귀를 수색하러 간 곳과 반대 방향이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