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9화 毒林(독림)-1
“헉!”
나는 식은땀을 흘리며 자리에서 벌떡 일어났다.
악몽을 꿨기 때문이었다.
주변을 둘러보니 아직 어두운 밤이었다.
내 옆에선 비사영과 배종관이 아직 곤히 자고 있었고, 설풍 조장은 또 수련을 하러 갔는지 보이지 않았다.
아직 아무것도 잃지 않았다는 것을 확인하고 나서야 나는 안도의 한숨을 내쉴 수 있었다.
내 악몽은 지난 삶의 기억이었다.
내 주변의 모든 이들이 사라졌던 지난 삶의 기억들.
그리고 어쩌면 앞으로 다시 반복될 일들 말이다.
나는 적어도 지금까지는 스스로 최선을 다하고 있다고 자부하고 있었다.
지난 삶에서는 잃어버리고 말았던 친구 배종관을 살리기도 했고, 지난 삶에서의 무위를 되찾기 위해, 더 나아가 주체적으로 움직일 수 있는 최소 조건이라고 생각하는 절정의 경지에 도달하기 위해 죽을힘을 다해 수련하고 있었으니까.
어차피 그 정도 무위가 되기 전엔 할 수 있는 것도 거의 없을 테고 말이다.
하지만 정말 그럴까?
정말 이것만으로 충분한 걸까?
전선의 위험도는 시간이 지날수록 점점 더 높아져만 갈 것이었다.
이제 곧 철귀가 등장할 테고, 더 시간이 지나면 독사귀가 등장하겠지.
지난 삶에서도 우리는 동료들을 한 명, 한 명 잃어 가며 어떻게든 버텨 냈지만, 결국 그걸 버텨 낸다는 건 아무 의미가 없는 일이었다.
모든 마인은 결국 최종 결과물인 혈마인을 만들기 위한 과정에 지나지 않았으니까.
오 년 후, 혈마인이 등장할 것이다.
마인들의 육체를 가진 절정 고수들이 말이다.
그리고 그들이 등장한 이 년 후, 전선은 완전히 무너졌었다.
혈교는 모았던 힘을 서서히 방출하며 운남성을 넘어 사천성, 귀주성, 광서성으로 영역을 점점 넓혀 나갔다.
무림맹과의 불가침 협정을 비웃기라도 하듯이….
난 그 과정에서 죽었었다.
그래서 그 이후의 일은 알지 못한다.
온 무림이 힘을 모아 혈교를 막아 냈을지 아니면 정말 혈교 천하가 이루어지고 말았을지.
물론 그 모든 미래에도 불구하고 지금 내가 할 수 있는 일은 나 자신을 성장시키는 것밖에 없긴 했다.
그래서 한 걸음씩 한 걸음씩 나아가겠다는 생각으로 수련에만 집중하고 있는 것이었고 말이다.
하지만 가끔 이렇게 악몽에 시달릴 때면 나는 다시 한번 스스로에게 질문하게 되고 마는 것이다.
이걸로 과연 충분한 걸까?
…….
그럴 리가 없었다.
***
점창검비 주태경과 선우진의 대결이 이틀 앞으로 다가온 시점, 오늘은 칠 조가 저녁 순찰을 맡은 날이었다.
순찰이 있는 시간의 수련은 쉬기 때문에 오늘은 저녁 대련 수련을 건너뛰고 순찰을 나가고 있었다.
그 사실에 칠 조의 부조장 나서유는 약간의 아쉬움을 느꼈다.
저녁 대련 수련은 그녀가 가장 좋아하는 시간이었기 때문이었다.
최근 그간의 정체를 깨고 무언가 길이 보이는 것 같았기도 했고, 또 매일 그와 단둘이서 대결을 할 수 있는 시간이 하루 중 가장 행복한 시간이기 때문이기도 했다.
그런 생각에 아쉬워하고 있던 나서유는 문득 전선에서 이런 생각을 하고 있는 자신이 우스워 피식 웃음 지었다.
처음 전선에 가도록 결정됐을 땐 전선에 들어가자마자 죽을 거라고 생각하고 있었는데 말이다.
‘대를 이을 네 남동생을 보낼 수는 없지 않겠느냐? 우리 나가장을 위해서 네가 좀 희생해 주려무나.’
그렇게 말하는 둘째 어머니의 목소리는 너무도 차가웠고 전혀 미안하게 느껴지지도 않았었다.
일곱 살 때, 나서유의 어머니가 돌아가신 후 둘째 어머니는 나가장의 실권을 장악했다.
그녀는 자신의 친자인 세 살 밑의 남동생과 나서유를 대놓고 차별했지만 그 사실을 부친께는 철저히 숨겼었다.
힘들고 괴로웠지만 그래도 참아야 한다고 생각했다.
자신이 희생하는 것이 부친과 나가장을 위하는 길이라고 생각했으니까.
그렇게 늘 희생만 해 왔던 나서유는 또다시 희생을 요구하는 둘째 어머니의 말에 그렇게 대답했었다.
‘네, 어머님. 알겠습니다’라고….
가면 죽을 거라는 사실을 알고 있었지만, 나서유는 거절하는 방법을, 반항하는 방법을 알지 못했다.
너무 오랜 시간 그렇게만 살아왔었으니까.
‘그리고 실제로 첫 순찰에서 죽을 뻔했었지.’
사람의 정기를 흡수하고 성장하는 주귀를 추적하는 사이 매복해 있던 혈교의 마두에게 납치당했던 것이다.
점혈을 당해 꼼짝도 못 하는 가운데 탐욕스러운 눈빛으로 자신의 온몸을 훑던 놈의 끔찍한 얼굴은 아직도 가끔 떠오르곤 했다.
아마 그 기억을 극복해 낼 수 없었을지도 모른다.
아니, 애초에 살아남을 수도 없었겠지.
그가 자신을 구해 주지 않았다면 말이다.
유성처럼 날아와 마두를 걷어차 버렸던, 그래서 피를 뿌리며 날아가는 마두를 그보다 더 빠른 속도로 쫓아가 난타하던 그 놀라운 무위와, 그러고는 자신에게 돌아와 산골 소년 같은 순박한 모습으로 괜찮냐고 물으며 어쩔 줄 몰라 하던 바보 같은 표정을 결코 잊을 수 없었다.
그때 나서유는 무서움도 잊고는 풋 웃음을 터트리고 말았었다.
나중에 그가 신설된 칠 조의 조장으로 뽑히고 나서유도 그를 따라서 칠 조로 오며 힘든 일들이 많았지만, 그래도 나서유는 자신 있게 말할 수 있었다.
그녀의 인생 중 지금이 가장 행복한 시간이라고.
설마 당장 내일 죽게 된다고 해도 말이다.
선두로 걸어가고 있는 그의 뒷모습을 잠시 바라보다 나서유는 조원들을 돌아봤다.
적을 물리치고 조원들을 보호하는 것이 그의 일이라면 조원들을 챙기는 건 자신의 일이었다.
자신이 가장 잘할 수 있고, 또 그의 모자람을 채워 줄 수 있는 그런 일.
“비 공자, 요즘 들어 몸이 더 멋있어진 것 같아요. 예전에도 사내다웠지만 요즘은 더욱 두드러지는데요?”
“흥! 부조장의 칭찬은 너무 흔해서 별로 믿기지 않는다오.”
“어머, 진짜라니까요?”
외공 수련으로 몸이 불어 민첩성이 떨어진 것 같다며 배종관에게 투덜대고 있는 비사영에게 해 준 말이었다.
자신의 칭찬은 믿지 않는다고 말하면서도 그가 입가를 실룩거리며 불평을 접는 것을 보며 나서유는 생긋 웃음 지었다.
그러고는 배종관에게 전음으로 말했다.
- 배 공자, 여자들은 너무 겉으로 티를 내면 별로 좋아하지 않아요. 오히려 알 듯 모를 듯 챙겨 줄 때 매력을 느끼죠. 제 말 무슨 말인지 알죠?
오늘도 천주은에게서 시선을 떼지 못하는 배종관에게 그렇게 조언하자, 배종관이 고맙다는 눈빛으로 나서유를 바라보며 애써 늠름한 척 주변을 경계하기 시작했다.
최근 들어 지나치게 자신을 바라보는 배종관의 시선에 천주은이 살짝 불편해하고 있었던 것이다.
아직은 그가 좋은 사람이고 자신에게 관심을 가져 주는 것에 감사하고 있지만, 불편함이 지속된다면 서로에게 안 좋은 결과가 될 수도 있었다.
언제 죽을지 모를 환경이다 보니 무림 어느 곳보다 연애가 자유로운 곳이 전선이었지만, 그러다 보니 남녀 사이의 불편한 감정으로 조의 단합이 흐트러지거나 심할 경우 아예 한쪽이 다른 조로 가야 하는 경우도 있었으니까.
나서유는 그런 일만큼은 막고 싶었다.
그리고 이왕이면 좋은 사람들끼리 좋은 감정을 갖게 되기를 바랬다.
적어도 살아 있는 지금 이 순간만큼은 말이다.
그렇게 바로 처리할 수 있는 일들을 수습한 나서유는 이제 그녀가 어떻게 손대야 할지 잘 모르겠는 사람에게로 시선을 옮겼다.
나서유가 어떻게 손대야 할지 모르겠는 사람, 청연이 알 수 없는 눈빛으로 한 명을 바라보고 있었다.
‘선우 공자.’
혜성처럼 나타나 칠 조의 분위기를 완전히 바꿔 준 선우진 공자는 최근 좀 어두워진 상태였다.
다른 사람을 대할 때 티를 내거나 하지는 않았지만 저렇게 혼자 뭔가를 골똘히 생각할 때면 그 차이가 확연히 드러나곤 하는 것이다.
모두들 곧 있을 주태경과의 대결 때문일 거라고 생각했기에 그저 모르는 척해 주고는 있지만, 그가 그러고 있으니 다른 조원들도 좀 기운이 빠지는 것은 사실이었다.
어느덧 선우진 공자는 칠 조의 분위기를 좌지우지할 만한 사람이 되어 있었으니까 말이다.
그리고 청연.
얼마 전 얼굴을 확인하고는 그 지나친 아름다움에 얼굴을 가리고 다니는 게 맞겠다고 까지 생각하게 만든 그녀는, 얼마 전 자신과 천주은의 앞에서 폭탄선언을 했었다.
얼마 전 선우진이 당여은을 연모하고 있다는 말을 들었을 때였다.
언제나처럼 칠 조의 여인 세 명이서 오후 수련을 하고 있었는데 문득 그때의 생각이 나서 말을 꺼냈었다.
‘나 사실은 처음 선우진 공자와 연이가 왔을 때 두 사람이 연인 관계인 줄 알았지 뭐니? 아니면 사모하는 사이거나. 그것도 연이가 선우진 공자를 따라 칠 조로 온 걸 보고는 연이가 선우진 공자를 연모하고 있는 줄 알았어.’
그러자 옆에서 듣고 있던 천주은도 웃음을 터트리며 동의했다.
‘푸후후! 언니도 그랬어요? 저도인데. 그래서 나중에 연 언니의 얼굴을 보고 나서는 좀 미안해졌었다니까요?’
‘아, 정말? 킥킥. 나도 그랬는데.’
십삼대에서 유이하게 청연의 진정한 외모를 알고 있는 두 사람이 그렇게 말하며 웃음을 터트리자 가만히 듣고 있던 청연이 무표정한 얼굴로 입을 열었다.
‘그거 맞는데요?’
‘응? 뭐가 맞다고?’
‘제가 선우 공자를 좋아하는 거, 맞다구요.’
‘…응?’
뭘 그런 당연한 얘기를 하느냐는 표정으로 담담하게 대답하는 청연의 모습에 나서유와 천주은은 당황했다.
‘무, 물론 선우 공자를 좋아하겠지. 나도 좋아해. 소중한 조원이고 믿을 수 있는 사람이지.’
‘맞아요. 선우 공자는 정말 좋은 사람이죠. 게다가 살이 빠지고는 깜짝 놀랄 만큼 미남이 되기도 했고요. 근데 언니, 우리는 그런 걸 말하는 게 아니라….’
하지만 청연은 천주은의 말을 끊으며 다시 말했다. 드물게 단호한 말투로.
‘뭘 말하는 건지 알아. 그리고 나도 그런 걸 말하는 게 맞고. 나는 남자로서 선우 공자를 연모하고 있어.’
‘…에?’
‘…정말?’
두 사람은 혼란에 빠졌다.
아니, 대체 청연이 왜 선우 공자를 연모한단 말인가.
게다가 무슨 연모한다는 말투가 저렇단 말인가.
말투만 들었을 땐 연모한다고 고백한 게 아니라 복수하고 싶다고 고백하는 것 같지 않은가.
나서유가 간신히 혼란을 수습하고는 청연에게 물었다.
‘아니, 연이 네가 대체 왜? 아니, 이게 아니지. 게다가 그게 사실이라면 선우 공자가 당 소저를 연모한다는 말을 들었는데 왜 그렇게 담담한 건데?’
청연이 당연하다는 듯 대답했다.
‘사실이 아닐 거니까요. 관심이 있는 건 맞는 것 같지만 그게 여인으로서의 관심은 아닌 것 같거든요. 오히려 그는….’
거기까지 말하고 나서유를 잠시 바라봤던 청연은 다시 화제를 돌렸다.
‘그리고 그를 좋아하게 된 건 그가 뚱뚱할 때였어요. 저는 원래 동그란 것들을 좋아했으니까. 근데 끌린 건 그의 동그란 모습이었는데 살이 빠진 후에도 마음이 사라지지 않더라구요. 아마 외모 안에 있는 것들을 보게 돼서 그런 게 아닐까 추측하고 있어요.’
마치 자연 관찰한 사실을 객관적으로 서술하듯 담담하게 말하는 그녀의 고백에 나서유와 천주은은 할 말을 잃고 말았다.
천주은이 다시 질문거리를 생각한 것은 좀 더 시간이 지난 후였다.
‘그, 그럼 왜 아무것도 하지 않는 건데?’
‘뭘 해야 하는데?’
‘아니, 지금보다 더 가까이 다가간다거나, 그래! 언니의 진짜 얼굴을 보여 준다든가 말이야!’
그러자 청연은 드물게 미소 지으며 물었었다.
‘왜 꼭 뭘 해야 해? 난 지금 옆에서 그를 관찰하고 있는 것만으로도 충분히 좋은데?’
나서유와 천주은은 청연이 이해 불가의 존재라는 것을 다시 한번 실감할 수밖에 없었다.
그런 일이 있고 나서는 나서유도 두 사람의 일에 쉽사리 끼어들 수가 없었다.
그래서 결국 두 사람에게는 아무 말도 못 한 채 순찰을 출발했다.
그리고 순찰 경로를 절반쯤 돌았을 때였다.
서쪽 하늘이 붉게 물들 무렵 선두에 서 있던 설풍이 조원들을 향해 손바닥을 내밀었다.
정지하라는 신호, 뭔가가 나타났다는 뜻이었다.
조원들이 일사불란하게 정지해 주변을 경계할 때 설풍이 한순간 빛줄기가 되어 밀림 속으로 뛰어들었다.
샤아악!
그러자 바로 비명 소리가 들려왔다.
“어이쿠! 살려 주세요!”
그 상상치 못한 반응에 칠 조원들은 모두 눈을 동그랗게 뜰 수밖에 없었다.
살려 주세요?
저런 평범한 사람들의 비명을 듣게 된다고?
이 전선에서?
설풍이 간신히 살수를 멈추고 제압해 잡아 온 이는 날렵해 보이는 검은 피부의 묘족 청년이었다.
심지어 그 묘족은 약간 어색한 한인의 언어로 조원들 앞에서 손바닥을 싹싹 빌며 사정했다.
“처는 쾨물이 된 사람이 철대로 아닙니다. 그처 숲 안쪽에 살고 있는 묘인일 뿐입니타.”
조원들은 당황했다.
전선에 근무하며 봤던 묘인들은 모두가 혈교에 의해 마인이 된 자들뿐이었던 것이다.
제정신을 가진 묘인을 처음 만나 봤는데 심지어 그 묘족 청년은 자신들에게 간절하게 부탁을 하고 있었다.
“푸탁입니다. 처희를 토와 주세요. 처희들의 은인인 톡노가 피를 토하고 켸십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