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2화 毒林(독림)-4
잠시 후 풀이 죽은 표정의 다캄이 모옥 밖으로 나왔다.
“청말 최송합니다. 처렇게까지 하실 줄은 몰랐어요. 혀기까지 와 주셨는데 태체 어떠케 사최를 트려야 할지.”
비사영이 피식 웃으며 대답했다.
“뭐, 덕분에 재밌는 구경한 셈 치지. 그래도 노친네가 팔팔한 걸 보니 당장 죽을 것 같지는 않아서 다행이구먼.”
그의 말에 이어 나도 그에게 말했다.
“다음에 또 필요해지면 비룡십삼대로 와서 우리를 찾아. 얼마든지 도와줄게. 그 대신이라면 뭐하지만 우리가 필요한 게 생기면 좀 찾아와도 될까?”
내 말에 그가 반색하며 힘차게 고개를 끄덕였다.
“네! 물론이지요! 헐마든지 토와 드릴케요!”
그의 순박한 모습에 나는 속으로 웃음 지었다.
그에게 빚을 지워 놓은 것만으로도 여기까지 온 목적은 충분히 달성했던 것이다.
해독초를 찾는 일이나 밀림 안쪽을 안내받는 일을 부탁할 수 있는 인맥을 만드는 것. 그게 원래의 내 목적이었으니까 말이다.
노인의 정체에 관한 것이 조금 마음에 걸리기는 했지만 본인이 저렇게 완강한 이상 어쩔 수 없지 않겠는가.
나는 한결 개운해진 마음으로 조장에게 말했다.
“그럼 돌아가죠, 조장. 지금 가면 시간도 넉넉하겠네요.”
하지만 설풍 조장은 내 말에 대답하지 않았다.
그는 무언가를 골똘히 생각하는 눈빛으로 모옥을 바라보고 있었다.
“조장?”
그러자 그는 갑자기 다시 모옥 쪽으로 걸어가기 시작했다.
우리는 당황한 표정으로 서로 시선을 교환했다.
설풍 조장은 모옥 앞에서 독노에게 말을 걸기 시작했다.
“어르신, 오해가 좀 있으신 것 같습니다.”
그러자 안쪽에서 예의 분노한 목소리가 들려왔다.
“오해는 무슨 오해! 당장 꺼지란 말이다! 이 망할 놈들아!”
하지만 설풍 조장은 아랑곳하지 않고 계속 말을 이었다.
“일단 저는 비룡대가 맞긴 하지만 정파인이 아닙니다. 그리고 뭘 뜯어먹기 위해 온 게 아니라 어르신을 돕기 위해서 일부러 온 겁니다.”
“닥쳐라, 이놈! 어디서 거짓부렁이냐?! 비룡대인데 정파는 아니라니! 차라리 개새끼인데 짐승은 아니라고 하지 그러느냐?!”
엄청난 폭언이었지만 조장은 전혀 화를 내지 않았다. 오히려 슬쩍 웃음 짓고는 다시 입을 열었다.
“그럼 저와 내기 한번 하시겠습니까? 제가 정파가 아니라는 걸 증명할 수 있다면 저희가 어르신의 상세를 볼 수 있도록 말입니다.”
“뭐라고?!”
“그럼 허락하신 걸로 알고 들어가겠습니다.”
조장이 들어가자 그를 보고 있던 청연 소저가 비사영에게 물었다.
“조장이 정파인이 아니었나요?”
비사영이 어깨를 으쓱했다.
“나도 잘 모르겠소. 조장의 사문에 관한 건 한 번도 들어 본 적이 없어서.”
비단 비사영만이 아니라 아마 십삼대의 누구도 조장의 진면목은 알지 못할 것이었다.
적어도 아직까지는 말이다.
나는 문득 지난 삶에서의 일을 떠올려 봤다.
전선이 완전히 무너졌던 그날 알게 됐던 그의 진정한 신분을….
그 신분은 실로 놀라운 것이 아닐 수 없었다.
붉은 광채를 뿜어내던 눈과 그 압도적인 무위가 생생히 기억났다.
그때 모옥 안에서 깜짝 놀란 노인의 목소리가 들려왔다.
“저, 적?! 네, 네놈이 대체 왜 비룡대에 있단 말이냐?!”
조장이 저 질문을 받는 것을 지난 삶에서도 본 적이 있었다.
그때 조장은 이렇게 대답했었다.
스스로에게서 도망쳐 왔었는데, 어느새 소중한 것들이 생겨 버렸다고.
잠시 후 우리는 다시 모옥 안으로 들어갈 수 있었다.
모옥 안에서 조장은 이미 노인의 맥을 잡고 진맥을 하는 중이었다.
하지만 그 표정은 매우 심각했다.
그 옆에선 다캄과 동생들이 숨을 죽이고 그 모습을 지켜보고 있었다.
“흥! 말하지 않았더냐? 네놈이 어떻게 할 수 있는 상세가 아니라고! 공연히 헛수고만 하는구나!”
노인은 여전히 못마땅한 얼굴로 투덜거리고 있었다.
하지만 그 목소리가 아까보다 훨씬 부드러워져 있음을, 그리고 그 속에 섞인 한 줄기 미안함과 염려를 나는 느낄 수 있었다.
잠시 후 진맥을 마친 조장은 깊은 한숨을 내쉬었다.
“죄송합니다, 어르신. 어르신의 말씀대로 제 능력으론 어떻게 해 볼 수가 없군요.”
그러자 다캄과 동생들이 안타까운 표정을 짓는 가운데 노인이 코웃음을 쳤다.
“당연하지! 평생을 의술과 무공을 연구해 온 나도 어쩌지 못하는 걸 네놈이 뭘 어떻게 한단 말이냐?”
조장은 이제 자리에서 일어나 다캄에게도 사과했다.
“미안하다, 다캄. 내 능력이 너의 기대에 미치지 못하는구나.”
“아, 크, 크런….”
다캄이 실망한 얼굴로 고개를 푹 숙이자 조장이 노인에게 꾸벅 인사를 하고는 등을 돌렸다.
“자, 이제 진짜 돌아가지.”
그때였다.
노인이 비릿한 표정으로 웃으며 조장에게 물었다.
“신분도, 성정도, 정말 이상한 놈이 아닐 수 없구나. 끝내 저 녀석들에게도 말하지 않을 참이냐?”
조장이 무거운 표정으로 노인을 다시 돌아봤을 때, 그가 다시 말을 이었다.
우리 모두를 경악하게 만든 그런 말을….
“내가 혈교의 마두라는 사실을 말이다.”
충격적인 발언이 아닐 수 없었다.
비사영이 눈을 부릅뜨고 소리쳤다.
“뭐, 뭐라고?!”
분노한 비사영의 목소리가 떨려 나오고 있었다.
“당신이…. 혈교의 마두라고?!”
설풍 조장이 무거운 눈빛으로 그를 바라봤다.
나는 솔직히 이미 짐작하고 있던 사실이었다.
마인들에 대한 지나치게 많은 지식, 그리고 정파를 끔찍하게 싫어하는 성정. 은퇴한 혈교의 마두일 확률이 높다고 생각했던 것이다.
그리고 표정을 보건대 청연 소저 또한 이미 짐작했던 것 같았다.
하지만 다캄의 말을 듣기에 그는 이미 오래전부터 묘인들을 살리기 위해 노력해 왔었다고 했다.
현재 다캄과 동생들의 울타리이기도 하고 말이다.
그래서 그가 악독한 자만 아니라면 그 사실을 모른 체하려고 생각했던 것인데, 혈교도들에게 사문이 멸문당하다시피 한 비사영은 그럴 수 없는 것이 당연했다.
“조장, 이게 어떻게 된 거요?! 저자가 정말 혈교의 마두란 말이오?!”
한숨을 내쉰 설풍이 대답했다.
“미안하네, 사영. 다캄과 동생들을 생각해 차마 자네에게 말하지 못했다네.”
그러자 비사영이 배신감 가득한 눈빛으로 조장을 바라보더니만 이내 분노한 눈빛으로 도를 뽑아 들었다.
챵!
“혈교의 마두! 조장은 몰라도 나는 네놈을 용서할 수 없다!”
그러자 깜짝 놀란 다캄과 동생들이 황급히 자신들의 몸으로 노인의 앞을 가렸다.
“아, 안 툅니다! 찰못했어요! 체발 용서하세요!”
“안 돼요! 제발 살려 주세요!”
노인은 킬킬거리며 그런 비사영을 비웃었다.
“그래그래. 그래야 내가 아는 정파지. 너희는 어린 아해들이야 홀로 내버려지든 말든 어떤 상황에서도 척마멸사를 해야 직성이 풀리는 족속들이 아니더냐?! 크하하하! 척마멸사! 정말 웃기는 말이로다!”
“닥쳐라, 마두!”
비사영은 금방이라도 내려칠 듯 도를 들어 올렸지만 그의 손은 풍랑을 만난 듯 덜덜 떨리고 있었다.
다캄과 동생들은 이제 그런 그의 몸에 매달려 사정하기 시작했다.
“횽서하세요! 체발!”
“독노를 죽이지 마세요, 대협!”
“안 돼요, 우리 할아버지란 말이에요!”
비사영은 아이들의 절절한 몸짓에 일그러진 얼굴로 노인을 바라봤다.
하지만 노인은 여전히 킬킬거리며 그를 비웃고 있었다.
그러자 비사영이 분노한 얼굴로 소리쳤다.
“혈교의 마두! 네놈이! 대체 네놈이 어떻게 정파를 비웃는단 말이냐?! 뭘 잘했다고!”
하지만 노인도 지지 않았다.
그의 눈빛 또한 분노로 이글거리고 있었다.
“어떻게 비웃냐고?! 왜 못 비웃는단 말이냐?! 얼마든지 비웃을 수 있다! 이 위선자 놈들! 네놈들에게 모든 것을 잃은 나는 얼마든지 네놈들을 비웃을 수 있단 말이다! 어디 비웃기만 할 것 같으냐?! 아주 세상에서 말살시켜 버릴 것이다! 어서 오너라! 내 비록 정상이 아니어도 네놈 하나쯤은 전혀 문제없다!”
“그래?! 오냐! 네놈 소원대로 해 주마!”
“아악! 안 돼요!”
“체발 살려 주세요!”
금방이라도 도를 내리칠 것 같았던 비사영은 결국 자신에게 울며 매달리는 아이들을 떨쳐 내지 못했다.
그의 표정이 잠시 동안 몇 번이나 변하고 있었다.
결국 그는 일그러진 얼굴로 아이들을 바라보다가 덜덜 떨리는 손을 힘없이 내려 버렸다.
그러고는 씹어뱉듯 말했다.
“난 비종문의 대제자 비사영이다. 내 사문에도 이 아이들만 한 사제들이 있지. 이런 아이들의 뒤에나 숨다니 비겁하기 그지없는 놈이로구나. 하긴, 그러니 혈교의 마두겠지만.”
그렇게 말한 비사영은 허탈한 표정으로 다시 납도하고는 등을 돌렸다.
“오늘 일은 기억에서 지우겠다. 난 네놈을 본 적이 없는 거다, 혈교의 마두 놈아.”
그때였다.
무언가 충격받은 것 같은 표정의 노인이 문득 떨리는 목소리로 비사영에게 물었다.
“비종문이라고? 설마 광서성의 비종문 말이냐?”
비사영이 등을 돌린 채 코웃음을 치며 대답했다.
“흥, 비종문이 다른 곳에 또 있다더냐?”
그러자 노인이 작게 중얼거렸다.
“무황총 혈사.”
그 말이 애써 참으려 하던 비사영의 분노를 다시 당기고야 말았다.
“뭐라고?!”
분노한 비사영이 이글거리는 눈빛으로 뒤돌아 소리쳤다.
“네놈이 감히 내 앞에서 그 일을 입에 담는단 말이냐?!”
하지만 노인은 비사영을 분노케 하려고 그 말을 한 것이 아니었던 모양이었다.
깊게 한숨을 내쉰 그는 움직일 수 있는 한쪽 팔과 한쪽 다리만으로 침상에서 내려오더니 비사영의 앞에 힘겹게 무릎을 꿇었다.
“내 가족, 내 모든 것을 점창파와 정파 놈들에게 잃었다. 내 결코 복수를 후회하지는 않으나, 그래. 무황총에서 억울하게 죽었던 자들의 후손이라면 나를 죽일 자격이 있겠지.”
“…대체 무슨 개소리를 하는 거냐?”
혼란스러운 눈빛으로 묻는 비사영의 앞에서 노인은 담담히 고백했다.
그것은 우리가 상상도 하지 못했던 엄청난 고백이었다.
“무광과 함께 무황총 혈사를 계획한 자가 바로 나다. 네 사문의 어른들을 죽인 원수가 바로 나란 말이다.”
두둥!
머릿속에서 북소리가 울린 것 같았다.
뭐라고?
무황총 혈사를 계획한 자라고?
방금 말한 무광이라는 이름이 설마 혈교 교주 사혜혈마 전무광을 말하는 건가?
우리는 벌려진 입을 다물 수가 없었다.
비사영이 덜덜 떨리는 눈빛으로 물었다.
“대체, 대체 무슨 개소리를 하는 거냐? 네놈이 무황총 혈사를 계획했다고? 무슨 말도 안 되는 소리냐?! 그런 자가 왜 여기서 이러고 있다는 거냐?!”
노인이 담담히 대답했다.
“내 사정까지 알 필요는 없다. 이해해 달라고도 안 하겠다. 그저…. 미안하구나. 그러니 나를 죽이고 네 원한을 풀도록 하여라.”
비사영이 절규하듯 소리쳤다.
“닥쳐! 네 멋대로 말하지 마라! 이해하고 안 하고는 내가 판단한다! 너는 말해라! 무슨 일이 있었는지 다 털어놓으란 말이다!”
비사영의 절규에 노인은 무거운 눈빛으로 그를 바라보다 천천히 입을 열었다.
노인의 이름은 석경달, 과거 운남의 정파였던 전가장의 총관이었다고 했다.
그리고 그는 당시 전가장의 가주였던 전무광과 막역한 친구 사이이기도 했다.
당시 전가장은 백여 년 전 천하 십검의 일인이었던 전광검객 전표승의 독문 무공인 전광검법이 절전된 상태였고, 그래서 그 전광검법을 다시 복원하는 것이 전가장의 오랜 숙원이었다.
오랜 시간 친구인 석경달과 전광검법의 복원을 추진해 오던 전무광은 어느 날 과거 선조들의 비밀 연공실을 발견할 수 있었다.
그리고 그곳에서 드디어 실전되었던 전광검법을 되찾을 수 있었다.
엄청난 경사가 아닐 수 없었다.
전가장의 모든 이들이 기쁨에 벅차올랐다.
하지만 그때는 알지 못했다.
그것이 재난의 씨앗이 될 줄은….
빌미가 된 것은 비밀 연공실이 있었던 곳이 인근 마가장의 영역이었다는 것이었다.
당시 마가장의 장주 마용척은 연공실이 자신의 영역에 있었으므로 전광검법 또한 자신들 마가장의 것이라고 주장해 왔던 것이다.
어이가 없는 일이 아닐 수 없었다.
그럼 그들의 영역에 선조들의 유해가 있으면 선조들이 마씨라도 된단 말인가?
전무광은 말도 안 된다며 일축했다.
그러자 마용척은 판단을 내려 달라며 운남성의 주인이라고 할 수 있는 구대문파 점창파를 끌어들였다.
그때까지도 전무광은 자신이 있었다.
우연히 입수한 무공도 사문에 돌려주는 것이 무림의 도의이건만 정파의 최고봉인 점창파가 마용척의 손을 들어 줄 리 없다고 믿었던 것이다.
하지만 그때의 전무광은 미처 알지 못했다.
마용척의 아들 마원웅이 점창파 장문인의 수제자라는 사실을….
점창파는 결국 마가장의 손을 들어 주었다.
그러고는 전무광에게 전광검법을 마가장에 돌려주라며 압박을 가해 오기 시작했다.
실로 기가 막힌 일이 아닐 수 없었다.
총관이었던 석경달은 그때 전무광에게 제안했다.
자신이 몰래 무림맹에 다녀오겠다고.
무림맹에 가서 중재해 달라고 부탁하겠다고 말이다.
다른 방법이 없었던 전무광은 눈물을 흘리며 석무경을 배웅했고, 석무경은 최선을 다해 빠르게 무림맹으로 갔다.
하지만 거기까지가 끝이었다.
점창파가 이미 손을 써 놨는지 어느 누구도 석무경을 만나 주지 않았던 것이다.
천하제일의 협객이라던 맹주는 물론 장로들조차 누구 한 명 만날 수가 없었다.
그의 목소리는 완전히 차단된 상태였다.
어찌할 바를 몰라 발을 동동 구르고 있던 석경달은 갑자기 비보까지 전달받게 되었다.
전가장이 정체를 알 수 없는 자들로부터 습격을 받았다는 소식이었다.
깜짝 놀라 돌아가 본 전가장은 이미 폐허가 되어 버린 상태였다.
전무광은 살아 있었지만, 다른 식솔들은 누구 하나 살아남지 못했던 것이다.
석경달의 가족들 또한 마찬가지였다.
피눈물을 흘리며 복수를 부르짖는 석경달에게 전무광은 힘없이 고개를 저으며 말했다.
저들이 전무광의 어린 딸을 데려갔다고.
얌전히 있지 않으면 하나 남은 딸마저 다시는 볼 수 없을 거라고 경고했다고 말이다.
그 후, 복수할 방법을 찾아 떠돌던 전무광과 석무경이 만난 이들이 바로 혈교의 잔당들이었다.
무림의 공적이었지만 이제 그들에겐 단 하나 남은 복수의 수단인 그들을 말이다.
거기까지 들은 우리는 뭐라고 말을 꺼낼 수가 없었다.
무림인에게 있어 지인의 복수는 율법과도 같았다.
하물며 가족과 가문을 모두 잃은 그들의 복수를 어떻게 욕할 수가 있단 말인가.
나는 처음 들어 보는 그 안타까운 비사에 탄식하며 말했다.
“그래서 무황총 혈사를 계획했던 거였군요. 처음부터 점창파를 노린 것이었어요. 그들이 절대 운남성 안에서 일어나는 일에 탐욕을 부리지 않을 리가 없다고.”
노인은 허탈하게 웃으며 고개를 끄덕였다.
“그래. 당연한 일이었지. 놈들은 딱 우리 생각대로 행동해 줬다. 그래서 나는 단 한 번도 그 일을 후회해 본 적이 없다. 하지만….”
그가 무거운 눈빛으로 비사영을 보며 말했다.
“그놈들이 거기 모여든 모든 무인을 다 죽이려고 무황총 안으로 몰 것까지는 예상치 못했었다. 그다지 위협적이지 않은 힘없는 무인들까지 다 죽이려고 할 줄은. 하지만 이 모든 건 그저 변명일 뿐이다. 확실한 건 내 복수가 결국 또 나와 같은 이들을 만들고 말았다는 것이지. 그러니 너는 나를 욕할 자격이 있다. 또 죽일 자격도 있지. 자, 나를 죽이거라. 내 원한을 갚기 위해 너희 사문 어른들을 희생시켰듯이 너도 나를 죽여 사문의 원한을 갚도록 해라.”
담담하게 읊조리는 그의 말에 다캄과 아이들이 그에게 매달렸다.
“톡노!”
“할아버지, 안 돼요!”
하지만 노인은 바위처럼 꿈쩍도 하지 않았다.
그저 담담하게 비사영을 바라보고 있을 뿐이었다.
허탈한 눈빛으로 멍하니 허공을 보고 있던 비사영이 문득 물었다.
“근데 그런 대단한 자가 왜 여기서 이러고 있는 거요? 배신이라도 당한 거요?”
“…내가 나왔다. 나의 목표는 오직 복수뿐이었지만, 그 사이 무광에겐 다른 꿈이 또 생긴 것 같더구나. 그걸 지켜볼 수도, 막을 수도 없었다.”
그러자 비사영이 비웃듯이 물었다.
“그래서 여기서 묘족 아이들을 돌보며 살고 있었던 거요? 속죄라도 하시려고?”
그 말에 노인은 힘없이 웃으며 고개를 저었다.
“내가 죽인 목숨이 몇인데 아이들 몇 보살핀다고 속죄가 되겠느냐? 그저…. 눈에 밟혔을 뿐이다.”
그 말을 들은 비사영이 킥킥거리고 웃기 시작했다.
“그저 눈에 밟혔다고? 큭큭큭, 큭큭큭큭.”
그러곤 버럭 소리쳤다.
“이런 시팔! 당신 때문에 내가 어떻게 살았는지! 내 사제들이 어떻게 살고 있는지 알기나 해?! 고아였던 나를 받아 준 사부님들 생각에 망해 가는 그곳을 나올 수도 없었어! 점소이에, 심부름꾼에 안 해 본 일도 없었지! 그뿐인가?! 구걸도 해 봤어! 사문에 먹을 게 떨어져서! 내 사제들 굶기지 않으려고 구걸도 하고 다녔다고! 지금도 내 사제들은 그렇게 살아! 근데 눈에 밟혀?! 눈에 밟혔다고?! 왜?! 씨발, 혈교의 마두라면 끝까지 마두답게 살았어야지! 왜 그따위 짓을 하고 지랄인데?! 왜 그따위로 살고 지랄이냐고!”
그렇게 울부짖는 비사영의 눈에선 눈물이 줄줄 흘러내리고 있었다.
노인은 그저 눈을 꼭 감은 채 고개를 숙이고 있을 뿐이었다.
한참 동안 허공을 보며 눈물을 흘리던 비사영은 문득 다시 킥킥거리며 웃기 시작했다.
“정말 웃긴 게 또 뭔지 알아? 주태경, 명문 점창파의 제자라는 주태경 놈을 만났을 때도 비종문도라는 말을 했었어. 그랬더니 놈이 거기가 어디냐고 되묻더군. 그래서 무황총의 얘기를 해 줬지. 많은 걸 바란 건 아니었어. 그저 미안해하는 표정만이라도 보고 싶었었지. 그랬더니 그 씨발 놈이 내 스승님을 비웃는 것도 모자라 나를 죽이려고 하더군. 근데…. 이제 혈교의 마두를 만났는데, 그 마두는 비종문도라는 말만 듣고도 내게 무릎을 꿇고죽음으로 사죄하겠다네. 이런 씨팔. 이건…. 이건 진짜 너무하잖아? 진짜 너무한 거 아니냐고.”
아무도, 무엇도 말할 수 없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