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3화 毒林(독림)-5
비사영은 결국 노인을 죽이지 못했다.
아니, 죽이지 않았다.
자신을 죽이라고 계속 말하는 노인에게 버럭 화를 냈을 뿐이었다.
“내가 지금 당신을 죽이면! 또 나 같은 녀석들을 만들라고?! 아니면 다캄과 저 아이들도 당신과 함께 다 죽일까?!”
그 말에 차마 대답하지 못하는 노인에게 비사영이 씹어뱉듯 말했다.
“책임지지도 못할 말 하지 말고, 살아 있는 동안 최대한 갚아.”
“살아 있는 동안, 갚으라고?”
그러자 비사영이 내 쪽을 보며 그에게 말했다.
“난 멍청해서 잘 모르겠지만 내 똑똑한 친구가 영감 지식이 필요한 모양이더군. 나중에라도 혈교로 쳐들어가기 위해선 정보가 필요하다고. 그러니 당신이 알고 있는 것들 다 털어놔. 혈교에 관한 것이든, 약초, 독초에 관한 것이든 모두 다!”
그러자 노인이 깊은 눈빛으로 그를 보며 물었다.
“…정말 그걸로 되겠는가?”
“씨팔! 되겠냐?! 그냥 그거라도 하라고! 자꾸 나 긁지 말고! 에잇! 애들 앞에서 욕을 할 수도 없고.”
욕이야 이미 많이 한 것 같긴 하지만 굳이 지적하진 않기로 했다.
우리는 그의 어깨를 따듯하게 다독여 주었다.
전, 현생을 통틀어, 내 뒤에 남아 죽었을 때를 제외하곤 오늘의 비사영이 가장 멋있어 보이는 것 같았다.
노인 석경달은 잠시 무언가를 생각하더니 다캄에게 말했다.
“가서 지난번에 만들어 둔 것 좀 가져오려무나.”
그러자 다캄이 들고 온 것은 믿을 수 없게도 깊은 향기를 풍기고 있는 단환이었다.
노인이 말했다.
“대환단까지는 몰라도 소환단 정도는 될 게다. 사죄라기엔 말도 안 되니 그냥 길에서 주웠다고 생각하거라.”
당황한 비사영이 소리쳤다.
“뭐, 뭐, 뭐?! 이, 이따위 걸 주면 내 마음이 풀어질 것 같아?! 나, 난 그런 사람 아니거든?!”
하지만 멍하니 그것을 받아 드는 모습을 보면 이미 좀 풀어진 것 같기는 했다.
우리는 빙긋이 웃으며 그를 축하해 줬다.
“영약 같은 거 먹어 본 적 없다고 투덜거리더니만 잘됐네. 소원 성취했는걸?”
“그러게요. 소환단과 동급이라니, 정말 축하해요.”
“이제 사영도 쑥쑥 성장할 수 있겠군. 더 빡세게 굴려 줄 테니 각오하게.”
하지만 물끄러미 그것을 바라보던 비사영은 그걸 우리에게 내밀며 말했다.
“이거…. 나눠 먹읍시다.”
너무 의외인 말에 우리가 눈을 동그랗게 떴을 때 그가 황급히 변명했다.
“뭐, 다른 뜻은 없소. 어차피 외기가 오 할 이상이면 주화입마에 걸린다고 하지 않았소. 난 그러기도 싫고, 또 진이 놈에게 당장 내공이 필요하기도 하고, 그리고 조장과 청 소저가 더 강해져야 나를 더 안전하게 지켜 줄 것 아니오! 뭐 그런 뜻이라오. 그러니….”
주절주절 변명을 늘어놨지만, 우리가 그의 마음을 모를 리 없었다.
오늘의 녀석은 아무래도 멋있어지기로 작정을 한 모양이었다.
설풍 조장이 따뜻한 미소를 지으며 말했다.
“그래, 자네 성의를 봐서라도 내 꼭 더 최선을 다해 강해지도록 하겠네. 다만 나는 지금 영약이 필요 없다네. 내공 팔십 년의 한계에 걸려 있는 상태라 깨달음이 없으면 어차피 더 쌓을 수도 없거든.”
청연 소저 또한 웃으며 대답했다.
“저도 마찬가지예요. 지금은 어차피 영약을 섭취해 봐야 내공을 쌓을 수도 없어서 마음만 받을게요.”
일반적인 사람이 쌓을 수 있는 내공은 일 갑자, 육십 년이 한계였다. 아무리 영약을 밥처럼 먹어도 그 이상은 그릇이 꽉 차 더 이상 내공이 쌓이지 않는 것이다.
하지만 거기서 깨달음을 얻게 되면, 그러니까 절정의 벽을 넘으면 다시 칠십 년까지 쌓을 수 있을 만큼 내공의 그릇이 커졌다.
거기서 또 깨달음을 얻어야 팔십 년, 그렇게 차근차근 깨달음을 얻다 마침내 내공 백 년의 벽을 넘어선 자들을 초절정이라고 부르는 것이다.
그런 그릇의 한계가 없었다면 영약을 싹쓸이할 수 있는 갑부들이 전부 다 무림 최고의 고수가 됐었을 테니 그 나름대로 공평한 자연의 섭리라고 할 수 있었다.
설풍 조장과 청연 소저는 지금 그 한계에 걸려 더 이상 내공을 쌓을 수 없는 상황이라고 말하고 있는 것이었다.
설풍 조장이 아마 내공 팔십 년의 벽에 막혀 있을 테고, 청연 소저는 일 갑자, 절정의 벽에 막혀 있는 것이겠지.
우리의 대화를 어이없는 표정으로 듣고 있던 석경달 노인이 말했다.
“내 살다 살다 영약을 차지하려 싸우는 건 많이 봤어도 서로 양보하려는 광경은 처음 보는구나. 너희는 대체 뭐 하는 놈들이냐?”
그 말에 우리는 서로 시선을 교환했다.
그의 말대로였다.
천금을 준다 해도 인연이 닿지 않으면 구할 수 없는 것이 소환단인데 그걸 남들과 같이 먹자고 하는 무림인이 어디 있을 것이며, 설사 지금 당장 먹을 수 없다 하더라도 영약을 거절하는 사람이 어디 있단 말인가.
지금 내 눈앞에 있는 사람들을 제외한다면 말이다.
서로에게서 느껴지는 이 따뜻한 느낌이 그렇게 푸근할 수가 없었다.
노인이 짜증 난다는 듯 손을 내저으며 다시 말했다.
“내 이제껏 살아온 삶이 다 허무해지려 하는구나. 늙은이 좀 그만 괴롭히고 아무나 빨리 먹어 버려라. 그리고 주화입마 따위는 걱정할 필요도 없다.”
“…예? 주화입마를 걱정할 필요가 없다구요?”
제일 먼저 그의 말뜻에 대해 깨달은 건 나와 청연 소저였다.
퍼뜩 놀란 우리가 서로를 바라봤다.
전부터 궁금해하지 않았던가.
흡정을 통해 내공을 쌓는 혈교도들이 왜 주화입마에 걸리지 않는지를….
침을 꿀꺽 삼키고는 물었다.
“뭔가 비법이 있는 겁니까?”
그러자 그가 의미심장하게 웃으며 대답했다.
“너희는 이제 혈교의 제일 큰 비밀 중 하나를 알게 되는 것이다.”
그렇게 말한 그가 내민 것은 검은 환약들이 담긴 주머니였다.
“이건 독단이다.”
“독단이요?”
“그래, 아주 미약한 독기가 들어 있는 독단이지.”
이어진 그의 설명은 이랬다.
오랜 시간 타인의 정기를 흡수해 내공을 쌓아 왔던 혈교도들은 정기적으로 미약한 독기를 섭취할 경우 주화입마가 일어나지 않는다는 사실을 발견했다는 것이었다.
“굳이 비유를 하자면 주화입마라는 건 내부의 정순하지 못한 내공이 정순한 내공과 충돌을 일으키는 것인데, 외부의 적이 생기니 서로 충돌하지 않게 됐다고나 할까?”
입이 떡 벌어지는 사실이 아닐 수 없었다.
“그, 근데 그게 어떻게 아직까지 전혀 알려지지 않았을까요?”
그러자 그가 웃으며 대답했다.
“말하지 않았더냐? 혈교의 가장 큰 비밀 중 하나라고. 게다가 설사 독단을 갖고 있던 자가 죽어서 빼앗기더라도 그저 독단일 뿐이지 않으냐? 혈교도가 독단을 갖고 있는 것이 뭐 특별한 일이라고 생각하겠느냐?”
“하아.”
역사적으로 수없이 많은 혈마들을 죽이고 혈교도들을 핍박했음에도 아직까지 그들을 박멸할 수 없었던 이유는 혈교도가 되면 쉽게 내공을 쌓을 수 있다는 유혹 때문이었다.
일 갑자의 내공을 쉽게 쌓아 금세 일류 최상급이 되곤 했으니 절정 고수의 수도 쉽게 늘릴 수 있었던 것이다.
물론 오히려 그렇게 쉽게 내공을 쌓았기에 그 이상의 깨달음을 얻어 발전하는 것은 더 힘들었지만, 그 정도만으로도 무림에선 충분히 강자의 반열에 들 수 있었다.
근데 우리가 오늘 그 비밀을 알게 된 것이었다.
문득 청연 소저가 말했다.
“말 나온 김에 두 분 다 지금 영약을 섭취하는 게 어떨까요? 어차피 선우 공자는 돌아가자마자 대결을 앞두고 있잖아요?”
조장 또한 동의했다.
“나도 동감이네. 방법을 찾은 이상 망설일 필요가 없을 것 같군.”
내 생각에도 그게 맞는 것 같았다.
그래서 나와 비사영은 바로 영약을 섭취하고는 바로 운기조식에 들어갔다.
석경달 노인도, 조장과 청연 소저도 흐뭇한 눈으로 우리를 바라보고 있었다.
그때 옆에서 지켜보고 있던 다캄이 문득 동생들에게 물었다.
“큰테 라쿤은 어티 캈어?”
“라쿤 형은 다캄 형이 안 들어와서 새벽에 찾으러 나갔는데?”
“크래? 설마 멀리 칸 컨 아니켔지?”
***
같은 시각 독림 근처.
퍼어엉!
“캬아아앙!”
가죽 부대가 터지는 소음과 함께 거대한 흑표범이 애처로운 비명을 지르며 튕겨 나갔다.
아까 설풍과 싸움을 벌였던 그 흑표였다.
흑표범은 고양잇과 동물답게 공중에서 자세를 바로잡으며 바닥에 착지했지만, 그 위로 거구의 남자가 덮치는 것을 막아 내지는 못했다.
퍼어엉!
“캬아아앙!”
남자의 일장이 흑표의 뒤통수를 가격하자 놈은 외마디 비명과 함께 그대로 풀썩 쓰러져 버리고 말았다.
그러곤 다시 일어나지 못했다.
그러자 주변에서 숨죽이고 싸움을 구경하던 남자들이 얼굴에 화색을 띠고는 떠들어 댔다.
“오오오! 역시 탐혈마군이시군! 저런 범상치 않은 요물을 단숨에 해치우시다니!”
“당연한 일이지! 혈마님을 보좌하며 지난 성전에서 활약하신 마군께 저런 미물 따위가 가당키나 한가?!”
부하들의 감탄을 한 귀로 흘리며 탐혈마군 지광옥은 그들에게 명령했다.
“죽이지는 않았으니 저놈도 챙기거라. 독성을 띤 흑표라니, 신기한 놈이로구나. 혈마께서 혹 관심을 가지실지도 모르겠다.”
“예! 알겠습니다!”
몇 명의 부하들이 흑표를 꽁꽁 묶어 포획할 때 뺀질뺀질한 인상의 부하 한 명이 지광옥에게 아부 섞인 목소리로 말했다.
“속하는 마군께서 이런 독물 채취 따위를 위해 직접 발걸음을 하시는 것을 이해할 수가 없습니다. 소 잡는 칼로 닭을 잡아도 유분수지, 이번 일은 혈마께서도 조금 너무하셨던 것 같습니다요.”
그러자 지광옥의 흉포한 눈빛이 그를 향했다.
“네놈이 지금 감히 혈마님의 판단에 의문을 품는 것이냐?”
그 맹수 같은 눈빛에 뺀질뺀질한 부하의 낯빛은 대번에 창백해졌다.
“아, 아닙니다요! 속하가 어찌, 저는 다만 마군께서 직접 여기까지 걸음을 하시기 불편하실까 봐…!”
퍼석!
부하는 말을 끝까지 마칠 수도 없었다.
지광옥이 간단히 휘두른 두꺼운 손이 그의 두개골을 수박처럼 으깨 버렸기 때문이었다.
머리를 잃고 힘없이 쓰러지는 부하의 시체를 보며 지광옥이 무표정한 얼굴로 말했다.
“혈마님께 복종하지 않는 교도는 교에 필요 없다.”
동료의 너무나도 간단한 죽음을 보며 부하들은 침을 꿀꺽 삼키고는 서둘러 표범을 포획하는 일을 마무리 지었다.
지난 정혈대전에서부터 사혜혈마 전무광의 사냥개로서 활약했다는 탐혈마군 지광옥은 과연 소문대로였다.
그 무위도, 그 흉포함도 말이다.
그들은 지금 혈마로부터 맹독성 독물을 채취해 오라는 명령을 받고 독림으로 온 상태였다.
원래 절정 초입 한 명과 일류 최상급 일곱 명으로 이루어진 인원이었는데, 그들의 감독관으로 이번에 탐혈마군 지광옥이 따라왔다.
혈교도들 사이에서도 꽉 막히고 흉포하기로 유명한 그의 합류에 혈교도들은 긴장하지 않을 수 없었다.
게다가 독림에 이제 도착했는데 벌써 세 명이나 죽지 않았던가.
두 명이야 물론 흑표에게 죽었던 것이지만, 그 둘이 흑표에게 당하는 동안 지광옥은 그저 흥미로운 눈빛으로 지켜보고만 있었으니 사실상 부하들의 죽음을 방조했다고 할 수 있었다.
게다가 그들 중 유일한 절정 고수마저도 그가 방금 직접 죽여 버렸던 것이다.
그가 자신들을 어떤 존재로 생각하고 있는지 뼈저리게 느낄 수 있는 부분이었다.
이제 혈교도들 모두는 최대한 빨리 독물을 채취해서 그에게서 벗어나고 싶은 마음뿐이었다.
그때 정찰을 나갔던 부하 한 명이 뭔가를 잡아서 돌아왔다. 어두운 피부의 묘족 남자아이였다.
“마군 어르신! 근처에서 묘족 아이를 하나 붙잡았습니다! 아직 아이인 것을 보건대 이 근처에 묘족들의 은신처가 있는 모양입니다! 게다가 이놈, 생시를 쫓아내는 향낭을 지니고 있었습니다!”
그러자 지광옥의 맹수 같은 눈이 아이에게로 향했다.
점혈을 당해 움직이지 못하는 아이는 눈물을 흘리며 소리를 지르고 있었다.
“아니야! 여긴 나 혼자 사는 곳이라고! 은신처 따위는 없단 말이다! 이 괴물들아!”
지광옥이 흥미롭다는 듯 중얼거렸다.
“독림 근처에 은신처라. 생시들이 독향에 민감한 것을 생각하면 그럴 수도 있겠구나. 거기다 생시들을 쫓는 향낭까지 가지고 있다는 말이지.”
지광옥은 묘족 아이의 목을 낚아채서는 자신의 눈앞으로 들어 올렸다.
아이는 이제 완전히 공포에 질려 있었다.
아이와 눈을 마주친 지광옥이 음산한 목소리로 입을 열었다.
“내 말을 들어라.”
그렇게 말하는 그의 눈은 요사스러운 녹광을 뿜어내고 있었다.
그러자 아이의 눈빛이 점점 몽롱해지기 시작했다.
비록 상대를 완전히 꼭두각시로 만드는 혈고술은 익히지 못했지만, 무공도 익히지 않는 아이 하나를 섭혼하는 것쯤은 탐혈마군 지광옥에게 있어서 그리 어려운 일이 아니었다.
***
설풍과 해청연은 다캄이 내온 차를 마시며 선우진과 비사영의 운기가 끝나기를 기다리고 있었다.
꽤나 긴 시간이었지만 그들은 석경달 노인과 대화하느라 시간이 가는 줄도 몰랐다.
원래 무학자이자 의술을 연구했다는 그의 박학다식함은 두 사람에게 있어 새로운 세계와도 같았던 것이다.
설풍이 충격받은 표정으로 되물었다.
“그럼 지금 두 사람이 먹은 영약이 독물로 만든 것이란 말입니까?”
“그런…. 하지만 독 기운은 전혀 느껴지지 않았는데요?”
“잘 생각해 보거라. 독이란 본디 한쪽으로 기운이 치우쳐 균형을 깨트리게 하는 것들을 말하지 않느냐? 하지만 영약 또한 한쪽으로 기운이 치우치면 독이 된다고들 하지. 그럼 독의 기운을 조합해 균형을 잡아 준다면 그것은 무엇이 되겠느냐?”
“…그게 영약이라는 말씀이시군요?”
“그렇지. 영약이란 본디 조화로운 기운이 깊게 쌓여 있는 것을 말하니 독의 깊게 쌓인 기운을 조화시킬 수만 있다면 그 또한 영약과 다를 바가 없는 것이다. 이것은 비단 내가 만든 이론도 아니다. 과거 괴의라 불렸던 낭빈 어르신께선 독 기운을 조합해 반신불수인 자를 환골탈태시키셨다고 전해지지.”
오랜만에 수준 높은 대화를 나눌 수 있는 상대를 만나자 석경달 노인 또한 내심 신이 났던 모양이었다.
그러다 그들의 대화가 마인들에 관한 것으로 이어졌을 때였다.
“그럼, 마인들. 그러니까 지금 나오고 있는 생시란 것들이 모두 실험체라는 말씀입니까? 더 높은 경지의 생시를 만들기 위한?”
설풍의 질문에 노인이 무거운 표정으로 대답했다.
“그래. 내가 무광의 곁에서 떠난 가장 큰 이유였지. 무광이 만들고 싶어 하는 건 바로….”
그때였다.
창밖을 내다보고 있던 다캄의 동생 한 명이 다급하게 소리쳤다.
“할아버지! 라쿤이에요! 라쿤이 이상한 사람들을 데리고 오고 있어요!”
“뭐라고?!”
그러자 설풍의 부축을 받아 창밖을 내다본 노인의 표정이 창백하게 질려 버리고 말았다.
“저놈은…. 모두 달아나라! 어서 뒷문으로 달아나!”
“무슨 일입니까? 저게 대체 누군데 그러시는 겁니까, 어르신?”
“탐혈마군, 탐혈마군 지광옥이다! 놈이 라쿤을 섭혼해서 이곳까지 찾아왔어! 당장 도망가야 한다!”
그 다급한 말에 설풍과 해청연이 서로의 얼굴을 마주 봤다.
탐혈마군 지광옥.
혈교와 싸우고 있는 이들로서 그 이름은 절대로 모를 수가 없었다.
그는 지난 정혈대전 때부터 수많은 정파인의 목숨을 앗아 갔던 마두이자, 내공이 백 년을 넘는 초절정의 괴물이었던 것이다.
다캄이 그에게 소리쳤다.
“하, 하치만 톡노! 라쿤은 어떠케 하쿠요?!”
“안타깝지만 라쿤은 놈에게 섭혼당했다! 라쿤을 구하려다간 다 죽게 돼!”
노인의 말이 맞았다.
놈이 정말 탐혈마군 지광옥이라면 당장 도망쳐야만 했다.
하지만 설풍은 여전히 운기 중인 선우진과 비사영을 바라보았다.
운기 중인 이들은 움직일 수 없었다.
그러니 설풍 자신 또한 이들을 두고 도망칠 수 없는 것이 당연했다.
설풍이 노인에게 말했다.
“아이들과 함께 피하십시오. 제가 어떻게든 시간을 벌어 보겠습니다.”
“그런 무모한!”
그러자 해청연이 끼어들었다.
“틀렸어요, 조장. ‘제가’가 아니라 ‘우리가’라고 말했어야죠.”
그렇게 말하는 해청연의 얼굴에는 한 점의 망설임도 담겨 있지 않았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