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6화 對決(대결)
“죄송합니다, 한교성 조장님.”
“아아, 괜찮아요, 나 소저. 설풍 녀석이 돌아오거든 간식이나 한번 돌리라고 전해 줘요.”
원래는 칠 조가 오후 순찰을 나가야 하는 시간, 아직 미귀환한 설풍과 조원들 때문에 나서유는 다음 차례였던 일 조에게 순찰을 부탁해야만 했다.
원래 주귀를 사냥하기 위해 근무 시간까지 미복귀한 경우 다음 조들이 순서를 당겨 근무를 나가 주는 것은 정해진 원칙이었다.
하지만 설사 그렇다고 하더라도 정해진 시간보다 먼저 근무를 나가는 것이 유쾌할 리가 없었다.
그런 의미에서 칠 조의 다음 차례가 일 조인 것은 그나마 다행한 일이었다.
원래 나서유와 설풍이 속했던 일 조의 조장 청풍검룡 한교성이 사람 좋게 웃으며 조원들을 다독여 순찰을 나가 줬던 것이다.
나서유의 옆에 있던 천주은이 다행이라는 표정으로 그녀에게 말했다.
“기분 좋게 받아들여 주셔서 다행이네요. 좀 걱정했었는데.”
그 말에 빙긋이 웃으며 나서유가 대답했다.
“일 조장님은 좋은 분이시거든. 비록 좀 게으르고, 식탐이 강하고, 건망증이 심하시긴 하지만 말이야.”
그러자 당황한 듯 눈을 깜빡이며 천주은이 물었다.
“…네? 제가 듣기엔 청성파에서도 알아주는 천재시라고 들었는데요.”
“맞아. 무공에 있어선 정말 천재시지. 비록 그래서 다른 범재들을 이해 못 하시고 상처를 주시기는 하지만 말이야. 정말 좋은 분이시긴 해. 물론 너무 자기 세계가 강해서 부조장 해원 언니가 고생만 하다 잔소리쟁이가 됐지만 말이야. 그럼, 정말 좋은 분이고말고.”
“…네?”
뭔가 쌓인 게 많은 듯한 나서유의 말에 천주은이 배종관을 바라보며 눈빛으로 무슨 상황인지를 물어볼 때, 나서유가 다시 한숨을 내쉬며 말했다.
“그나저나 이 조장님께도 다음 근무를 부탁드려 놔야겠지? 이 조장님은 좀 부담스러운데….”
그녀의 말에 천주은이 약간 굳은 얼굴로 물었다.
“이 조장님은 점창검룡 사군일 조장님이시죠?”
그 질문에 나서유는 약간 걱정스러운 얼굴로 그녀에게 대답했다.
“맞아. 불편하면 나 혼자 갔다 올 테니 주은이는 기다리고 있어도 돼.”
부친이 무황총 혈사에서 사망했던 천주은은 비사영처럼 점창파 문도들을 증오하고 있었다.
그게 십삼대에 처음 들어왔을 때 점창검응 마유겸의 사 조에 들어가지 않았던 이유이기도 하고 말이다.
하지만 천주은은 생긋 웃으며 고개를 저었다.
“괜찮아요. 그래도 함께 싸우는 동료들인데 언제까지나 증오만 하고 있을 수는 없는걸요. 우리 조의 주태경 같은 사람만 아니라면 상관없어요.”
그 말에 나서유가 기특하다는 듯 웃으며 그녀의 머리를 쓰다듬어 줬다.
“그래, 이 조의 사군일 조장님은 그래도 점창파 사람들 중 가장 합리적이신 분이야. 물론 사람이 너무 차가워서 좀 부담스럽기는 하지만, 그게 원래 성격인 거지 딱히 사람을 무시하거나 오만해서 그런 건 아니거든.”
그녀의 말에 배종관도 고개를 끄덕이며 첨언했다.
“맞소, 천 소저. 사군일 조장님은 같은 남자가 봐도 정말 멋진 분이시라오. 누구에게나 공평하게 차갑게 대하시는 정말 잘 벼려진 검과 같은 분이시오.”
“…누구에게나 공평하게 차갑게 대한다는 건 성격이 나쁘다는 말 아닌가요?”
“아, 그게 그렇지 않소. 내가 말을 잘 못해서 그런데 사군일 조장님은 사람을 차별하지 않고 공정하게 대한다는 뜻이오. 무위가 강하든 약하든, 심지어 점창파 사람이든 다른 문파의 사람이든 말이오.”
배종관과 천주은의 대화를 들으며 나서유는 남몰래 한숨을 내쉬었다.
아무렇지 않은 척 다른 조장들에게 다음 근무를 부탁하고는 있지만, 속으로는 무척 불안해하고 있었던 것이다.
설풍의 무위를 잘 알고 있기에 그에게 무슨 일이 생길 거라고 생각지는 않았었다.
하지만 귀환이 이렇게 늦어지는 건 분명 이상했다.
설마….
나서유가 남몰래 두 손을 꼭 모으고 그와 조원들의 무사함을 기원할 때, 문득 누군가가 그녀에게 말을 걸었다.
“설풍은 아직인가?”
그는 바로 점창검비 주태경이었다.
그가 등 뒤로 똘마니 세 명을 거느리고 오만한 표정으로 걸어오고 있었다.
그를 본 나서유가 작게 한숨을 내쉬고는 다시 아무렇지도 않은 표정으로 대답했다.
“좀 늦어지나 봐요. 일 조장님께 순찰을 부탁드렸어요.”
그러자 주태경이 비릿한 웃음을 지으며 중얼거렸다.
“그러게 쓸데없는 짓을 하더니만….”
주태경이 말을 시작하자 그의 뒤에 서 있던 똘마니 하무진, 지만금, 만구인 역시 입을 놀리기 시작했다.
“그 선우 돼지 놈이 태경과 대결하는 게 두려워 일부러 안 오는 거 아닐까?”
“충분히 그럴 만도 하지. 오죽이나 가슴이 떨렸겠어? 지금쯤 설풍에게 사정하고 있을걸? ‘조장, 저 돌아가기 싫어요. 저 좀 살려 주세요’하고 말이지.”
“와하하하, 진짜 웃기다.”
그렇게 말하며 킬킬거리는 세 사람을 한심한 눈으로 쳐다보던 나서유가 말했다.
“세 분은 같은 조원을 떠나 같은 대원으로서도 소속감을 좀 가지셔야겠는데요? 혹시 동료들에게 무슨 일이 생기지 않았을까 걱정하는 게 사람으로서의 도리가 아닐까요?”
그러자 하무진이 비웃는 표정으로 대꾸했다.
“걱정? 우리가 왜? 만약 설풍에게 무슨 일이 생긴다면 드디어 태경이 조장이 될 텐데? 그게 더 잘된 일이 아닌가?”
“그러게. 사실 진작에 그렇게 됐어야 했지.”
“맞아, 맞아.”
이 말이 드디어 나서유의 눈빛을 바꾸고야 말았다.
그저 한심하다는 눈빛이었던 나서유가 이젠 차가운 눈빛으로 그들을 쏘아보기 시작한 것이다.
“주태경 공자가 조장이라구요? 왜죠? 그럴 리도 없겠지만 설풍 조장 다음에 누군가 조장을 해야 한다면 제가 조장을 하는 게 맞는 거 아닌가요?”
“뭐?!”
“뭐라고?! 부조장, 당신이 감히 그런 소리를 하다니!”
그러자 나서유가 기세를 확 뿜어내며 그들을 압박했다.
“감히? 감히라구요? 감히 당신들 따위가 부조장인 내게 그따위 소리를 지껄여요?”
일류 중급의 무인인 그녀의 기세에 아직 이류에 불과한 하무진, 지만금, 만구인 세 명은 금세 하얗게 질려 입을 닫을 수밖에 없었다.
그러자 주태경이 자연스럽게 그들의 앞으로 나와 기세를 받아 내며 말했다.
“나 소저가 훌륭한 무인이라는 건 잘 알고 있소. 하지만…. 조장을 노리기엔 좀 부족하지 않겠소?”
오만한 표정으로 그렇게 말하는 그를 향해 나서유는 생긋 웃으며 대꾸해 줬다.
“제가 부족하긴 하지요. 하지만 주 공자만 하겠어요? 주 공자는 선우진 공자부터 먼저 이기셔야죠. 별로 그럴 일은 없을 것 같지만요.”
그녀의 빈정거리는 말투에 주태경의 얼굴도 굳어졌다.
“그따위 놈이 감히 내 상대가 될 것 같소?”
“모르죠. 근데 제가 보기에 선우진 공자는 주 공자와의 대결은 아예 신경도 안 쓰는 것 같더라구요. 뭐라더라? 별로 중요한 일도 아니라던가?”
“감히!”
주태경이 분노를 터트리자 나서유는 생긋 웃어 주며 몸을 돌렸다.
“그럼 행운을 빌어요, 주 공자.”
하지만 몸을 돌린 그녀의 표정은 바로 굳어져 버렸다.
얼마 전까지 자신과 비슷했던 주태경의 경지가 한 단계 상승했음을 느낄 수 있었던 것이다.
저 상태라면 설사 영약을 섭취한다 해도 선우진이 그를 감당할 수 있을지 의문이었다.
불안함에 마음이 답답해져 오고 있었다.
이 조장인 점창검룡 사군일을 만나러 가며 나서유는 속으로 빌고 또 빌었다.
‘조장, 어서 돌아와요. 저 너무 불안하단 말이에요.’
***
일 조가 오후 순찰에서 돌아올 때까지도 설풍 일행은 복귀하지 못했다.
이제 저녁 순찰을 나가야만 하는 시간, 나서유는 칠 조 대신 저녁 순찰을 나가는 이 조장 사군일과 이 조원들을 배웅하고 있었다.
“사군일 조장님, 고생하세요. 저희 조 때문에 번거롭게 해 드려 죄송합니다.”
그 말에 묵묵히 고개만 끄덕인 이 조장 점창검룡 사군일은 출발하려다 말고 문득 고개를 돌려 나서유에게 말했다.
“설풍은 내가 아는 가장 뛰어난 무인 중 한 명이오.”
그 뜬금없는 말에 나서유가 의아한 얼굴로 되물었다.
“네? 무슨…?”
그러자 사군일은 무심한 얼굴로 다시 한마디만을 남긴 채 뒤돌아 출발했다.
“그러니 너무 걱정하진 마시오.”
무심한 듯 자상한 그의 배려에 멍하니 그의 뒷모습을 보고 있던 나서유는 피식 웃음 지었다.
아무래도 자신의 표정이 많이 안 좋아 보였던 모양이었다.
더 마음을 굳세게 먹어야겠다며 심호흡을 하고는 웃는 얼굴로 뒤돌아 조원들을 바라봤다.
“자! 조장이 없다고 놀지 말고 우리라도 수련을…. 주은아? 왜 그러고 있어?”
문득 바라본 천주은이 새빨개진 얼굴을 두 손으로 감싸고 있었던 것이다.
그녀의 멍한 시선이 사군일의 뒷모습을 향하고 있는 것을 본 나서유는 대강의 상황을 짐작할 수 있었다.
쓴웃음을 지은 그녀가 천주은을 다시 불렀다.
“주은아?! 수련하러 가야지!”
“네?! 네! 네! 언니!”
둔한 배종관은 그 옆에 있으면서도 여전히 좋아 죽겠다는 표정으로 천주은을 힐끗거리고 있었다.
한숨이 절로 나왔다.
그때 또다시 주태경이 다가왔다.
나서유가 한숨을 내쉬며 그에게 물었다.
“또 무슨 일인가요, 주 공자?”
그러자 피식 웃음 지은 주태경이 그녀에게 말했다.
“이쯤 되면 좀 심각한 것이 아닌가 해서 말이오. 대주에게 말해 수색대라도 편성하는 것이 낫지 않겠소?”
전혀 심각하지 않은 표정으로 그렇게 말하는 주태경에게 나서유가 생긋 웃으며 대꾸해 줬다.
“무슨 말씀이세요? 조장의 무위를 누구보다도 잘 아시면서. 아직 고작 사흘째밖에 안 됐는걸요.”
하지만 이번에는 주태경 역시 여유 있는 표정으로 대꾸했다.
“아직이 아니라 벌써가 아니겠소? 내가 알기로 지금까지 밀림 속에 사흘 동안 사라졌다 돌아온 사람은 없는 것으로 알고 있는데 말이오. 분명 그곳의 위치가 왕복 하루면 된다고 했는데 사흘이라…. 너무 과한 믿음을 갖는 것은 좋지 않소. 조장이 되고 싶다면 때로는 냉정하게 상황을 판단하고 현실을 받아들일 수도 있어야 하지 않겠소?”
비열하게 웃으며 그렇게 말하는 주태경의 모습은 그야말로 한 마리의 뱀을 보는 것 같았다.
왜 그의 별호가 점창검비인지 확실히 알 것 같은 느낌이었다.
나서유는 문득 그의 앞에 서 있다는 것만으로도 소름이 끼치는 것을 느꼈다.
하지만 그것과는 별개로 그의 말을 반박할 수가 없었다.
사흘 동안 돌아오지 않았던 사람이 생환한 적이 없었다는 말도 사실이고, 무엇보다 나서유 본인의 마음이 너무도 불안했다.
하지만 주태경의 앞에서 약한 모습을 보일 수는 없는 일. 입술을 꽉 깨물어 마음을 다잡은 나서유가 단호하게 말했다.
“조장이 없을 경우의 판단은 부조장인 제가 합니다. 일단 내일까지 기다려 본 후 조치를 취하도록 하겠습니다.”
그러자 주태경이 피식 웃으며 대꾸했다.
“그렇소? 마유겸 조장님께서는 다르게 생각하시던데 말이오. 아마 내일은 조장 소집이 먼저 이루어질 거요.”
그 말을 들은 나서유의 표정이 순간 분노로 가득 찼다.
“당신! 설마 당신 맘대로 마유겸 조장에게 이 사실을 말한 건가요?!”
하지만 나서유의 분노에도 주태경은 유들유들한 태도로 대꾸했을 뿐이었다.
“다 우리 조와 십삼대를 위해서 한 일이라오. 이 상황이 지속될수록 다른 조원들의 피해만 커지는 것 아니겠소? 문제는 커지기 전에 빨리 해결하는 것이 상책이니 말이오.”
“당신, 정말!”
그때 누군가 끼어들었다.
“그러게 말이야. 문제가 커지기 전에 해결했어야 했는데 내가 너무 물렀었군. 진이, 네 말이 맞았구나.”
“이제라도 아셨으니 됐습니다. 썩은 과일이 있다면 빨리 골라내야 다른 과일들도 안 썩는 법이지요.”
그 목소리에 깜짝 놀란 나서유와 주태경이 홱 고개를 돌렸다.
그러곤 두 사람의 표정이 극명하게 갈렸다.
“조장!”
“설풍?!”
그곳엔 다소 지쳐 보였지만 멀쩡한 얼굴의 네 사람이 웃으며 돌아와 있었던 것이다.
나서유가 감격한 표정으로 자신의 입을 틀어막고, 천주은과 배종관이 환한 얼굴로 그들에게 달려갔다.
“아아아!”
“조장! 사영! 진! 청 소저!”
“꺄아악! 조장! 왜 이렇게 늦었어요! 서유 언니가 엄청 걱정했단 말이에요!”
안길 듯 맹렬하게 달려드는 천주은에게 흠칫한 설풍이 몸을 뒤로 빼며 어색하게 대답했다.
“아, 미, 미안하오. 내가 바보같이 부상을 좀 당하는 바람에 진에게 업혀 오느라 좀 늦었다오.”
그 말에 눈물을 글썽거리며 보고 있던 나서유가 깜짝 놀라 그에게로 달려갔다.
“다쳤다구요?! 어디가요?! 얼마나요? 지금은 괜찮은 거예요?!”
그녀의 살벌한 기세에 눌린 설풍이 정신없이 대답했다.
“아, 내, 내상을 좀 입었는데, 별거 아니오. 오면서 벌써 다 회복했다오. 그리고….”
거기까지 말한 설풍이 어색하게 웃으며, 하지만 평소의 그답지 않은 부드러운 눈빛으로 말했다.
“늦게 돌아와서 미안하오, 나 소저. 그리고 걱정해 줘서 고맙소.”
처음 들어 보는 설풍의 부드러운 말에 나서유는 순간 울컥해 버리고 말았다.
그녀의 눈에서 눈물이 주르륵 흘러내렸다.
그러자 순간 눈물을 흘린 나서유도, 그걸 목격한 설풍도 깜짝 놀라고 말았다.
“아! 이, 이게 왜 눈물이, 아니에요. 이게 제가 슬퍼서 그러는 게 아니라.”
“미, 미안하오. 나 소저. 내가 정말 잘못했소.”
“아, 아니, 그게 아니라니까요.”
그들이 그렇게 서로 당황해하고 있을 때, 그 옆에선 일그러진 표정의 주태경이 선우진에게 말을 걸고 있었다.
“어떻게 시간 내에 돌아오긴 했구나. 분명히 말하지만 네가 설사 조장을 업고 왔다고 해도 달라지는 것은 없다. 내가 대결을 미뤄 줄 거라고는 생각지 마라.”
그러자 피식 웃은 선우진이 그에게 대꾸했다.
“응? 너도 있었냐? 미루긴 왜 미뤄? 빨리 끝내고 쉬고 싶은데. 자, 빨리 하자. 좀 쉬게.”
마치 귀찮은 일을 처리하는 듯 자신을 무시하는 선우진의 말에 분노한 주태경이 검을 움켜잡았다.
“이놈, 감히!”
그러자 선우진이 빙긋이 웃으며 말했다.
“아, 그냥 여기서 할까? 그것도 좋지.”
선우진의 말에 주태경은 멈칫할 수밖에 없었다.
아무리 화가 나도 그럴 수는 없었다.
이 대결은 공개적으로 최대한 많은 사람 앞에서 이루어져야만 했으니까.
주태경은 최대한 많은 사람이 보는 앞에서 이 건방진 놈을 묵사발로 만들고 자신의 실력을 뽐내고 싶었다.
이제 자신도 당당한 일류 상급의 무인이 됐음을, 그래서 자신이 얼마나 뛰어난 인재인지를 모든 이의 뇌리에 강렬하게 새겨 주고 싶었던 것이다.
으득.
이를 갈며 분노를 갈무리한 주태경이 말했다.
“반 시진 후 대련장에서 보자. 도망은 가지 않으리라 믿겠다.”
“잉? 도망을 간다고? 내가? 왜?”
끝까지 어처구니없다는 표정으로 속을 뒤집는 선우진을 외면하고는, 주태경은 빠른 걸음으로 걸어가기 시작했다.
그는 제일 먼저 점창의 장문제자로서 섬기고 있는 마유겸을 찾아갈 생각이었다.
그라면 알아서 판을 키워 줄 테니까 말이다.
잠시 후면 많은 사람들 앞에서 선우진을 짓밟을 수 있다는 기대감에 벌써부터 가슴이 두근거리고 있었다.
놈을 죽일 수는 없겠지만, 죽기 직전까지 몰아붙일 생각이었다.
아주 철저히, 최대한 잔인하게 말이다.
그래서 죽는 것이 더 나았다고 생각하게 만들어 줄 것이었다.
다시는 자신 앞에서 숨도 쉴 수 없도록.
벌써부터 흥분에 온몸이 떨려 오고 있었다.
***
주태경이 멀어지자 비사영이 문득 선우진에게 물었다.
“진이, 너 진짜 괜찮냐?”
선우진이 쓰게 웃으며 대답했다.
“아니, 그럴 리가. 너무 피곤해 쓰러질 것 같다. 지금 안 싸우겠다 그래서 천만다행이로군. 난 바로 운기조식 좀 해야겠다.”
선우진이 그 자리에서 풀썩 주저앉아 운기조식에 들어가자 나서유가 걱정스러운 눈빛으로 설풍에게 물었다.
“오늘 느꼈는데 주태경의 경지가 한 단계 더 오른 것 같더라구요. 선우 공자가 괜찮을까요?”
그 말에 설풍과 비사영, 해청연은 서로를 바라보며 빙긋이 웃음 지었다.
비사영이 자신만만하게 말했다.
“두고 보시구려, 나 소저. 아마 깜짝 놀라게 되실 거요.”
“…네?”
나서유와 천주은. 배종관은 의아한 눈빛으로 서로를 마주 볼 뿐이었다.
***
반 시진을 꼬박 운기하고 일어난 나는 드디어 대련장으로 향했다.
대충 예상은 했지만 대련장에는 꽤 많은 인파가 몰려 있었다.
주태경 녀석이 작정하고 사람을 모은 모양이었다.
사 조장 마유겸은 물론 순찰을 나가 있는 이 조장 사군일을 제외한 다른 모든 조장들은 다 구경을 와 있는 것 같았다.
일 조장 청풍검룡 한교성, 삼 조장 당가검봉 당여은….
놈은 아마 저 많은 사람들 앞에서 나를 밟아 주고 싶은 모양이었다.
하지만….
대련장 중심에 서서 비릿하게 웃고 있는 주태경을 바라봤다.
나를 기다리는 녀석의 얼굴을 보니 문득 지난 삶에서의 기억들이 떠올랐다.
나를 끔찍하게 무시하고 모욕했던 일들도, 사사건건 설풍 조장에게 딴지를 걸어 조에 분란을 일으켰던 것들도, 무엇보다도 저놈 때문에 나서유 소저가 죽었던 장면이 내 머릿속에 선명히 떠오르고 있었다.
문득 웃음이 흘러나왔다.
드디어, 두 번째 삶에서야 드디어 그 모든 걸 갚아 줄 시간이 온 것이다.
대련장에 들어서자 놈이 희열에 찬 눈빛으로 내게 말했다.
“죽이지는 않겠다. 하지만 죽고 싶을 만큼 수치스럽게 만들어 주지.”
대충 무슨 생각을 하는지 알 것 같았다.
사실 죽이고 싶었는데 너무 목격자가 많아 죽일 수는 없다고 생각한 거겠지.
피식 웃고는 손가락을 들어 녀석에게 까닥거려 줬다.
“닥치고, 와라.”
순간 놈의 얼굴이 딱딱하게 굳어지고는 바로 검파를 잡으며 소리쳤다.
“이놈! 감히!”
그러곤 놈의 검이 빛살이 되어 나를 덮쳤다.
슈하악!
놀라운 속도.
태양마저 쏘아 떨어뜨린다는 점창파의 찌르기였다.
그 찌르기가 내 오른쪽 가슴을 관통하는 순간, 가볍게 움직인 내 몸이 바람에 날리는 꽃잎처럼 자연스럽게 놈의 검을 비껴 냈다.
검은 여전히 뽑지 않은 채였다.
“뭐?!”
살짝 눈을 찡그린 놈이 그대로 연환초를 전개했다.
희뿌연 검기를 뿜어내는 놈의 검이 안개 속에서 떨어지는 빗줄기처럼 쏟아지고 있었다.
“하아아압!”
슈하아악!
하지만 결과는 마찬가지였다.
놈의 사일검법은 전생부터 이미 훤하게 알고 있는 데다, 이제는 공력도 경지도 내게 상대가 되지 않았던 것이다.
더군다나 주귀 사건 이후로 천풍신법의 성취는 이미 지난 생을 넘어선 상태였다.
바람에 날리듯 부드럽게 움직이는 내 몸이 약간의 발놀림만으로 소나기 같은 놈의 찌르기를 모두 피해 내고 있었다.
힐끗 바라보니 비사영의 표정이 멍해진 상태였다.
아마 감동한 모양이었다.
비종문의 절기 천풍보법이 점창파의 사일검법을 무력화시키고 있었으니까 말이다.
이건 비사영에게 보내는 영약에 대한 감사의 표시였다.
계속해서 공세를 몰아쳤음에도 나를 맞히지 못한 주태경이 수치스러운 듯 붉어진 얼굴로 분노를 터트렸다.
“뭐 하는 짓이냐?! 계속 도망만 다닐 셈이냐?!”
웃음이 나왔다.
검을 뽑지 않은 나를 상대로도 우위를 점하지 못했다는 게 무슨 의미인지 아직도 모르는 모양이었다.
아니면,
인정하기 싫었거나.
놈에게 간단히 말해 줬다.
“지금까진 비종문의 천풍보법이었다.”
“…뭐라고?”
놈이 인상을 찡그리며 반문할 때 이제 검파를 잡아 가며 사납게 웃음 지었다.
“그리고 지금부턴, 선우세가의 선우십삼검이다.”
“뭐?”
그 순간, 내 검이 드디어 백룡이 되어 검집을 뛰쳐나갔다.
슈하아악!
발검과 함께 뿌연 검기가 날개를 펼친 듯 놈을 덮쳐 가고 있었다.
선우십삼검의 일 초식 신응비상이었다.
“윽?!”
깜짝 놀란 놈이 뒤로 물러서며 방어하려 했다.
웃음이 짙어졌다.
상대의 공세 앞에서 뒤로 물러서다니, 생각보다 더 바보 같은 놈이었던 것이다.
스스로 길을 열어 줬으니 망설일 이유가 없었다.
바로 이초식 신응피익으로 연결했다.
펼쳐진 뿌연 날개에서 깃털이 쏟아지듯 반짝거리는 수십 개의 검광이 놈을 덮치기 시작했다.
극에 달한 환검이었다.
당황한 놈의 표정이 선명하게 눈에 들어왔다.
“헉?!”
놈이 방어를 위해 정신없이 검을 휘두르려 할 때였다.
수많은 환검 사이에서 단 하나의 검광만이 빛살이 되어 놈에게 쏘아졌다.
섬전십삼검의 삼초, 신응강하였다.
주태경은 자신의 목 바로 앞에 멈춰 있는 내 검을 멍하니 바라보고만 있었다.
단 삼 초만의 패배를 믿을 수 없는 모양이었다.
“이, 이건…. 이럴 수가….”
나는 씨익 웃으며 놈에게 말해 줬다.
“이제 형님이라고 불러라, 주태경.”
전생과 현생을 통틀어 놈의 얼굴이 가장 처참하게 일그러진 순간이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