소설리스트

마교전선 비룡십삼대-28화 (28/359)

28화 흑상방 습격사건-2

이 일은 당대의 명의 중 한 명인 생사괴의 마종환이 귀주팔세의 하나이자 귀주성 남서부의 지배자인 흑상방 방주 흑상도객 고주용의 의뢰를 받아 영약을 제조해 줬던 것에서부터 시작됐다.

많은 보수를 약속받고 영약을 제조해 줬던 마종환은 그 명성대로 우수한 품질의 영약을 제조해 줬고, 그 솜씨가 너무나도 뛰어났기에 흑상도객 고주용은 마종환에게 흑상방에 귀의할 것을 제의했다.

하지만 원래 강호낭중(떠돌이 의사)들 중 제일인으로 이름 높았던 마종환에게 고작 귀주 촌구석의 지배자 흑상방이 눈에 찰 리가 없었다.

당연히 그는 거절했고 그러자 흑상도객 고주용은 마종환에게 원한을 품게 되었다.

그래서 마종환의 약점을 잡고자 뒷조사를 하던 그는 최근 마종환이 자신만의 비법으로 만든 영단을 제조하고자 한다는 사실을 알아내게 되었다.

사실 고주용의 의뢰를 받아 영약을 만들어 준 것도 영단을 만들 돈이 필요했기 때문이었던 것이다.

그 사실을 알게 된 고주용이 가만히 있을 리가 없었다. 그는 몰래 마종환을 추적해 영단을 다 만들 때까지 기다렸다가 그를 습격했다.

무공이 그리 약하지 않았던 마종환은 그래도 영단을 가지고 간신히 탈출할 수 있었는데, 불행히도 그의 두 자식은 그렇지 못했다.

그의 두 딸(두 딸이 아닌 아들과 딸이란 소문도 있었다)이 고주용에게 붙잡혀 버렸던 것이다.

고주용은 당연히 그의 두 딸을 인질로 마종환을 협박했다.

자식들을 살리고 싶으면 얌전히 영단을 내놓으라고 말이다.

이런 상황에서 보통의 아버지였다면 눈물을 머금고 영단과 두 딸을 교환했을 텐데, 불행히도 마종환은 보통의 아버지가 아니었다.

어찌나 성미가 괴팍했던지 별호에도 ‘괴’자가 들어간 자가 바로 생사괴의 마종환이었던 것이다.

화가 난 그는 영단을 주기는커녕 오히려 자신의 영단을 이용해서 온 무림에 현상금을 걸어 버리고 말았다.

흑상도객 고주용을 죽여 주는 자에게 소환단을 능가하는 자신의 영단 다섯 개를 주겠다고 말이다.

깜짝 놀란 고주용은 황급히 흑상방의 전력을 끌고 그를 추격하기 시작했다.

까닥 잘못하면 감당 못할 고수들에게 목숨이 노려질 수도 있게 된 상황이었던 것이다.

이제 그는 자신이 살기 위해서라도 최대한 빨리 마종환을 잡아야만 하는 처지가 되고 말았다.

내가 여기까지 설명해 주자 비사영이 불만 가득한 표정으로 내게 물었다.

“네 얘기는 잘 알겠는데, 그거랑 기껏 휴가를 나온 우리가 흑상방 담장에 숨어 있는 거랑은 무슨 관계가 있는 거냐?”

그 질문에 나는 짐짓 엄한 표정으로 그를 꾸짖었다.

“사영! 너 설마 정파의 명문 비종문의 제자로서 이런 불의한 이야기를 듣고도 피가 끓어오르지 않았다는 거냐?! 그렇다면 너에게 실망하지 않을 수가 없구나! 나는 그동안 정파의 명.문. 비종문의 절기를 배우고 있다는 것만으로도 자부심을 품고 있었는데 네가 어떻게…!”

내가 거기까지 얘기하자 비사영이 눈을 질끈 감으며 항복했다.

“알았다! 거기까지만! 한다, 한다고! 하면 되잖아!”

그러자 옆에 있던 배종관이 뭐라고 입을 열려는 것을 내가 먼저 엄숙한 표정으로 말했다.

“정파의 명.문. 금강불괴문의 금강불괴심공을 익힌 종관 자네라면 물론 나의 뜻에 동의하겠지? 그렇지 않은가?”

입을 열려던 배종관은 다시 입을 닫으며 풀 죽은 얼굴로 고개를 끄덕였다.

그때 옆에서 체념한 듯한 표정으로 듣고 있던 설풍 조장이 중얼거렸다.

“나는 딱히 정파가 아닌….”

“아무튼! 그래서 우리는 이 불의, 불인하기 그지없는 사태에 진정한 정의를 세우기 위해 여기까지 온 거란 말이지!”

물론 정의를 세운 후에는 영단도 몇 개 받을 생각이긴 하지만 그건 그리 중요한 게 아니었다.

중요한 건 어디까지나 정의가 아니겠는가.

또 옆에서 설풍 조장이 ‘나는 화끈하게 대접해 준다고 해서 왔던 건데’라고 중얼거리기는 했지만 못 들은 척하기로 했다.

그러자 비사영이 물었다.

“근데 설사 그렇다 해도 우리가 여기 있는 건 좀 이상하잖아? 그럼 우리도 생사괴의 마종환이란 사람을 찾아가서 도와줬어야 했던 거 아니야? 여긴 왜 온 거야?”

그의 질문에 손가락을 흔들며 대답해 줬다.

“쯧쯧, 잘 생각해 봐라. 생사괴의 마종환은 왜 영단을 자식들과 바꾸지 않고 흑상도객 고주용의 현상금으로 걸었을까?”

“음…. 성질이 괴팍하니까?”

비사영의 대답이 그리 틀린 얘기는 아닐지도 몰랐다.

실제로 무림의 모든 이들은 그렇게 믿고 있기도 하고 말이다.

나 또한 지난 삶의 기억이 없었다면 몰랐겠지.

하지만 앞일을 이미 알고 있는 나는 나지막한 목소리로 그에게 반문했다.

“만약 생사괴의가 영단을 줬다면 고주용은 정말 생사괴의의 딸들과 그를 풀어 줬을까? 지금 가진 영단 몇 개가 문제가 아니라 앞으로도 그런 영단을 계속 만들 수 있는 그를?”

“…응?”

“아아아!”

“그도 그렇군!”

심지어 얼마 전까지 거래를 했던 사람의 뒤통수를 친 고주용이 그 약속을 지킬 리가 없었던 것이다.

비사영이 이제야 알았다는 표정으로 말했다.

“그럼 생사괴의는 흑상도객이 어차피 약속을 지키지 않을 거라는 사실을 알았다는 거로군?”

“그렇지. 게다가 또 한 가지. 이렇게 함으로써 그는 흑상도객이 자신의 딸들에게 인질로서의 가치가 없다고 느끼도록 만든 거야. 관심을 잃도록 만든 거지.”

“아아아, 그렇구나.”

“과연, 이제 그의 딸들은 사람들의 관심에서 사라지고 오직 영단과 흑상도객에게만 관심이 집중되겠군.”

설풍 조장과 비사영이 감탄했다는 표정으로 고개를 끄덕였다.

배종관은 아직 이해 못한 듯 내 눈치를 봤지만 그냥 모른 척해 주기로 했다.

뭐, 당장 이걸 이해하는 게 중요한 건 아니니까.

실제로 지난 삶에서 마종환의 의도는 절반 정도 성공을 거두게 됐었다.

진짜 영단을 받기 위해 찾아왔던 고수에 의해 고주용과 그의 부하들이 괴멸당하고 말았으니까 말이다.

하지만, 고주용이 죽자 분노한 그의 아들 고무상이 마종환의 두 딸들을 죽여 버리면서 결국 모든 일은 비극으로 마무리되고 말았었다.

그때 마종환은 피눈물을 흘리며 흑상방을 완전히 가루로 만들어 주는 이에게 평생을 봉사하겠다고 맹세했었다.

그리고 그의 맹세는 결국 사라진 흑상방과 함께 이루어지고 말았었다.

설풍 조장이 이제 진지해진 눈빛으로 말했다.

“그럼 우리가 할 일은 먼저 마종환의 딸들을 구해 내는 것이겠군.”

역시 조장이었다.

빙긋이 웃으며 고개를 끄덕여 줬다.

“맞습니다, 조장.”

그러자 비사영이 물었다.

“근데 어떻게? 아무리 그래도 흑상방은 귀주팔세, 귀주성 전체에서도 손꼽히는 문파잖아? 우리만으로 그게 가능할까? 또 그녀들이 어디에 갇혀 있는 줄 알고?”

좋은 질문이었다.

그걸 알아내기 위해서 아까 하오문 지부에 다녀왔으니까 말이다.

“자, 일단 평상시라면 당연히 힘들었을 거야. 하지만 지금은 고주용이 방의 전력 대부분을 이끌고 밖에 나가 있는 중이거든. 한마디로 여긴 지금 빈집이란 말이지. 게다가 아까 하오문에 의뢰해서 딸들이 갇혀 있을 만한 곳들을 알아봤는데, 예상되는 곳은 대략 세 곳 정도야. 뇌옥과 창고, 그리고 고주용의 거처에 있다는 비밀 창고. 우리는 이 세 곳을 나눠서 털어 볼 거야.”

나는 흙바닥에다 흑상방의 대략적인 구조를 그리고 세 곳의 위치를 표시해 줬다.

“뇌옥 쪽이 아마 가장 경계가 삼엄하다는 것 같아. 그러니 조장이 뇌옥 쪽, 창고 쪽은 그나마 가장 한산하다니까 사영 네가 그쪽으로. 나는 고주용의 거처에 있다는 비밀 창고를 털어 볼게.”

내 말에 조장과 비사영이 눈을 빛내며 고개를 끄덕였다. 그러자 배종관이 내 눈치를 보며 물었다.

“어, 그럼 나는? 나는 뭘 하면 돼?”

질문을 받은 나는 그의 눈을 뜨겁게 바라보며 대답해 줬다.

“좋은 질문이야, 종관. 너는 가장 중요한 일, 너만이 할 수 있는 일을 좀 해 줘야겠어.”

“가, 가장 중요한 일이라고?”

***

흑상방의 정문, 도를 착용한 여덟 명의 무사가 하품을 하며 문을 지키는 중이었다.

“이틀 연속으로 야간 근무라니, 몸이 안 쑤신 곳이 없군.”

“그뿐인가? 심지어 내일도 또 서야 하잖아? 그 생사괴의란 놈이 안 잡힌다면 그 후에도 쭉 서야 할지도 모르고.”

“생각만 해도 끔찍하군. 그 너구리 같은 놈 때문에 이게 무슨 고생인지. 제발 빨리 잡아야 할 텐데.”

“흥! 엄밀히 따지자면 그놈이 잘못한 거야 없지. 그놈 단약을 빼앗겠다는 방주님 욕심 때문이 아니던가. 게다가 그놈 하나 잡겠다고 인원을 죄다 끌고 간 것도 방주님이고 말일세.”

“어허, 자네 미쳤나? 누가 들으면 어쩌려고!”

“듣긴 누가 들어? 우리밖에 없는데. 그러고 보니 생사괴의란 놈의 자식들이 그렇게 예쁘다고 하던데 사람도 없을 때 가서 맛이나 볼까?”

“크흐흐흐! 자네 진짜 미쳤구먼.”

그들이 그렇게 잡담을 하고 있을 때였다.

전방 어두운 공터에서 웬 거대한 그림자 하나가 모습을 드러냈다.

“잠깐! 저건 뭐지?!”

“응?!”

수문 무사들이 긴장된 눈빛으로 전방을 주시하자 그들은 곧 그 거대한 그림자가 근육질 거한이라는 것을 깨달을 수 있었다.

위압적인 몸을 지닌 거한이 정문을 향하여 뚜벅뚜벅 걸어오고 있었던 것이다.

그의 목적지가 흑상방 정문이라는 것이 확실해지자 수문 무사 한 명이 외쳤다.

“멈춰라! 신분과 용무를 밝혀라! 이 밤중에 흑상방에는 무슨 일인가?!”

그러자 우뚝 멈춘 거한이 말했다.

“나는 금강불괴문의 배종관이라고 하오! 예전부터 마음으로 흠모해 왔던 흑상방에 입방하고자, 산에서 내려오자마자 이곳으로 오게 되었소! 방주님을 만나게 해 주시오!”

그 뜬금없는 용무에 수문 무사들이 어이없는 얼굴로 반문했다.

“금강….뭐라고? 금강불괴문?”

“입방하려고 왔다고? 이 오밤중에?”

“게다가 방주님을 만나게 해 달라고? 미친놈 아냐?”

하지만 선우진으로부터 무조건 뻔뻔해지라는 지시를 받은 배종관은 그들의 반응에 아랑곳하지 않았다.

다시 더 큰 목소리로 소리칠 뿐이었다.

“먼 길을 걸어 이곳까지 왔소! 어서 방주님을 만나게 해 주시오!”

그 쩌렁쩌렁 울리는 목소리에 인상을 찌푸린 무사 한 명이 타일렀다.

“이봐. 입방하고 싶으면 밝을 때 다시 오라고. 이 오밤중에 이렇게 난리를 피우면 오해를 살 수 있지 않겠나? 게다가 이제 입방하러 왔다면서 방주님을 어떻게 만나나? 우리도 잘 못 만나는 분을.”

수문 무사의 말은 충분히 논리적이었다.

배종관이 임기응변으로 대응하기엔 난이도가 매우 높은 질문이 아닐 수 없었다.

하지만 선우진은 이미 당부해 놨었다.

복잡한 질문 따위는 다 무시해 버리라고.

배종관은 방금 무사의 말은 전혀 상관도 하지 않고 다시 소리쳤다.

“나는 금강불괴문의 제자 배종관이오! 어서 방주님을 만나게 해 주시오! 어서 만나게 해 달란 말이오!”

수문 무사들은 이제야 이놈이 뭔가 이상하다는 걸 깨달았다.

그들은 이제 험악한 표정으로 배종관을 협박하기 시작했다.

“닥쳐라! 정말 입방하고 싶다면 밝을 때 다시 와라! 더 이상 소란을 피우면 베겠다!”

그러자 배종관이 진심으로 코웃음을 쳤다.

“베겠다고? 당신들이 나를? 크하하하! 웃기는구나!”

폭소를 터트리며 비웃는 배종관의 모습에 수문 무사들은 정말 화가 나고 말았다.

사파인 흑상방의 무사들이 참을성이 많을 리가 없었던 것이다.

“이놈이 정말! 피를 봐야 정신을 차릴 놈이로구나!”

그렇게 소리친 수문 무사 한 명이 정말로 배종관에게 달려들며 발도했다.

“하아압!”

하지만 바로 다음 순간 그는 뭔가가 잘못됐다는 걸 바로 깨달을 수 있었다.

까앙!

“으윽?!”

몸을 벤 감촉과 소리가 뭔가 이상했던 것이다.

마치 철 기둥을 벤 듯 지이잉 떨리는 도와 손의 통증에 당황하고 있을 때 배종관이 무서운 눈으로 그를 노려보며 말했다.

“진짜 베었겠다?!”

그러곤 그의 몸을 한 손으로 와락 움켜잡더니만 번쩍 들어 올렸다.

“우와아악! 이, 이놈이!”

깡! 깡! 깡!

무사가 배종관의 팔에다 도를 마구 내리쳐 봐도 아무 소용이 없었다.

쇠를 두드리는 소리만 날 뿐이었다.

무사의 몸을 번쩍 들었던 배종관은 이내 정문을 향해 그를 힘껏 던져 버렸다.

무사가 날아가며 비명을 질러 댔다.

“으아아아아악!”

콰아아앙!

정문이 엄청난 소리와 함께 거세게 흔들렸다.

자신의 몸으로 정문을 강타한 무사는 개구리처럼 납작하게 뻗은 채 바닥으로 스르르 떨어져 내리고 있었다.

도로 내리쳐도 쇳소리만 나는 몸에다 사람을 돌멩이처럼 한 손으로 던져 버리는 괴력이라니.

수문 무사들은 더 이상 그를 우습게 볼 수 없었다.

당장 도를 뽑아 들고는 배종관을 포위하기 시작했다.

챵! 챵! 챵!

“꼼짝 마라!”

“감히 흑상방의 정문에서 행패를 부리다니!”

그러자 배종관이 억울하다는 듯 소리쳤다.

“누가 행패를 부렸다는 거요?! 저자가 먼저 나를 베지 않았소?!”

그때 정문이 열리며 흑상당의 순찰당주인 요적삼이 뛰어나왔다.

“이게 무슨 소란이냐?!”

그의 얼굴을 본 무사들이 반색을 했다.

하지만 말을 한 것은 배종관이 먼저였다.

“나는 금강불괴문의 배종관이오! 흑상방에 입방하러 왔건만 저자들이 다짜고짜 나를 도로 베었소!”

이것 역시 선우진의 지시였다.

높아 보이는 사람이 나타나면 무조건 억울하게 공격당했다고 주장하라고 했던 것이다.

배종관의 말에 눈이 휘둥그레진 요적삼이 무사들을 바라봤다.

“저 말이 사실이냐?”

그러자 무사들은 이내 땀을 뻘뻘 흘리며 변명하기 시작했다.

“아, 아니. 그게….”

***

조용한 밤하늘에 우렁우렁한 목소리와 쿵! 하는 충돌음이 작게 들려오고 있었다.

배종관이 시작한 모양이었다.

좌우를 보며 짧게 말했다.

“갑시다!”

흑의를 입은 우리는 비조처럼 솟구쳐 밤 고양이처럼 은밀하게 담장을 넘었다.

소리 따위는 전혀 들리지 않았다.

우리는 눈빛으로 서로에게 인사를 보내고는 각자 맡은 방향으로 사사삭 흩어졌다.

내가 맡은 방향은 정면이었다.

건물들 사이를 은밀하게 움직이는 동안 돌아다니는 사람은 거의 만날 수 없었다.

흑상방에 사람이 없다는 게 여실히 드러나는 모습이었다.

하지만 가끔 만나는 사람들을 피해 가며 은밀하게 움직이던 나는 드디어 제대로 된 경계가 펼쳐져 있는 삼 층 전각에 도착할 수 있었다.

저기가 바로 방주의 거처인 모양이었다.

정문을 지키는 무사가 네 명, 건물 주위를 돌며 순찰하는 무사가 네 명이었다.

꽤나 빡빡한 경계에 아무래도 정문보단 뒤쪽으로 침입하는 쪽이 나을 것 같아 건물의 뒤쪽 방향에 가만히 숨어서 기회를 노렸다.

하지만 생각보다 순찰 무사들의 시야에 사각이 없었다. 그들이 톱니바퀴 맞물리듯 움직이고 있었던 것이다.

문득 아버지의 서재에서 읽었던 책들을 떠올려 봤다.

그중엔 살수비기에 관한 책들도 있었다.

은신술이나 침투 방법에 관한 것이 적혀 있던 책들.

거기서 뭐랬더라.

침투를 하기 위해 가장 좋은 계책이 성동격서라고 했었지, 아마?

나는 슬그머니 빠져 다른 한산한 건물의 지붕 위로 올라갔다가 잠시 후 다시 돌아왔다.

그리고 기다렸다.

지붕 기와 하나를 빼서 풀잎으로 매달아 놨으니 곧 버티지 못한 풀잎이 끊어질 것이었다.

그러면 기와가 떨어지겠지.

퍼석!

저렇게 말이다.

“무슨 소리지?!”

“누구냐?!”

순찰 무사들이 바로 소리를 지르며 그쪽으로 달려갔다.

“뭐야? 기와가 떨어졌잖아?”

“멀쩡하던 기와가 왜 떨어졌지?”

“지난 강풍 때 파손됐었나 보지? 나중에 내당에 말해 수리하라고 해야겠군.”

“에이, 깜짝 놀랐잖아. 가뜩이나 정문 쪽이 소란스러운데 말이야.”

기와를 확인하고 그들이 돌아왔을 때 나는 이미 이 층 창문을 통해 전각 안으로 들어온 후였다.

창문은 빗장이 걸려 있었지만 문틈으로 검기를 방출해 빗장을 소리 없이 자르는 건 어려운 일도 아니었다.

전각의 이 층 안에는 과연 아무도 없었다.

소리 없이 움직여 계단을 타고 삼 층으로 올라갔다.

방주의 거처가 삼 층에 있다고 했었다.

삼 층 또한 조용했다.

흑상방주 고주용은 자기 거처에 누가 오는 것을 매우 싫어해 아무도 접근하지 못하게 한다더니만 역시 그런 모양이었다.

만족스럽게 웃으며 방주의 방문을 슬그머니 열었을 때였다.

나는 문의 안쪽, 방주의 침대에 옷을 홀딱 벗고 앉아 있던 한 젊은 남자와 눈이 마주치고 말았다.

“헉!”

서로를 바라보는 둘 모두의 눈이 튀어나올 듯 커지고 있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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