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9화 흑상방 습격사건-3
남자와 눈이 마주친 순간 머리가 하얗게 돼 버렸다.
여기에 왜 사람이 있는 거지?
아니, 그보다 내가 어떻게 그 기척을 못 느낄 수가 있었지?
빨리 놈을 제압해야만 했다.
놈이 소리라도 지르면 끝장이었다.
하지만 내가 달려드는 것보다 놈이 검을 뽑는 것이 먼저였다.
챵!
검을 뽑으며 놈이 작게 외쳤다.
“웬 놈이냐?!”
그 순간 멈칫한 나는 의아함을 느꼈다.
작게 외쳤다고? 왜지?
큰 소리로 외쳐 무사들을 불러야 하는 거 아닌가?
그러자 옷을 홀딱 벗고 있는 놈의 옆쪽 이불이 꿈틀거리더니 거기서 역시 홀딱 벗고 있는 여인 한 명이 얼굴을 내밀었다.
앳된 얼굴의 아름다운 여인이었다.
그녀가 나를 보더니 깜짝 놀란 얼굴로 작게 소리쳤다.
“상랑! 빨리 문을 닫게 해요! 이러다 밖에 소리가 들리겠어요!”
응? 문을 닫아? 밖에 소리가 들린다고?
거기까지 들은 나는 문득 내 뒤의 문을 바라봤다.
그러자 두 사람이 움찔하는 것이 선명하게 느껴졌다.
어라? 요것들 봐라.
문을 탁 닫아 봤다.
그러자 바깥의 기척이 완전히 차단되는 것을 느낄 수 있었다.
완벽한 방음이었다.
그리고 문을 닫자 그제야 안심한 듯한 표정을 짓는 남자와 여자를 보고는 그들의 사정 또한 대충 짐작할 수 있을 것 같았다.
남자가 이제 안심한 듯 검을 내밀며 내게 소리쳤다.
“뭐 하는 놈이냐?! 감히 복면을 쓰고 흑상방 방주실을 침입하다니! 도둑이냐?!”
그래, 도둑이 맞긴 하지.
근데 너희도 그런 말 할 입장은 아닌 것 같은데?
피식 웃으며 대답해 줬다.
“방주님의 방에서 방주님의 첩과 붙어먹는 놈이 상관할 바는 아닌 것 같다만.”
그러자 놈의 표정이 순식간에 하얗게 탈색됐다.
놈이 말을 더듬거리며 물었다.
“서, 설마 아버님이 보낸 자냐? 처, 처음부터 우리 일을 눈치채고서?”
얼씨구, 아버님이라고?
그럼 이놈이?
비릿하게 웃으며 대답해 줬다.
“고무상! 네 죄를 네가 알겠느냐?!”
그러자 놈은 너무 놀란 나머지 뒷걸음질 치다 침대에 털썩 주저앉고야 말았다.
놈이 망연자실한 표정으로 중얼거리고 있었다.
“이, 이럴 수가! 이런…. 어떻게?”
정답이었다.
저놈이 바로 고주용의 아들 고무상이었던 것이다.
나중에 고주용이 죽자 화가 나서 마종환의 딸들을 죽여 버렸다는 그놈.
그 얘길 듣곤 되게 효자인 줄 알았더니만 이렇게 뒤에서 자기 아버지 첩이랑 붙어먹은 놈이었을 줄이야.
그때였다.
역시 하얗게 질려 있던 옆의 여인이 이내 표독한 표정이 되어 소리쳤다.
“상랑! 아직 들킨 게 아니에요! 저자를 죽여 버려요! 그러면 아무 증거도 없다구요!”
그 말에 고무상이 퍼뜩 정신을 차렸다.
그러곤 다시 검을 뻗으며 이글거리는 눈빛으로 나를 바라봤다.
옆에서 여인이 외치고 있었다.
“어서 죽여요! 밖에 있는 사람들이 눈치채기 전에 죽여 버려야 해요!”
밖에 있는 사람들이 눈치채기 전이라.
그건 너무 고마운 일인데?
문득 씨익 웃으며 재빨리 몸을 돌려 문고리를 잡아 갔다. 놈과 여인이 동시에 비명을 질렀다.
“안 돼!”
고무상이 필사적으로 몸을 날려 내 등으로 검을 찔러 왔다.
“죽엇!”
슈학!
놈의 무위는 대충 일류 중급 정도 되는 것 같았다.
정면으로 맞붙는다면 그리 쉽게야 제압할 수 없었겠지만 저렇게 급하게 서둘러 준다면야.
나로선 그저 감사할 뿐이었다.
몸을 살짝 회전한 것만으로 놈의 검을 피한 후 그 회전력을 이용해 바로 발검했다.
샤악!
“커억!”
내 검이 온 힘을 다해 검을 찌른 놈의 목을 가볍게 스치고 지나갔다.
목이 베어진 놈은 이 상황이 믿기지 않는 듯 눈을 부릅뜬 채 그대로 무너져 버렸다.
반쯤 갈라진 놈의 목에선 뒤늦게 피가 뿜어져 나오고 있었다.
그냥 제압할까 생각도 해 봤지만 전생의 기억을 되돌려 봐도, 현생에서의 평판을 봐도 그리 살아 있을 가치는 없는 놈이었다.
죽일 수 있을 때 죽이는 편이 나을 것 같았다.
내가 망설임 없이 고무상을 죽여 버리자 고주용의 첩은 이제 공포에 질린 얼굴로 얼어붙었다.
“다, 당신, 방주님의 아들을 어떻게…?”
그러다 퍼뜩 뭔가를 깨달은 듯 소리쳤다.
“당신, 방주님이 보낸 자가 아니로군요?!”
좀 감탄했다.
머리 회전이 보통 영악한 것이 아니었다.
그러자 여인이 무슨 생각을 했는지 갑자기 이불 속에서 나와 몸을 일으켰다.
그녀의 벌거벗은 뇌쇄적인 몸매가 내 눈앞에 펼쳐지고 있었다.
그녀는 금세 요염하게 웃으며 내게 말했다.
“이봐요. 당신이 방주님의 사람이 아니라면 저 좀 데리고 가 줘요. 저는 강제로 여기 붙잡혀 있었다구요. 저를 여기서 나가게 해 주신다면 앞으로 당신의 여자가 되어 은혜를 갚으며 살게요.”
촉촉한 눈빛으로 그렇게 말하는 그녀의 모습은 정말 비련의 여주인공을 보는 듯했다.
나도 깜빡 넘어갔을 것만 같았다.
만약 방금 전까지 표독한 얼굴로 나를 죽이라고 외치지만 않았다면 말이지.
푸욱!
망설임 없이 찌른 검이 그녀의 심장을 관통하자 그녀가 믿기지 않는 눈빛으로 나를 쳐다보다 그대로 쓰러져 버렸다.
차라리 덜 영악한 모습을 보였다면 고민이라도 해 봤을 것을 저런 뱀 같은 여인을 살려 둘 수는 없었다.
문득 설풍 조장이 이쪽으로 오지 않아 다행이라는 생각이 들었다.
조장이었다면 저게 거짓이라는 걸 알면서도 단지 여자라는 이유만으로 쩔쩔매며 해결하지 못했겠지?
그놈의 여자 공포증.
그런 후 방 안쪽에 난 통로를 통해 이 방에서만 들어갈 수 있게 설계된 이 층의 방주 개인 창고로 내려갈 수 있었다.
결론부터 말하면 내 쪽은 허탕이었다.
들어가며 알았지만 이 창고는 사람을 가둘 수 있는 곳이 아니었던 것이다.
하지만 그렇다고 실망하지는 않았다.
아니, 오히려 휘파람을 불며 감탄할 수밖에 없었다.
“휘유우, 멋진데?”
창고 안에 전시된 물품들에 눈이 돌아갈 것만 같았다.
창고 안에는 금자, 금괴, 보석들은 물론 무척 귀해 보이는 무기들, 그리고 심지어 영약들까지도 잔뜩 쌓여 있었던 것이다.
고주용 이 자식은 창고에 영약을 이렇게 쌓아 놓고도 또 남의 것을 탐내 그 사단을 냈었다니.
그걸 둘러보는 내 눈이 반짝거리고 있었다.
“호오, 이것 봐라.”
***
한편, 뇌옥 쪽으로 간 설풍이 길을 찾는 것은 그리 어렵지 않았다.
경계가 압도적으로 삼엄한 곳이 바로 뇌옥이었으니까.
다만 경계가 너무 삼엄하다 보니 선우진이 그랬듯 몰래 침투하기는 좀 곤란한 상황이었다.
잠시 고민하던 설풍은 결국 몰래 침투하는 것을 포기할 수밖에 없었다.
뇌옥은 일 층으로 된 건물이었는데 정보에 따르면 지하 삼 층까지 죄인들을 가두도록 설계됐다고 했다.
뇌옥의 입구에는 여섯 명의 보초들이 상시 경계를 하고 있었고, 네 명의 보초들이 톱니바퀴처럼 뇌옥 주변을 순회하며 교대하고 있었다.
설풍은 그림자 속에 몸을 숨기고 때를 기다렸다.
맹수처럼 몸을 웅크리고 있던 설풍은 마침내 한 명의 보초가 모퉁이를 돌아간 순간 정문의 보초들을 향해 비호처럼 뛰어들었다.
파박!
보초들이 뭔가 덮쳐 온다는 걸 깨달았을 땐 이미 설풍의 권각이 그들의 머리를 강타하는 중이었다.
“뭐…!”
“저…!”
빠바바바바박!
여섯 명이 모두 정신을 잃고 쓰러진 것은 거의 찰나의 순간이었다.
설풍은 거기서 멈추지 않았다.
아까 보초가 돌아간 반대쪽 모퉁이를 향해 돌진했다.
그러자 막 모퉁이를 돌아오고 있던 보초의 눈이 깜짝 놀라서는 크게 확대됐다.
“뭐…!”
퍼억!
하지만 그 역시 아무 소리도 낼 수 없었다.
설풍은 그를 쓰러뜨리고는 바로 모퉁이를 돌아 보초가 순회하는 반대 방향으로 돌며 보초를 모두 기절시켰다. 그렇게 한 바퀴 도는 데 걸린 시간이 고작 세 호흡에 불과했다.
설풍은 잠시 그들을 죽일까 말까를 고민하다 이내 고개를 젓고는 뇌옥 안쪽의 첫 번째 감방 안에다 모두를 집어넣기로 했다.
전선에서 생활하는 그에게 있어서 사람을 죽이는 것은 너무나도 쉬운 일이었다.
그래서 설풍은 오히려 꼭 죽여야만 하는 상황이 아니라면 사람을 죽이지 않으려고 노력하곤 했다.
괴물을 상대하되 괴물이 되고 싶지는 않았으니까 말이다.
그들을 감방 안에 가둔 설풍은 일 층 뇌옥에 갇혀 있는 다른 사람들에게 물었다.
“여기 혹시 생사괴의 마종환의 두 딸이 갇혀 있습니까?”
그러자 설풍이 보초들을 뇌옥에 집어넣을 때부터 눈을 동그랗게 뜨고 주목하고 있던 수감자들이 앞다퉈 말했다.
“그, 그런 사람들은 없소! 그보다 날 좀 구해 주시오!”
“맞소! 내가 알기로도 여기 여자들은 없소이다! 대협은 누구시오?! 이 중산협도 노상원은 하늘을 우러러 한 점 부끄러움도 없는 사람이오! 나를 풀어 주신다면 이 은혜를…!”
“대협!”
“대협!”
수감자들이 아우성치기 시작했다.
설풍은 쓴웃음을 짓고는 그들에게 말했다.
“그렇게 큰 소리를 내실 거면 나는 여러분을 풀어 드리지 않고 그냥 나가 버리겠소.”
그의 말에 사람들이 모두 ‘헙!’소리를 내며 모두 입을 다물었다.
선우진이 말했었다.
뇌옥의 일 층에는 주로 잡범들이 갇혀 있을 것이고 지하 이, 삼 층으로 가면 흑상방에 대항하던 자들이 잡혀 있을 것이라고.
그들을 어떻게 하면 좋겠냐는 설풍의 질문에 선우진은 아무렇지도 않게 이렇게 대답했었다.
‘그냥 풀어 주시지요? 흑상방 놈들이 가뒀다면 아마 나쁜 놈들보단 좋은 사람들의 비율이 높을 겁니다. 게다가 나쁜 놈들이라 해도 흑상방 수준에서 잡을 수 있는 자들이라면 그리 위험한 자들도 아닐 거고요.’
설풍에게 있어 혹시라도 나쁜 놈들을 풀어 주게 될 가능성이 있다는 건 썩 유쾌한 일은 아니었다.
하지만 확실히 일일이 가려서 풀어 주기엔 시간상 무리이긴 했다.
설풍이 수감자들에게 말했다.
“나는 분명히 여러분들을 풀어 드릴 것이오. 하지만 제일 아래층까지 확인한 이후 풀어 드릴 것이니 돌아올 때까지 부디 들키지 않도록 조용히 계시길 바라겠소.”
그러자 수감자들은 쥐 죽은 듯이 조용해졌고, 설풍은 아래층으로 내려갔다.
결론적으로 설풍 또한 허탕이긴 했다.
생사괴의의 두 딸은 뇌옥에 갇혀 있지 않았던 것이다.
설풍은 대신 지하 삼 층에 갇혀 있던 흑상방에 적대하던 자들을 모두 풀어 줬다.
그중엔 흑상방에 의해 가족을 잃거나 패망한 사람들이 모여 만든 단체인 살상회의 회주 종원익도 있었다.
종원익이 눈물을 흘리며 설풍에게 감사했다.
“감사하오! 대협이 아니었다면 이대로 처자식들의 원한도 갚지 못한 채 똑같이 흑상방 놈들에게 갇혀 생을 마감할 뻔했구려! 정말 감사드리오! 이 은혜는 절대 잊지 않겠소!”
설풍은 지하 삼 층의 사람들을 모두 풀어 준 뒤 올라가며 이 층, 일 층의 사람들도 모두 풀어 주도록 했다.
이것은 물론 억울한 사람들을 풀어 주기 위한 것이었지만 흑상방을 혼란시키기 위함이기도 했다.
이 모든 혼란 속에서 흑상방은 결코 누가 이런 짓들을 저질렀는지 알아내지 못할 테니까 말이다.
***
정파인들이 이십 대에 절정을 넘은 여고수들에게 봉황의 칭호를 붙인다면, 사파인들은 절정을 넘은 젊은 여고수들에게 작(鵲:까치)의 칭호를 붙이곤 했다.
그중에서도 염작(閻鵲)이라고 불리는 혈편서시 야운향은 현재 흑상방에 육 개월째 고용된 상태였다.
그녀가 흑상방에 와서 딱히 한 일은 없었다.
그녀를 고용한 고용주들이 늘 그랬듯 흑상방주 고주용 또한 그녀의 무력을 보고 고용했다기보다는 어떻게든 그녀와 밤을 함께 지내고 싶어 고용한 것이었으니까.
하지만 야운향은 자유분방한 사파 여인이긴 해도 쉬운 여자는 아니었다.
마음에 드는 남자가 아니면 절대 관계를 맺어 주지 않았던 것이다.
그러니 그녀가 늙다리에 불과한 고주용 따위와 관계를 허락할 리 없었다.
지금은 어쨌든 흑상방에 속해 있는 만큼 그의 계속된 유혹을 거부하는 것 때문에 곤란한 상황이 생길 만도 했지만 그녀는 딱히 걱정하지 않았다.
이런 사태에 대비해 그녀는 비용을 늘 선불로 받곤 했었으니까.
만약 고용주들이 지나치게 개수작을 부리려고 하면 고용비를 돌려 주고는 훌쩍 떠나 버리면 그만이었다.
그런 면에서 볼 때 지금까지의 고주용은 그렇게 나쁜 고용주는 아니었었다. 적어도 강제로 뭘 하려고 하지는 않았으니까 말이다.
‘적어도 지금까지는 그랬었지.’
하지만 이번 생사괴의에게 한 짓을 지켜보며 그녀는 고주용에게 질려 버리고 말았다.
방금 전까지 거래했던 사람의 뒤통수를 치고 가족들을 붙잡아 협박을 하다니, 자신에게도 아직 뭔가를 하지 않았을 뿐 앞으로 충분히 뭘 할 수 있는 자라는 것을 분명히 깨달았던 것이다.
비록 사파이기는 하지만 사람으로서 지켜야 할 도리라는 것이 있다고 생각하던 그녀로서는 도저히 용납할 수 없는 짓거리였다.
그래서 그녀는 생사괴의를 추적하라는 요구를 거부하고는 흑상방에 남았다.
그리고 이곳을 떠날 생각을 굳힌 상태였다.
‘고주용이 돌아오는 대로 떠나야겠지.’
솔직히 그녀 또한 고주용을 죽이고 생사괴의의 단약을 얻어 볼까라는 생각도 해 봤었다.
하지만 방금 전까지 고용 관계였다가 뒤통수를 치는 그와 똑같은 짓을 하고 싶지는 않았기에 참기로 했었다.
지금 야운향은 흑상방의 후방 쪽으로 걸음을 옮기는 중이었다.
그리고 그 이유는 정문 쪽에서 소란이 일었고 사람들의 관심이 그쪽으로 집중됐기 때문이었다.
가뜩이나 방에 인원도 없는데 지금 이런 상태면 후방이 무척 취약해지겠다는 생각이 들었기 때문이었다.
물론 딱히 그걸 막아 줄 만큼 흑상방에 애정이 있는 것은 아니었다.
하지만 고용되어 있는 동안만큼은 돈값 정도는 해야 한다는 것이 그녀 나름의 직업의식이었다.
그때였다.
“응?”
그녀의 귀에 문득 뇌옥 쪽에서 잠깐 일었던 소란이 포착됐다.
아주 잠깐일 뿐이었지만 그게 오히려 더 수상했다.
그래서 혹시나 싶어 가 본 뇌옥에는 앞을 지키던 보초들이 모두 사라지고 없었다.
분명 뭔가 일이 생긴 것이 틀림없었다.
잠시 사람들을 부를까 생각했던 야운향은 어차피 부를 사람도 별로 없고 거리도 너무 멀다는 생각에 그냥 혼자서 가기로 결정했다.
그때, 때마침 뇌옥에서 사람들이 몰려나오고 있었다.
고초를 겪은 듯 허름한 옷차림들, 모두 수감자들이 틀림없었다.
“흐음.”
혹시나 했지만 진짜 일이 생겼을 줄이야.
귀찮은 일이 아닐 수 없었다.
그녀가 나른한 목소리로 중얼거렸다.
“일은 일이니까.”
한순간 야운향의 얇은 허리에 칭칭 감겨 있던 검은 강편이 살아 있는 뱀처럼 꿈틀거리더니만, 순식간에 뛰쳐나가 뇌옥의 앞 땅을 후려쳤다.
촤아아악!
“우와아아악! 뭐, 뭐야?!”
“뭐야, 뭔데?!”
달려 나오던 수감자들은 그대로 얼음이 되어 제자리에 멈출 수밖에 없었다.
땅을 강타한 채찍의 자국이 용이 지나간 듯 두껍게 파여 있었던 것이다.
야운향이 나른한 목소리로 그들에게 말했다.
“모두 거기서 멈춰. 움직이지 않는다면 죽이지는 않을 거야.”
수감자들의 시선이 달빛 아래에서 요요하게 빛나고 있는 그녀의 얼굴에 닿았다.
몽롱한 듯 신비한 얼굴, 딱 붙는 흑의 무복에서 드러나는 뇌쇄적인 몸매, 그녀의 몸 주변에서 살아 있는 듯 꿈틀거리며 휘도는 검은 강편, 강남의 무인들 중 그녀의 이름을 모르는 이들은 없었다.
누군가 침을 꿀꺽 삼키며 중얼거렸다.
“혈편서시.”
“혈편서시 야운향.”
그러자 그녀가 나른한 목소리로 말했다.
“미안하지만 내가 고용되어 있는 동안 탈출은 좀 곤란하거든. 얌전히 다시 감방으로 돌아가 준다면 나도 못 본 척해 줄게.”
그렇게 말한 순간, 그녀의 몸 주변을 휘돌던 검은 강편이 다시 엄청난 기세로 바닥을 후려쳤다.
콰아아아앙!
그 충격이 어찌나 엄청났는지 땅에 깊게 패인 채찍 자국에선 연기마저 피어오르고 있었다.
그런 압도적인 무위를 아무렇지도 않게 선보인 야운향이 특유의 나른한 목소리로 경고했다.
“하지만 반항한다면 나도 어쩔 수 없어.”
혈편서시.
외모는 서시처럼 아름다웠지만 그녀의 검은 강편에 수없이 많은 피가 묻어 있었기에 붙은 별호였다.
특히 자신에게 약을 먹이고 겁탈하려 했던 광서성 의주의 지배자 흑갈방의 방주 및 그 부하 간부들을 하룻밤 사이에 싸그리 몰살시켜 버렸던 사건은 몇 년이 지나도록 강남지역 여류 무인들 사이에 전설로 남아 있을 정도였다.
신이 나서 탈출하려던 수감자들이 그녀를 만나고 얼음이 된 채 못 박혀 버렸을 때, 그들 사이에서 검은 복면을 쓴 남자 하나가 천천히 걸어 나왔다.
설풍이었다.
그를 본 야운향의 눈이 이채를 띠었다.
“흑의복면인? 당신이 이 사건의 주모자인 모양이로군.”
그 말과 함께 그녀의 주변을 휘돌고 있던 검은 강편이 다시 용트림을 하기 시작했다.
설풍이 만만치 않은 상대라는 걸 바로 알아챘던 모양이었다.
하지만 나른했던 눈을 번뜩이며 승부욕을 보이는 야운향과는 달리 설풍의 눈빛은 점점 어두워져만 가고 있었다.
하필 여자였던 것이다.
젠장.