소설리스트

마교전선 비룡십삼대-30화 (30/359)

30화 흑상방 습격사건-4

살아 있는 흑룡처럼 꿈틀거리던 강편이 설풍을 향해 맹렬하게 휘몰아쳐 갔다.

마치 용이 꼬리로 후려치는 듯한 강맹한 공격이었다.

하지만 이 순간까지도 설풍은 마음을 결정하지 못한 상태였다.

설풍의 기억 속엔 어린 시절 자신을 향해 눈물짓다 숨을 거두신 어머니의 잔상이 언제나 화인처럼 남아 있었다.

그 후 오랜 시간을 산속에서 조부와 단둘이서만 살아왔던 그에게 있어, 여자란 존재는 기억 속의 어머니와 다르지 않았다.

그래서 그는 여자를 대하는 것이 언제나 어려웠다.

더더군다나 여자에게 손을 쓴다는 것은 차마 상상도 할 수 없는 일이었다.

적어도 지금까지는 그랬다.

하지만 설풍도 알고는 있었다.

언젠가는 여자를 적으로 맞이해 싸워야 할 때가 올 것이라는 걸, 그때가 돼서도 손을 쓰지 못한다면 자신 때문에 동료를 죽게 만들 수도 있다는 걸 말이다.

흑편이 그의 몸을 맹렬하게 후려쳐 오는 순간, 설풍은 눈을 질끈 감았다.

그러곤 고양이처럼 공중제비를 돈 그의 신형이 흑편을 살짝 타고 넘었다.

파아앙!

흑편이 헛되이 땅을 가격한 순간 야운향의 입꼬리가 살짝 올라갔다.

“호오?”

그녀의 웃음과 함께 흑편의 움직임이 더 맹렬하고 강맹해지기 시작했다.

설풍을 중심으로 또아리를 튼 흑룡이 사방에서 꼬리를 후려치고 있었다.

촤아아아악!

촤아아아악!

하지만 눈을 감고 있는 설풍의 움직임 역시 점점 빨라지고 있었다.

그는 수풀 사이를 뛰어다니는 고양이처럼 날렵하게 재주를 넘으며 그 공격들을 모두 무위로 돌리고 있었다.

그러자 이제 나른함에서 완전히 깨어난 듯한 명료한 눈빛의 야운향이 신이 난 목소리로 소리쳤다.

“멋진걸! 이것도 한번 받아 보시지!”

광폭하게 꿈틀거리던 그녀의 채찍이 한순간 다섯 개로 분열했다.

극에 이르면 아홉 개의 잔상을 만든다는 절초 구미요호였다.

다섯 개의 채찍이 사방에서 설풍을 향해 쏟아질 때였다. 몸을 잔뜩 움츠렸던 설풍의 신형이 한순간 사라져 버렸다.

파박!

웬만한 무인들로선 눈으로 따라갈 수도 없는 속도로 튀어 나갔던 것이었다.

빛살이 된 설풍의 신형이 한순간 야운향의 눈앞까지 짓쳐들어오고 있었다.

“흥!”

하지만 야운향은 코웃음 쳤다.

세인들은 그녀가 장병인 강편을 사용하기에 접근전은 약할 것이라 생각하지만 사실 그녀의 단검술 또한 강편보다 약하지 않았다.

이미 대비하고 있던 야운향이 왼손의 단검을 번개처럼 뽑아 달려 들어오는 설풍에게 휘두르려 했다.

하지만 먼저 손을 휘두른 것은 설풍이었다.

어느새 암기를 손에 쥔 설풍이 그녀를 향해 손을 뿌렸던 것이다.

화악!

“암기?!”

깜짝 놀란 야운향이 황급히 단검을 몸 앞으로 붙이며 암기를 방어하려 했다.

하지만 아무것도 날아오지 않았다.

“이런?!”

속임수였다.

속았다는 것을 깨달은 야운향이 다시 단검을 휘두르려 했을 땐 이미 그녀의 간격 안으로 들어온 설풍이 강기를 두른 손으로 단검을 받아 내고 있었다.

야운향은 이를 악물었다.

이렇게 쉽게 져 줄 수는 없었다.

“이익!”

그녀의 단검이 영활하게 움직이며 설풍의 손을 피해 그를 난자하려 시도했다. 하지만 단검이 고작 복면을 베었을 때 설풍의 손가락은 이미 그녀 목의 수혈을 집는 중이었다.

탁!

야운향의 눈이 망연해졌다.

죽이지도 않고 이렇게 쉽게 자신을 제압해 버리다니, 완벽한 패배였다.

흐려져 가는 야운향의 눈에 복면이 베어져 드러난 설풍의 맨얼굴이 마지막으로 들어왔다.

그러곤 정신을 잃었다.

그녀를 제압한 설풍은 난감한 표정을 짓고 있었다.

하필 얼굴을 보여 버리다니, 선우진이 혹시라도 얼굴을 보이게 되면 반드시 죽여야 한다고 신신당부했었던 것이다.

처음부터 죽이려고 마음먹었었다면 이런 일은 일어나지 않았을 텐데, 굳이 죽이지 않고 제압하려다 보니 얼굴을 보이게 되고, 얼굴을 보였으니 이제 죽여야 하는 상황이 되다니, 설풍은 눈앞이 깜깜해져 왔다.

하지만 잠시 고민하던 설풍은 결국 그녀를 죽이지 않기로 결심했다.

아까 그녀도 다른 사람들을 죽이지 않았지 않은가.

사람들을 죽이지 않으려 한 선한 여인을 자신이 먼저 죽일 수는 없었다.

결코 여자이기 때문에 안 죽이는 것은 아니라고 스스로를 합리화시키며, 설풍은 뇌옥 빈 감방의 푹신한 곳에 그녀를 조심스럽게 뉘어 주고는 서둘러 빠져나왔다.

***

비사영은 창고에 도착하자마자 자신이 제대로 찾아왔다는 것을 깨달을 수 있었다.

왜냐하면 세 명의 무사가 한 명의 여인을 둘러싸고 겁탈하려 하고 있었던 것이다.

그 옆에는 동생으로 보이는 십 대 중반의 여자아이가 줄로 꽁꽁 묶인 채 울며 소리를 지르고 있었다.

“당장 멈춰! 이 금수만도 못한 놈들아! 당장 멈추라고!”

하지만 그들은 그저 킬킬거릴 뿐이었다.

두 명의 남자가 언니로 보이는 여인을 붙잡고 있는 가운데 한 놈이 웃으며 바지를 내리려 하고 있었다.

“크흐흐흐! 오늘 특별한 경험을 하겠구나!”

“빨리 끝내라고! 다음 차례를 기다리고 있으니까!”

“염려 마. 저놈 토끼라 얼마 안 걸린다고. 크하하하!”

탐욕스러운 웃음을 지은 남자가 마침내 바지를 내리고 잡혀 있는 여인의 눈빛이 절망으로 물들었을 때였다.

분노한 비사영이 유성처럼 남자의 뒤로 날아들었다.

푸학!

그의 도에 남자의 목이 떨어져 나간 것은 한순간이었다.

나머지 남자들이 깜짝 놀라 소리쳤다.

“강가야!”

“뭐, 뭐냐?!”

남자들은 황급히 여인을 놓고는 뒤로 물러서 자신들의 병기를 잡아 갔다.

하지만 비종문의 대제자 비사영의 속도는 그들의 상상 이상이었다.

한 놈의 목을 날리고 바로 왼쪽 남자에게 짓쳐들어온 비사영의 도가 막 무기를 잡으려던 남자의 몸을 사선으로 갈라 버렸던 것이다.

푸학!

“크아아악!”

“이가야!”

두 명째를 죽인 비사영이 고개를 돌려 남은 한 놈을 바라봤을 땐 놈도 이미 분노한 얼굴로 도를 뽑아 든 후였다.

“이놈, 감히!”

비사영이 혀를 찼다.

“쳇!”

마음이 급해지고 있었다.

배종관이 정문 쪽에서 난리를 쳐 주고 있는 덕에 창고 근처에 사람이 없긴 했지만, 그럼에도 너무 시끄러운 소리를 내 버렸던 것이다.

게다가 도를 뽑은 상대의 자세가 심상치 않아 보였다.

“하아압!”

자신에게 달려든 놈의 도 끝에서 뿌연 안개 같은 것이 보이고 있었다.

도기였다.

‘젠장, 일류 무사잖아!’

마음속으로 비명을 지른 비사영은 천풍보법을 이용해 상대의 공세를 삭삭 흘려보냈다.

상대의 경지 또한 일류 하급 정도로 보이기에 당장 위험할 것 같지는 않았다.

하지만 빨리 상대를 죽이고 여인들을 데려가야 하는 비사영에게 있어선 난감한 상황이 아닐 수 없었다.

잠시 후 폭풍처럼 도를 휘두르며 맹공을 퍼부었지만 비사영을 맞히지 못한 남자가 이제 알겠다는 듯 비웃으며 말했다.

“네놈, 도기를 만들지 못하는구나. 신법만 빠를 뿐 이류의 떨거지에 불과했어.”

비사영은 이를 악물었다.

하지만 대꾸할 말이 없었다.

비사영의 현재 내공은 사십 년을 훌쩍 넘은 상태, 내공으로만 따지면 일류 중급도 될 수 있는 공력이었다.

하지만 그간 계속 노력했음에도 불구하고 그는 도저히 도기를 만들어 낼 수가 없었다.

내공이 충분함에도 불구하고 검기상인의 경지는 마치 신기루처럼 비사영에게 자신을 허락하지 않았던 것이다.

남자는 이제 잡히지 않는 비사영을 굳이 잡으려 하지 않았다.

그냥 목소리를 높여 사람들을 불렀을 뿐이었다.

“침입자다! 여기 창고에 침입자가 있다!”

비사영의 마음이 조급해졌다.

이러다가 일을 다 그르쳐 버릴 것 같았다.

하필 자신이 생사괴의의 딸들을 발견한 곳에서 이렇게 되어 버리다니.

“이놈!”

비사영은 더 생각하지 않고 몸을 날려 놈을 덮쳐 갔다. 자신 때문에 모든 일을 망친다는 건 도저히 용납할 수가 없었다.

그러자 남자도 기다렸다는 듯 비사영에게 도를 휘둘렀다. 아마도 처음부터 이것을 노렸던 모양이었다.

챵! 챠챵! 챠챵!

도와 도가 수없이 맞부딪쳤다.

본래 일류와 이류의 간격은 단지 검기를 다룰 수 있느냐, 아니냐의 차이만은 아니었다.

검기를 만들 수 있을 만큼의 내공 운용력과 그로 인해 강화된 힘, 속도, 반사 신경, 감각 등 모든 면에서 큰 차이가 났던 것이다.

그것은 고양이와 스라소니만큼이나 현격한 차이였다.

하지만 비사영은 지금 그 간격을 전혀 느낄 수가 없었다.

속도, 힘, 노련함.

도기를 제외한 어떤 부분에서도 밀린다는 느낌을 받을 수가 없었던 것이다.

그는 깨달을 수 있었다.

지금 자신과 도를 맞부딪치는 남자의 실력이 그간 자신이 상대해 왔던 조장이나 선우진, 청연 소저나 나 소저에 비해 너무나도 저급하다는 것을.

비사영의 얼굴에 드디어 웃음이 떠올랐다.

이 정도라면 지금의 자신으로도 충분할 것 같았다.

자신감을 되찾자 쾌의심법으로 운용되는 그의 비종도법이 속도를 점점 더 빨리하기 시작했다.

원래 신법의 빠르기로 유명한 비종문의 도법은 대부분의 초식 또한 쾌도로 이루어져 있었다.

하지만 단지 쾌도만으로 적을 제압할 수는 없었다.

아무리 빠른 속도도 눈에 익숙해지면 방어할 수 있는 법, 쾌도를 사용하는 자들에게 제일 중요한 것은 도의 속도를 달리해 상대방의 허점을 만들어 내는 완급 조절이었으니까.

하지만 지금 비사영은 전혀 완급 조절을 하지 않았다.

완전히 싸움에 몰입해서는 소나기처럼 쾌도를 쏟아 낼 뿐이었다.

채채채채채챙!

빨리, 더 빨리.

마치 스스로에게 주문을 걸고 있는 것만 같았다.

점점 빨라지는 바사영의 쾌도에 손이 어지러워지던 남자가 마침내 비명 같은 기합을 질렀다.

“으아아아아압!”

그 순간 비사영의 도가 이제까지 중 가장 빠른 속도로 남자의 방어를 통과해 몸을 훑고 지나갔다.

샤아악!

남자의 몸을 가른 비사영의 도 끝에선 뿌연 도기가 한 치나 뻗어 나와 있었다.

“하아, 하아, 하아.”

도를 멈춘 채 멍한 얼굴로 숨을 몰아쉬고 있던 비사영의 뒤로, 남자의 가슴이 쩍 갈라지며 피를 뿜어내고는 그대로 쓰러졌다.

푸화악! 쿵!

“하, 하하, 하하하. 이게 도기로구나.”

비사영은 웃음 지었다.

마치 자신의 몸인양 도 끝까지 전달된 내공의 느낌이 기분 좋은 짜릿함을 전해 주고 있었다.

그때 문득 묶여 있던 소녀가 소리쳤다.

“대협! 제발 도와주세요!”

퍼뜩 정신을 차린 비사영이 서둘러 그녀들을 묶고 있던 줄을 끊어 주며 물었다.

“두 분이 생사괴의 마 대협의 따님들이시오?”

“네! 제가 딸이에요! 오빠는 남자구요!”

응?

소녀의 대답에 비사영이 잠시 이해하지 못하고 되물었다.

“…뭐라고 하셨소, 소저?”

그러자 소녀가 다시 대답했다.

“저만 딸이라구요! 저쪽은 제 오빠, 남자예요!”

“…에?”

그리고 다시 바라본 언니라고 생각했던 사람은 무척이나 아름다워 보이는…. 남자였다.

호리호리한 몸매에 예쁘장한 얼굴이 딱 여인처럼 생기긴 했지만 입고 있는 옷도, 상의가 벗겨져 보이는 평평한 가슴도 모두 남자였던 것이다.

멍해진 비사영이 물었다.

“아니, 그럼 아까 저놈들은….?”

그러자 오빠 쪽이 수줍은 목소리로 작게 대답했다.

“제가 예쁘게 생겼다며 색다르다고….”

“헉….”

그의 말에 뒷목을 움켜잡은 비사영은 아까 그들을 너무 쉽게 죽여 줬다며 후회했다.

하지만 불행히도 다시 죽일 시간은 없었다.

“두 분, 경공을 쓸 줄 아시오? 바로 빠져나가겠소!”

“네!”

“네!”

멀리서 달려오는 사람들의 발소리가 시끄럽게 들려오고 있었다.

***

우리는 모두 무사히 흑상방을 빠져나와 약속 장소인 외딴 관제묘에서 합류했다.

조장은 비사영 쪽이 걱정됐는지 미리 합류해서 같이 이동했던 모양이었다.

나는 제일 먼저 상의가 온통 칼자국으로 너덜너덜해진 배종관을 보며 걱정스럽게 물었다.

“종관, 고생했어. 다친 곳은 없어? 옷을 보니 무척 험한 일을 당한 것 같은데?”

아무래도 그에게 너무 힘든 역할을 맡겼던 것은 아닌지 후회가 됐다.

그러자 배종관이 씩씩하게 웃으며 대답했다.

“하하하하! 걱정 말게. 그쪽 간부가 내 외공을 보고 신기해하길래 좀 더 보여 줬을 뿐이라네. 아무래도 내 외공의 강력함에 홀딱 반한 눈치더군. 와하하하하!”

…괜히 걱정했던 모양이었다.

그러곤 생사괴의의 딸들….이 아닌 아들과 딸을 살펴봤다.

예쁘장하게 생긴 아들은 아직도 충격이 큰 듯 어두운 표정으로 입을 닫고 있었고, 이제 열여섯 살이라는 딸은 그래도 의연하게 우리에게 감사 인사를 했다.

“구해 주셔서 감사합니다. 오빠도 저도 정말 큰일을 당할 뻔했어요. 아버지마저 저희를 버리셨다고 해서 다 끝났다고 생각했었는데….”

그렇게 말한 소녀는 말하는 도중 또 감정이 북받친 듯 다시 눈시울을 붉혔다.

“소저….”

내가 저만한 나이의 여자아이에게 무슨 말로 위로를 해 줘야 할지 몰라 잠시 망설였을 때 비사영이 말했다.

“과연 생사괴의께선 대단한 분이시군. 자기 자식들을 구하기 위해 자식들에게 원망을 받는 것도 감수하시다니.”

비사영의 말에 소녀가 의아한 얼굴로 물었다.

“…네? 그게 무슨 말씀이신가요?”

“영단과 너희를 바꾸자는 요구를 거절하고 오히려 영단으로 현상금을 거신 것 말이다. 우리가 너희를 구할 수 있었던 건 생사괴의께서 그렇게 해 주셨기 때문이었다. 흑상방주가 너희에게 아무런 가치도 없다고 판단하고 당신을 잡기 위해 전력을 끌고 나가도록 만드셨기 때문이지. 그렇지, 진?”

항상 느끼는 거지만 비사영 이 녀석은 가끔 멋있을 때가 있었다.

그게 너무 가끔이어서 문제지만.

내가 고개를 끄덕이며 비사영의 말을 받았다.

“맞습니다. 반대로 흑상방주의 요구대로 영단과 두 분을 바꾸려 했다면 생사괴의 어르신마저도 흑상방주에게 붙잡히고 말았겠지요. 그러곤 두 분을 살리기 위해 평생 흑상방에 갇혀 영단을 제조하며 살아야 하셨을 겁니다.”

그러자 아들 쪽이 번쩍 고개를 들고는 물었다.

“그, 그게 정말인가요? 아버지가 저희를 살리기 위해서 일부러 그러셨다는 게?”

비사영이 답답하다는 듯 말했다.

“우리한테 묻지 말고 너희 스스로에게 물어봐라. 너희 부친은 고작 영단 몇 개가 아까워 너희를 버리실 분이신가?”

생사괴의의 아들과 딸은 서로 얼굴을 마주 보며 격렬히 고개를 저었다.

“아뇨, 절대 그렇지 않죠.”

“맞아요. 그깟 영단이야 다시 만들면 되는걸요. 그럼….”

두 사람이 충격을 받은 것은 험한 일을 당했다는 것보단 아버지가 자신들을 포기했다는 것에 대한 실망 때문이었던 모양이었다.

이제 사실을 알고 나자 확연하게 밝아진 얼굴로 아들이 인사했다.

“감사합니다! 여러분들이 없었다면 저흰 바보같이 아버지의 뜻도 모른 채 죽었을 거예요! 조금만 생각해 보면 간단한 것을, 정말, 정말 감사드립니다!”

“맞아요! 너무 감사드려요! 이 은혜를 대체 어떻게 갚아야 할지….”

여동생은 이제야 나이답게 눈물을 흘리며 오빠에게 안겼다.

마음고생이 무척 심했던 모양이었다.

그 모습들을 뿌듯하게 바라보던 비사영이 문득 내게 물었다.

“자, 그럼 이제 생사괴의 어르신도 구하러 가야 하는 거 아냐?”

설풍 조장 또한 웃으며 맞장구쳤다.

“그러게. 저 모습을 보니 빨리 구해 드리고 싶어지는군.”

그들의 적극적인 모습에 나 또한 의욕이 솟구치는 것 같았다.

하지만 그 전에 먼저 해야 할 일이 있었다.

나는 남매들을 뒤편으로 데려가 좀 쉬게 한 후 일행들 앞에다 들고 온 거대한 꾸러미를 쾅! 소리 나도록 내려놓았다.

“자, 가기 전에 이것부터 먼저 좀 봅시다.”

그러자 모두들 궁금한 눈빛으로 그것에 집중했다.

“사실 아까부터 궁금했었지. 대체 뭘 가져온 거냐?”

“나도 궁금했다네. 자네 몸만 한 꾸러미라니. 혹시 사람이라도 몇 명 납치해 온 건가?”

나는 씨익 웃으며 드디어 꾸러미를 개봉했다.

그러자 모두의 눈과 입이 크게 벌어졌다.

“이, 이게?!”

“아니! 이건?!”

“우와아아아! 이게 다 뭐야?!”

나는 흐뭇하게 웃으며 그들의 반응을 즐겼다.

그럴 만도 했다.

흑상방주의 창고에서 좋아 보이는 것들을 몽땅 다 긁어 왔으니까 말이다.

일단 재물은 보석을 제외하고 금자만 챙겼다.

괜히 추적당하면 골치 아플 것 같았기 때문이었다.

그리고 영약 종류는 일단 좋아 보이는 것들은 몽땅 들고 왔었다.

사실 이번에 생사괴의를 구해 주며 최종적으로 얻고 싶었던 게 영약이었는데, 그 목표는 이미 훨씬 초과 달성한 것 같았다.

마지막으로 무기 중 좋아 보이는 것들을 가져왔다.

나는 그중에서 먼저 조장에게 두 개의 팔 보호대를 건넸다.

“선물입니다. 맹호조라는데 아마 혈룡조를 본떠서 만든 모양이더라고요.”

“응? 혈룡조를 본떠 만들었다고?!”

혈룡조란 말에 조장이 흥미를 보였다.

혈룡조는 사파의 혈살귀조 막종기가 사용하는 기문병기였다.

그의 팔 보호대에서 자유자재로 튀어나오는 네 개의 긴 발톱은 처음 상대해 본 사람은 물론 그걸 알고 있는 사람들에게도 치명적인 공포의 대상으로 알려져 있었다.

그냥 몸만으로도 위협적인 권사에게 발톱을 달아 준 것이니 그 위력은 더 말할 것도 없었다.

조장은 대충 살펴보고는 원리를 파악했는지 팔 보호대를 차고는 손목을 살짝 비틀어 봤다.

챵!

“오오!”

조장은 양손에서 네 개씩 뻗어 나온 긴 발톱을 보며 감탄했다.

그러곤 정신을 집중하자 발톱에서부터 붉은 강기가 불꽃처럼 뿜어져 일렁거렸다.

“이거면 찌르기는 물론 베기도 가능하겠군. 굳이 마인들을 부수지 않아도 쉽게 베어 낼 수 있겠어. 고맙네, 진. 최고의 선물이로군.”

다음으로 비사영에게 준 것은 단월이라는 이름이 새겨진 환도와 얇은 은사로 연결된 비도였다.

바로 단월을 뽑아 본 비사영은 시리게 빛나는 단월의 도광에 감탄했다.

“오오! 훌륭해! 고맙다, 진! 근데 이 비도는 뭐야?”

만족스러워하는 비사영에게 흐뭇한 미소를 지어 주며 설명해 줬다.

“이건 내 생각인데 사영 네가 비도술을 익히면 좋을 것 같더라고. 어차피 암기술도 수련하고 있잖아? 그 은사가 뭘로 만든 건지 검기에도 안 끊어지는 게 잘하면 은사만으로도 상대를 벨 수 있을 것 같아.”

“오, 좋은걸?! 근데 암기를 수련하고 있는 건 진 너도 마찬가지잖아?”

비사영의 말에 씨익 웃으며 대답해 줬다.

“크크크, 나야 벌써 하나 챙겼지.”

“크으, 그렇다면야 고맙게 받으마.”

마지막으로 배종관에겐 언월도를 선사했다.

긴 자루를 두 개로 분리해서 단봉으로도 쓸 수 있는 물건인데 무게가 십 관은 넘을 것 같았다.

들고 온 것들 중 가장 무거운 놈이었다.

하지만 언월도를 받은 배종관은 미안한 듯 웃으며 고개를 저었다.

“성의는 고맙지만 미안하네, 진. 나는 내 몸으로 충분하다네. 외공을 익힌 내게 무기 따위는 쓸모없지 않겠나? 하하하하!”

그래, 이놈이 대충 그렇게 말하지 않을까 생각은 했었다.

하지만 무기를 사용한다는 건 그 날카로움을 떠나 거리에서의 우위를 가져갈 수 있다는 뜻이었다.

그러니 단단한 몸에 비해 박투술이 약한 배종관을 위해선 반드시 거리의 우위를 가져갈 필요가 있다는 것이 내 판단이었던 것이다.

나는 웃으며 대답했다.

“물론 나도 그렇게 생각하네. 종관, 자네에게 무기 따위는 필요가 없지. 하지만 생각해 보게나. 자네처럼 멋진 체격을 가진 거한이 이 언월도를 폭풍처럼 휘두르며 싸운다면 사람들이 누굴 떠올리겠나?”

“음? 누굴 떠올린단 말인가?”

의아한 얼굴로 묻는 그에게 우리가 있는 관제묘를 둘러보며 대답했다.

“아마도 관제를 떠올리지 않겠나? 삼국지 최고의 무장인 관운장 말일세.”

“…관운장?”

“그래, 상상만 해도 정말 환상적이겠군. 아마 천 소저도 그 모습을 본다면….”

무인들의 영원한 우상 관운장에서 천 소저로 이어지는 이 연타에 배종관은 더 버티지 못하고 항복을 선언했다.

“그, 그래? 그럴까?”

“당연하지!”

물론 관운장보단 전위나 허저 쪽을 떠올릴 확률이 높다는 건 굳이 말해 주지 않았다.

또 천 소저가 그 모습을 본다면 어떤 반응을 보일지 잘 모르겠다는 말도 말이다.

어쨌든 ‘그 모습을 본다면’까지만 말했으니 거짓말을 한 것은 아니지 않겠는가?

게다가 저걸 써서 배종관의 생존율이 높아진다면 결국 좋은 일이 아니겠냐며 스스로를 합리화시켰다.

만족스러운 얼굴로 맹호조를 살펴보던 설풍 조장이 문득 내게 물었다.

“그나저나 그럼 진 자네는 뭘 갖기로 한 건가? 설마 우리 것만 챙겨 주느라 자기 것을 못 챙긴 건 아니겠지?”

착한 사람들은 남들도 자기처럼 착할 거라고 생각하는 경향이 있다.

하지만 나는 조장 같은 사람이 아니었다.

씨익 웃으며 대답해 줬다.

“그럴 리가요. 저야 당연히 챙겼지요. 딱 마음에 드는 게 있더군요.”

그렇게 말하며 챙긴 검을 꺼내 보여 줬다.

보는 순간 나를 홀딱 반하게 만들었던 검 ‘묵랑’이었다.

손잡이와 검집 모두가 온통 검은색으로 칠해진 묵랑은 호수구에 울부짖는 늑대의 머리가 장식되어 있는 멋진 검이었다.

그 멋진 외형에 조장이 감탄했다.

“오오오! 멋지군!”

“그렇죠?”

하지만 이 녀석에게서 제일 멋진 건 역시 검을 뽑았을 때 날에서 뿜어내는 요요한 광채였다. 시험 삼아 내리친 바위를 간단히 두 동강 내는 모습은 마인마저도 검강 없이 두 동강 낼 수 있지 않을까 싶을 정도였다.

훌륭한 병기는 무인의 친구이자 보물, 좋은 친구를 얻은 내 동료들은 모두 싱글벙글 웃으며 자신들의 병기를 살펴보느라 여념이 없었다.

뿌듯했다.

문득 생각했다.

나 소저도 기뻐해 주겠지?

이번에 같이 오지 않은 여자 조원들에게 줄 것도 이미 챙겨 놓은 상태였다.

그것을 받은 조원들이, 특히 나 소저가 어떤 표정을 지을지 가슴이 설레었다.

흐뭇하게 웃고 있던 나는 이내 박수를 쳐 주위를 환기했다.

“자, 자. 그럼 무기 시험은 실전에서 하시고, 이제 출발하도록 합시다! 근데…. 출발하기 전에 출출하니까 영약이나 하나씩 먹고 가시겠습니까?”

내 말에 동료들이 헛웃음을 지었다.

내 내공은 이제 몇 년만 더 채우면 절정에 올라설 수 있는 최소 조건인 일 갑자가 된다.

예전에야 조금만 더 채우면 될 것을 굳이 아깝게 영약을 먹을 필요가 없다고 생각했지만, 이렇게 영약이 남아나는데 굳이 아낄 필요가 없지 않겠는가?

드디어 내공 일 갑자를 꽉 채울 시간이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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