31화 生死怪醫(생사괴의)-1
천천히, 아주 천천히.
거의 멈춘 듯 천천히 숨을 쉬었다.
내가 있는 곳은 나무 위 울창한 나뭇잎 사이, 지금 나무 아래로 네 명의 흑상방 무사들이 다가오는 중이었다.
무위는 높게 봐줘야 이류에서 일류 하급.
정면으로 부딪쳐도 충분히 이길 수 있을 것 같기는 했다.
하지만 기다리기로 했다.
가능하면 소리 없이 처리해야 할 테니까.
한 걸음, 두 걸음, 세 걸음.
이제 놈들이 내 바로 밑을 막 지나가고 있었다.
그리고 맨 뒤의 무사까지 다 지나간 순간, 나는 소리 없이 거꾸로 떨어져 내렸다.
샤악!
공중에서 몸을 뒤집으며 베어 낸 검이 맨 뒤 무사의 경동맥을 스치고 지나갔다.
“컥!”
피시식!
그의 목에서 핏줄기 한 가닥이 세차게 뿜어져 나올 때, 내 검은 이미 앞의 둘을 향해 베어 가고 있었다.
“뭐…!”
“억…!”
쉬이이익!
두 사람의 눈이 나를 향하긴 했지만 소용없었다.
이미 목이 베어진 후였으니까.
그때 제일 앞서가던 무사가 문득 뒤돌아 나를 보고는 깜짝 놀라며 입을 크게 벌리려 했다.
“적…!”
하지만 그 순간 그의 심장에 내 검 ‘묵랑’이 깊게 박혀 들어갔다.
푸우욱!
“커어억!”
그의 눈이 빛을 잃고는 그대로 무너지는 것을 보며 묵랑검을 부드럽게 뽑아냈다.
사람 몸을 찌르고 빼는 것이 무슨 두부를 찌르는 것처럼 부드러운 느낌이었다.
새 애검의 예리함에 다시 한번 감탄하며 다시 발걸음을 옮겼다.
아직 생사괴의의 종적은 발견하지 못했고, 그 전까지 마주치는 흑상방의 전력은 최대한 줄여 놓을 생각이었다.
몇 시진 전, 관제묘를 나온 후 우리는 다시 두 무리로 찢어졌었다.
생사괴의의 자녀들과 그들을 보호하기 위해 남은 배종환이 하나, 생사괴의를 구하러 가는 조장과 나, 비사영이 또 하나였다.
‘종관, 이번 일은 은밀하게 움직여야 하니까 조장, 나, 사영 셋이 다녀올게. 너는 객잔에서 생사괴의의 자녀들을 지키고 있어 줘. 혹시라도 다시 납치당하지 않도록.’
그러자 조장도 고개를 끄덕이며 말을 덧붙였다.
‘그래, 내 생각에도 갑자기 내공이 늘었으니 운기부터 하는 게 좋을 것 같네. 내가 월도술을 하나 가르쳐 줄 테니 그걸 익히고 있도록 하게.’
이번에 영약을 섭취하며 배종관은 대략 사십 년 이상의 내공을 쌓게 된 상태였다.
그도 마침내 일류의 경지에 발을 디딜 조건을 충족했던 것이다.
그를 제외한 우리 세 사람은 바람처럼 달려 흑상방이 생사괴의 마종환을 쫓고 있는 귀주성과 광서성의 경계까지 금방 도착할 수 있었다.
생사괴의는 흑상방이 있던 귀주성 흥인에서부터 동남쪽 광서성 방향으로 도주했었다.
이 지역의 환경은 운남성 못지않은 밀림과 구릉지로 이루어져 있었기에 흑상방 무인들은 수색에 무척 애를 먹고 있는 모양이었다.
그래서 흑상방주 고주용은 데려온 많은 인원을 넓게 펼쳐 마종환이 있을 만한 곳을 크게 포위한 채 천천히 포위망을 좁혀가는 중이었다.
우리는 일단 세 갈래로 갈라진 후 세 방향에서 흑상방의 뒤를 따라가며 생사괴의의 행방을 찾아보기로 했다.
‘각자 생사괴의를 찾아보며 상황이 허락하는 대로 흑상방의 전력을 깎아 포위망에 구멍을 좀 내 보도록 하죠.’
‘알겠네, 그럼 조심하게. 특히 사영, 자네는 너무 무리하지 말고.’
‘헹, 저도 이제 일류의 무인이 됐으니 그렇게 걱정 안 하셔도 됩니다, 조장.’
이게 내가 지금 은밀하게 움직이며 흑상방도들을 기습하고 있는 이유였다.
아마 조장도 지금쯤 한쪽을 초토화하고 있겠지.
비사영이 조금 불안하긴 했지만 그 역시 이미 일류의 경지를 밟은 데다 내공도 일 갑자를 꽉꽉 채워 줬으니 적어도 도망치는 그를 잡을 수 있는 자는 없을 것이라 확신하고 있었다.
그것이 설사 절정 고수라고 해도 말이다.
다시 은밀하게 움직이던 나는 조금 떨어진 곳에서 다시 흑상방도들을 발견할 수 있었다.
이번에는 십여 명 정도, 아무래도 인원이 좀 많은 것 같았다.
풀숲에 몸을 낮춘 나는 먹이를 노리는 호랑이처럼 천천히 다가가기 시작했다.
비종문 천풍보법의 극의는 공기 그 자체가 되는 것, 아직 극의를 밟지 못했다 해도 내 움직임에 부스럭거림 따위는 전혀 없었다.
대충 적들의 수준을 가늠해 봤다.
전체적으론 이류에서 높게 봐줘야 일류 하급 정도지만, 책임자로 보이는 한 놈이 일류 중급 정도로 보였다.
놈들의 수준을 파악하고는 잠시 고민했다.
기습해서 싸워 이기는 것이 문제가 아니었다.
무리하게 기습하다가 혹시라도 부근의 다른 흑상방도들에게 신호를 보내기라도 하면 낭패인 것이다.
잠시 고민하고 있던 내 눈에 문득 허리에 달아 놨던 가죽 자루가 눈에 들어왔다.
빙긋이 웃음이 지어졌다.
결국 마음을 결정했다.
약간 모험을 해 보기로.
나 혼자만이라면 무리겠지만 내겐 예쁜 친구들이 있지 않은가.
적들과의 거리를 대충 가늠한 후 가죽 자루의 묶여 있는 입구를 허공 쪽으로 향하게 했다.
그러곤 살짝 입구를 벌리자 자루에서부터 두 마리의 뱀이 화살처럼 튀어 나갔다.
피핑!
독림에 갔던 그날 이후로 열심히 키우고 있는 삼채시사였다.
나는, 삼채시사가 하늘 높이 솟구쳤다 포물선을 그리며 떨어지는 모습을 지켜봤다.
조준은 괜찮았던 모양이었다.
내 귀여운 녀석들이 숲을 수색하는 흑상방도들의 머리 위로 떨어지고 있었다.
***
흑상방 외당 소속의 정조 조장 정모수는 머리끝까지 짜증이 치밀어 올라 있는 상태였다.
정말이지 모든 것이 짜증 났다.
며칠 동안을 그림자도 보이지 않는 생사괴의도, 그 생사괴의를 잡겠다고 자신들로 하여금 밀림 속을 헤매게 만든 방주도, 푹푹 찌는 더위도, 쉴 새 없이 웽웽거리며 달려드는 모기들도.
무엇 하나 짜증 나지 않는 것이 없었다.
그래서 정모수는 그 짜증을 부하들을 갈구는 것으로 풀고 있었다.
“좀 빠릿빠릿하게 움직이지 못하냐, 이 병신들아?! 빨리 놈을 잡아야 집으로 돌아갈 것 아니냐, 엉?!”
사실 빠릿빠릿하지 못한 건 자신 또한 마찬가지였고, 이렇게 자기가 짜증을 풀면 달리 풀 곳이 없는 부하들은 더 힘들 거라는 점도 짐작이 가긴 했다.
하지만 거기까지 신경 써 줄 배려 따위는 없었다.
그때였다.
얼굴이 거멓게 죽어 가던 부하들의 바로 옆으로 하늘에서 무언가가 툭 떨어져 내렸다.
그러자 부하 한 명이 무심코 그것을 바라봤다가 깜짝 놀라 비명을 질렀다.
“으아아악! 뱀이다!”
“와아앗! 뭐, 뭐야?!”
순식간에 뱀을 중심으로 부하들이 화다닥 물러섰다.
바닥에 떨어진 뱀 두 마리가 똬리를 틀고는 혀를 날름거리며 이쪽을 보고 있었다.
사실 정모수도 깜짝 놀랐었다.
하지만 그는 습관적으로 짜증부터 냈다.
“야, 이 병신들아! 고작 뱀 두 마리 때문에 그 난리들이냐?! 당장 저거 안 잡아?!”
“…….”
정모수의 말에 부하들이 불만스럽게 인상을 찡그리며 뱀에게로 다시 다가갈 때였다.
갑자기 뱀들이 화살처럼 쏘아졌다.
쉭!
푹!
“으아아악! 뭐, 뭐야?!”
“무, 물렸어?!”
그들이 정신을 차렸을 땐 이미 뱀들이 두 명의 몸에 독니를 박아 넣은 후였다.
깜짝 놀란 부하들은 다시 우르르 뒤로 물러섰다.
하지만 뱀에게 물린 부하들은 그렇게 하지 못했다.
그들은 벌써 거멓게 된 얼굴로 풀썩 쓰러지더니 입에서 거품을 물기 시작했던 것이다.
“지, 지금 봤어?! 뱀이 화살처럼 날아들었어!”
“뭐, 뭐야?! 무, 물리자마자 저렇게 된 거야?!”
겁을 먹은 부하들은 차마 다시 뱀에게 다가가지 못하고 있었다.
그리고 그건 정모수 또한 마찬가지였다.
그는 정작 자기가 가까이 가지는 못하고 두려운 표정으로 뱀을 바라보면서도 부하들에게 소리쳤다.
“야, 이 병신들아! 빨리 가서 저 뱀을 잡아! 저놈들을 죽게 만들 셈이냐?!”
“하, 하지만 조장님!”
자기가 명령을 했음에도 아무도 앞으로 나서는 부하들이 없자 정모수는 분노한 표정으로 부하들 쪽을 쳐다봤다.
“이 새끼들이…?!”
그러자 볼 수 있었다.
어느새 유령처럼 다가와 부하들의 등 뒤에서 검초를 날리고 있는 잘생긴 젊은 남자를.
슈하아악!
그의 검이 환상처럼 퍼져 나갔다.
“어억?!”
“끅?!”
“끄어어억?!”
한순간 그의 검이 부챗살처럼 사방으로 퍼져 나가자 순식간에 부하들이 피를 뿜으며 쓰러져 가고 있었다.
“뭐, 뭐냐?!”
깜짝 놀란 정모수가 황급히 도를 뽑으려 했다.
하지만 부하들의 목을 스친 남자의 검이 짓쳐들어오는 게 먼저였다.
푸슉!
엄청난 속도로 확대된 남자의 얼굴이 정모수의 시야를 가득 채운 순간, 목의 따끔한 감촉과 함께 갑자기 그의 눈에 파란 하늘이 들어왔다.
정모수의 눈에 담긴 마지막 광경이었다.
***
책임자로 보이는 적의 목을 간단히 날려 버린 나는 헛웃음을 지으며 묵랑검을 바라봤다.
사람의 목을 날리는 감촉이 마치 풀을 베는 것처럼 부드러웠다.
다시 살펴본 묵랑검의 검날에는 피조차 묻어 있지 않았다.
“이건 요검이로군.”
그렇게 중얼거리며 고개를 돌려 주변을 살폈다.
살짝 거리가 있던 자들 세 명에겐 암기를 던졌었는데 확실히 죽었는지 확인이 필요했다.
만족스럽게도 모두 즉사였다.
삼채시사로 죽인 자가 둘, 검으로 죽인 자가 여섯, 암기로 죽인 자가 셋.
이 인원을 소리 지를 시간조차 안 주고 처리했다는 건 꽤나 괜찮은 결과였다.
이 정도면 지난 삶의 마지막과 비교해도 좀 더 낫지 않나 싶었다.
드디어 과거의 나를 뛰어넘은 것이다.
뭐, 어차피 절정에 올랐던 것도 아니기에 그게 무슨 의미가 있는지는 모르겠지만, 적어도 이번 삶에서는 절정의 경지를 밟아 볼 수 있을 거 같았다.
‘느닷없이 죽지만 않는다면 말이지.’
묵랑을 납검한 후 삼채시사에게 물려 죽어 가고 있는 자들에게 다가가 간단히 뱀의 목을 잡고는 다시 자루에 집어넣었다.
목표물의 숨이 완전히 끊어질 때까지 독니를 빼지 않는 녀석들의 습성 덕에 회수도 이렇게 간편할 수가 없었다.
“수고했다, 이쁜이들.”
흐뭇한 미소가 절로 나왔다.
어떻게 뱀인데도 이렇게 예쁠 수 있는지 신기했다.
사람인 점창검비 주태경보다도 훨씬 예쁜 것 같지 않은가.
하긴 주태경은 아무 도움이 안 되지만 우리 이쁜이들은 무려 탐혈마군 지광옥을 물리쳐 줬으니 당연한 일이기는 하지만 말이다.
물론 처음에 나를 물려고 달려들긴 했었지만 그건 생각지 않기로 했다.
과거가 뭐 중요하겠는가?
지금 예쁘면 됐지.
그런 생각을 하며 다시 은밀하게 이동하기 시작했다.
가능하면 흑상방도보다 먼저 생사괴의를 찾고 싶었다.
그런 식으로 계속 전진하다 이변을 느낀 것은 두 시진 정도가 더 지났을 때였다.
삐이익!
내가 가고 있는 방향에서 긴급한 호각 소리가 들려오고 있었다.
아무래도 생사괴의를 발견한 모양이었다.
파바박!
은밀함을 버리고 전속력으로 달리기 시작했다.
주위 풍경들이 급속도로 지나쳐 가는 속도감이 새삼 내가 성장했음을 느끼게 해 주고 있었다.
그렇게 일각 정도를 달렸을 때였다.
전방에 사람들이 몰려 있는 것이 눈에 들어왔다.
흑상방도들이 한 명을 높이 솟은 절벽의 벽 쪽으로 몰아넣고는 포위하고 있었다.
발걸음을 늦추고는 빠르게 몸을 숨겼다.
대략 삼사십 명의 인원, 게다가 그들을 이끌고 있는 자가 심상치 않아 보였던 것이다.
사십 대 정도로 보이는 흑색 무복의 남자가 속이 시원하다는 듯 웃으며 말하고 있었다.
“으하하하하! 드디어 잡혔구나, 생사괴의! 어차피 이렇게 잡힐 것을 그렇게 고생을 시키다니! 당장 네놈을 죽여 버리고 싶지만 대형의 명이니 특별히 다리만 부러뜨려 주마!”
대형이라….
흑상방에는 고주용을 비롯해 흑상방의 사천왕이라고 불리는 네 명의 절정 고수가 있었다. 그들은 모두 의형제를 맺고 있었고 말이다.
그건 충분히 놀랄 만한 일이었다.
절정 고수들이 이런 촌구석 문파에 네 명씩이나 모여 있다니.
전선에 있다 보니 고수들에 대한 감이 무뎌져서 그렇지 절정 고수란 존재는 원래 이런 촌구석에서는 절대자나 다름없는 존재였던 것이다.
선우세가가 있던 귀양도 거기가 귀주성의 도성이니 아버지를 비롯해 다른 문파 문주들까지 절정 고수가 십여 명씩이나 있었던 거지, 다른 지역은 절정 고수 한 명이 지역 하나씩 나눠 먹고 왕 노릇 하는 것이 원래 정상적인 상황이었다.
‘물론 구대문파나 무림맹 같은 곳이야 절정 고수가 몇십 명, 저 위쪽의 천마신교에는 몇백 명씩 몰려 있다는 소릴 듣긴 했지만, 거기는 예외지. 그 정도 되니까 구대문파나 무림 제일세 소리를 듣는 것이니까’
아무튼 절정 고수는 무림에서 매우 드물고 귀한 존재였다.
그러니 이십 대의 절정 고수가 다섯 명이나 있는 비룡십삼대를 보고 청연 소저가 무림맹도 이렇지는 않다며 놀랐던 것이었다.
누구보다 쉽고 빠르게 절정에 도달할 수 있는 혈교의 무학이 왜 무인들에게 매력적인지도 이해할 수 있는 것이고 말이다.
‘근데 하필 그런 절정 고수가 조장도 없이 나만 있는 곳에서, 그것도 나보다 먼저 생사괴의를 발견해 버렸단 말이지?’
심지어 뒤로 사십여 명의 무사들까지 이끌고 말이다.
고민에 빠질 수밖에 없었다.
‘어떻게 해야 하지?’
놈들은 지금 이 순간에도 생사괴의를 포위해 막다른 절벽 쪽으로 압박하고 있었다.
이대로 놔두면 잡힐 것 같은데 아무리 생각해도 뾰족한 수가 생각나지 않았다.
그때였다.
뒤쪽, 내가 왔던 방향에서 누군가 달려오는 기척이 느껴졌다.
발걸음이 가볍지 않은 것으로 볼 때 대략 이류 정도의 무사였다. 아마 흑상방 무사인 듯했다.
그들 세 명 정도가 이쪽으로 다급하게 달려오고 있었다.
내가 왔던 쪽에서 다급하게 달려오는 무사라니, 대충 무슨 상황인지 짐작이 갔다.
‘젠장, 습격해 죽였던 자들의 시체가 발견됐구나!’
입맛이 썼다.
하필 이런 상황에 내 존재까지 알려지게 되다니.
다시 돌아가 설풍 조장과 합류라도 해야 하나 생각될 정도였다.
그때, 문득 어떤 생각이 떠올랐다.
흠, 이거 잘만 하면?