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마교전선 비룡십삼대-35화 (35/359)

35화 生死怪醫(생사괴의)-5

흑상방도들이 한참을 헤매다 간신히 우리의 종적을 발견하고는 다시 쫓기 시작하고, 그들을 약 올리듯 요리조리 피해 다니던 우리들이 마침내 그들에게 따라잡혔을 때였다.

하룻밤 사이에 십 년은 늙어 보이는 고주용이 우리에게 소리쳤다.

“이 개 같은 놈들! 이젠 절대로 놓치지 않겠다!”

우리는 힐끗 뒤를 바라봤다.

포위당한 상태이긴 하지만 굳이 뚫고 나가고자 한다면 못 뚫을 것 같지는 않았다.

워낙 지쳐 보이는 적들의 모습이 도저히 우리를 막을 수 있을 것처럼 보이지 않았던 것이다.

차라리 이대로 싸워도 괜찮지 않을까 싶을 정도였다.

그때였다.

어디선가 젊은 여인의 목소리가 들려왔다.

“뭐야?! 벌써 구출된 거야?! 그러면 안 되는데?!”

목소리의 방향으로 고개를 돌려 보니 붉은 옷을 입은 미녀 한 명이 허리에 팔을 얹은 채로 나무 위에서 우리를 지켜보고 있었다.

나이는 많이 봐줘야 이십 대 초반? 큰 눈망울과 살짝 들어간 보조개, 온몸에서 뿜어내고 있는 듯한 소녀 같은 풋풋함이 허리에 팔을 얹은 자세까지도 귀엽게 보이게 만드는 소저였다.

심지어 그 미모는 당여은 소저 못지않아 보이기까지 했다.

그녀가 가볍게 몸을 날려 우리 옆으로 착지하며 말했다.

“어이, 너희들! 너희가 생사괴의를 구한 거야? 그 단약도 받기로 한 거고? 아, 이러면 안 되는데!”

그녀를 본 나는 회심의 미소를 지었다.

드디어 기다리던 사람이 왔던 것이다.

나는 그녀에게 포권하며 대답했다.

“누구신지는 모르겠지만, 아직 저희가 생사괴의 어르신을 완전히 구했다고 할 수는 없습니다. 저자들이 계속 남아 있는 한 언제든 어르신을 노리려고 할 테니까 말입니다.”

그러자 인상을 살짝 찌푸렸던 그녀가 귀엽게 턱을 긁으며 생사괴의에게 물었다.

“당신이 생사괴의지? 어때? 당신도 그렇게 생각해? 내가 저들을 쓸어버리면 당신을 구한 게 내가 되는 거야?”

아직 젊다 못해 어려 보이는 소저였기에 중년의 생사괴의에겐 무례한 언동이 아닐 수 없었다.

하지만 내 행동을 보며 무언가를 느낀 듯한 생사괴의는 잠시 생각하다 대답했다.

“그렇게 생각지는 않소. 이 소협들은 충분히 최선을 다했고 이미 나를 구하기도 했소. 다만 누군가 저들을 죽여 후환을 없애 준다면 그 또한 나를 구한 사람 중 하나가 되겠지요.”

그러자 그녀가 생기 있게 웃으며 고개를 끄덕였다.

“좋아! 그 정도라도 어디야! 그럼 잠시 기다리라고!”

그러곤 한순간 그녀의 신형이 사라져 버렸다.

그 신묘한 움직임에 우리는 당황할 수밖에 없었다.

각자 나름대로 신법에 자신이 있다던 우리 세 사람도 전혀 그녀의 종적을 파악할 수가 없었던 것이다.

엄청난 신법이었다.

비사영이 경악한 얼굴로 중얼거렸다.

“이형… 환위?”

그때 얼이 빠진 듯한 표정의 생사괴의가 내게 물었다.

“저 소저는 대체 누구인가? 선우 소협, 자네는 저 소저의 정체를 알고 있는가?”

나는 일단 그 질문에 대답하지 않고 설풍 조장을 바라봤다.

그는 그녀를 처음 본 순간부터 파랗게 질려 있는 상태였던 것이다.

그에게 물었다.

“조장님은 아시겠습니까?”

그러자 조장이 침을 꿀꺽 삼키며 대답했다.

“저 소저는, 저분은 설마….”

그때 옆에 있던 비사영이 경악한 얼굴로 소리쳤다.

“저, 저길 봐! 저건?!”

그가 가리킨 손가락을 따라 무심코 시선을 돌리던 우리는 그녀를 발견하고는 눈을 크게 치떠야만 했다.

어느새 흑상방도들 쪽으로 이동한 그녀가… 공중에 둥둥 뜬 채로 그들을 내려다보고 있는 것이 아닌가.

우리는 경악해 입을 떡 벌릴 수밖에 없었다.

그녀가 마치 허공에 안 보이는 발판을 밟고 있는 듯 안정적으로 서 있었던 것이다.

그걸 본 비사영이 비명처럼 소리를 질렀다.

“느, 느, 능공 허도?!”

그녀의 정체를 알고 있었던 나도, 대충 짐작은 한 모양이던 설풍 조장도 입을 다물 수가 없었다.

능공 허도라니…. 그건 정말 전설 속에서나 나오던 경지인 줄 알았는데….

아니, 솔직히 이야기꾼이 만들어 낸 공상 같은 것에 불과하다고 생각했었다.

근데 그걸 실제로 보게 되다니.

하지만 지금의 놀라움은 시작에 불과했다.

그녀가 흑상방도들을 내려다보며 말했다.

나지막이 중얼거림에도 우리에게까지 선명하게 전달되는 목소리였다.

“너희는 나쁜 놈들이니 죽어도 억울하지는 않을 거야. 그렇지?”

그러자 이미 넋이 나가 있던 고주용이 화들짝 놀라며 되물었다.

“그, 그, 그게 무슨…?”

하지만 그는 답을 들을 수 없었다.

그녀가 하늘로 손을 번쩍 치켜들자 그녀의 손바닥 위로 붉은 구체가 맺히기 시작했다.

아마도 강기의 덩어리일 그것은 순식간에 사람 몸보다도 더 큰 직경으로 이글거리며 성장하더니만.

그녀가 그 손을 힘껏 내리치자 그것은 마침내 붉은 유성이 되어 멍하니 보고 있던 그들을 향해 떨어져 내렸다.

그리고 거대한 폭발이 일어났다.

콰아아아아아아아앙!

엄청난 굉음, 엄청난 폭발이었다.

우리는 폭발과 함께 확 밀려온 열풍에 쓰러지지 않기 위해서 필사적으로 자세를 낮춰야만 했다.

화아아아악!

“크으으윽!”

“이, 이게 대체?!”

그리고 잠시 후 열풍이 지나간 뒤 눈을 떠 목격한 광경은 도저히 믿기지 않는 모습이었다.

그들이 서 있던 땅이 운석을 맞은 듯 직경 사 장 정도의 원형으로 깊게 파여 있었던 것이다.

그 원 부근에 사람이 있었던 흔적 따위는 어디서도 찾아볼 수가 없었다.

전멸이었다.

우리가 멍한 표정으로 입을 다물지 못하고 있을 때 어느새 다시 우리 앞에 나타난 그녀가 물었다.

“좀 귀찮아서 그러는데 저 뒤에 있는 조무래기들도 다 처리해 줘야 할까?”

그녀가 손가락으로 우리 뒤를 포위하고 있는 하급 무사들을 가리키자, 번개에 감전된 듯 부르르 몸을 떤 하급 무사들이 그 자리에 풀썩풀썩 엎드려 사정하기 시작했다.

“아이고, 선녀님! 제발 살려 주십시오!”

“착하게 살겠습니다! 제발 살려 주십시오!”

그러자 그들의 아우성에 인상을 찌푸린 그녀가 중얼거렸다.

“너무 시끄러워. 역시 죽여 버려야겠군.”

그 순간 사위가 거짓말처럼 고요해졌다.

그들 중 누구 하나 숨소리조차 내는 사람이 없었다.

생사괴의가 말을 더듬으며 그녀에게 물었다.

“소, 소저는 대체 누, 누구… 시오?”

그러자 그녀가 소녀처럼 생긋 웃으며 대답했다.

“나? 나 손은상이야.”

그 말에 깜짝 놀란 비사영이 소리치려 했다.

“그, 그럼 색…!”

나는 재빨리 그의 입을 틀어막아 다음 얘기를 못 하게 만들고는 황급히 말했다.

“역시 소문대로 아름다우십니다, 선배님.”

그러자 비사영을 한 번 슬쩍 째려본 그녀가 이내 피식 웃으며 내게 말했다.

“손이 빠르구나. 입도 예쁘고. 얼굴은 더 잘생겼네. 마음에 들어. 친구는 살려 줄게.”

“감사합니다, 선배님!”

그녀의 이름은 손은상, 별호는 여령(悆齡)색마였다.

또한 그녀는 천마신교의 주인인 천마, 우리의 주적인 혈교의 혈마, 그리고 괴마와 함께 일제 이왕 삼성 사마 오괴 중 사마에 속하는 이 시대의 절대자 중 한 명이기도 했다.

겉으로 보이는 모습은 갓 이십 대가 됐을 법한 소저에 불과하지만 그녀의 진정한 나이는 이미 육십이 훨씬 넘은 노마두였던 것이다.

그녀가 입을 떡 벌린 채 경악해 있는 생사괴의에게 말했다.

“어때? 이 정도면 내가 구해 준 거 맞지? 아니면 저 조무래기들도 다 쓸어 줄까?”

그러자 이제야 정신을 차린 생사괴의가 격하게 고개를 저으며 대답했다.

“아니오, 아니오. 괜찮소. 괜찮소. 그런데 손 선배께서도 내 생사환을 얻으러 여기까지 행차하신 거요?”

그러자 그녀가 살짝 쑥스럽다는 듯 머리를 긁적이고는 대답했다.

“아니, 그건 아니고 소환단에 버금가는 단환을 만들 줄 아는 의원이라면 도움을 좀 받고 싶어서 말이야.”

“도움이라고 하셨소? 무슨…?”

“그래, 그게 그러니까, 음…. 내가 이제 그만 좀 젊어지고 싶거든. 나도 나이를 좀 먹고 싶어졌어. 그래서 도움을 좀 받으려고.”

“…!”

그녀의 뜬금없는 말에 모두가 놀라 눈을 껌뻑거렸다.

물론 이미 알고 있던 나 또한 겉으론 놀란 척했다.

여령(悆齡)색마라는 별호답게 그녀는 채양보음의 색공을 익힌 색마였다.

그녀는 이십 대였을 때부터 수많은 남자들을 유혹해 그들의 양기를 빨아먹었고 그것으로 상상도 할 수 없는 내공을 쌓아 왔다.

그렇다고 무공이 약하냐 하면 그것도 절대 아니었다.

애초에 깨달음이 없이는 높은 내공을 쌓을 수도 없었을 테니까 말이다.

그래서 색마를 절대 용납하지 않는 무림맹은 그녀를 무림공적으로 선포했었다.

덕분에 그녀의 삶은 수많은 피로 점철되어 버렸고 말이다.

하지만 그로부터 사십 년 가까이 지난 지금까지도 그녀는 여전히 살아 있었다.

아무도 그녀를 죽일 수 없었던 것이다.

당당하게 신분을 드러내고 다녀도 아무도 범접할 수 없는 색마, 무림 역사상 몇 명도 되지 않을 그 위업을 달성한 것이 바로 그녀, 여령색마 손은상이었다.

그녀의 미모는 옛날부터 유명했었다.

심지어 양기를 빨리고 죽을지 모르는데도 그녀와 관계를 맺고 싶다는 남자들까지 있을 정도였으니까 말이다.

게다가 그녀는 늙지도 않았다.

고강한 내공 때문인지 아니면 무공의 성격 때문인지, 시간이 지나도 늙지를 않아 별호조차 여령(悆齡:나이를 잊음)색마가 되었는데, 어느 순간부터인가 오히려 어려지고 있다는 소문까지 돌기 시작했었다.

그리고 지금 그녀를 보건대 아마 그 소문은 사실이었던 모양이었다.

대체 무공이 얼마나 강한 것인지 상상조차 되지 않았다.

근데 그런 그녀가 지금 나이를 먹고 싶다고 말한 것이었다.

무림의 모든 여인들이 광분할 만한 소리가 아닐 수 없었다.

생사괴의가 혼란스러운 표정으로 물었다.

“그러니까, 손 선배의 말은 지금 더 늙어지고 싶다는 거요? 아니, 대체 왜 그러고 싶단 말이오?”

그러자 한숨을 푹 내쉰 그녀가 대답했다.

“뭐, 이해가 안 될 수도 있겠지. 근데 난 이제 젊게 사는 것에 질렸어. 내 마음이 젊지 않은데 모습만 젊은 것에 말이야. 그래서 앞으로는 조금쯤 나이에 맞는 삶을 살고 싶어.”

거기까지 들은 우리는 뭐라고 말을 꺼낼 수가 없었다. 전혀 이해할 수 없는 영역의 이야기라 그저 그럴 수도 있겠다며 이해해 보려고 노력해 볼 뿐이었다.

그녀가 다시 말했다.

“그래서 생사괴의 당신이 나를 좀 도와줬으면 좋겠어. 그럴 수 있을까?”

그러자 잠시 심각한 표정으로 고민하던 생사괴의가 물었다.

“선배님께서 원하시는 것이 늙는 것이라면 그것은 의술보단 무공의 문제일 수 있소. 알고 계시지 않소?”

손은상은 고개를 끄덕였다.

“맞아. 내 무공과 내공의 성질에 관한 문제이지. 그래서 벌써 십 년 이상 거기에 매달려 연구해 왔었어. 하지만 무공 지식만으론 한계가 있더라고. 그래서 요즘 얻은 내 결론은 아무래도 무공만이 아닌 인간에 관한 이해가 필요하다는 거야. 바로 의술 같은 것 말이지.”

생사괴의는 이제 이해했다는 듯 고개를 끄덕였다.

하지만 그의 표정은 밝지 않았다.

“손 선배께서 내게 부탁하고 싶으신 건 그럼 함께 연구를 하는 것이겠구려. 그것도 긴 시간이 필요한 연구를 말이오.”

그러자 손은상이 황급히 말했다.

“딱 일 년이면 돼! 그 이상 귀찮게 하진 않을게. 또 나도 어차피 역마살 낀 인간이라 당신이 강호낭중으로 사는 것을 막을 이유도 없어. 그냥 편하게 다니고 싶은 곳을 다녀도 돼. 내가 그 옆에 따라다닐 테니까.”

하지만 그녀가 그렇게 말했음에도 생사괴의의 표정은 밝아지지 않았다.

그때, 문득 내가 끼어들어 생사괴의에게 말했다.

“저는 괴의 어르신께서 손 선배님의 부탁을 들어주시면 좋을 것 같다고 생각합니다.”

그러자 그가 의아한 얼굴로 물었다.

“응? 어째서 말인가?”

“첫째, 그것이 도리이기 때문입니다. 어르신께선 손 선배님께 은혜를 입으셨습니다. 흑상방을 괴멸시켜 후환을 끊는 것은 저희로선 도저히 해 드릴 수 없었던 일이었지요. 둘째, 손 선배님과 함께 있는 것이 어르신의 안전에도 도움이 될 것이기 때문입니다. 이제 어르신의 수중에 생사환이 있다는 것과 어르신께서 그것을 만들 수 있다는 소문이 무림에 좍 퍼졌을 것입니다. 어르신께선 맹운이와 용지를 납치해 어르신을 협박하려는 시도가 이번 한 번뿐이라고 장담할 수 있으시겠습니까?”

내 말에 그가 낮게 신음을 흘렸다.

아마 흑상방만 생각했지 이후의 일은 생각하지 못했던 모양이었다.

나는 계속해서 말을 이었다.

“마지막으로 셋째는 손 선배님이 충분히 믿을 만한 분이시라는 점입니다. 비록 정파인은 아니시지만 손 선배님께서는 아직 한 번도 자신의 말을 어긴 적도, 무고한 이를 해치신 적도 없으셨지요.”

사실이었다.

그녀는 비록 색마이긴 했지만 그녀 기준으로 죽일 만하다고 생각되는 자들이 아니면 결코 양기를 빼앗거나 해치지 않았었다.

그렇기 때문에 그녀와 관계를 맺고 싶어 하는 남자들이 그렇게나 많았던 것이기도 했고 말이다.

물론 자신을 죽이려는 자들은 절대 용서치 않고 철저히 응징했기에 피로 점철된 길을 걸어오기는 했지만, 이렇게 오랜 시간이 지나도록 자신의 신념을 지키며 살아온 이는 정파인 중에서도 많지 않았다.

아니, 오히려 극히 드물겠지.

내 말을 듣자 반색한 그녀가 내게 말했다.

“꼬마 너, 무척 마음이 열려 있는 아이로구나? 정파 녀석인 것 같은데 특이하네.”

꼬마….

아무리 그녀가 나이가 많다는 걸 알아도 많이 봐줘야 이십 대 초반의 외형을 지닌 그녀에게 꼬마 소리를 듣는 건 묘한 기분이었다.

내심 쓴웃음을 짓고는 대답했다.

“제 친한 동료들 중에는 사파 출신도 꽤 많습니다. 반면 사람 같지 않은 정파인도 많이 봐 왔지요. 사람이 옳고 그른 것에 정파, 사파가 중요한 것은 아니라고 생각합니다. 당장 제 옆에 계신 제 조장부터 정파 출신이 아니시거든요.”

그러자 그녀가 흐뭇한 미소를 지으며 내 어깨를 두드려 줬다.

“마음에 들어. 아주 마음에 드는 녀석이야. 얼굴도 이렇게 잘생긴 녀석이 생각도 번듯하다니.”

그러고는 조장을 힐끗 보고는 다시 말을 이었다.

“그러고 보니 너도 잘생겼구나? 너희 혹시 나랑 잘 생각 있니? 너희라면 내가 화끈하게 놀아 줄게.”

“네, 네?!”

상상치도 못한 그녀의 제안에 나는 깜짝 놀라고 말았다. 게다가 그렇게 말하는 그녀는 아까의 풋풋함은 어디 갔는지 어느새 숨이 막힐 듯한 색기를 뿜어내고 있었던 것이다.

표정 하나 바뀌었을 뿐인데 소녀 같은 발랄함에서 한순간 요녀같이 색기를 띤 모습으로 변하다니, 정말 요물이란 말이 절로 나오는 여인이 아닐 수 없었다.

그녀의 압도적인 색기에 나도 모르게 피가 확 쏠리고 말았다. 얼굴도 순식간에 붉어진 상태였다.

당연히 거절해야 하는데 차마 입이 떨어지지 않고 있었다.

너무나도 유혹적이었다.

그때 문득 설풍 조장의 얼굴이 내 눈에 들어왔다.

그러곤 나도 모르게 풋 웃음을 터트리고 말았다.

조장이 아까 그녀의 무위를 처음 봤을 때보다 더 딱딱하게 얼어붙어 있었던 것이다.

아마 감당할 수 없는 그녀의 색기에 사고가 얼어붙어 버린 모양이었다.

덕분에 나는 웃으며 그녀에게 포권할 수 있었다.

“그렇게 말씀해 주셔서 정말 감사드립니다. 하지만 저희가 선배님의 진정한 신분을 알면서 감히 그렇게 할 수는 없을 것 같습니다.”

그러자 그녀의 눈에 이채가 떠올랐다.

이번엔 진심으로 감탄한 표정이었다.

“정말 대단한 녀석이로구나. 도저히 이십 대 초반이라곤 믿기지 않는 부동심이야. 아무튼 알았어. 제안은 언제든 유효하니까 다음에라도 마음이 내키면 내게 말하도록 해.”

그렇게 말하는 그녀의 색기는 정말 감당할 수가 없었다. 침이 꿀꺽 넘어갔다.

하지만 아쉽게도 다음 기회가 있을 것 같지는 않았다.

아마 다음에 봤을 땐 그녀에게 남편이 생겨 있을 테니까 말이다.

지난 삶에서 생사괴의를 구해 준 그녀는 그의 부탁으로 흑상방을 먼지 하나 남지 않도록 철저히 괴멸시켜 주고는 결국 그와 함께 다니게 되었었다.

그러곤 몇 년 후, 생사괴의와 손은상은 부부의 관계를 맺었다.

무림이 한동안 엄청나게 시끄러워졌을 만큼 유명한 얘기였다.

물론 이번 삶에서도 똑같이 되리라는 보장은 없었다.

하지만, 그래도 미래의 남편이 될지도 모르는 사람 앞에서 그 아내와 관계를 맺고 싶다고는 말할 수 없지 않겠는가?

아무튼 이로써 이번 휴가의 대부분을 투자했던 생사괴의 사건은 깨끗하게 마무리되었다.

우리는 함께 배종환과 생사괴의의 자녀들이 묵고 있는 객잔을 찾아갔고 그곳에서 감격스러운 가족 상봉을 지켜볼 수 있었다.

생사괴의는 우리에게 약속한 것보다 많은 일곱 개의 생사환을 주고는 그러고도 이 은혜는 절대 잊지 않겠다며 몇 번을 강조하고 떠나갔다.

그의 옆에 있던 손은상 역시 언제든 마음이 바뀌면 함께 자 주겠다는 말을 잊지 않았고 말이다.

민망했다.

다만 생사괴의의 자식들은 그렇게 깔끔하게 떠나지 못했다.

첫째 아들인 예쁘장한 외모의 마맹운은 함께 있는 동안 배종관과 많이 친해진 모양이었다.

그는 오랜 지인처럼 배종관과 헤어지기 힘들어하며 눈시울을 붉혔고, 둘째이자 딸인 마용지는 의외의 사람에게 마음을 밝혔다.

그녀가 새빨개진 얼굴로 비사영에게 다가가 말했던 것이다.

“제가 스무 살이 되면 비 오라버니를 찾아갈 거예요. 그러니까…. 그때까지 보중하세요.”

그러고는 도망치듯 달려가는 그녀를 바라보며 비사영은 멍한 표정을 짓고 있었다.

나와 조장은 웃음을 터트리며 그를 놀리기 시작했다.

“여어! 인기남! 장난 아닌데?!”

“하하하하! 사영, 알고 보니 도둑놈이었군.”

우리의 놀림에 발끈한 비사영이 역정을 냈다.

“에잇! 어린 여자애의 설익은 감정을 가지고 무슨!”

하지만 그렇게 화를 내는 척하는 비사영의 얼굴엔 어쩐지 흐뭇한 웃음이 떠올라 있었다.

아마 이번 휴가는 그에게 큰 선물로 남을 것 같았다.

괴의의 딸 때문만이 아니라 내가 흑상방에서 쓸어 온 재물의 절반을 비종문에 보내 주겠다고 그에게 말했던 것이다.

지난번에 비종문의 사정이 어렵다는 얘기를 내가 기억하고 있었기 때문이었다.

그는 감격한 얼굴로 눈물을 흘리며 내게 감사해했고, 조장과 배종관도 자신의 몫을 기꺼이 내밀어 비종문으로 보내 주겠다며 동참했다.

그러고도 남은 재물들은 내가 전장에 맡기고 관리하기로 했다.

그러니 비사영은 이번 휴가를 통해 일류의 경지를 밟게 되었고, 일 갑자의 내공을 채웠으며, 훌륭한 무기를 얻게 되었고, 심지어 마음속에 짐으로 남아 있던 사문의 사제들까지도 지원해 줄 수 있게 되었던 것이다.

거기에다 미모의 소녀에게 고백까지 받았다니 아마 천국이 따로 없지 않을까 싶었다.

하지만 이때까지 우리는 알지 못했다.

여인의 마음을 훔친 도둑은 비사영만이 아니었다는 것을 말이다.

***

소문이 말보다 더 빠르다는 건 세상 어디나 마찬가지겠지만, 무림은 그중에서도 수위를 다투는 곳이 아닐 수 없었다.

생사괴의에게 일어났던 사건은 순식간에 귀주는 물론 주변 지역의 무림인들에게 쏜살같이 퍼져 나갔다.

생사환을 만들 수 있는 그가 여령색마 손은상과 함께 다니게 되었다는 사실을 듣게 된 무림인들은 일부 안타까워했고, 일부는 신기해했으며, 일부는 웃음 지었다.

특히 흑상방에게 눌려 있던 귀주성 서남부의 방파들은 한꺼번에 떨쳐 일어났다.

그간 억눌려 왔던 한을 남은 잔당들에게 풀기 시작했던 것이다.

바야흐로 귀주성 서남부의 패권이 요동치고 있었다.

또한 이 사건과 함께 세 남자의 이름이 무림인들에게 새롭게 부상했다.

휴가 나왔던 비룡대의 무사들이 흑상방에 대항해 생사괴의와 그의 자녀들을 구해 냈다는 소문이 퍼지자, 귀주성 인근의 모든 협객들이 그들의 뛰어난 의협심과 무공에 찬사를 던졌던 것이다.

특히 아직 이십 대의 젊은이이면서도 흑상방의 절정 고수인 흑광륜 각기효를 순식간에 격살했다는 비룡십삼대 칠 조 조장 설풍은 광풍비룡이란 별호를 새롭게 얻으며 무림의 신룡으로 떠올랐다.

사람들은 알 리 없겠지만 선우진의 지난 삶에서와 똑같은 별호였다.

또한 무위와 신법만이 아니라 뛰어난 재지로 생사괴의를 구해 내고 역시 절정 고수인 흑살표 동패경을 참살했던 선우진은 비천흑랑이라는 별호를, 단 한 순간 보인 신법만으로도 흑상방도들을 충격에 빠트렸던 비종문의 대제자 비사영은 질풍비응이란 별호를 얻게 되었다.

그리고 패망한 흑상방 인근의 외딴 객잔, 그들의 소문을 듣고는 그들 중 한 명의 이름을 되뇌는 한 여인이 있었다.

“광풍비룡, 설풍이란 말이지?”

그렇게 말한 이는 하얀 얼굴에 나른한 표정을 짓고 있는 몽환적인 분위기의 여인, 이제는 다시 소속을 잃어버린 염작 혈편서시 야운향이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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