소설리스트

마교전선 비룡십삼대-37화 (37/359)

37화 마유겸-2

“그래, 그 묘족을 따라갈 때 선우진이 뭐라고 말했다고 했었지?”

마유겸의 질문에 주태경이 당황하며 대답했다.

“예? 그, 그야 언젠가 저 안쪽으로 들어가기 위해선 그곳에 대한 정보를 얻어야 한다고….”

그러자 마유겸은 이제 분노한 표정이 되어 물었다.

“그래, 언젠가 저 안쪽으로 들어가기 위해선, 다시 말해 혈교를 치기 위해선 당연히 밀림에 대한 정보를 얻어야만 하지. 근데 누구보다 더 혈교를 치고 싶어 해야 할 점창파 제자인 너는! 대체 왜 그때 저들을 따라가지 않았던 것이냐?!”

마유겸의 갑작스러운 분노에 주태경은 엄청나게 당황할 수밖에 없었다.

“그, 그건….”

하지만 마유겸의 말은 거기서 끝난 것이 아니었다.

그가 칠 조원들 쪽을 손가락으로 가리키며 소리쳤다.

“저들의 웃고 떠드는 모습들을 봐라! 저것이 혈교에게 섭혼된 자들의 모습이라고?! 네 눈은 동태눈이냐?! 혈교의 마두들에게 붙어? 저 설풍이? 저놈이 쳐 죽인 혈교의 마두들이 몇인지 알기나 하고 그따위 소리를 하는 것이냐?!”

마유겸은 설풍을 싫어했지만, 그와 별개로 무인으로서의 그를 누구보다 인정하고 있기도 했다.

아니, 오히려 그래서 싫어하는 것인지도 몰랐다.

명문 정파의 제자도 아닌 주제에 자신보다도 뛰어난 무력을 가진 그를….

근데 감히 주태경 같은 뱀 따위가 자신이 인정한 설풍을 혈교의 마두들에게 붙었다고 모함하려 하다니, 분노가 들끓어 오르지 않을 수 없었다.

“너의 머리로는 사리 분별이라는 것이 불가능한 것이냐?! 자신의 모자람을 알았으면 전력투구해서 그 모자람을 채울 생각이나 할 것이지, 타인을 모함함으로써 저열한 질투심이나 채우려고 해?!”

거기까지 소리친 마유겸은 주태경의 멱살을 확 낚아채서는 그만이 들을 수 있도록 작게 속삭였다.

“주태경, 내가 우리 점창이 멸문당했음을 가장 뼈저리게 실감할 때가 언제인지 아느냐?”

그의 살기 어린 질문에 이제 파랗게 질려 버린 주태경이 덜덜 떨며 대답했다.

“모, 모르겠습니다.”

그러자 살기 가득한 눈빛으로 마유겸이 속삭였다.

“너 같은 쓰레기들도 점창의 얼마 안 남은 동문이라고 차마 쳐내지 못하는 나를 발견할 때다. 정말이지 비참하기 그지없구나.”

그렇게 말한 마유겸은 주태경을 확 밀쳐 버리고는 그대로 뒤돌아 걸어가 버렸다.

하지만 그는 그렇게 분노하면서도 힐끗 시선을 돌려 눈부신 대결을 펼치고 있는 선우진과 청연을 잠시 바라봤다.

주태경과 비교되어 더 반짝거리는 듯한 그가 그렇게 아쉬울 수가 없었다.

마유겸은 조원들을 떨쳐 버리고 홀로 숙소로 걸어가며 고뇌했다.

점창이 다시 일어서기 위해서는 인재들이 절실했다.

주태경 같은 쓰레기가 아닌 제대로 된 인재들, 예를 들면 설풍이나 선우진과 같은 그런 인재들 말이다.

하지만 지금 점창의 제자들은 새로운 인재들을 받기는커녕 원래 있던 제자들조차 하나로 뭉치지 못하고 있는 실정이었다.

그것이 마유겸을 너무도 안타깝게 했다.

그리고 마유겸은 그 이유가 무엇인지 누구보다 잘 알고 있었다.

그가 무겁게 한숨을 내쉬며 생각했다.

‘바로 나 때문이겠지.’

점창의 제자들이 뭉치지 못하는 이유는 바로 마유겸 자신 때문이었다.

점창의 장문제자를 자처하는 자신이 모든 점창 제자들을 하나로 모을 만큼의 신망을 얻지 못했던 것이다.

그랬다.

마유겸은 현재 모든 점창 제자들의 지지를 받고 있지 못했다.

그 이유야 물론 마유겸이 점창을 몰락게 한 전대 장문인 마원웅의 아들이란 것이 제일 크긴 했다.

하지만 그럼에도 만약 그가 점창제일검이었다면 다른 제자들도 어쩔 수 없이 그를 인정할 수밖에 없었으리라.

어쩔 수 없는 점창의 대표자라고 말이다.

‘하지만… 나는 그것조차 해내지 못했지.’

마유겸은 이를 악물며 주먹을 꽉 쥐었다.

불행히도 점창의 제자들 중에는 마유겸보다 확실히 뛰어나다고 인정받는 이가 두 명이나 더 있었다.

바로 이 조 조장인 점창검룡 사군일과 다른 비룡대에 속해 있는 점창검호 제원영 두 사람이었다.

물론 이 두 사람보다 뛰어나지 못해도 이들이 마유겸 자신을 인정하고 따라 주기만 한다면 다른 점창 제자들도 충분히 결집시킬 수 있을 것 같긴 했다.

하지만 마유겸에겐 안타깝게도 그들은 그러지 않았다.

사군일은 원래 성격이 그렇듯 홀로 떨어져 마유겸의 뜻에 동참하려 하지 않았다.

그리고 제원영은 심지어 마유겸을 매우 싫어하기까지 했다.

그와는 점창파가 멸문당하기 전부터 서로를 싫어했던 앙숙 사이였다.

그래서 어떻게든 그들 없이 자신의 힘만으로 점창파 제자들의 인정을 받아 다시 점창의 이름을 일으켜 보려 노력해 왔었던 것인데….

하지만 마유겸은 요즘 들어 이렇게는 안 된다는 것을 뼈저리게 느끼는 중이었다.

‘나 혼자만으론… 불가능하다.’

마유겸은 자신의 한계를 인정할 수밖에 없었다.

모두를 결집시키기 위해서는 그들 중 최소한 한 명의 인정은 반드시 필요했다.

특히 최고인 점창검룡 사군일의 인정이 말이다.

그래서 마유겸은 결심했다.

만약 점창을 다시 일으켜 세울 수만 있다면 굳이 그들이 자신을 인정하지 않아도 상관없다고.

가장 중요한 것은 자신이 아니라 자신의 소중한 사문일 테니까 말이다.

거기까지 생각한 마유겸은 발걸음을 돌려 이 조의 숙소로 찾아갔다.

다시 사군일을 만나 볼 생각이었다.

사군일은 언제나처럼 숙소 옆 나무 밑에서 홀로 명상에 잠겨 있는 중이었다.

마유겸은 거침없이 그에게 다가가 말을 걸었다.

“군일, 얘기 좀 하자.”

사군일은 마유겸처럼 점창에서 태어나고 자란 제자였다. 그렇기에 나이가 같았던 두 사람은 굳이 사형제를 나누지 않고 어려서부터 친구로서 함께 지내 왔었다.

사군일은 천천히 눈을 떠 그를 바라봤다.

무슨 할 말이 있느냐는 듯한 눈빛이었다. 굳이 말을 섞기 싫다는 듯 눈빛으로만 묻고 있었다.

그의 냉랭한 태도에 마유겸은 깊은 한숨을 내쉬었다.

문득 어렸을 때의 기억이 떠올랐다.

둘은 성격이 많이 달랐음에도 늘 함께 어울려 다니던 좋은 친구였었다.

‘그래, 그럴 때가 있었지.’

적어도 사군일의 아버지인 장로 사우용이, 장문인으로 취임했던 마유겸의 아버지 마원일의 행사를 사사건건 반대하기 전까지는 말이다.

다른 무엇보다 점창파의 실질적인 이익을 우선시하던 아버지 마원일에게, 사군일의 아버지 사우용은 정파로서의 책임과 명분을 이야기하며 사사건건 대립하곤 했었다.

마유겸은 어렸지만 그런 사우용 장로를 현실도 모르는 몽상가에 불과하다고 비난했었다.

적어도 아버지 마원일의 욕심이 원인이 되어 점창파가 멸망하기 전까지는 말이다.

마유겸이 힘겹게 입을 열어 그에게 말했다.

“군일, 점창을 위해 너의 도움이 필요하다.”

이 말을 하기까지 얼마나 많은 자존심을 버려야 했는지 다른 사람은 절대 알 수 없을 것이었다.

과거의 마유겸으로선 상상조차 할 수 없는 말이었다.

하지만 사군일은 눈에 약간 이채를 띠었을 뿐 대답은 하지 않았다. 아마 이 정도로는 모자란 모양이었다.

마유겸은 심호흡을 한 번 하고는 다시 말했다.

“도와 다오, 군일. 이대로 점창을 무너뜨릴 수는 없지 않겠느냐? 네가 원한다면 너를 장문인으로 추대하겠다. 내가 온 힘을 다해 너의 뒤를 받쳐 주겠다. 그러니 부디 점창을 위해서 움직여 다오!”

마유겸은 이제 장문인이 되겠다는 목표마저 버릴 수 있었다.

모두 다 사문인 점창의 부활을 위해서였다.

그러자 잠시 마유겸을 바라보던 사군일이 천천히 입을 열었다.

“좀 변했구나, 유겸.”

그의 말에 마유겸이 희망 섞인 눈빛으로 황급히 물었다.

“그럼?!”

하지만 사군일은 고개를 저었다.

“미안하지만 네가 변했다 해도 마찬가지다. 나는 점창의 부활을 위해 움직일 생각이 없으니까.”

그 말은 결국 마유겸을 분노케 했다.

“너 지금 무슨 소리를 하는 거냐?! 날 위해 움직이는 것도 아니고 점창의 부활을 위해 움직일 생각이 없다고?! 설마 사문의 은혜를 저버리기라도 하겠다는 뜻이냐?!”

그러자 사군일은 어쩐지 쓸쓸한 표정으로 되뇌었다.

“사문의 은혜…. 그래, 사문의 은혜를 저버릴 수는 없지.”

“그런데 왜…?!”

분노해 소리치려는 마유겸의 말을 끊으며 사군일이 물었다.

“하지만 말이다, 유겸. 우리 점창에게 과연 다시 일어설 만한 자격이라는 게 있는 것일까?”

“…뭐라고?”

마유겸은 상상도 못 한 사군일의 질문에, 또 처음 보게 된 그의 눈빛에 말을 이을 수가 없었다.

무겁게 가라앉은 사군일의 눈빛이 너무도 슬퍼 보였기 때문이었다.

“나도 수없이 고뇌했었다. 아무렴, 난들 내 고향이자 부모님과도 같은 사문을 어떻게 외면할 수 있을까? 하지만 몇십, 몇백 번을 다시 생각해도 결론은 똑같았다. 점창에겐 다시 일어설 자격이 없다고 말이다.”

그의 말에 마유겸이 분노해 검을 뽑아 들었다.

챙!

그러곤 격분해 소리쳤다.

“대체 무슨 소리를 하는 거냐?! 우리 점창에게 다시 일어설 자격이 없다니?! 똑바로 설명해라! 그렇지 않으면 이 자리에서 너를 베어 버리겠다!”

그러자 사군일이 슬픈 눈빛으로 마유겸을 물끄러미 바라보다 물었다.

“자신의 것도 아닌 보물을 욕심내 힘없는 무인들을 겁박하고 학살한 것이 누구였느냐? 그 끔찍한 탐욕으로 혈교에게 운남성을 바치고 수많은 사람들을 죽음에 내몰게 한 원인이 대체 누구였느냔 말이다. 너는 이런 우리 점창파에게도 다시 부활할 자격이 있다고 생각하는 것이냐?”

마유겸은 그의 말에 순간 입술을 깨물었다.

하지만 이내 대답했다.

“그 일은 잘못된 소수의 판단으로 일어난 일이 아니더냐?! 어찌 그런 잘못 몇 가지로 정파의 명문이자 기둥으로서 긴 역사를 지켜 온 점창파의 존속까지 부정할 수가 있단 말이냐?!”

그러자 힘없이 피식 웃은 사군일이 다시 물었다.

“소수의 잘못이라. 그럼 너는 어떠냐, 유겸? 그 잘못을 저지른 장문인의 아들인 너는 지금이라도 전 무림에 점창의 잘못을 공표하고 사과할 수 있겠느냐? 점창이 잘못된 탐욕으로 저질러 왔던 수많은 잘못과 그로 인해 죽어 갔던 죄 없는 사람들에게 일일이 무릎 꿇고 사죄를 청할 수 있겠느냔 말이다.”

사군일의 질문에 마유겸의 표정이 딱딱하게 굳어졌다.

그런 그를 보며 사군일은 계속해서 말을 이었다.

“운남성을 혈교에게 바치고, 그로 인해 이 전선에서 수많은 사람들이 죽어 갔고 죽어 가고 있는 이 모든 것들이 점창의 탐욕 때문이라고 고백할 수 있겠느냐? 네가 만약 그렇게 할 수 있다면 나는 두말 않고 너를 장문인으로 인정하겠다. 그리고 점창의 부활을 위해 내 모든 것을 바치겠다.”

마유겸으로선 너무도 기다렸던 말이 아닐 수 없었다.

하지만 그럼에도 마유겸은 침만 꿀꺽 삼킬 뿐 차마 대답할 수 없었다.

그건 쉽지 않은 얘기였다.

점창의 과오를 인정한다는 것 자체도 그렇지만, 만약 점창의 탐욕 때문에 혈교에게 운남성을 빼앗겼다는 것을 세인들이 알게 된다면 무림인들은 점창의 부활 자체를 감정적으로 용납 못 하게 될 수도 있었으니까 말이다.

마유겸은 일단 사군일의 말 자체를 부정해 봤다.

“너의 말은 너무 지나치다. 그 모든 것이 어떻게 점창의 잘못 때문이라고만 말할 수 있겠느냐? 그렇게 따지면 보물에 대한 탐욕으로 운남성에 모여들었던 모든 무인들에게도 잘못이 있는 것이 아니겠느냐? 게다가 그에 대한 사과는 점창이 다시 오롯이 선 이후에 해도 될 것이고 말이다.”

그러자 사군일은 마유겸을 향해 씁쓸한 웃음을 지으며 말했다.

“기억하느냐, 유겸?”

“…뭘 말이냐?”

“너의 아버지, 마원일 장문인께서는 정도에 어긋난다고 반대하시는 내 아버지의 말에 항상 그렇게 말씀하셨다. 일단 점창파가 먼저 강해져야 운남성에서 정파들의 버팀목이 되어 줄 수 있다고. 정파의 기둥인 구대문파로서 힘이 부족해 정도를 세울 수 없다면 그 정도라는 것이 무슨 의미가 있겠냐고 말이다.”

마유겸 또한 기억하고 있었다.

그런 아버지에게 반기를 드는 사군일의 아버지를 자신 또한 꽉 막힌 몽상가에 불과하다고 비난했었으니까 말이다.

사군일이 허탈하게 웃으며 말을 이었다.

“그런데 보아라. 힘을 위해 정도를 외면했던 우리 점창파가 이제 운남성을 지킬 힘을 잃게 되고야 말았다. 강한 힘으로 운남성의 버팀목이 되어 주는 것이 점창파의 존재 이유였다면 이제 힘이 없어진 후 점창의 존재 이유는 무엇이냐? 이제 와서 정파의 명문이라는 명분을 들 것이냐? 네 말대로 다른 이들과 똑같이 탐욕스러웠을 뿐인 우리가? 그런 우리가 정파이긴 했던 것이냐?”

마유겸은 일순 대답할 수 없었다.

사군일이 저런 고민을 짊어지고 있었을 줄은 전혀 예상치 못했기 때문이었다.

물론 그의 말에 반박할 명분도 전혀 없었다.

사군일은 이제 몸을 일으키며 말했다.

“유겸, 너는 너의 아버지, 마원일 장문인을 무척 닮았다. 그래서 나는….”

거기까지 말한 사군일은 무거운 눈빛으로 마유겸을 바라보다가 이내 발걸음을 돌렸다.

그러자 마유겸이 발작적으로 소리쳤다.

“너 혼자만 고상한 척하지 마라, 군일! 그래 봐야 너도 점창의 제자가 아니더냐?! 그래! 네 말대로 점창이 죄를 지었다고 치자! 근데 그래서 어쨌다는 거냐?! 그 죄 때문에 점창을 외면한다면 그것은 죄가 아닌 것이냐?! 너는 점창의 죄를 핑계로 사문을 외면하는 죄를 짓겠다는 것이냐?!”

그의 외침에 깊은 한숨을 내쉰 사군일이 등을 돌린 채 대답했다.

“나는 분명 점창의 제자다. 그래서 내 모든 것을 바쳐 혈교에 복수할 것이다. 하지만 만약에라도 내 생전에 그것이 이루어진다면….”

그러곤 무거운 눈빛으로 돌아보며 말을 마쳤다.

“점창에게서 받은 모든 것들을 버릴 것이다. 그땐 네 손에 죽는다 해도 원망하지 않겠다.”

그렇게 말하며 떠나가는 그를 마유겸은 결국 잡을 수 없었다.

사문의 복수는 할 수 있을망정 사문을 되살리지는 못하겠다는 그의 괴로운 마음을 어쩐지 이해할 수 있을 것 같았기 때문이었다.

***

마유겸은 무거운 마음으로 숙소로 돌아갔다.

점창이 죄를 지었다는 건 분명했다.

하지만 그는 그에 대해 깊이 생각한 적이 없었다.

아니, 깊이 생각하기를 피해 왔었다는 게 정확한 말일 것이었다.

그저 점창의 제자이니 점창을 부활시켜야 하고, 전 장문인의 아들이니 자신이 장문인이 되어야 한다는 것 까지만 생각했었다.

하지만 오늘 사군일은 자신이 추구해 왔던 그 모든 것들을 사정없이 흔들어 버렸다.

깊은 한숨을 내쉬었다.

“후우우.”

마유겸의 숙소는 다른 조의 조장들과 달리 독채로 되어 있었다.

다른 이들과 함께 생활하는 것을 싫어하는 그의 성격 때문이기도 했고 그의 사생활 때문이기도 했다.

아무 생각 없이 독채의 문을 열고 들어가던 그는, 문득 잠겨 있어야 할 문이 열려 있다는 것을 깨달을 수 있었다.

가뜩이나 마음이 무거웠던 마유겸은 짜증 난다는 듯 인상을 팍 찡그리고는 문을 열며 말했다.

“이제 사적으로 찾아오지 말라고 했을 텐데.”

그리고 눈에 들어온 그의 침상 위에는 한 여인이 다소곳이 앉아 있었다.

“여경.”

그녀는 마유겸이 조장으로 있는 사 조의 부조장이자 얼마 전까지 그의 연인이었던 매여경이었다.

눈 밑이 까맣게 된 침울한 표정의 그녀가 잔뜩 움츠린 채로 입을 열었다.

“조장, 제발….”

너무나도 간절한 목소리였지만 마유겸은 전혀 흔들림이 없었다.

그저 차가운 표정으로 문을 활짝 열며 말할 뿐이었다.

“다시 말하지만 이제 우리는 그저 조장과 부조장의 관계일 뿐이다. 피곤하니 내 방에서 당장 나가 줬으면 좋겠는데.”

하지만 이렇게 간절한 얼굴로 찾아왔던 매여경이 그렇게 쉽게 다시 나갈 리 없었다. 그녀는 간절한 목소리로 그에게 사정했다.

“제가 잘못한 게 있다면 뭐든 고칠게요, 조장. 제발 다시 한번만 제게 기회를 주세요.”

그러자 짜증 난다는 듯 한숨을 내쉰 마유겸은 애써 마음을 가라앉히려 노력했다.

그러고는 좋게 타이르듯 그녀를 달래기 시작했다.

“여경, 네가 잘못한 것은 전혀 없다. 너는 충분히 좋은 여인이었어. 실제로 널 만나기 전까지 내가 한 번도 일 년 이상 교제한 적이 없었다는 건 너도 잘 알지 않느냐? 다만 내 마음이 식었을 뿐이다. 마음이 식는 데 이유가 꼭 필요한 건 아니지 않나? 그러니 받아들여라. 네가 아무리 매달려 봐야 너만 비참해질 뿐이다.”

마유겸의 말은 일정 부분 사실이었다.

매여경은 충분히 매력적이고 훌륭한 교제 상대였고, 그래서 이유야 어쨌든 마유겸은 과거에 교제했던 수많은 여인들과는 달리 일 년이 넘도록 그녀와의 관계를 이어 갈 수 있었으니까.

다만 마유겸은 처음부터 그녀와 끝까지 갈 마음 자체가 없었던 것뿐이었다. 어차피 언젠가는 헤어질 것이라 생각하고 있었고 그렇기에 호칭도 조장이라고 부르도록 유지시켰었다.

그리고 지금, 언젠가 당연히 올 그때가 왔을 뿐이었다.

하지만 상대방의 마음도 마유겸과 같을 수는 없었다.

더군다나 매여경처럼 내성적이고 외로움이 많은 여인은 더욱 그랬다.

그녀가 드디어 눈물을 터트리고는 바닥에 무릎을 꿇으며 사정했다.

“조장, 제발요. 제발 저를 버리지 말아 주세요. 조장이 원하시는 거라면 뭐든지 할게요. 그러니 제발….”

그녀의 행동에 마유겸은 드디어 짜증을 터트렸다.

이런 질척질척한 대응은 그가 가장 싫어하는 행동이었던 것이다.

가뜩이나 마음이 불편했던 그는 이제 더 다독이는 것을 포기하고는 몸을 돌리며 말했다.

“하! 너도 결국 마지막 기억을 더럽히는 여자에 불과했구나. 됐다. 네가 나가지 않겠다면 내가 나가지.”

그렇게 말하며 막 방을 나가려는 찰나였다.

매여경이 울먹이며 흐느꼈다.

“조장, 제발…. 저는 이젠 조장이 없이는 살 수 없어요. 제발 저를….”

그녀의 무너지는 듯한 목소리에 마유겸은 한숨을 내쉬며 발걸음을 멈췄다.

매여경이 정서적으로 조금 불안하다는 것은 이미 알고 있었던 사실이었다.

어린 시절 부모에게 학대받았던 기억 때문에 정에 굶주려 있고 의존적이라는 것을 말이다.

더군다나 수많은 여인들과 교제해 왔던 마유겸 자신과 달리 매여경에게는 그가 첫 남자였다.

그것도 어린 시절 기억 때문에 남자를 믿지 못했던 그녀가 처음으로 마음을 열었던 상대가 바로 마유겸이었던 것이다.

그러니 별다른 이유도 없는 자신의 변심을 그녀가 받아들이지 못하는 것도 당연했다.

마유겸 자신 또한 그런 그녀를 알기에 마음이 식은 이후에도 교제를 지속해 왔지 않았던가.

물론 그것도 더 이상 견딜 수 없게 됐지만 말이다.

마유겸은 깊게 한숨을 내쉬고는 자신의 마음을 다독였다.

동정심만으로 교제를 지속할 수는 없었다.

다만 조금쯤은 부드럽게 끝을 맺어 주고 싶었다.

그런 생각을 한 마유겸이 다시 고개를 돌리자 그의 시선이 닿는 곳에서 매여경이 흐느끼며 옷을 벗으려 하고 있었다.

정말 할 수 있는 모든 것을 다 해 보려는 모양이었다.

마유겸은 냉랭한 표정, 하지만 조금은 누그러진 말투로 말했다.

“여경, 충고하건대 지금 네가 하고 있는 행동은 너의 가치를 스스로 낮추는 행위에 불과하다. 너는 충분히 괜찮은 여자다. 그러니 자신을 소중히 여겨라. 굳이 내가 아니어도 금방 다른 사람을 만날 수 있을 것이다.”

그렇게 말하고는 다시 몸을 돌렸다.

여인과 헤어질 때마다 항상 칼 같았던 그로선 이제 해 줄 수 있는 모든 것을 다 해 줬다는 생각이 들었다.

마음이 후련했다.

그때였다.

매여경이 다시 소리쳤다.

“당 소저 때문인 거죠?!”

그녀의 말에 마유겸은 멈칫할 수밖에 없었다. 너무도 예상치 못한 말이었기 때문이었다.

마유겸이 어이없다는 표정으로 돌아보며 되물었다.

“뭐라고?”

그러자 독기 어린 눈빛으로 매여경이 울며 소리쳤다.

“당 소저, 당여은 때문이잖아요! 당신이 그녀를 사랑한다는 걸 제가 모를 것 같아요?! 왜 모르는 거죠?! 아무리 당신이 그녀를 바라봐도 그녀는 절대 당신에게 오지 않아요! 헛된 짝사랑일 뿐이라구요!”

마유겸은 이제 분노로 번들거리는 눈빛으로 매여경을 바라보며 씹어뱉듯 말했다.

“정말이지 너의 망상은 듣고 있기가 너무 힘들구나. 아무래도 여경, 너와 나는 같은 조에 있기가 힘들겠다. 다른 조로 가는 것이 나을 것 같아. 그러니 이번 회담이 끝난 후 다른 조로 옮기도록 해라. 대주에겐 내가 말해 놓도록 하지.”

하지만 그렇게 차갑게 말하고 방을 나온 마유겸의 얼굴은, 이내 아까 사군일을 만났을 때보다도 더욱 일그러져 있었다.

이를 악물었다.

전혀 티를 낸 적이 없었다고 생각했는데,

대체 어떻게….

마유겸은 문득 그녀의 얼굴을 떠올렸다.

단 한 순간도 그의 뇌리에서 지워지지 않는 낙인 같은 얼굴을….

처음엔 그저 사천당문의 직계라는 신분에 흥미를 느꼈을 뿐이었다.

그녀와 혼인할 수 있다면 점창파를 부활시키는 데 큰 도움이 될 것 같다는 이유에서였다.

하지만 다른 뭇 여인들과는 다르게 그녀는 자신에게 조금도 관심을 보여 주지 않았었다.

그래서 승부욕이 생겼다.

일부러 그녀의 주변을 맴돌기도 하고 그녀가 보라는 듯 다른 여인을 사귀기도 했었다.

하지만 마유겸의 어떤 행동에도 그녀는 여전히 변함이 없었다.

늘 그렇듯 아름답고 도도했으며, 또한 강했다.

점창검응이라 불리는 자신보다도 말이다.

그러던 어느 순간 정신을 차렸을 땐 어느새 자신의 시선이 늘 그녀 쪽을 향하게 되어 버리고 만 후였다.

화가 났었다.

자존심도 상했고 스스로가 한심하기까지 했다.

점창을 되살려야 할 자신이 이따위 감정에 빠졌다며 스스로를 몰아붙여 수련에 매진해 보기도 했고, 여러 여인들을 바꿔 가며 사귀어서 잊어 보려고도 했다.

하지만 그 어떤 방법으로도 한 번 심장에 새겨진 그녀의 이름은 지워질 줄을 몰랐다.

오히려 시간이 갈수록 더 선명해지기만 할 뿐이었다.

마유겸은 어느새 어두워져 가는 저녁 하늘을 바라보며 공허하게 중얼거렸다.

“빌어먹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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