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마교전선 비룡십삼대-38화 (38/359)

38화 정혈회담-1

“빌어먹을….”

가슴 밑바닥에서부터 끓어 나온 듯한 마유겸의 나지막한 읊조림을 들으며 나 또한 한숨이 새어 나오려는 것을 간신히 참을 수 있었다.

아무래도 나는 이제껏 너무 많은 걸 착각하고 있었던 모양이었다.

***

아까 한참 전력을 기울여 청연 소저와 대련을 하고 있을 때였다.

그녀가 문득 내게 말했다.

‘마 조장이 어쩐지 심상치 않아 보이네요.’

‘…네?’

갑작스러운 그녀의 말에 당황해 묻자 그녀가 오히려 되물었다.

‘마유겸 말이에요. 공자가 전부터 그들에 대해 신경 쓰고 있었잖아요? 마유겸과 매여경 두 사람에 대해서요.’

‘예? 아니, 그야 그렇긴 한데, 그걸 어떻게…?’

당황스러웠다.

전부터 마유겸에 대해 신경을 쓰고 있긴 했지만 한 번도 누구에게 말한 적이 없었는데, 그녀가 그걸 어떻게 알고 있단 말인가?

‘그냥 보니까 알겠더라구요. 그나저나 따라가 보지 않아도 되는 건가요?’

‘네? 아, 그래도 지금은 소저와 대련 중인데….’

‘난 괜찮으니 어서 가 봐요.’

그렇게 등 떠밀리듯 마유겸을 쫓아가며 한 가지를 더 깨달을 수 있었다.

내가 최선을 다해 그녀와 대련을 하는 동안 그녀는 여유 있게 마유겸을 관찰하고 있었다는 사실을….

아무래도 그녀를 이겨 보려면 훨씬 더 많은 시간이 필요할 모양이었다.

그리고 마유겸의 뒤를 은밀하게 쫓으며 사군일과의 대화, 그리고 매여경과의 대화를 모두 들을 수 있었다.

아버지의 서고에서 배워 놨던 살수비기 덕분이었다.

나는 마유겸의 거처 근처에 있는 나무 그림자에 몸을 숨긴 채로, 깜깜해진 하늘 아래 무거운 발걸음을 옮기고 있는 그의 뒷모습을 바라보았다.

귓가에는 매여경의 흐느낌이 낮게 흐르고 있었다.

무척이나 처연한 풍경이었다.

문득 내가 이미 알고 있던 사실들과 새롭게 알게 된 사실들을 비교해 봤다.

지난 삶에서 나는, 아니 십삼대의 모두는 마유겸이 나중에 혈교로 전향할 정도로 망가진 근본적인 이유가 매여경의 죽음 때문이라고 생각했었다.

그가 매여경을 너무 사랑했던 나머지 그녀의 죽음을 견딜 수 없었던 거라고 말이다.

‘근데… 그게 아니었다는 거잖아?’

오늘 들은 사실들만 놓고 봤을 때, 그때 우리는 완전히 잘못 알고 있었던 것 같았다.

내가 오늘 들은 대로라면 매여경이 죽었을 땐 마유겸이 그녀와 이미 헤어진 후였다는 얘기가 아닌가.

심지어 그가 진짜 사랑한 여인은 당여은이었고 말이다.

‘뭐야, 이게? 뭐가 어떻게 되는 거야?’

머리가 복잡해지고 있었다.

아니, 그렇다면 그 진짜 사랑하는 여인인 당여은과 사귀게 된 마유겸이 왜 그렇게 망가졌단 말인가?

당여은에게는 왜 또 그렇게 함부로 대했고?

당시 당여은과 교제하게 된 마유겸은 그녀를 거의 노리개처럼 희롱했었다.

술에 취해 사람들 앞에서 그녀의 가슴을 주무르던 마유겸과 수치스러운 얼굴로도 반항조차 하지 못하던 당여은의 모습은 아직도 내게 충격적으로 남아 있었다.

근데 그 모든 이유가 매여경의 죽음 때문이 아니었다면….

여러 가지 생각들이 어지럽게 떠올랐다.

‘혹시 사군일의 거절 때문에? 그래서 점창파를 다시 일으켜 세우려는 꿈이 좌절되어서?’

지금 마유겸이 가장 중요하게 생각하는 건 분명 점창파의 부활임에 틀림이 없었다.

그 자존심 강한 자가 사군일에게 머리를 숙이고 장문인 자리를 포기하겠다고 말했을 때는 나도 깜짝 놀랐으니까 말이다.

하지만 사군일이 거절했다고 해서 그의 꿈이 좌절됐다고 생각하는 건 좀 비약인 듯했다.

내가 아는 마유겸이란 인간은 사군일이 한 번 거절했다고 포기할 인간이 아니었으니까.

오히려 그라면 무슨 수를 써서든 사군일의 마음을 돌리려 하거나 아니면 어떻게든 다른 방법을 찾아내겠지.

그를 좋아하지는 않지만, 그가 심적으로 매우 강인한 인간이라는 건 나도 충분히 인정하고 있었다.

그래서 그의 흑화를 더 이해할 수가 없었다.

그저 답답할 뿐이었다.

***

여러 가지 의문들이 여전히 내 머릿속을 어지럽히는 가운데 드디어 정혈회담, 그 당일이 오고야 말았다.

그 후로도 계속해서 마유겸을 주목해 봤지만 별다른 일은 없었다.

하루하루 초췌해져 가는 매여경에 비해 마유겸은 정말 아무 일도 없었다는 듯 잘 지내는 것처럼 보였던 것이다.

역시 매여경과의 이별이나 사군일의 거절은 그에게 큰 충격을 주지 못했던 것 같았다.

“곧 맹주님께서 도착하실 겁니다.”

먼저 십삼대로 달려온 전령이 소식을 전했다.

그러자 안 그래도 잠도 못 잔 듯 퀭한 얼굴로 이리저리 뛰어다니고 있던 부대주 헌영보가 발작을 일으켰다.

“뭐 하는 거냐?! 저기를 더 닦으란 말이다! 너희는 빨리 저기를 더 쓸고! 빨리! 시간이 없다! 에잉, 비켜라! 차라리 내가 하겠다!”

그가 눈에 보이는 대원들을 닦달하며 청소와 주변 정리에 집착하자, 비사영이 슬금슬금 피하며 말했다.

“진짜 사력을 다하는군. 살짝 미친 것 같기도 하고. 저러다 진짜 이번 회담 끝나고 맹주님을 따라가게 되는 거 아닌가?”

“글쎄. 아마도 그렇진 않을걸?”

저래 봐야 아무 소용이 없다는 걸 알고 있는 나로선 그저 한심하고 안쓰러울 따름이었다.

정오가 되기 전 십삼대원들은 입구 옆으로 모두 도열해 있었다.

회담은 오후였지만 맹주 일행이 정오가 되기 약간 전에 도착한다고 했기 때문이었다.

그리고 잠시 후, 관도를 따라 다가오고 있는 그들의 모습이 눈에 들어왔다.

현 무림 맹주인 협왕 모용검과 총군사인 제갈지강, 그리고 맹주의 호위대인 신검대와 무림맹 제일의 무력대라는 천룡대까지, 모두 백오십여 명에 달하는 대인원이었다.

꼭 헌영보가 아니더라도 모든 대원들이 긴장으로 딱딱하게 굳어 보였지만 나만은 어쩐지 안심이 됐다.

도착 시간도 인원도 모두 지난 생의 기억과 똑같다는 것이 어쩐지 내게 안정감을 주고 있었기 때문이었다.

십삼대의 모든 인원은 질서정연하게 입구 옆에 도열한 채로 그들을 맞이했다.

제일 앞에 서 있던 대주 풍양이 절도 있게 포권을 하며 목소리를 높였다.

“맹주님을 뵙습니다!”

그 뒤로 우리 역시 절도 있게 포권하며 입을 맞춰 복창했다.

“맹주님을 뵙습니다!”

맹주인 협왕 모용검은 흐뭇하게 웃으며 우리의 인사를 받았다.

“모두 반갑소! 불철주야 전선을 지키며 정도 무림을 수호하고 있는 여러분들을 드디어 만나게 되니 이 모용모는 감격스럽기 그지없소이다. 우리가 편안히 생활할 수 있는 것이 다 여러분의 노고 덕분임을 이 모용모는 잘 알고 있소. 바쁘다는 핑계로 이제야 여러분을 직접 뵙게 된 것을 사과드리오. 미안하오. 그리고 진심으로 감사드리오.”

그리 크게 얘기하지 않았음에도 우렁우렁하게 귓전을 울리는 목소리였다.

목소리에 실린 내공, 자연스럽게 뿜어내는 위압감, 과연 현 무림의 절대자 중 한 명다운 존재감이었다.

심지어 그의 뒤를 호위하고 있는 신검대나 천룡대보다도 그 한 명의 존재감이 더 크게 느껴질 정도였다.

말을 마치고 맹주가 우리를 향해 포권하자 헌영보가 기다렸다는 듯 목소리를 높였다.

“혈교도들의 도발을 막아 세상의 평안을 지키는 것을 어찌 노고라 할 수 있겠습니까?! 저희 십삼대의 모두는 맹주님께 작은 도움이나마 드릴 수 있는 것을 영광으로 생각하고 있습니다! 부디 그런 말씀은 거두어 주십시오!”

그러자 모용검이 기꺼운 듯 호탕한 웃음을 터트렸다.

“하하하하하! 그렇소? 역시 정도 무림의 영웅들다운 마음가짐이로구려! 하하하하하!”

모용검이 즐겁게 반응해 주자 헌영보의 얼굴이 화색을 띠었다.

그러곤 서둘러 다시 말했다.

“영웅들이라니, 과찬이십니다! 정도무림의 진정한 영웅이신 맹주님 앞에서 어찌 저희가 감히 영웅이란 칭호를 들을 수 있겠습니까?!”

“응? 하하하하하!”

헌영보의 아부에 맹주 모용검이 다시 웃음을 터트리자, 신이 난 헌영보가 계속 말을 이어 가려 했다.

“저 헌영보는 맹주님…!”

하지만 옆에 있던 군사 천뇌 제갈지강이 무표정한 얼굴로 그의 말을 끊으며 말했다.

“맹주님, 이제 그만 들어가시지요. 저희가 들어가야 젊은 무인들이 좀 쉬지 않겠습니까?”

“응? 아, 그렇겠군. 그럼 이만 들어갈까?”

그러자 아부 신공을 충분히 발휘하지 못해 안타까운 표정을 지었던 헌영보가 급히 소리쳤다.

“제, 제가 안내해 드리겠습니다! 저를 따라오십시오!”

맹주와 군사가 헌영보를 따라 회담장으로 들어가고 그 주변을 신검대와 천룡대가 겹겹이 둘러싸자 드디어 대주 풍양이 우리를 돌아보며 말했다.

“모두 잠시 해산하도록. 오후에 혈교 측의 사람들이 올 때 다시 도열해야 하니 너무 멀리는 가지 않도록 해라.”

그제야 우리는 흩어져 휴식을 취할 수 있었다.

나는 문득 설풍 조장에게 물었다.

“맹주님을 어떻게 보셨습니까, 조장?”

내 질문에 조장이 침음성을 흘리며 잠시 생각했다.

“으음, 글쎄.”

전 무림맹주였던 협왕 천기강의 뒤를 이어 협왕이란 칭호와 무림맹주라는 지위 모두를 물려받은 모용검은, 무림 오대 세가인 모용세가의 태상가주이자 일제 이왕 삼성 사마 오괴 중 이왕에 해당하는 무림의 절대자였다.

다시 말해 현 무림에서 세 손가락 안에 드는 무인이라고 할 수 있었던 것이다.

하지만 그를 직접 본 내 감상은 좀 묘했다.

분명 엄청나게 강해 보이기는 했지만….

지난 삶에서 그를 봤을 땐 너무 까마득해 보여 아무 느낌도 느낄 수 없었다.

하지만 이번에 봤을 때 나는 그의 강함을 조금이나마 엿볼 수 있을 것만 같았다.

물론 그가 자신의 존재감을 전혀 숨기지 않았기 때문이었다.

조장이 잠시 고민하다 대답했다.

“너무 높아 까마득하게 보이는 산 같았네.”

맹주의 강함을 인정하는 말이었다.

하지만 이어서 나지막하게 덧붙였다.

“하지만 구름 위까지 올라가 보이지는 않더군.”

역시….

조장의 말에 나도 고개를 끄덕였다.

그 구름이 누구를 뜻하는지 알 것 같았기 때문이었다.

맹주인 협왕 모용검은 물론 끔찍하게 강한 존재감을 뿜어내고 있었다.

하지만 얼마 전에 봤던 천하사마의 일인 여령색마 손은상에 비한다면….

딱 조장의 표현대로였다.

구름처럼 그 높이가 전혀 가늠되지 않았던 손은상에 비해 맹주는 높지만 어떻게든 그 높이가 가늠이 되는 산처럼 느껴졌던 것이다.

물론 이게 정확한 것인지는 장담할 수 없고, 그냥 우리의 착각일 수도 있었다.

하지만 진심이 느껴지지 않았던 아까의 형식적인 인사에다 헌영보의 아부에 기꺼워하는 모습까지, 정파 무림의 정점이라는 그의 모습이 어쩐지 내게 실망을 안겨 줬다는 것만큼은 사실이었다.

그리고 이 실망은 오후에 혈교의 교주 사혜혈마 전무광이 십삼대에 도착했을 때 더 심해지고 말았다.

전무광은 자신의 뒤로 죽립을 깊게 눌러쓴 흑의인 네 명만을 대동한 채 십삼대로 걸어 들어오고 있었다.

하지만 우리는 숨조차 제대로 쉴 수가 없었다.

그 다섯 명이 자연스럽게 내뿜는 존재감이 아까 맹주와 함께 왔던 백오십 명보다 훨씬 더 거대하게 우리를 짓누르고 있었던 것이다.

비사영이 내 뒤에서 중얼거렸다.

“엄청나군. 진짜 바위에 짓눌리고 있는 기분이야. 고작 다섯 명인데 왜 백오십 명보다 더 많아 보이는 기분이지?”

동감이었다.

특히 그중에서도 맨 앞에 선 혈마 전무광의 존재감은 지난번 여령색마 손은상에게서 느꼈던 그 막막함에 전혀 뒤지지 않고 있었다.

엄청났다.

혈마가 빙긋이 웃음을 지으며 우리를 둘러보고는 말했다.

“비룡십삼대에 관한 얘기는 익히 들어 왔소. 무척 재능 있는 젊은이들이 많다고 하더군. 이렇게 직접 만나게 되어 영광이오.”

그의 인상은 무척이나 청수했다.

혈(血)자가 새겨진 화려한 적의나 강렬한 눈빛만 아니라면 정파의 대협이라고 해도 전혀 이상하지 않을 정도였다.

‘하긴, 그럴 만도 하군.’

생각해 보니 그는 원래 정파 소속이었던 전가장의 가주였던 것이다.

석경달 노인에게 들었던 그의 과거가 떠오르자 뭔가 복잡한 기분이었다.

대주 풍양이 그에게 포권하며 인사했다.

“혈교의 수장을 뵙게 되어 영광이오. 비룡십삼대의 대주 풍양이라 하오. 맹주께서 기다리고 계시오.”

그러자 혈마의 뒤에 서 있던 네 명이 바로 움찔했다.

그러곤 그중 가장 큰 체격을 지닌 죽립인이 살기를 확 뿜어내며 소리쳤다.

“감히! 지존께 그따위로 말을 해?!”

화아악!

“크윽!”

갑자기 덮쳐 온 엄청난 살기에 우리는 뒤로 물러서지 않기 위해 내공을 끌어올려야만 했다.

그나마 제자리에서 버틸 수 있었던 자들도 일류 이상, 이류 이하의 무인들은 비틀거리며 뒷걸음질 치고 있었다.

죽립인은 단지 뿜어낸 무형의 살기만으로 이 많은 무인들을 압박했던 것이다.

엄청난 무위를 지닌 자였다.

그러자 혈마가 가볍게 한 손을 들어 올리며 말했다.

“그만해라. 척강.”

그러자 한순간 우리를 압박하던 살기가 씻은 듯이 사라져 버렸다.

혈마가 가볍게 들어 올린 한 손이 전 방위로 뻗어 나가던 살기를 차단해 버렸던 것이었다.

그게 무슨 뜻인지를 깨달은 우리들의 얼굴은 바로 창백해지고 말았다.

게다가 저자가 바로 척강이었다니….

척강은 철신광마라 불리는 혈교오마 중 한 명이자, 천하의 절대자 열다섯 명에게 가장 근접해 있다고 알려진 천하삼십육성 중 일인이었다.

방금 뿜어냈던 엄청난 살기가 비로소 이해되는 이름이 아닐 수 없었다.

하지만 방금 혈마가 보여 준 한 수에 비한다면 그의 이름도 빛이 바랠 수밖에 없었다.

무형의 기운을 그렇게 광폭하게 뿜어낸 척강의 무위도 상상할 수 없는 것이었지만, 그걸 차단한다는 건 차원이 다른 일이기 때문이었다.

몸 밖으로 뿜어낸 기운을 자신이 원하는 대로 완벽하게 제어할 수 있다는 건, 그가 원한다면 저 무형의 기운을 수족처럼 다룰 수도 있다는 얘기였다.

단지 기운만으로 물건을 움직이거나 심지어 사람을 살해할 수도 있다는 뜻, 과연 이 시대의 절대자다운 무위였다.

그 혈마가 부드러운 얼굴로 척강에게 말했다.

“무림맹 소속인 비룡대주가 나를 혈교의 수장이라고 부르지 않으면 뭐라고 부른단 말이냐? 설마 지존이라고 부르기라도 하라는 말이냐? 그럼 너도 무림맹의 맹주에게 지존이라고 불러야겠구나.”

그의 말에 척강이 당황한 목소리로 고개를 숙였다.

“어, 어찌 그따위 놈에게….”

그러자 혈마가 짐짓 엄한 목소리로 말했다.

“척강! 우리는 지금 회담을 하러 왔고 회담이란 서로를 존중하지 않으면 이루어질 수 없는 것이다! 너는 설마 내가 직접 추진한 이 회담을 방해하려는 것이냐?!”

그 말에 척강이 바로 털썩 무릎을 꿇으며 사죄를 청했다.

“죄송합니다, 지존! 이 멍청한 놈이 또 지존의 뜻을 헤아리지 못하고 실수를 저질렀습니다! 부디 벌하여 주십시오!”

그 광경을 지켜보던 우리는 질린 표정을 지을 수밖에 없었다.

천하에 두려울 것이 없는 천하삼십육성의 일인이자, 광폭하고 오만하기로 유명한 철신광마 척강이 저렇게 쉽게 무릎을 꿇다니.

그것도 정파의 애송이들에 불과한 우리 앞에서 말이다.

혈교 내에서 혈마가 얼마나 절대적인 위상을 갖고 있는지를 잘 알 수 있는 광경이었다.

“일어나라, 척강. 너에 대한 처우는 교로 돌아간 후 결정할 것이다.”

“예! 지존!”

척강에게 주의를 준 혈마는 다시 우리 쪽으로 고개를 돌려 부드럽게 말했다.

“정파의 신룡들 앞에서 못 볼 꼴을 보이고 말았군. 아무래도 우리가 사악한 마도의 패륜아들이다 보니 정파의 동량들이 보기엔 모자란 부분이 좀 많을 것일세. 부디 이해를 부탁하네.”

혈마는 그렇게 말하고 부드럽게 웃었지만 그걸 지켜보던 우리는 전혀 웃을 수 없었다.

그의 모습이 이제껏 우리가 알고 있던 사악한 마두와는 전혀 다른 모습으로 다가오고 있었기 때문이었다.

절대자다운 무위와 함께 뭔가 무림의 대선배다운 여유가 느껴지는 그런 모습이 아닐 수 없었다.

혈마가 우리를 주욱 둘러보며 말했다.

“오기 전에 비룡십삼대에 대해 좀 알아봤다네. 십삼대에는 비룡대 중에서도 유독 젊은 신룡들이 많더군.”

그러곤 일 조장 한교성부터 주욱 눈으로 훑으며 말을 이어 갔다.

“구대문파인 청성파에서도 천재라고 불린 청풍검룡 한교성 소협이나.”

그 말에 일 조장 한교성이 묵묵히 포권했다.

늘 졸린 표정이던 그도 지금만큼은 날카로운 칼처럼 눈을 빛내고 있었다.

“점창파 제자들 중에서 가장 뛰어나다는 점창검룡 사군일 소협.”

그의 말에 사군일은 묵묵히 그를 노려보기만 했다.

점창을 멸문시킨 장본인인 그에게 포권을 할 수는 없었던 모양이었다.

검을 뽑지 않은 것만 해도 그로서는 아마 최선을 다한 것이 아닌가 싶었다.

“그리고…. 호오, 역시 듣던 대로 대단한 미인이로군. 당가검봉 당여은 소저겠지? 미색만으로도 충분히 놀라운데 거기에 재주까지 함께 갖췄다니, 양친께서 얼마나 자랑스러워하실지 상상도 안 가는군. 그저 부러울 뿐이네.”

듣기 좋은 덕담임에는 분명했는데 그게 당 소저에게는 뭔가 거슬렸던 모양이었다.

몸을 부르르 떤 당 소저가 이를 세게 악물고는 힘겹게 포권하는 모습을 보였다.

하지만 혈마는 그 모습을 보지 못한 듯 다음 사람에게로 시선을 옮겼다.

바로 아까부터 그를 죽일 듯이 노려보고 있던 마유겸에게로였다.

혈마가 부드럽게 웃으며 말했다.

“자네가 점창검응 마유겸이겠군. 점창파의 전대 장문인이셨던 마원일 대협의 자식이었지, 아마? 용모가 부친을 많이 닮지는 않았군.”

그 말을 들은 마유겸의 얼굴이 끔찍하게 일그러졌다.

그의 아버지 마원일 장문인을 죽게 한 직접적인 원흉인 혈마가 그 이름을 입에 담다니, 마유겸에게 저걸 참으라는 건 내가 봐도 무리한 일이 아닐 수 없었다.

그는 결국 참지 못하고 검을 뽑으려 했다.

“네놈이 감히?!”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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