39화 정혈회담-2
하지만 검파를 잡고 그것을 뽑으려던 마유겸은 결국 검을 뽑지 않았다.
아니, 뽑지 못했다.
“이익!”
검파를 잡은 채 부들부들 떨고 있는 모습, 아마도 어떤 무형의 힘에 의해 억눌려지고 있는 듯했다.
아까 척강의 살기를 차단했던 것처럼 혈마가 무형의 기운으로 압박한 모양이었다.
손끝 하나 까닥하지 않고도 절정의 무인인 마유겸을 저렇게 만들 수 있다니, 기가 막힐 따름이었다.
문득 절정의 경지에만 도달하면 혈교에 대한 공세를 계시하겠다던 내 생각이 그렇게 우스울 수가 없었다.
허탈했다.
혈마는 부드럽게 웃으며 이를 악문 그의 얼굴을 지켜보다가 이내 다음 사람에게로 시선을 돌렸다.
그러자 마유겸은 곧 망연자실한 표정이 되어 검을 잡았던 손에서 힘을 빼고 말았다.
아마 도저히 극복할 수 없는 거대한 벽에 절망한 게 아닌가 싶었다.
혈마는 모든 조장을 거쳐 설풍 조장에게까지 한마디씩 덕담을 던진 후 회담장으로 들어갔다.
우리는 복잡한 얼굴로 그의 뒷모습을 바라볼 수밖에 없었다.
그가 남긴 인상은 너무도 강렬했다.
그의 압도적인 존재감과 무위는 물론이고, 무엇보다도 방금 조장 한 명, 한 명의 이름을 부르며 친근하게 덕담 한마디씩을 남기고 간 것은 우리에게 있어 큰 충격이 아닐 수 없었다.
내 뒤에 서 있던 비사영의 허탈한 듯 중얼거리는 목소리가 들려왔다.
“누가 무림맹주인지 모르겠군.”
동감이었다.
정작 우리의 맹주이신 협왕 모용검은 형식적으로 인사 한마디만을 남겼을 뿐인데 말이다.
아마 조장들의 이름은커녕 대주나 부대주의 이름이나 기억하고 있을까 싶었다.
씁쓸했다.
싸우지도 않았는데 이미 패배한 기분이었다.
그때 문득 내 귓가에 한 가닥 전음이 들려왔다.
청연 소저의 목소리였다.
- 방금 좀 이상하지 않았어요?
그녀의 전음에 나는 의아한 표정을 지었다.
이상하다고?
뭐가 말이지?
혈마가 너무 괜찮아 보였던 걸 말하는 건가?
하지만 바로 이어진 청연 소저의 말은 그런 것이 아니었다.
- 아까 혈마가 마 조장에게 뭔가 전음을 남겼던 것 같았어요.
응? 전음?
혈마가 마유겸에게?
놀라서 되물었다.
- 전음을 감청했다는 겁니까?
- 아뇨, 그럴 리가요.
하긴 그럴 리가 없었다.
이제껏 누가 전음을 감청할 수 있다는 얘기는 아직 들어 본 적도 없었으니까.
설사 무림의 절대자들이라 해도 가능할지 의문이었다.
그녀가 계속 전음을 이었다.
- 검을 뽑으려 하던 마 조장이 갑자기 힘을 풀고 놀란 표정을 지은 것이 그렇게 보였어요. 혈마가 그에게 뭔가 놀랄 만한 얘기를 했던 것 같아요.
그녀의 말에 나는 마유겸의 얼굴을 다시 한번 살펴봤다. 그는 고개를 푹 숙인 채 충격을 받은 듯 몸을 가늘게 떨고 있는 모습이었다.
솔직히 내가 보기엔 그저 사문의 원수인 혈마 앞에서 무력함을 느꼈기 때문이 아닐까 생각되긴 했다.
옆에 있던 나도 막막함을 느꼈는데 직접 마주했던 그라면 훨씬 더 했을 테니 말이다.
하지만 관찰력이 나보다 훨씬 뛰어난 청연 소저의 말이니만큼 결코 무시할 순 없었다.
하지만….
아무리 생각해 봐도 딱히 예상되는 것이 없었다.
혈마가 이제 와서 마유겸에게 대체 무슨 얘기를 한단 말인가.
점창파에 대해 사과라도 했다는 건가?
도무지 짐작이 가지 않았다.
회담은 결국 전생의 기억처럼 아무 일도 없이 금방 끝났다.
혈마와 철신광마 척강을 포함한 네 명의 수행원들이 바로 돌아가자 맹주 일행 역시 뒤도 돌아보지 않고 십삼대를 떠났고 말이다.
“맹주님! 부디 살펴 가십시오!”
부대주 헌영보가 목이 터져라 뒤에서 외쳤지만, 전혀 그에게 신경 쓰지 않고 길을 재촉하는 것을 보면 역시 이번 삶에서도 그는 계속 이곳에 머물게 될 모양이었다.
그리고 바로 당일 저녁, 순찰 당번이 우리 칠 조였기에 저녁이 되어 근무를 나갔을 때였다.
청연 소저가 문득 우리에게 말했다.
“여러분들께 부탁을 드릴 것이 있어요.”
그 말에 우리는 의아한 표정으로 그녀를 바라봤다.
그녀는 비단 무공만 강한 것이 아니라 어떤 일에서든 항상 똑 부러지는 뛰어난 모습을 보여 왔었다.
그래서 다른 사람들이 그녀에게 부탁을 하면 했지 그녀가 누구에게 뭘 부탁한 적은 한 번도 없었던 것이다.
하지만 이어서 그녀가 한 말은 더욱 놀라운 것이 아닐 수 없었다.
그녀가 의아한 표정으로 바라보는 우리들 앞에서 이렇게 말했기 때문이었다.
“아니라고 믿고 싶긴 하지만, 어쩌면 근 시일 내로 제가 죽게 될지도 몰라요.”
그녀의 뜬금없는 말에 바로 뜻을 이해하지 못했던 우리들은 한순간 깜짝 놀라 소리쳤다.
“…예에?!”
“죽는다고?! 그게 무슨 소리야, 청연아?!”
***
당일 오전, 도열한 십삼대원들 앞으로 맹주와 그 일행들이 지나갈 때였다.
해청연은 그들 중 한 명에게로 전음을 던졌다.
- 오랜만에 뵙네요. 제갈 숙부.
무림맹의 군사인 천뇌 제갈지강에게로였다.
그러자 문득 고개를 돌렸던 제갈지강은 한순간 눈을 부릅뜨고 말았다. 그녀를 여기서 보게 될 것이라곤 상상도 못 했기 때문이었다.
- 너는 청연이가 아니더냐? 네가 대체 왜 여기 있단 말이냐?
- 그럴 사정이 있었어요. 자세한 얘기는 잠시 후에 저쪽 숲에서 하시겠어요? 기다리고 있을게요.
제갈지강은 회담장에 들어간 후 잠시 볼일을 보고 오겠다고 말하고는 숲에서 해청연을 만날 수 있었다.
“청연이가 숙부님을 뵙습니다.”
“청연아! 이게 대체 어떻게 된 일이냐?! 네가 왜 전선에 있느냔 말이다?! 해 형도 이걸 알고 있는 것이냐?!”
해청연은 제갈지강이 애지중지하는 귀중한 딸 제갈서율의 친구임과 동시에 몇 안 되는 친우의 딸이기도 했다.
그런 그녀가 이곳에 있다는 것에 제갈지강은 분노가 다 치밀어 오를 지경이었다.
하지만 해청연은 담담하게 대답했다.
“아버지는 아직 모르세요. 하지만 이곳에서 어떤 일이 벌어지는지 알게 됐으면서도 모를 척할 수는 없었어요. 그건 아버지께 배운 정파인의 자세가 아닐 테니까요.”
제갈지강은 순간 말문이 막히고 말았다.
그녀의 아버지가 어떤 사람이고 평소에 무엇을 제일 강조했는지 그 또한 잘 알고 있었기 때문이었다.
“아니, 아무리 그렇다 해도 아직 어린 네가, 더군다나 여인의 몸으로 있기엔 너무 위험한 곳이 아니더냐?”
하지만 이번에도 그녀는 빙긋이 웃으며 고개를 저었다.
“저희 조에는 저보다 한 살 어린 여동생도 있는걸요. 제 나이도 이제 스물한 살이니 충분히 한 사람 몫을 할 때가 되었지요. 더군다나 여기서 알게 된 사실들이 너무 충격적이라 이제 와서 외면할 수도 없었구요.”
여기서 알게 된 사실들이라….
그 말에 제갈지강은 문득 복잡한 눈빛으로 그녀를 바라봤다.
그러자 해청연이 웃으며 다시 입을 열었다.
“너무 걱정하지 마세요. 아직 그렇게까지 위험한 적은 없었으니까요. 그리고 이것을 좀 부탁드리려고 숙부께 뵙자고 했어요.”
그렇게 말하며 해청연이 내민 것은 두 개의 봉인된 서찰이었다.
“서율이와 아버지께 편지를 썼는데 어차피 회담 때 숙부님께서 오실 것 같아 아직 부치지 않았어요. 이걸 숙부님께 부탁드려도 될까요?”
그녀의 말에 제갈지강은 웃으며 고개를 끄덕였다.
“그래, 네 뜻이 그렇다면 그런 거겠지. 알았다. 내가 전해 주마.”
두 사람은 그 이후로도 얼마간 더 덕담을 나누고는 헤어졌다.
하지만 환하게 웃으며 제갈지강과 헤어졌던 해청연의 얼굴은 뒤로 돌아서자마자 바로 심각하게 변해 버렸다.
그리고 그녀가 볼 수는 없었지만 웃음이 사라진 것은 제갈지강의 얼굴 또한 마찬가지였다.
***
해청연이 동료들에게 말했다.
“저는 예전부터 작금의 상황이 뭔가 이상하다고 생각했어요. 전선의 열악한 상황과 위험한 마인들, 그 원인이라고 할 수 있는 무황총 혈사와 점창파의 잘못들, 거기에 전가장의 비사까지. 이 모든 것들이 무림에 알려지지 않았거나 잘못 알려진 것이 너무도 부자연스럽다고 말이지요. 그래서 그것을 관리하고 있는 거대한 세력이 있을 거라고 생각했어요.”
그녀의 말에 비사영이 인상을 찌푸리며 물었다.
“거대한 세력이라니 누가 말이오?”
그러자 해청연이 대답했다.
“아마도… 무림맹이겠지요.”
천주은이 이해가 안 된다는 표정으로 물었다.
“하지만 언니, 우리가 비밀 서약을 한 건 다들 아는 사실이잖아? 물론 그 의도는 좀 의심스럽지만, 그렇다고 그게 그렇게까지 이상한 일일까?”
해청연이 대답했다.
“비밀 서약을 한 것도 문제가 있는 거지만, 내가 생각하는 제일 큰 문제는 그 비밀이 잘 지켜지고 있다는 거야.”
“…응?”
“전선의 근무 기간은 오 년이지. 다시 말해 스스로의 의지로 근무를 연장하지 않았다면 무림엔 이미 전선 출신의 사람들이 꽤 많이 활동하고 있어야만 해. 더군다나 여기서 오 년을 버틴 사람의 솜씨가 별로일 리가 없으니 그들은 모두 꽤나 고수들이겠지? 그렇다면 어디선가는 분명히 전선 출신의 고수들이 나타났어야 했어. 특히 운남성과 인접한 귀주성이나 사천성, 광서성에는 더욱.”
그러고는 선우진을 보며 물었다.
“선우 공자는 밖에서 전선의 정보를 얻었었다고 하셨죠. 전선 출신의 사람을 직접 만나 보셨던 건가요?”
그 말에 선우진이 굳은 표정으로 고개를 저었다.
그도 이제 그녀가 무슨 말을 하는지 알 수 있을 것 같았던 것이다.
“아니오. 나는 귀주성에서 전선 출신이라고 알려진 사람을 단 한 명도 만나 본 적이 없소. 심지어 소문조차도 들은 적이 없었지. 정보를 얻을 수 있는 곳은 하오문 뿐이었소.”
그러자 해청연이 다시 사람들을 보며 말했다.
“이게 말이 되는 얘기일까요? 운남성의 바로 옆 귀주성에도 전선 출신의 사람이 한 명도 없다는 게? 그리고 말보다 소문이 빠르다는 무림에 전선의 소식이 전혀 전해지지 않고 있다는 게?”
그녀의 말에 사람들의 표정이 점점 심각해졌다.
나서유가 침을 꿀꺽 삼키고는 물었다.
“청연아, 그럼 네 말은 설마….”
***
비슷한 시각, 객잔에 투숙한 제갈지강은 해청연이 맡긴 서찰을 잠시 바라보다 그것의 봉인을 뜯었다.
그리고 내용을 읽기 시작했다.
하지만 그것을 읽는 제갈지강의 표정은 점점 굳어 가고 있었다.
해청연이 그녀의 부친에게 보낸 편지 안에는 전선의 상황이 상세하게 적혀 있었다.
그곳에서 나오는 마인들, 노련한 무사들이 죽고 젊은 무사들만 남은 열악한 전선의 상황, 심지어 점창파에 관한 비사까지.
그리고 편지의 말미엔 이 모든 것들이 왜 비밀이어야 하는지 그리고 어떻게 아직까지 무림인들에게 알려지지 않을 수 있었는지 이해할 수 없다는 말도 함께 적혀 있었다.
해청연의 편지는 결국 그것에 대해 좀 조사해 주실 수 없겠냐는 부친에게 보내는 부탁이었던 것이다.
편지를 다 읽고 나자 처음에 딱딱했던 제갈지강의 표정은 이제 완전히 무표정해진 상태였다.
한참을 생각에 잠겨 있던 제갈지강은 마침내 결정을 내린 듯 희미하게 웃음 지었다.
그러곤 다 읽은 해청연의 서찰을 불에 태우기 시작했다.
“청연아, 청연아. 비밀 서약이라는 건 비밀을 지키기로 약속한 거란다. 서율이를 생각해서라도 그냥 모르는 척해 주고 싶지만…. 너를 그냥 두면 지금이 아니라도 언젠가는 네 부친에게 이 사실들을 전달하게 되겠지? 그러니 이 숙부도 어쩔 수가 없구나. 네 부친이 사실을 알게 되는 걸 감당할 자신이 없거든.”
그러곤 문득 그녀의 부친을 생각하며 말했다.
“미안하게 됐구려, 해 형. 하지만…. 해형은 딸 셋 중 하나가 없어져도 아직 둘이나 남아 있지 않소. 이 모든 게 다 해 형의 꽉 막힌 성정 때문이니 부디 이해해 주시구려.”
그렇게 말한 그는 서찰을 쓰기 시작했다.
무림맹으로 보내는 비밀 서찰이었다.
***
어두운 밤, 십삼대 오 조에 속한 여인 중 한 명인 도희영은 잠자리에서 벌떡 일어났다.
뭔가 이상한 꿈을 꿨던 것 같았기 때문이다.
그런데 일어나고 나니 아무것도 기억이 나지 않았다.
그저 머리가 좀 멍한 느낌이었다.
“이상하네. 왜 이러지?”
그렇게 중얼거린 그녀는 다시 잠을 청하려다 문득 낮에 봤던 혈마와 그 일행들의 모습을 떠올렸다.
혈마가 조장들에게 한 명씩 인사를 하고 그래서 모든 이의 시선이 거기에 집중돼 있을 때였다.
그녀는 뭔가 이상한 소리가 들린 것 같은 느낌에 문득 고개를 돌려 혈마와 함께 온 네 명 쪽을 바라봤었다.
그러다 문득 그중 가장 체격이 작았던 죽립인과 눈이 마주치게 됐었다.
그가 때마침 죽립을 살짝 들어 그녀를 바라보고 있었던 것이다.
어쩐지 기분 나쁘게 느껴지는 붉은 눈빛의 남자였다.
‘하지만 그러곤 바로 시선을 돌렸었는데.’
너무 기분이 나빠서 잠시도 시선을 마주치고 싶지 않았기 때문이었다.
그러곤 아무 일도 없었는데.
설마….
갑자기 덜컥 겁이 났다.
혹시 자신이 그때 섭혼당한 게 아닐까라는 생각이 들었던 것이다.
하지만 두려움에 침을 꿀꺽 삼켰던 그녀는 곧 고개를 저었다.
아무리 자신이 오 조에서 가장 무공이 약하다지만 그래도 눈빛 한 번 마주쳤다고 섭혼이 된다는 건 말도 안 되지 않겠는가?
만약 섭혼이 됐다면 지금 이런 생각도 할 수 없었을 것이고 말이다.
‘그래, 아닐 거야. 그저 신경이 예민해진 탓이겠지.’
도희영은 그렇게 결론을 내리고는 다시 잠을 청하기 시작했다.
혈교도에게 섭혼되어 동료를 해치게 되는 것, 그래서 동료들에게 죽임을 당하게 된다는 것은 상상만 해도 너무 끔찍한 일이 아닐 수 없었다.
도희영은 자신에게 그런 일이 일어난 건 절대 아닐 거라고 믿고 싶었다.
하지만 잠시 후 잠이 든 그녀는 다시 또 악몽에 시달려야만 했다. 깨어나면 아무것도 기억나지 않는 악몽에 말이다.
***
마유겸은 천천히 숙소의 문을 열었다.
숙소 안에는 아무도 없었지만 문을 여는 그의 손은 미세하게 덜덜 떨리고 있었다.
딱딱하게 굳은 표정으로 안으로 들어갔던 그는 자신의 침상 위에 가지런히 놓인 서찰과 상자를 발견하고는 그대로 얼음처럼 굳어지고 말았다.
그러곤 눈을 질끈 감았다.
하지만 한참을 움직이지도 못한 채 가만히 서 있던 그는 결국 심호흡을 하고는 서찰을 펼쳐 봐야 했다.
덜덜 떨리는 손으로 서찰을 펼친 그의 눈에 익숙한 필체가 들어왔다.
너무도 친숙하지만 아주 오랫동안 보지 못했던 필체였다.
그것을 보고 확 일그러졌던 그의 얼굴은 서찰을 읽으며 점점 더 일그러지기 시작했다.
그리고 마침내 서찰의 끝까지 다 읽었을 때, 그는 서찰을 와락 꾸기며 괴성을 내질렀다.
“으아아아아아아아아아악! 아아아아아아아아아!”
깊은 한과 비통함, 절망감이 뒤섞인 그런 목소리였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