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마교전선 비룡십삼대-43화 (43/359)

43화 음영대-4

청연 소저의 아버지라는 그는, 이제 다 함께 모인 우리 조원들 앞에서 자신을 소개했다.

“나는 청연이의 아버지인 해운백이라고 한다네.”

그의 말을 듣고서 나는 이제야 오랜 궁금증을 풀 수 있었다.

“아, 그럼 청연 소저의 성도 ‘해’씨겠군요. 해청연.”

그러자 그녀가 빙긋이 웃으며 고개를 끄덕였다.

“네, 맞아요.”

“어쩐지! 분명히 ‘청’씨가 아닌 다른 성이 있을 거라고 생각했는데.”

내가 드디어 풀린 궁금증을 기뻐하고 있을 때 옆에 있던 비사영이 멍한 얼굴로 내게 물었다.

“지금 그게 중요한 게 아닌 것 같은데? 너 저분의 이름을 듣고 뭐 생각나는 거 없냐?”

비사영은 무려 이십 마리가 넘는 간귀를 혼자서 다 처리하고 돌아온 상태였다.

정말이지 괄목상대라는 말이 어울리는 놀라운 성장이 아닐 수 없었다.

그러자 굳은 얼굴의 설풍 조장이 침을 꿀꺽 삼키고는 물었다.

“혹시… 천의검성 해운백 대협이신 겁니까?”

설풍 조장은 절정 두 명을 포함한 습격자들 아홉 명을 혼자서 모두 죽였다.

나 소저의 말로는 도움이 필요하기는커녕 도와줄 틈도 없었다고 했다.

조장의 말에 청연 소저의 부친이 수염을 쓰다듬으며 고개를 끄덕였다.

“그렇게 불리기도 한다네.”

그 순간 우리 모두가 얼어붙었다.

천의검성이라니….

너무 놀라 목소리도 나오지 않았다.

천의검성은 일제 이왕 삼성 사마 오괴 중 삼성에 속하는 이 시대의 절대자 중 한 명이었다.

그러니까 우리 눈으로 직접 봤던 색마 손은상이나 혈마, 무림맹주와도 동급의 인물이라는 얘기였다.

게다가 검성의 앞에 ‘천의’라는 칭호가 붙은 것이 말해 주듯, 그는 천하제일의 협객으로도 유명했다.

무림 모든 협객들의 우상이나 다를 바 없는 존재, 그게 바로 천의검성 해운백이었던 것이다.

그런데 청연 소저가 그 검성의 딸이었다니.

한참을 얼어붙어 있던 조원들이 하나둘씩 어색하게 말을 꺼냈다.

“처, 청연이가 검성님의 딸이었다구요?”

“어, 언니, 우리 앞으로도 친하게 지내요.”

“아, 그, 청 소저, 아니, 해 소저. 그동안 내가 잘못한 게 있다면 지금이라도….”

나는 그런 조원들을 어이없는 눈으로 바라보며 한숨을 내쉬었다.

나는 언제나 사람의 가치는 자기 자신이 결정한다고 생각해 왔었다.

누구의 제자이니, 누구의 딸이니, 어떤 가문 출신이니 이런 것은 전혀 중요하지 않다고 말이다.

그러니 청연 소저가 설사 검성의 딸이라고 해도 내 행동이 달라져야 할 이유는 전혀 없었다.

그렇지 않은가?

상대가 검성이든 뭐든, 내가 그에게 잘 보이거나 꿀릴 이유가 없지 않은가.

나는 평소처럼 당당한 자세로 그에게 말했다.

“검성 어르신! 제가 예전에 청연 소저를 구해 줬던 선우진이라고 합니다! 목숨이 좀 위험하기는 했지만 그리 대단한 일은 아니었습니다!”

“응? 하하하하! 그래, 얘기는 들었네. 청연이가 신세를 많이 지고 있다고 하더군.”

“과찬이십니다! 앞으로도 최선을 다하겠습니다!”

날 보는 조원들의 뜨악한 눈빛은 그냥 무시해 주기로 했다.

대충 인사를 나눈 우리는 이제 습격자들의 수장에게 관심을 집중했다.

나와 싸우며 독충에 물려 눈도 뜰 수 없었던 그는, 그동안 운기조식을 통해 독 기운을 좀 가라앉힌 상태였다.

검성이 그에게 말을 걸었다.

“날 알아보겠는가?”

그러자 그가 무릎을 꿇고는 눈물을 흘리며 대답했다.

“제가 어찌 검성 어르신을 잊을 수가 있겠습니까?”

알고 보니 검성이 그를 죽이지 못하게 한 것은 그가 아는 사람이었기 때문이었다.

과거 무명의 무사였던 그의 재능을 높이 산 검성이 무림맹의 입맹 시험을 볼 수 있도록 소개해 줬던 인연이 있었던 모양이었다.

“그때 나는 자네를 보고서 갈고 닦으면 찬란한 보석이 될 인재라고 생각했었네. 근데 자네가 대체 왜 이런 짓을 하고 있는 건가?”

검성의 안타까운 질문에 그는 차마 대답하지 못하고 고개를 푹 숙인 채 눈물만 떨어뜨렸다.

그러자 청연 소저가 끼어들었다.

“그도 좋아서 하고 있는 건 아닐 거예요. 저희를 습격할 때의 작전만 생각해도 그는 무관한 사람을 죽이고 싶어 하지 않는 것 같았으니까요. 만약 살인을 즐기는 자였다면 힘을 합쳐 설풍 조장부터 죽이려고 했었겠죠.”

그러곤 그에게 직접 질문했다.

“만약 당신이 이 일을 하지 않으면 어떻게 되는 거죠?”

그러자 그가 잠시 망설이다 결국 대답했다.

“명문의 제자가 아닌 배경이 없는 무사들은 음영대에서 십 년 동안 임무를 수행해야 정식 타격대에 들어갈 수 있는 자격이 생깁니다. 그리고 음영대의 무사들은 모두 명령에 불복하면 척살당해도 원망하지 않겠다는 서약서를 작성했습니다. 그래서….”

그의 말을 들은 검성이 낮은 신음을 흘렸다.

“그게 무슨…. 무림맹이 어찌….”

하지만 청연 소저는 고개를 끄덕이며 말했다.

“비밀을 유지하는 동시에 자신들에게만 충성할 수 있는 가치 판단이 제거된 무인들을 양성할 수 있는 방법이로군요. 게다가 후일 말썽이 될 만한 자들을 미리 거르는 효과도 있을 거구요. 그들로선 일석삼조의 방법이었겠네요.”

그러곤 다시 검성에게 말했다.

“이분이 이렇게 된 것에는 아버지의 책임도 있어요.”

그러자 놀란 얼굴로 검성이 물었다.

“응? 내 책임이라니?”

“만약 아버지가 이분의 배경으로서 있어 줬다면 제갈 숙부도 차마 이분을 그 음영대라는 곳으로 보낼 수 없었겠죠? 제갈 숙부가 보기엔 참 탐나는 인재였을 거예요. 무려 검성이 재능을 보장한 인재인데 뒷배경이 전무했으니까요.”

“그건…. 오히려 내가 입맹을 추천했기 때문에 이렇게 될 수밖에 없었다는 거냐?”

“네, 제갈 숙부는 아버지가 일부러라도 관심을 끊으실 거란 걸 누구보다 잘 알고 있었을 테니까요.”

사실인 것 같았다.

검성이 공명정대하다는 것은 세상 모두가 알고 있는 사실이었고, 무림맹에서도 검성은 혹시라도 자신의 이름이 불공정한 배경이 될까 봐 일부러 추천한 무사들에 대해 관심을 끊어 버리곤 했다는 것이다.

근데 그것이 오히려 무사들을 이용당하게 만든 결과가 되고 말았던 모양이었다.

“그리고 이분, 아까부터 아버지의 얼굴도 제대로 쳐다보지 못하는 것을 보니 아마 아버지를 동경해서 무림맹에 들어왔던 모양인데요? 그렇지 않나요?”

그는 청연 소저의 질문에 대답하지 못한 채 더욱 고개를 푹 수그렸다.

하지만 그게 긍정의 의미라는 것은 누구나 알 수 있었다.

검성이 안타까운 얼굴로 그를 보고 있을 때 청연 소저가 검성에게 단호하게 말했다.

“그러니 앞으로 이분을 아버지가 책임지셔야 해요.”

그 말에 검성은 물론 우리 모두가 다 깜짝 놀라고 말았다. 삭무흔이란 이름의 그 또한 놀란 눈으로 고개를 쳐들었다.

검성이 의아한 얼굴로 물었다.

“책임지라니? 뭘 책임지란 말이냐?”

“책임지셔야죠. 아버지 얼굴만 보고 무림맹에 들어온 사람을 방치하셔서 여기까지 오게 만들었으니까요. 수행원으로 쓰시든 제자로 키우시든 어떻게든 책임지세요.”

그녀의 말에 삭무흔이 다시 고개를 푹 숙이며 중얼거렸다.

“제, 제자라니. 제가 어찌 감히….”

하지만 그렇게 말하는 그의 얼굴에는 약간의 생기가 감돌고 있었다.

검성은 잠시 말없이 그를 바라봤다.

아마 고민이 되는 모양이었다.

내가 보기에도 청연 소저의 말에는 무리가 있었다.

상황이 어쨌든 모든 선택은 그 자신이 한 것이고, 그가 그간 했던 일들이 사라지는 것도 아닐 테니까 말이다.

하지만 그걸 모를 리 없는 청연 소저가 저런 얘기를 했다는 건 뭔가 의도가 있는 것 같았다.

그녀에게 물었다.

“뭔가 다른 생각이 있으시오, 소저?”

그러자 그녀가 생긋 웃으며 고개를 끄덕였다.

“네, 원래 일이 좀 복잡해질 뻔했는데 이분만 우리에게 협조해 준다면 아주 간단하게 처리할 수 있을 것 같거든요.”

그녀의 말을 듣고 뭔가를 느낀 검성은 삭무흔에게 일단 무기명 제자로 삼고서 지켜보겠다고 말해 줬다.

그는 당연히 눈물을 흘리며 감격해했다.

청연 소저는 이제 같은 편이 된 삭무흔으로 하여금, 그녀를 죽이는 데 성공했다는 보고서를 제갈지강에게 올리도록 시켰다.

그러곤 검성과 함께 부대주 헌영보를 찾아가 그에게도 그녀가 혈교도들에 의해 납치되었다는 보고를 올리게 했다.

물론 그녀가 검성의 딸임을 알게 된 헌영보가 그 말을 거부할 리 없었다.

이로써 그녀는 공식적으로 죽은 사람이 되었던 것이다.

“이것으로 잠시 눈을 가릴 수 있을 거예요. 그 사이 아버지께서 조용히 정보를 좀 모아 주세요. 이 일은 최소한 십 년 이상, 전선의 성립과 동시에 추진된 일일 거예요. 그러니 아버지도 절대 함부로 움직이셔서는 안 돼요.”

그 말에 검성이 침음성을 흘리며 물었다.

“으음, 제갈지강 혼자만 관계된 일이 아닐 거란 말이냐?”

“물론이죠. 오히려 아버지 혼자만 모르고 있었을 확률이 더 높아요. 최소한 전선의 성립 때 관여했던 이들은 거의 다 연관되어 있을 거예요.”

그러니 절대 모르는 척 천천히 증거부터 수집해야 한다며 청연 소저는 재차 삼차 강조했다.

검성은 개운하지 않은 눈치였지만 딸의 판단을 따르기로 했다.

아마 그녀의 비범함을 무척 신뢰하는 모양이었다.

이로써 우리는 청연 소저 습격 사건을 일단락 지을 수 있었다.

하지만 이때까지 나는 깨닫지 못했다.

내 지난 삶에서 없었던 일을 처리하느라 지난 삶에서 있었던 일들에 대해 미처 신경을 쓰지 못했다는 것을 말이다.

***

마유겸은 자신을 외딴곳으로 부른 매여경의 쪽지에 잠시 고민했다.

일부러 못 본 척하고는 있었지만 그녀가 요즘 거의 폐인이 되어 가고 있다는 사실은 그도 알고 있었던 것이다.

이별을 받아들이지 못하는 그녀가 답답했지만, 문득 당여은을 잊지 못하는 자신도 똑같다는 생각이 들자 차마 전처럼 매몰차게 무시할 수만은 없었다.

‘아니, 똑같은 것도 아니지. 혈마의 외손자인 내가 감히 누구를 무시한단 말인가.’

어쩌면 최근 자기 자신에 대한 확신이 사라졌기 때문인지도 몰랐다.

그래서 씁쓸하게 웃으며 어찌할지를 고민하던 그는 문득 혈마가 남긴 비급을 떠올렸다.

거기에 쓰여 있던 암시법을 말이다.

문득 그런 생각이 떠올랐다.

‘만약 그녀에게 내가 없어도 잘 살아갈 수 있다는 의지를 암시로 남길 수만 있다면? 그럼 그녀에게도 좋은 것이 아닐까?’

가능성이 있는 얘기였다.

게다가 마음이 활짝 열린 사람이나 무너진 사람에게 잘 통한다고 했으니 그녀는 그 대상으로 더 이상 적절할 수가 없는 사람일 테고 말이다.

‘비록 혈교의 기술이라 해도 좋은 방향으로 쓸 수만 있다면 꼭 나쁜 것만은 아니겠지. 칼도 누가 어떻게 쓰느냐에 따라서 선악이 결정되는 것이니까.’

거기까지 생각한 마유겸은 비급을 다시 펼쳐 암시법을 암기하고 익히기 시작했다.

하지만 곧 그럴 필요가 없다는 사실을 깨달았다.

어쩐 일인지 그는 이미 거기 있는 모든 내용을 외우고 있었던 것이다. 암시법은 물론 다른 내용까지도.

자신의 머리가 이렇게 좋았나 싶은 생각에 또 쓴웃음을 흘렸다.

하지만 그는 이 자체가 혈마의 암시였을지도 모른다는 것까지는 미처 떠올리지 못했다.

매여경이 그를 불러낸 곳은 밀림 속에 있는 작은 바위산의 뒤편, 예전에도 가끔 그녀와 밀회를 즐겼던 비밀 장소였다.

움푹 들어간 곳 바깥을 수풀로 가려 놓으면 밖에선 전혀 보이지 않는 비밀 공간이 있었던 것이다.

그곳에서 매여경은 초조한 얼굴로 마유겸을 기다리고 있었다.

마유겸이 그곳으로 들어가자 매여경은 금방이라도 울음을 터트릴 듯 감격스러운 표정으로 소리쳤다.

“조장, 와 주셨군요!”

그녀의 격한 반응에 마유겸은 내심 한숨을 내쉬었다.

맹목적으로 주인을 반기는 강아지와 같은 그녀의 반응이, 너무도 부담스럽고 답답했기 때문이었다.

하지만 그는 일단 그런 기색을 숨기기로 했다.

암시를 걸기 위해서는 일단 상대를 제압해서 무력화시키든가, 아니면 완전히 마음이 풀어진 무방비한 상태로 만들어야만 했으니까.

애써 웃음을 지으며 그녀에게 말해 줬다.

“얼굴이 안 좋아 보이는구나, 여경. 식사는 제대로 하고 있는 것이냐?”

그 걱정스러운 말투에 매여경은 결국 눈물을 터트리고 말았다.

“으흐흑, 조장.”

마유겸은 천천히 다가가 울고 있는 그녀를 품에 안아 줬다.

그러자 그녀는 온몸에 힘을 뺀 채 그에게 폭 안겼다.

아무런 마음의 벽도 없는 것 같았다.

마유겸은 이 정도면 된 것 같다고 생각했다.

이젠 그녀의 눈을 보고 암시를 걸면 되는 것이다.

마유겸이 그렇게 생각하며 정신을 집중하고 있을 때, 문득 품에 안긴 매여경이 울며 중얼거렸다.

“조장, 사랑해요. 조장이 설사 혈마의 손자라 해도 저는 전혀 상관없어요. 오직 조장의 옆에만 있을게요.”

그 순간, 마유겸의 온몸이 마치 벼락을 맞은 듯 부르르 떨렸다.

심장이 멈춰 버릴 것 같은 기분이었다.

새파랗게 질린 얼굴로 매여경을 향해 물었다.

“지, 지금 뭐라고?”

그러자 매여경이 눈물을 흘리면서도 환하게 웃는 얼굴로 대답했다.

“저는 아무래도 상관없어요, 조장. 저는 오직 조장의 여자니까요.”

그 순간에야 마유겸은 그녀가 자신의 방 열쇠를 갖고 있다는 것을 떠올렸다.

그리고 처음 어머니의 편지를 봤던 날 그걸 무방비하게도 침상 위에 놓은 채로 방에서 뛰쳐나갔었다는 것도.

눈앞이 하얗게 되고 있었다.

매여경이 그를 안심시키려는 듯 다시 말했다.

“걱정 말아요, 조장. 조장이 저를 버리지만 않으면 저는 절대 조장을 배신하지 않아요.”

그녀가 알고 있었다.

그녀가 자신의 비밀을 알고 있었던 것이다.

자신이 혈마의 손자라는 걸….

마유겸은 한순간 머릿속이 폭발해 버린 것만 같다고 생각했다.

아무것도 눈에 보이지 않았다.

아무런 생각도 들지 않았다.

그저 두려울 뿐이었다.

자신의 정체가 사람들에게 드러나는 것이….

***

매여경이 주귀에게 피가 빨린 듯 바짝 말라비틀어진 모습으로 발견된 것은 청연 소저의 사건을 해결하고 며칠이 지난 후의 일이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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