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마교전선 비룡십삼대-48화 (48/359)

48화 당가검봉-4

콰콰콰쾅!

마유겸의 붉은 검강과 내 보라색 검강이 부딪쳐 허공에 불꽃을 튀겼다.

검을 맞댄 마유겸이 경악한 눈빛으로 소리쳤다.

“절정이라고?! 네놈이 언제 절정의 경지에?!”

검성 어르신께 가르침을 받고 한동안 명상에 잠겼던 나는 깨달을 수 있었다.

강기라는 것은 검기를 압축하는 것이 아니라 더 가늘고 세게 뿜어내야 하는 것이라는 사실을, 마치 엄청난 수압으로 뿜어낸 물줄기가 바위를 자르듯이 말이다.

검성께서는 물을 예로 들어 내게 그것을 깨우쳐 주셨던 것이었다.

그리고 양쪽으로 튕겨 나갔던 우리는 다시 서로 짓쳐 들며 빛살 같은 검초를 교환하기 시작했다.

마유겸의 검이 공간을 꿰뚫을 듯한 속도로 내게 찔러 왔다.

쉬이익!

그야말로 태양도 꿰뚫을 것만 같은 속도였다.

초고속의 찌르기가 세 개의 잔상을 만들며 찔러 오자 나는 검을 다급하게 휘둘러 간신히 그것을 걷어 낼 수 있었다.

티티팅!

“으윽!”

확실히 그와 같은 경지인 절정에 올라 강기를 막아 낼 수는 있었지만 검사로서의 기량에서 아직 그를 따라잡기는 무리였던 모양이었다.

“으하하하! 아직 풋내기로구나! 강기도 허술하기 그지없군!”

마유겸이 비웃으며 소나기처럼 검을 찔러 왔다.

쉬쉬쉬쉬쉭!

그의 말대로였다. 아직 강기를 만드는 것이 익숙하지 않아 강기의 내공 소모가 너무 많았고 안정성도 부족했다.

그나마 절정의 경지에 오른 후 바로 영약을 통해 내공을 보충한 것이 다행이었다.

“으하하하핫! 죽어랏!”

“크으윽!”

마유겸은 이제 완전히 승리를 자신한 듯했다.

빛살 같은 찌르기들을 정신없이 막아 내느라 제대로 공격도 할 수 없었다.

초고속의 쾌검인 사일검법을 상대로 환검인 섬전십삼검의 상성이 좋지 못하다는 것도 지금 깨닫게 된 사실이었다.

환검인 섬전십삼검은 무위가 비슷하거나 더 낮은 다수를 상대할 때는 유용하지만, 무위가 더 높은 개인을 상대할 때는 그 환검이 오히려 허점을 드러내는 결과가 되고 말았던 것이다.

사악!

“크윽!”

놈의 검강이 왼팔을 강하게 스치고 지나가며 피가 튀었다.

옷은 이미 다 찢겨 너덜너덜해지고 강기에 스친 몸 여기저기에 생채기가 난 상태였다.

“으하하하하! 이게 너의 한계냐?! 한심하구나!”

놈이 광기 어린 눈으로 점점 더 빠르게 맹공을 퍼붓고 있었다.

으득!

이를 갈았다.

하지만 상황이 너무 안 좋았다.

실력의 차이가 명확한 데다 내공 소모가 막대해 앞으로 얼마나 더 버틸 수 있을지 알 수 없었던 것이다.

그나마 신법에서 우세하기에 간신히 버티고 있을 뿐이었다.

그때 문득 떠오르는 방법이 하나 있긴 했다.

아직 한 번도 펼쳐 본 적이 없던 그것.

‘선우십삼검의 십사초와 십오초.’

책의 숨겨진 부분에서 발견한 십사초와 십오초는 아직 한 번도 펼쳐 본 적이 없었다.

기본적으로 강기를 쓸 수 있어야만 펼칠 수 있는 초식이기 때문이었다.

그러니 지금이라면 펼칠 수 있다는 뜻이기는 했다.

하지만….

망설여졌다.

이론적으로만 알고 있던 초식을 펼치는 게 과연 의미가 있을까?

오히려 남은 내공만 다 소모한 채 기회를 잃게 되는 건 아닐까?

한 편으론 문득 그런 생각도 들었다.

‘차라리 도망갈까?’

냉정하게 내공이 아직 남아 있는 지금 도망간다면 마유겸의 신법으론 나를 쫓아올 수 없을 터였다.

게다가 여기서 내공을 더 소모한 다음에는 그것마저도 불가능해질 테고 말이다.

물론 그렇게 하면 당 소저는 포기할 수밖에 없겠지만 어차피 당 소저가 내게 그렇게 큰 의미가 있는 사람은 아니지 않은가.

내가 그토록 살리고 싶었던 동료들이 아닌 그저 얼굴을 알고 있는 십삼대의 동료일뿐.

그녀를 위해 목숨까지 걸 필요는 없을 것 같았다.

한번 떠오른 도망간다는 선택지는 갈수록 내 머릿속에서 매력적으로 부상하고 있었다.

기껏 다시 돌아와서는 고작 여기서, 그것도 혈교의 마두도 아닌 마유겸과 싸우다 죽게 된다면 너무 허무한 일이 아니겠는가.

내가 그런 생각을 하고 있을 때였다.

“하아아압!”

슈하아아악!

내게 맹공을 퍼붓던 마유겸의 검격에 약간의 틈이 벌어지는 것이 눈에 들어왔다.

반격을 할 수는 없겠지만 딱 빠져나가기 좋을 그런 틈이.

눈이 번쩍 뜨였다.

‘기회다!’

나는 본능적으로 몸을 날리려 했다.

이 기회마저 놓친다면 이제 도망조차 칠 수 없을지도 몰랐다.

“이익!”

하지만 막 몸을 날리려던 나는 결국 멈칫한 채 움직이지 못했다.

문득 내 머릿속에 명사현의 얼굴이 떠올랐기 때문이었다. 같은 남자가 봐도 멋져 보였던, 내게 다가와 속으로 우습게 봤던 자신의 마음을 사과한다며 유쾌하게 말했던 그의 얼굴이 말이다.

‘그가 섭혼술을 이겨 낼 만큼 사랑했던 여인을 버리고 간다고?’

그건 불가능했다.

도저히 발이 떨어지지 않았다.

그리고 놀랍게도 그 망설임이 내 목숨을 살리고 말았다.

“하아압!”

슈하아악!

내가 몸을 날리려고 했던 방향으로 마유겸이 눈부신 섬광을 뿜어내고 있었다.

푸른 빛줄기와도 같은 검강이 공간을 꿰뚫었다.

절정의 경지에서 펼쳐 낸 일시사일이었다.

나는 눈앞으로 지나가는 빛의 창을 바라보며 어떻게 된 일인지를 순간 깨달을 수 있었다.

아마 놈은 내가 도주할 거라고 이미 예상했던 모양이었다. 그래서 일부러 도주할 틈을 만들어 주고는 일시사일을 펼칠 준비를 하고 있었던 모양인데, 내가 순간 망설이는 바람에 공격이 빗나갔던 것이었다.

“이, 이런?!”

마유겸의 눈이 당황으로 물들었다.

온 힘을 다한 일격에 허점이 드러났던 것이다.

이를 악물었다.

이 기회를 놓칠 수 없었다.

“하압!”

선우십삼검 제 십사초.

주작현신.

슈하아악!

내 보랏빛 검강이 불꽃으로 된 새로 화했다.

처음 펼쳐보는 십사초 주작현신이었다.

검강이 불타오르는 새의 모양으로 화해 마유겸을 향해 덮쳐 갔다.

온몸의 내공이 한꺼번에 쑤욱 빠져나가고 있었다.

“크윽!”

날개를 활짝 펼친 보랏빛 새가 부리를 벌려 울음을 토하며 마유겸을 감쌌다.

- 삐이이이익!

“으하아아압!”

마유겸도 사력을 다해 검을 회전시켰다.

점창검법 중 방어에 적합한 회풍무류사십팔검이었다.

콰콰콰콰콰콰콰쾅!

보랏빛과 붉은빛의 강기가 뒤섞인 장대한 폭발이 일어났다.

그걸 지켜보는 나는 온몸을 가득 채운 탈력감에 거친 숨만 몰아쉬었다.

“하아, 하아, 하아.”

폭발이 가라앉고 이제 한 점 내공도 남지 않은 내가 이를 악물었다.

저 앞에 여전히 서 있는 마유겸의 모습이 눈에 들어왔기 때문이었다.

놈은 폭풍을 만난 듯 엉망이 된 행색이었지만 적어도 큰 부상을 입은 것으로는 보이지는 않았다.

내공만 끝까지 이어졌다면 끝낼 수 있었을 텐데….

너무도 아쉬웠다.

방금 나는 내공이 부족해 마지막까지 초식을 완성하지 못했던 것이다.

아니, 내공보단 숙련도의 문제겠지.

하지만 지금 중요한 것은 아니었다.

마유겸이 이를 갈며 내게 말했다.

“방금 것은 제법이었다. 하마터면 죽을 뻔했군.”

그러곤 다시 비릿하게 웃으며 말을 이었다.

“하지만 이젠 네가 죽게 되겠구나.”

빌어먹을.

그의 말대로였다.

내공이 바닥나 싸우기는커녕 도망도 칠 수 없었다.

아마 두 번째 삶도 여기서 끝나는 모양이었다.

“잘 가라, 선우진.”

그렇게 말하며 마유겸이 검을 치켜들었을 때였다.

문득 목소리가 들려왔다.

“글쎄, 나랑은 생각이 좀 다르네. 내 생각엔 잘 가야 할 건 너인 것 같은데, 마유겸.”

깜짝 놀란 고개를 돌려 쳐다본 곳에는, 어느새 꼿꼿하게 일어난 당 소저가 마유겸에게 검을 겨누고 있었다.

그녀가 차가운 눈빛으로 마유겸을 노려보며 말했다.

“감히 내게 더러운 짓을 하려고 했겠다.”

그녀의 검에서 당가의 사람다운 연녹색의 검강이 이글거리며 피어오르고 있었다.

또한 그녀의 차가운 눈에서 끓어오르는 증오의 빛도 검강에 못지않았다.

마유겸의 눈에선 이제 두려움의 빛이 떠오르고 있었다. 아주 보기 좋은 얼굴이었다.

나와의 우열이 명확했듯, 둘 사이의 우열도 명확했다.

그가 사 조장이고 당여은이 삼 조장인 이유는 그녀의 실력이 더 뛰어나기 때문이었다.

게다가 나와 싸우며 많이 지쳤을 테니 그로선 더더욱 그녀를 당할 수 없을 테고 말이다.

“으으으.”

주춤주춤 뒷걸음질 치던 마유겸은 그대로 몸을 날려 도망쳤다.

“으아아아아아!”

처절한 괴성만을 남긴 채 그는 그야말로 빛살처럼 사라져 버리고 말았다.

느낌상 나를 쫓을 때보다 더 빠른 것 같았다.

“하아아.”

한숨을 내쉬며 풀썩 주저앉았다.

정말 죽는 줄 알았다.

내공도 없고 힘도 없고 온몸이 다 아팠다.

힘없이 웃으며 당여은을 향해 말했다.

“덕분에 살았소, 때마침 정신을 차려 다행….”

하지만 나는 그 말을 끝맺을 수 없었다.

당 소저가 그대로 정신을 잃으며 풀썩 쓰러져 버렸기 때문이었다.

“당 소저?!”

간신히 달려가서 그녀를 안아 보니 온몸에 열이 펄펄 끓어오르는 채로 식은땀을 흘리고 있었다.

아마 정신적으로 너무 힘든 상황에서 무리를 한 것이 아닌가 싶었다.

난감했다.

내 내공과 체력도 바닥난 상태라 그녀를 데리고 돌아갈 자신이 없었던 것이다.

게다가 이 상태로 만약 마유겸이 돌아오기라도 한다면….

“으윽!”

간신히 그녀를 안고는 근처의 구석진 장소를 찾았다.

혹시 마유겸이 돌아올 것을 대비해서라도 숨어 있어야만 했으니까.

독물을 쫓는 향낭이 있는 것이 그나마 다행이었다.

나무 사이의 움푹 파인 장소를 찾고는 그곳으로 들어갔다. 원래 뱀이 있던 곳이지만 내가 다가가자 피독향에 후다닥 도망친 후였다.

찝찝하지만 어쩔 수 없었다.

대충 수풀로 주변을 덮고 그녀를 안고 있자 그녀의 몸이 차가워지기 시작했다.

그것도 이마는 펄펄 끓는데 몸만 차가워지고 있었다.

게다가 몸이 아프기 때문인지 다시 헛소리를 중얼거리기 시작했다.

“제가 태어나서… 죄송해요, 어머니. 제가 죽었어야 했는데…. 죄송해요.”

게다가 아까 마유겸이 걸었던 섭혼술도 완전히 깨진 것이 아닌 모양이었다.

“저는 당여은이에요. 당여은은 마유겸의….”

도저히 그냥 둘 수가 없었다.

문득 이럴 땐 옷을 벗기고 서로의 체온으로 온도를 유지하는 것이 가장 좋다고 했던 얘기가 떠올랐다.

하지만 차마 그렇게까지 할 수는 없었다.

대신 그녀를 품에 꼭 안은 채 손으로 몸을 문질러 몸을 데워 주려고 노력했다.

그러곤 그녀의 귀에 계속해서 속삭여 줬다.

“당 소저는, 당여은은 소중하고 가치 있는 사람이오. 당신이 무사히 태어나 줘서 정말 다행이오. 명사현 형도 당연히 그렇게 생각할 거요. 당여은은 당 소저 자신의 것이오. 다른 누구도 당여은의 주인이 될 수 없소.”

어떻게든 그녀를 돌려놔야 한다는 순수한 마음에서 비롯된 행동이었다.

하지만 내 두 번의 삶 중 여인의 몸과 이렇게까지 가까이 밀착한 것은 처음이었다.

단련된 무인임에도 한없이 부드럽게 느껴지는 몸의 감촉, 게다가 같은 사람에게서 나는 냄새라곤 믿기지 않을 정도로 향긋한 냄새.

순수한 마음을 유지하기가 쉽지 않았다.

게다가 바로 딱 옆에 붙어서 보게 된 정신을 잃은 그녀의 얼굴은 정말이지 너무도 아름다웠다.

그야말로 여신 그 자체인 것 같았다.

이대로 계속 보고 있다간 혼이 나갈 것만 같은 기분이라 눈을 감았다가는 나도 모르게 다시 떠서 그녀를 보게 되곤 했다.

여러 가지 충동이 떠올랐지만 나 소저와 명사현을 생각하며 간신히 억제할 수 있었다.

시간이 어떻게 지나가는지도 알 수 없었다.

밤새 그녀의 몸을 꼭 안고는 체온을 데워 주려 노력하고, 귀에다가 계속 속삭여 주다 보니 운기조식도 전혀 하지 못하는 가운데 날이 밝아 오고 있었다.

다행히 그녀의 체온은 이제 정상으로 돌아온 것 같았다.

드디어 그녀가 편안한 표정으로 쌔근쌔근 숨을 쉬고 있는 것을 확인한 나는 옆에 조심스럽게 그녀를 눕혀 주고는 그대로 옆에 대자로 드러누웠다.

더 이상은 너무 피곤해서 아무 생각도 들지 않았다.

그러곤 곧 잠들고 말았다.

꿈속에서 문득 당 소저의 고맙다는 목소리가 들렸던 것도 같았다.

그리고 알 수 없는 남자의 목소리도….

- 흠, 드디어 쓸 만한 계승자 감을 만난 것 같군. 꽤 괜찮았다네.

처음 들어보는 남자의 목소리였지만 아마도 환청인 것 같았다.

너무 피곤하니 그럴 수도 있겠지.

충분히 이해할 수 있었다.

***

내가 잠에서 깨어났을 땐 그녀가 이미 깨어나 앉아 있는 상태였다. 내가 일어나자 그녀가 고개를 돌린 채로 어색하게 말했다.

“고마워… 요.”

“고, 고맙긴요. 당연히 했어야 하는, 하하하, 하하….”

우리는 그 어색한 모습으로 한마디도 못 한 채 다시 십삼대로 돌아왔다.

그때까지도 마유겸은 아직 돌아오지 않은 상태였다.

아마 이대로 떠나 버린 것이 아닌가 싶었다.

나는 바로 마유겸의 숙소로 가서 잠긴 방문을 부수고 들어갔다.

그리고 그곳에서 그의 어머니가 남긴 편지와 비급, 그리고 영약을 발견할 수 있었다.

그걸 본 나는 그제야 일의 전모를 파악할 수 있었다.

전가장 혈사와 점창파, 혈마, 마유겸의 어머니까지 복잡하게 꼬여 있는 인연의 실타래를.

마유겸이 무너진 것도 어쩐지 이해할 수 있을 것만 같은 기분이었다.

자신의 정신적 기둥인 점창파와 아버지가 자신의 어머니를 망친 가해자라니, 게다가 그 대가로 사혜혈마라는 괴물을 탄생시켰고 심지어 그게 자신의 외조부라니.

누구보다 혈교와 혈마를 증오해 왔던 그가 대체 어떤 기분이었을지 상상도 가지 않았다.

하지만 이해가 간다고 해서 그의 행동을 용납할 수 있다는 건 아니었다.

나는 그것을 바로 설풍 조장에게 전달했고, 그러자 급하게 간부 회의가 열렸다.

내가 처음으로 참가한 간부 회의였다.

회의실에 모인 조장과 부조장들은 너무나도 충격적인 사실에 아무런 말도 꺼내지 못하고 있었다.

누구보다도 혈교를 증오하던 마유겸이 혈마의 손자였다니, 그가 매여경을 흡정해서 죽이고 당 소저마저 섭혼하려고 했었다니.

도저히 믿을 수가 없었던 것이다.

나는 문득 당여은을 힐끗 바라봤다.

마유겸이 자신에게 저지르려 했던 일들에 대해 듣는 중에도 그녀는 예전처럼 냉정한 얼굴로 아무렇지 않은 듯 앉아 있는 중이었다.

많이 괜찮아진 것 같아 다행이었다.

그녀의 상태를 먼저 확인한 나는 아무도 얘기하지 않고 있는 조장들 사이에서 제일 먼저 입을 열었다.

“정황을 보건대 아마 마 조장은 여기 쓰여 있는 수법들을 익혀서 마기에 침식당한 게 아닌가 싶습니다. 눈빛이 정상적으로 보이지 않았거든요. 너무 충격을 받아 마음이 무너진 상태에서 마기에 침식당하다 보니 갑자기 사람이 변해 버린 거였겠죠.”

예전 석경달 노인에게 혈교의 무공들이 익히는 사람의 정신을 파괴한다는 얘기를 들었었기에 할 수 있는 얘기였다.

내 말을 들은 이 조장 사군일이 눈을 질끈 감았다.

마유겸과 같은 점창파 동문인 그로서는 더욱 안타까움이 큰 모양이었다.

그런 사군일을 안쓰러운 눈으로 쳐다보던 이 조 부조장 감지인이 말했다.

“그럼 이 사실은 일단 우리만 알고 있는 게 어떨까요? 사 조 조원들은 물론 모든 십삼대원들에게도 너무 큰 충격일 것 같으니까요.”

그의 말에 조장들은 잠시 고민하는 것 같았지만 내가 고개를 저으며 단호하게 말했다.

“안 됩니다.”

“네?”

“만약 이 사실을 조원들이나 다른 대의 대원들이 모르는 가운데 마유겸이 다시 접근한다면 어떤 일이 벌어질 것 같으십니까?”

그러자 모두가 침음성을 흘렸다.

절정의 고수인 데다 흡정술과 암시법까지 쓸 줄 아는 그가, 만약 그를 경계하지 않는 다른 대원들에게 접근한다면 엄청난 참상이 벌어질 수도 있었던 것이다.

“저도 그의 상황이 안타깝습니다만, 이 사실은 최대한 빨리 모든 전선에 전파되어야만 합니다.”

내 말에 회의실의 간부들이 모두 무거운 표정으로 고개를 끄덕였다.

결국 회의는 마유겸의 상황을 최대한 빨리 전파한다는 결론만을 낸 채 종료되었다.

이로써 마유겸은 다시는 전선에 돌아올 수 없게 되었던 것이다.

문득 지난 삶보다 훨씬 먼저 혈교로 전향하게 되어 버린 그가 앞으로 어떤 행보를 보일지 걱정이 됐다.

또한 무림맹의 천뇌 제갈지강이 이 소식에 대해 어떻게 반응할지에 대해서도 걱정이었다.

이 사실이 알려지면 필연적으로 혈마와 점창파의 옛일이 사람들에게 알려질 텐데 그는 별로 그것을 원하지 않을 것 같았기 때문이다.

‘어쩌면 극단적인 수를 쓰려고 할지도 모르지. 청연 소저에게 하려고 했던 것처럼.’

문제는 딱히 내게 그것을 막을 방법이 없다는 것이었다.

그저 이 일은 무림맹으로 복귀하신 검성 어르신께 기대를 거는 수밖에 없을 것 같았다.

그 후로 십삼대의 분위기는 계속 좋지 않았다.

전체적인 분위기는 물론이고 졸지에 조장과 부조장을 모두 잃은 사 조의 분위기는 거의 초상집이나 다를 바가 없었다.

다만 걱정했던 당 소저는 꿋꿋하게 잘 이겨 내고 있는 것 같았다.

오히려 원래 사람들을 챙기는 역할을 맡았던 명사현 부조장의 몫까지 잘해 나가고 있다는 얘기가 들려오고 있었다.

다행이었다.

며칠이 지난 후, 나는 당 소저를 한번 찾아가 보기로 했다.

곧 나타나게 될 철귀 때문에 그녀에게 화골산을 부탁해 봐야 했기 때문이었다.

사람의 시체를 녹여 흔적을 없애는 데 쓰이는 화골산은 철귀의 피부를 약하게 만드는 효과가 있었다.

지난 삶에서 수많은 희생을 거친 후에 알게 된 사실이었다.

‘예전이야 그녀와의 접점이 전혀 없어 부탁하지 못했지만, 지금이라면 그래도 좀 괜찮지 않을까? 어쨌든 내가 그녀의 생명의 은인인 셈이니까.’

그런 생각이었다.

삼 조를 찾아가 조원들에게 물어보니 그녀는 홀로 연무장에 가 있다고 했다.

수련을 할 때 혼자 있는 것을 좋아한다는 것 같았다.

문득 ‘혼자 수련을 하는데 가 봐도 되는 건가?’라는 의문이 들어 망설여졌다.

하지만 그냥 가 보기로 했다.

나도 그녀가 혼자 있을 때 부탁하는 게 편할 것 같았기 때문이었다.

“하압! 하아, 하아, 하아.”

수련장의 그녀는 가쁜 숨을 내쉬며 검을 휘두르고 있었다.

여전히 얼음처럼 차가운 표정이었지만 뭔지 모를 절박함과 슬픔이 느껴지는 검초였다.

문득 그런 생각이 들었다.

‘그녀는… 진짜로 괜찮아진 것이 아니었구나.’

하긴 상식적으로 그런 일이 있고 바로 괜찮아진다는 것도 말이 안 되지 않겠는가.

어쩌면 당연한 일이었다.

그녀가 조금 지쳤는지 드디어 검을 멈추고 가쁜 숨을 몰아쉴 때였다.

조심스럽게 목소리를 냈다.

“저, 당 소저.”

그러자 그녀가 고개를 돌려 나를 바라봤다.

“아!”

그리고 그 순간 그녀의 차가운 얼굴이 무너져 버렸다.

***

당여은은 요즘 평소와 같은 모습을 보이기 위해 사력을 다하는 중이었다.

명사현이 없는데 자신까지 무너질 수는 없었다.

어떻게든 자신의 몸과 마음을 추스르고 조원들에게 믿음직한 모습을 보여 줘야만 했다.

하지만 그것은 절대 쉽지 않았다.

자신뿐만이 아니라 조원들을 관리하는 부분에 있어서도 명사현의 빈자리가 너무 컸던 것이다.

사람들에게 친근하게 다가가 한 명, 한 명을 신경 쓰는 것은 그녀에게 너무도 어려운 일이었다.

순간순간 그대로 주저앉아 버리고 싶었다.

더는 못하겠다고, 나도 힘들다고 울음을 터트리고 싶었다.

하지만 그럴 순 없었다.

그가 말했던 대로 그녀 자신은 명사현이 목숨을 바쳐 사랑했던 사람.

그녀가 무너지는 모습을 보이는 건 그녀를 사랑해 준 명사현까지도 모욕하는 일이 되고 말 것이니까 말이다.

그래서 힘들 때마다 마치 주문처럼 수없이 되뇌었다.

그가 귓속으로 속삭여 줬던 그 말을.

‘나는 가치가 있는 사람이다. 나는 소중한 사람이다. 그러니까…. 나는 할 수 있다.’

선우진이 밤새 속삭여 줬던 그 말이 그녀를 지탱해 주는 유일한 힘이었다.

살면서 처음 들어 본, 눈물이 나올 것만 같은 그런 말.

지금도 그녀의 머릿속에선 선우진의 목소리가 생생하게 떠돌고 있었다.

그렇게 그 목소리에 기대어 하루하루를 간신히 버텨 낼 수 있었다.

하지만 그럼에도 어쩔 수 없는 순간은 있었다.

이른 아침 개인 수련을 시작하는 시간, 연무장에 나가 아무것도 놓여 있지 않은 텅 빈 연무장을 볼 때면 문득 다시 한번 깨닫게 되고 마는 것이다.

이제 더 이상 명사현이 세상에 없다는 것을.

그녀를 두고 가 버렸다는 것을….

그럴 때면 이를 악물고 검을 휘두르곤 했다.

명사현을 생각해서라도 절대 무너질 수 없다고 스스로를 채찍질하며.

하지만….

너무도 힘들었다.

너무도 슬프고 괴로웠다.

오늘도 그랬다.

터져 나오려는 울음을 꾹 참으며 검을 휘둘렀다.

제대로 수련을 하고 있는 것인지는 중요하지 않았다.

그저 지금 무너지지 않는 것만이 중요했다.

그녀는 명사현이 사랑한 사람이니까.

그를 위해서라도 절대 무너질 수 없으니까 말이다.

그때 문득 목소리가 들려왔다.

머릿속에서 늘 맴돌던 것과 같은 그 목소리였다.

“저, 당 소저.”

깜짝 놀라 고개를 돌려 목소리가 들려온 곳을 쳐다보았다.

그러자 그곳엔 그가 있었다.

명사현은 없었지만, 밤새 자신을 가치 있는 사람이라고, 소중한 사람이라고 속삭여 줬던 그가, 선우진이 그곳에 있었던 것이다.

“으흐흑!”

당여은은 왈칵 울음을 터트리고 말았다. 왜 그랬는지는 그녀 자신도 알 수 없었다.

그저 더 이상 버틸 수 없었을 뿐이었다. 마치 엄마를 만나 마음이 놓인 아이처럼, 캄캄한 어둠 속에서 한 줄기 빛을 발견한 사람처럼 말이다.

두 손으로 얼굴을 가리고는 하염없이 울었다. 도무지 그쳐지지 않았다.

“다, 당 소저?!”

선우진은 깜짝 놀라 그녀에게로 달려갔다.

평상시 보여 주던 차갑고 강인한 모습은 온데간데없는 작고 가냘픈 모습으로, 그녀가 흐느끼고 있었다.

가늘게 떨리는 어깨가 그렇게 안쓰러워 보일 수가 없었다.

안타까운 얼굴로 그녀를 보며 잠시 망설였던 선우진은 천천히 그녀의 어깨를 감싸 안아 줬다.

그 후로도 한참 동안을, 당여은은 선우진의 품에서 하염없이 눈물을 흘렸다.

그리고 선우진은 그녀의 귀에 다시 속삭여 주었다.

“당 소저는 누구보다도 소중하고 가치 있는 사람이오. 그리고 지금도 충분히 잘해 나가고 있다오.”

당여은이 무엇보다도 듣고 싶었던, 그런 말과 목소리가 아닐 수 없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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