52화 파견-2
우리는 귀주성 선위에 위치한 하오문 지부에서 거력마에 관한 정보를 얻을 수 있었다.
아니, 정확히는 거력마의 행방을 왜 찾을 수 없는가에 대한 정보였다.
십이대주 만종임이 신음처럼 중얼거렸다.
“으음, 낭인들로 위장하고 움직였을 거란 말인가?”
정보에 따르면 최근 귀주성 서부 쪽에 전운이 감돌고 있는 모양이었다.
사천성에서 세를 떨치고 있는 정협방과, 귀주팔세의 두 자리를 차지한 운씨세가와 산검문 사이의 충돌이었는데, 벌써 한 차례 전투가 벌어졌었고 앞으로 더 확대될 상황이라고 했다.
그래서 귀주의 낭인들은 대부분 그곳으로 향하는 중이었고, 돈이 부족한 낭인들이 서로 뭉쳐 수레를 타고 이동하는 모습을 곳곳에서 볼 수 있다는 것이었다.
하오문의 설명으로는 만약 거력마들이 그들 사이에 섞여서 움직였다면 행방을 파악할 수 없는 게 당연하다는 얘기였다.
또한 하오문은 그들이 선위 안으로는 절대 들어오지 않았을 거라고도 단언했다.
대부분의 무인들이 밖으로 나가고 있기 때문에 만약 외지의 무인들이 선위로 들어왔다면 절대 모를 수가 없다는 것이다.
십이대 일 조의 조장인 도무곤은 어두운 얼굴로 만종임에게 물었다.
“결국 놈들은 귀주성으로 간 거였군요. 어떻게 하실 겁니까, 대주님?”
만종임이 이를 갈며 대답했다.
“어떻게 하기는! 따라가야지! 절대 놓치지 않겠다!”
그러자 점창검호 제원영이 물었다.
“하지만 어디로 따라간단 말입니까? 낭인들과 섞여 이미 귀주성까지 올라간 뒤라면 그 후에 어느 방향으로든 갈 수 있을 것이 아닙니까? 그걸 어떻게 쫓는단 말입니까?”
“으음.”
제원영의 질문에 만종임은 대답하지 못했다.
그 또한 고집도 부릴 수 없을 만큼 제원영의 질문이 타당하다고 느껴졌기 때문이었다.
하지만 내 생각은 달랐다.
“아뇨, 그들은 아무래도 정협방이나 운씨세가 쪽으로 갔을 것 같군요.”
모두가 의아한 눈빛으로 내게 집중했다.
제원영이 물었다.
“그들이 말이오? 왜 그렇게 생각하시오?”
내 머릿속에 문득 지난 삶의 기억들이 떠올랐다.
언제인지도 모르게 혈교에게 섭혼됐었던 식솔들, 누가 아군인지 적군인지도 구분할 수 없었던 그 혼란했던 시기의 기억들이.
날카로운 눈빛으로 사람들을 둘러보며 입을 열었다.
“하필이면 거대 세력들 간의 분쟁이 일어나는 시기에 딱 맞춰 거력마가 전선을 넘었습니다. 그리고 또 자연스럽게 선위의 안도 아닌 입구에서 낭인들과 합류해 귀주성으로 이동했단 말이지요. 이 모든 게 지나치게 자연스럽고 군더더기 없이 이루어졌다고 생각하지 않으십니까?”
하지만 대부분의 사람들은 내 말뜻을 이해하지 못했다. 그들이 그저 인상만 찌푸리고 있을 때 청연 소저만이 바로 무언가를 깨달은 듯 내게 물었다.
“원래부터 정해진 계획이었다? 더 많은 자들이 있다고 생각하시는 거군요.”
역시 청연 소저였다.
씨익 웃으며 고개를 끄덕였다.
“아마 셋 중 하나일 거라고 생각합니다.”
“둘일 수도 있지 않을까요?”
“현재 상황을 봤을 때 둘 다일 것 같지는 않더군요.”
“흠, 그럼 셋이 아니라 둘 중 하나겠네요.”
“아마 그렇겠죠.”
거기까지 말한 청연 소저는 어이없다는 듯 웃으며 고개를 저었다.
“불가침 협정이라는 건 정말 아무 의미도 없는 거였군요. 할 수만 있다면 시간을 돌려 무슨 얘기가 오갔는지 참관해 보고 싶을 정도네요.”
멍한 얼굴로 우리 대화를 듣고 있던 제원영이 조심스럽게 비사영에게 물었다.
“저게 대체 무슨 소리요? 혹시 나만 못 알아듣고 있는 거요?”
그러자 비사영이 환하게 웃으며 대답했다.
“염려 마시오. 나도 전혀 모르겠으니까. 하지만 조금만 기다려 보시구려. 곧 저 친구가 사람의 언어로 통역해 줄 거라오.”
그 말에 다른 조원들도 환하게 웃으며 고개를 끄덕였다. 마치 해탈한 도인들과도 같은 웃음이었다.
바로 그들에게 설명을 시작했다.
“제 생각은 이렇습니다. 지금까지 벌어진 일련의 사태는 거력마가 충동적으로 전선을 넘어왔다기보다는 잘 짜여진 계획대로 움직인 것처럼 보인다는 겁니다.”
만종임이 얼굴을 찌푸리며 되물었다.
“계획대로 움직였다고? 어떻게 말인가?”
“누군가가 시간 맞춰 거력마에게 선위 앞으로 오도록 지시했고 그곳에서 그들을 바로 태워 이동시킨 거겠죠.”
“…뭐, 뭐라고? 대체 누가 그런 짓을 한단 말인가?!”
“누구겠습니까? 전선 북쪽에 위치한 혈교의 세력이겠죠. 아니, 전진 기지라고 해야 할까요?”
“뭐라고?!”
내 말에 모두가 경악한 표정이 되고 말았다.
만종임이 말을 더듬으며 물었다.
“그, 그게 말이나 되는가? 그놈들이 어떻게 전선 북쪽에 세력을 형성할 수가 있단 말인가?”
지난 삶에 나도 그것에 대해 궁금해했었다.
대체 언제 그렇게 전선 이북의 곳곳에 세력을 형성해 놓을 수 있었던 건지 말이다.
그 의문의 답을 이제야 찾은 것 같았다.
“우리는 이제껏 운남성을 뛰쳐나가는 혈교의 마두들이 혈마의 지배에 불만을 품었기 때문이라고만 생각했었습니다. 심지어 혈마의 차도살인이라고도 생각했었죠. 근데 만약 그들 중 일부가 그런 이유로 벗어난 게 아니었다면 어떻게 되는 걸까요? 그들이 사실은 혈마의 지시로 운남성을 벗어난 거였다면 말이지요?”
“그, 그런….”
모두가 충격받은 얼굴로 멍해져 있을 때 제일 먼저 정신을 차린 설풍 조장이 내게 물었다.
“그럼 아까 말했던 셋 중 하나라는 것은?”
“만약 제 가설이 맞는다면 지금 거력마가 이동하는 이유는 그들의 무력이 필요한 곳이 있기 때문이겠죠. 그러니 현재 낭인들의 목적지에 있는 분쟁 중인 세 문파 중 하나가 그들의 전진 기지일 거라고 생각합니다. 정협방, 운씨세가, 산검문 셋 중 하나가요.”
“으으음!”
말을 마치고는 다른 사람들이 충격을 가라앉히고 현실을 받아들일 때까지 잠시 기다려 줬다.
그리고 대충 됐다 싶었을 때쯤 만종임에게 물었다.
“그래서, 대주님께서는 어떻게 하실 생각입니까? 제 예상이 맞는다면 그들을 추적하기 위해서는 귀주성 중부까지 북상해야 합니다. 또한 그곳에 갔다고 해서 그들을 발견할 수 있다는 보장도 없습니다. 아니, 설사 발견한다 해도 문제겠지요. 놈들의 수와 전력이 우리가 예상했던 것보다 훨씬 높다는 뜻일 테니까요.”
하지만 내 경고에도 만종임은 더 생각할 것도 없다는 듯이 대답했다.
“흥! 난 이미 놈들을 절대 살려 두지 않겠다고 하늘에 맹세했네! 설사 놈들의 전력이 예상보다 훨씬 더 많고 강하다고 하더라고 내가 포기할 것 같은가?!”
그의 대답에 옅게 웃으며 고개를 끄덕여 줬다.
“그렇군요. 알겠습니다.”
더 할 말은 없었다.
나 또한 그럴 생각이었으니까.
설사 그가 가지 않겠다고 해도 우리 조원들만이라도 설득해서 갈 생각이었다.
사실 나는 이번 파견을 소풍처럼 생각하고 나왔었다.
어차피 적들의 행방을 놓치고 추격이 좌절되리라고 생각했었으니까.
하지만 혈교의 세력이 이미 전선 위쪽까지 뻗어 있다는 것을 알게 되고, 그 실마리까지 잡은 지금 절대 이대로 돌아갈 수는 없었다.
나중을 위해서라도 반드시 그 실마리를 당겨 뿌리까지 뽑아내야만 했다.
그렇게 우리는 모두 함께 전운이 감돌고 있다는 귀주성 서북부의 인회로 가기로 했다.
다만 그 진행은 그리 순탄하지 않았다.
만종임이 찡그린 얼굴로 내게 말했다.
“전선의 근무자로서 우리가 알게 된 사실과 우리의 움직임을 맹에 보고하는 것은 당연한 의무일세. 대체 왜 보고하지 말라는 건가?”
이번만큼은 그의 말이 분명 타당했다.
하지만 나는 그 타당한 행동을 어떻게든 막고 싶었다.
“다시 말씀드리지만 그저 사실만 전달하고 이대로 돌아가실 거라면 그냥 보고해도 상관없다고 생각합니다. 하지만 우리가 귀주성의 북부로 이동하겠다는 보고를 하면 맹에선 분명히 우리를 막으려고 할 것입니다.”
그랬다. 지난 삶에서 파견자들이 되돌아왔던 것도 맹에서 북상을 허락하지 않았기 때문이라고 하니 이번에도 당연히 그럴 것이었다.
하지만 지난 삶의 기억이 없는 만종임은 어이없다는 듯 물었다.
“그게 무슨 말도 안 되는 소린가? 대체 맹에서 왜 우리를 막으려고 한단 말인가?!”
그냥 막으려 하는 것이 아니라 심하면 죽여서 막으려고 할지도 모른다는 말까지 하고 싶었지만, 지난 삶의 기억은커녕 음영대에 대해서도 전혀 알지 못하는 그에겐 씨알도 먹힐 리가 없었다.
결국 설득할 방법이 없다는 생각에 나는 한숨을 내쉬며 말했다.
“정 그렇게 생각하신다면 보고하시지요. 하지만 이번에 만약 제 말대로 된다면 다음번엔 꼭 제 말을 들어주시기 바랍니다.”
그러자 그는 못마땅한 눈빛으로 나를 쏘아보고는 대주 전용 전서구를 날려 무림맹에 우리의 상황과 결정을 보고했다.
안타까웠지만 어쩔 수 없었다.
그 후, 무림맹의 무사들이 우리의 앞을 막아선 것은 그날 오후 우리가 운남성을 벗어나 귀주성으로 막 들어가고 있을 때였다.
“멈추시오!”
우리 앞에 나타난 자들은 커다란 죽립을 눌러쓴 열한 명의 흑의인들이었다.
이미 그들과 같은 복장을 본 적이 있던 우리 조원들은 바로 그들을 알아볼 수 있었다.
음영대였다.
그들이 물었다.
“비룡 십이대주이신 만종임 대협되십니까?”
그러자 바로 도를 뽑아 들 태세를 갖추고 그들을 경계하던 만종임은 이채를 띤 눈빛으로 물었다.
“나를 아는군. 누구신가?”
그들 중 우두머리로 보이는 흑의죽립인이 앞으로 나와 포권하며 말했다.
“뵙게 되어 영광입니다. 맹에서 왔습니다.”
“맹이라고? 맹의 무사들이란 말인가?”
만종임은 그제야 경계를 풀며 반가운 눈빛을 보였다.
하지만 죽립인은 그의 반가워하는 기색에도 다른 말 없이 바로 본론으로 들어갔다.
“만 대협께서 보내신 보고서는 잘 받았습니다. 말씀하신 거력마를 추적하는 일은 저희 맹의 무사들이 이어받도록 하겠습니다. 만 대협과 비룡대원들은 이만 돌아가셔도 됩니다.”
그 말을 들은 만종임은 깜짝 놀라고 말았다.
“뭐라고? 그게 무슨 말인가? 우리보고 돌아가라니?”
역시 예상했던 대로였다.
하지만 전혀 예상하지 못했던 만종임은 이 사태에 매우 당황한 모습이었다.
흑의죽립인이 차가운 말투로 대답했다.
“운남성 밖의 일은 저희 맹의 무사들이 맡겠습니다. 비룡대 여러분들은 전선을 유지하는 것에만 신경을 써 주시기 바랍니다.”
어휘는 그나마 공손한 편이었지만 그 태도는 전혀 공손하지 않았다.
오히려 강압적이라고 느껴질 만큼이나 매우 딱딱한 태도였다.
만종임은 내 얼굴을 힐끗 보더니만 조금 화가 난 표정으로 그들에게 말했다.
“이미 보고받았겠지만 놈들은 내 대원들을 무려 이십 명 가까이 죽였네. 내 그놈들을 갈가리 찢어 버리기 전에는 절대 돌아가지 않겠다고 하늘에 맹세했단 말일세!”
하지만 그들의 태도는 전혀 변하지 않았다.
“비룡대원들은 전선을 지키고 전선 이외의 일은 저희가 처리하는 것이 맹의 방침입니다. 맹에 소속되신 이상 규칙을 따라 주시기 바랍니다.”
“아니, 이게 무슨!”
만종임은 그들의 철벽같은 태도에 말문이 막힌 모양이었다.
나는 일단 청연 소저 쪽을 슬쩍 돌아봤다.
그러자 그녀가 이미 배종관의 큰 체구 뒤에 숨은 듯 서 있는 것을 볼 수 있었다.
음영대의 눈에 띄지 않으려는 모양이었다.
그녀의 위치를 확인한 나는 이제 마음 놓고 앞으로 나섰다.
“그것참 이상하구려. 마치 비룡대원들을 전선에 가둬 두겠다는 말처럼 들리는데 말이오? 그렇지 않습니까, 대주님?”
내 말에 살짝 당황한 듯 잠시 바라보던 죽립인이 다시 입을 열었다.
“그렇지 않소. 어디까지나 이건 맹의 규칙….”
“그러니까 우리가 왜 맹의 규칙을 따라야 한단 말이오? 우리는 순수하게 혈교를 막고자 하는 의지로 자발적으로 전선에 모인, 이를테면 의병과 같은 존재이지 맹에 소속된 무사대가 아닌데 말이오.”
“…억지 부리지 마시오. 그대들이 비룡대에 들어올 때 분명히 서약서를 작성하지 않았소?”
“서약서, 물론 썼지요. 비밀 유지 서약서를 말이오. 근데 그게 혹시 맹에 가입한다는 문서였소? 그런 내용은 없었던 것 같은데? 또한 전선 이외의 곳으로 이동이 제한된다는 내용도 없었고 말이오.”
이번엔 내 말에 죽립인의 말문이 막힌 모양이었다.
죽립 아래로 보이는 눈이 나를 노려보고 있었다.
그리고 그 눈빛에 점점 살기가 깃드는 것 또한 느낄 수 있었다.
그가 잠시 후 다시 말했다.
“다시 말씀드리지만 이건 맹의 규칙이오. 규칙을 따라 주시지 않겠다면 우리도 더 이상 어쩔 수 없소.”
어쩔 수 없다라.
그 말에서 어쩐지 피 냄새가 느껴지는 것 같았다.
강력한 기세였지만 피식 웃고는 나 또한 사납게 말했다.
“우리는 지금 동료의 복수를 하러 가는 중이오. 무림의 율법 중 복수보다 중요한 규칙이 있던가? 우리의 복수행을 막고 싶으면 왜 그래야 하는지를 우리에게 먼저 납득시키시오. 그 정체를 알 수 없는 규칙이라는 말만 앵무새처럼 반복하지 말고 말이오. 애초에 전선의 근무자들도 모르는 규칙이 언제, 왜 생겼단 말이오?!”
그렇게 말한 나는 슬쩍 만종임에게 물었다.
“안 그렇습니까, 대주님?”
“으, 응? 물론이네. 당연히 그렇지!”
상대방의 주의를 만종임에게로 살짝 돌린 나는 빙긋이 웃으며 마지막 결정타를 날려 줬다.
“물론 상부의 명령을 따라야 하는 귀하의 입장도 이해가 안 가는 건 아니오. 하지만 상부의 명령이라고 해서 옳고 그른지에 대한 판단도 없이 덮어놓고 따른다면…. 그게 어디 무림인이라고 할 수 있겠소? 아니, 무림인이 뭐요? 사람도 아닌 개돼지에 불과하겠지. 귀하께서는 그렇게 생각지 않으시오?”
그렇게 눈앞의 개돼지를 도발해 주자, 이제 죽일 듯 나를 노려보던 그는 결국 마지막 말만을 남기고 자리를 떠났다.
“후회하게 될 것이오.”
조금 실망이었다.
이 자리에서 바로 격분해 공격해 오길 기대했는데 말이다.
하지만 지금 이 자리가 아니라도 그리 멀지 않은 시점이 될 거라는 건 예상할 수 있었다.
나는 그들의 뒷모습을 바라보며 누가 후회할지는 아직 알 수 없는 일일 거라고, 빙긋이 웃으며 생각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