54화 파견-4
선우진의 만류에 적들을 추격하지 못한 만종임은 인상을 찌푸리며 그에게 물었다.
“왜 추격하지 말라는 것이냐?!”
일전에 선우진은 맹에서 온 자들이 자신들을 못 가게 막을 것이라고 예상하며, 그 예상이 맞을 경우 자신의 말을 따라 줄 것을 만종임에게 요구한 적이 있었다.
게다가 선우진은 이번 습격 또한 예상하고 만종임에게 경고했었다.
그런 선우진의 말이다 보니 만종임은 이제 차마 그의 말을 무시할 수가 없는 상태였다.
하지만 불만이 생기는 것만큼은 어쩔 수가 없었다.
순식간에 도주해 버린 습격자들 쪽을 바라보며 만종임이 불만스럽게 소리쳤다.
“지금 저놈들을 보내 주면 다음엔 더 많은 자들이 되어 돌아올 것이란 말이다! 그것도 모르느냐?!”
사납게 외치는 만종임의 말에 선우진은 그저 씨익 웃으며 순순히 고개를 끄덕였다.
“네, 그렇겠지요. 대주님의 말씀이 맞습니다.”
그러자 너무 쉬운 수긍에 오히려 당황한 만종임이 되물었다.
“뭐, 뭐라고? 근데 왜 저들을…?”
“바로 따라가면 저들도 멀리 도망갈 것 아닙니까? 이제 저들은 우리가 쫓지 않는다고 생각할 테니 금방 멈추겠지요.”
“…뭐라고?”
만종임의 표정이 일그러졌다.
이게 대체 무슨 말인지 이해할 수가 없었다.
이미 저들의 뒤를 놓쳤는데 안 보이는 곳에서 금방 멈추든 말든 무슨 소용이 있단 말인가.
하지만 선우진은 그 의문을 풀어 줄 생각이 없는지 여전히 웃는 얼굴로 주위 사람들을 둘러보며 말했다.
“자, 이제 슬슬 움직여 보시죠. 다 같이 갈 필요는 없고 절정에 도달한 분들만 움직이시면 될 것 같습니다.”
선우진의 말에 의문을 느끼면서도 현재 일행 중 절정에 도달한 무인들인 십이대주 만종임과 십이대 일 조 조장 도무곤, 십일대 일 조 조장 제원영은 설풍, 해청연과 함께 선우진의 뒤를 따라 움직이기 시작했다.
짧은 시간 동안 보여 준 선우진의 선견지명만으로도 어쩐지 또 뭔가 있을 것 같았기 때문이었다.
***
휴자승은 적들의 추격이 없다는 것을 진작에 깨달았다. 하지만 혹시 모르는 일이었기에 거기서 한참을 더 달리고 또 방향을 바꿔 적들이 추적할 수 없다고 확신이 든 후에야 발걸음을 멈췄다.
발을 멈춘 그의 뒤로 일곱 명의 음영대원들이 차례대로 착지하고 있었다.
그들을 보며 휴자승은 허탈하게 중얼거렸다.
“고작 일곱 명…. 그 잠깐 사이에 스물두 명에서 일곱 명이 됐다고?”
참담했다.
경험해 보기는커녕 상상도 해보지 못한 결과였다.
다른 대원들 또한 마찬가지였다.
믿을 수 없는 처참한 결과에 모든 음영대원들이 고개를 들지 못한 채 분루를 삼키고 있었다.
휴자승은 잠시 말없이 잔존 무인들을 바라보았다.
이제 자신들의 힘만으로 놈들을 처리하는 것은 확실히 무리일 터였다. 하지만….
“휘이이익!”
휴자승은 이글이글 타오르는 눈빛으로 하늘을 향해 휘파람을 불었다.
그러자 잠시 후 하늘에서부터 자신의 전용 전서구가 날아들었다.
푸드득!
휴자승은 이를 갈며 생각했다.
‘우리 힘만으로 복수할 수 없다면 맹의 힘을 빌려 주마. 지금 우리는 여덟 명이 남았지만 너희는 아무도 살아남지 못할 것이다!’
그는 확신할 수 있었다.
저들의 삶은 앞으로 한 달도 채 되지 않을 것이라고.
설사 음영대 두 개 조를 패배시킨 전력이라 해도 무림맹의 척살 대상이 되고서 살아남을 수는 없을 테니까 말이다.
휴자승은 그들의 행동과 위험성을 과장해 정식 무력대의 파견을 요청할 생각이었다.
음영대 두 개 조가 치명적인 피해를 입었으니 딱히 틀린 얘기도 아니었다.
전서를 쓴 휴자승은 그것을 전서구의 다리에 달고 날려 보냈다.
푸드득!
하늘로 솟구치는 비둘기의 뒷모습을 보며 휴자승은 잔인한 웃음을 흘렸다.
‘이제 끝이다!’
그때였다.
맨 뒤에 서 있던 음영대원 한 명이 갑자기 바람처럼 뛰쳐나와 전서구를 낚아챘다.
화악!
“삐익!”
하늘로 날아가는 전서구를 낚아채다니, 엄청난 신법이 아닐 수 없었다.
하지만 그 신법보다도 갑작스러운 돌발 행동에 깜짝 놀란 휴자승이 소리쳤다.
“무슨 짓이냐?!”
휴자승 자신이 누군지 모르는 걸 보면 아마 구 조의 살아남은 조원일 것 같았다.
그런데 구 조의 조원이 왜 전서구를 날리는 걸 막는단 말인가.
게다가 자신이 반응도 못 할 속도로, 날아가기 시작한 전서구를 낚아챌 수 있을 정도의 신법이라니.
저 정도면 죽은 구 조 조장 양원당과 비교해도 떨어지지 않을 실력인 것 같았다.
휴자승은 분노한 눈빛으로 손에 잡힌 전서구를 바라보고 있는 음영대원에게 소리쳤다.
“무슨 짓이냐고 묻지 않느냐?! 네놈은 구 조 몇 호냐?!”
그 말을 들은 음영대원이 피식 웃음 지었다.
죽립 밑으로 보이는 그 비웃는 듯한 입꼬리에 휴자승의 얼굴이 더욱 일그러졌다.
그때 그의 뒤에 서 있던 구 조원 한 명이 창백해진 얼굴로 말했다.
“저, 저자는 구 조가 아닙니다, 팔 조장 님.”
“…뭐?”
“구 조원 중엔 저런 자가 없습니다. 저는 팔 조원인 줄 알았는데….”
“뭐라고?!”
그게 무슨 소리냐고 소리치려던 휴자승의 머릿속에 문득 아까 매복을 망쳐 버렸던 음영대원의 모습이 떠올랐다.
혼자서만 먼저 뛰쳐나가 매복을 엉망으로 만들어 버렸던….
휴자승의 눈이 크게 확대됐다.
만약 그게 전달이 잘못돼서 벌어졌던 실수가 아니었다면?
누군가 일부러 매복을 망치고 자신들을 드러나게 한 거라면?
이제 경악한 표정이 된 휴자승이 외쳤다.
“네, 네놈은 대체 누구냐?!”
그러자 죽립으로 얼굴을 가린 삭무흔이 빙그레 웃으며 대답했다.
“지금 내 정체를 궁금해할 때가 아닐 텐데.”
“뭐라고?!”
삭무흔이 휴자승의 뒤쪽을 손가락으로 가리키며 말했다.
“너희 뒤를 봐라.”
하지만 휴자승은 이를 갈며 소리쳤다.
“어딜 그따위 개수작을…?!”
그 순간이었다.
설풍을 필두로 한 비룡대의 절정 고수들이 후방에서부터 파도처럼 그들을 덮쳤다.
푸화악!
“크아아악!”
설풍, 만종임, 제원영, 선우진, 해청연, 도무곤.
현재 파견대에 속한 절정 고수 전원이었다.
그것도 전선에서의 수많은 실전을 통해 단련된 백전의 고수들.
그들이 그야말로 해일과 같은 기세로 음영대원들을 참살하고 있었다.
슈하아악!
“으아아악!”
쉬이익!
“흐어억!”
음영대원들은 반항조차 제대로 하지 못한 채 죽어 갔다.
그들에겐 이미 여섯 명의 절정 고수와 맞서 싸울 수 있는 힘이 남아 있지 않았던 것이다.
아니, 정확히는 반항할 수 있는 힘조차 없었다.
완전히 당했다는 무력감과, 같은 음영대원이 자신들을 함정에 빠트렸다는 혼란감에 정신적으로 이미 무너져 버렸기 때문이었다.
푸화악!
“크아아악!”
“아아악!”
두 명의 음영대원을 피의 폭풍으로 화하게 만든 설풍이 맹호처럼 휴자승에게 덮쳐 오고 있었다.
하지만 그것을 막을 생각조차 하지 못한 휴자승은 문득 멍하니 자신의 뒤를 돌아봤다.
그러자 자신들을 속였던 아까의 음영대원은 어느새 사라져 버린 후였다.
그리고 그것이 휴자승이 볼 수 있었던 마지막 광경이었다.
푸우욱!
“….”
***
“자네 말대로라면 우리 보고 체계에 혈교의 주구들이 끼어들었다는 말인가?”
“저도 확신할 수야 있겠습니까만, 만약 그렇지 않다면 저들이 어떻게 맹의 무사들이라며 대주님의 보고서를 확인하고 습격할 수 있었겠습니까? 정파의 기둥인 맹에서 우리를 죽이고 싶어 할 리는 없지 않습니까?”
“으음, 그건 그렇지.”
나는 지금 십이대주 만종임에게 사기를 치는 중이었다.
이 꽉 막힌 작자에게 제갈지강과 음영대에 관한 얘기를 들려줘 봐야 쉽게 받아들일 것 같지도 않고, 또 알아봐야 위험만 가중될 것 같았기에 그가 듣고 싶은 말만 골라서 해 줬던 것이다.
“아마 거력마처럼 전선 위로 올라간 혈교의 무리들이 침투해 전선에서의 보고를 가로채고 있는 것이 아닌가 싶습니다. 제가 대주께 일단 보고를 올리지 말아 달라고 부탁드린 것도 그런 의심이 있었기 때문입니다.”
“과연! 확실히 그런 자들이 아니라면 내 보고를 볼 수도 없었을 것이고 또한 우리를 습격하지도 않았겠지. 혈교의 무리들이 맹과 전선 사이의 보고 체계에 끼어들다니, 그야말로 통탄할 만한 일이로군.”
“네, 저도 그렇게 생각합니다.”
그러자 한참을 혈교도를 욕하던 만종임이 다시 내게 물었다.
“그럼 자네 생각엔 이제 어떻게 하는 것이 좋겠나?”
그러자 모든 이들의 눈이 내게로 집중됐다. 초롱초롱한 눈빛들이 그렇게 부담스러울 수가 없었다.
이번 음영대의 습격이 있고 난 후로 사람들은 어째 나를 이번 파견대의 군사처럼 생각하게 된 모양이었다.
무척이나 민망했다.
사실 딱히 내가 뛰어나서라기보단 지난 삶의 기억과 음영대에 관한 정보, 삭무흔의 도움이 있었기 때문이었는데 말이다.
솔직히 순수한 지혜로만 따지면 청연 소저가 나보단 훨씬 더 뛰어나지 않을까?
하지만 청연 소저는 내가 그녀를 쳐다보자 웃으며 고개를 저을 뿐이었다.
아마 자신은 나서기 싫으니 나보고 하라는 의미인 것 같았다.
그냥 쳐다봤을 뿐인데 내가 무슨 생각을 한 건지는 또 어떻게 알았는지, 정말이지 대단한 소저였다.
저런 소저가 사람들을 이끌어야 하는데 말이다.
아무튼 나도 굳이 뒤로 빼지는 않기로 했다.
이번 일에 관해서라면 어차피 내가 주도권을 갖는 것이 편했으니까.
그래서 본격적으로 자세를 가다듬고 이야기를 시작했다.
“일단 보고 체계의 문제는 그들 같은 가짜가 아닌 진짜 맹의 무사분께 보고를 올리도록 부탁드렸습니다. 아마도 곧 맹에서 조사가 들어가겠지요. 그러니 나머지는 맹에게 맡겨 두고 저희는 일단 거력마에만 집중하도록 하지요.”
진짜 맹의 무사란 삭무흔 형님을 뜻했다.
나는 형님께 부탁해 지난번 음영대 조장이 날리려던 전서구의 내용을 바꾼 후 다시 날리게 했었다.
파견대는 다시 전선으로 돌아갔고, 혈교의 무리들이 귀주성 쪽으로 침투한 것 같으니 조사를 부탁한다는 내용이었다.
그리고 비룡대에도 같은 내용으로 보고해 달라고 전언을 보냈다.
십일대 일 조장 제원영에게 부탁해 가장 무공이 떨어지는 조원을 돌려보내며 십일대와 우리 십삼대에 그런 내용을 전달해 달라고 했고, 십이대는 대주가 여기에 있으니 보고를 올리는 데 아무 문제도 없었다.
만종임은 이제 내 말을 아주 잘 따라 주었으니 말이다.
‘자, 이제 무림맹의 선택이 좀 궁금해지는군.’
거력마들이 귀주성으로 갔다는 얘기는 전달했지만 귀주성의 어디일 것이란 얘기는 하지 않은 상태였다.
그러니 제갈지강에게 그들을 잡을 의지가 있다면 아마 귀주성을 샅샅이 훑으려 할 것이었다.
그도 과연 나와 같은 결론에 도달하게 될지, 그래서 정협방, 운씨세가, 산검문 쪽으로 눈을 돌리게 될지 궁금했다.
‘만약 조사를 하지 않는다면 그건 진짜 심각한 일이겠지. 무림맹이 혈교의 북침을 좌시하거나 어쩌면 협조했다는 얘기일 테니까.’
하지만 그건 나중의 일.
일단 우리의 행동 방향에 대해 일행들에게 설명하기 시작했다.
“전에도 얘기했던 것처럼 현재 대립하고 있는 정협방, 운씨세가, 산검문 세 곳 중 한 곳에 거력마가 있을 것이라고 예상하고 있습니다. 그러니 저희가 제일 먼저 할 일은 그 셋 중 어디가 혈교의 전진 기지인지를 알아내는 것일 겁니다.”
그러자 만종임이 코웃음을 치며 말했다.
“흥! 그럼 답은 정해졌군. 정협방은 당연히 아닐 테니 운씨세가와 산검문 둘 중 하나일 것이 아닌가. 더군다나 산검문의 상황이 지금 매우 좋지 않다니 운씨세가일 확률이 높겠군.”
나는 그의 말에 희미하게 웃음 지었다.
그가 그렇게 말할 것이라고 이미 예상하고 있었기 때문이었다.
“그렇게 생각하십니까?”
그러자 만종임이 뭘 당연한 것을 묻느냐는 듯 자신 있게 말했다.
“당연한 것이 아닌가? 정협방은 정파일세. 혈교의 무리들이 전진 기지로 삼았다면 당연히 사파인 운씨세가나 산검문이겠지.”
“하지만 작금의 사태는 사천성의 정협방이 먼저 귀주성 쪽으로 세력을 뻗쳤고 그래서 귀주성의 운씨세가와 산검문이 연합하여 그들을 막고 있는 상황입니다. 심지어 전황도 정협방 쪽이 훨씬 우세하다고 하더군요. 그런 걸 보면 정협방일 수도 있지 않겠습니까?”
하지만 내 반론을 만종임은 격렬하게 부정했다.
“그럴 리가 없네! 정협방은 전선에도 무인들을 몇 명씩이나 보내 주고 있는 훌륭한 정파의 일원이란 말일세. 우리 십이대에도 정협방 출신의 무인이 한 명 있을 정도지. 그 또한 수많은 마인들을 척살한 훌륭한 무인이라네. 만약 그들이 혈교의 세력이라면 자신들의 본진을 막기 위해 무인들을 보냈다는 것인데 그게 말이나 되는 소리인가?!”
만약 그들이 진짜 혈교의 전진 기지라면 그들의 무인들이 전선에 있는 것이 더 위험할 수도 있다는 얘기는 굳이 하지 않았다.
또한 일반 방도들은 정파의 사람들인데 수뇌부의 성향이 다를 수도 있다는 얘기도.
그저 이렇게만 얘기했다.
“그러시군요. 그럼 이렇게 하는 것은 어떻겠습니까?”
“어떻게 말인가?”
“저희는 어차피 혈교의 무리들에게 발각당한 상태입니다. 그러니 이대로 다 함께 움직이는 것은 위험한 일이지요. 너무 저들의 눈에 띄어 지난번처럼 습격당할 수도 있으니까요. 그래서 말인데, 제 생각엔 저희도 눈에 띄지 않게 다시 세 무리로 나뉘어 각각 한 곳씩을 조사해 보는 것이 어떨까 싶습니다. 어떻게 생각하십니까?”
물론 다시 습격이 있을 거란 얘기는 사실이 아니었다.
우리를 알고 있는 음영대는 몰살당했고 보고도 막았으며, 심지어 무림맹 상부의 시선도 귀주성으로 침투한 거력마 쪽으로 돌려놨으니까.
하지만 앞으로도 눈에 띄지 않으려면 적은 수로 쪼개지는 것이 맞다는 것만큼은 사실이었다.
그리고 무엇보다도 나는 만종임 대주와 따로 움직이고 싶었다. 그의 뛰어난 무력은 조금 아깝지만 그것만 제외하면 모든 면에서 방해만 될 것 같았기 때문이었다.
무엇보다도 같이 있으면 속이 너무 답답했다.
이런 내 속내를 모르는 만종임 대주는 그 제안에 흔쾌히 고개를 끄덕였다.
“좋은 생각인 것 같군. 그럼 나와 십이대원들이 운씨세가를 조사해 보도록 하겠네.”
그의 말에 환하게 웃음을 지어 줬다.
성공이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