57화 독수 오 남매-3
산검문 문주 분광검객 허경은 저 맞은편에 보이는 수많은 무사들을 바라보며 이를 악물었다.
평원 너머로 정협방의 유명한 절정 고수인 철장대협 황장곤이 무려 오백여 명의 정협방 무사들을 이끌고 도열해 있었다.
문득 자신의 뒤를 바라봤다.
그러자 낭인들을 다 포함했음에도 이백여 명도 되지 않는 무사들이 그의 눈에 들어왔다.
그것도 대부분이 정협방에 비해 실력이 떨어지는 이류의 무사들뿐이었다.
가슴이 아팠다.
이게 다 지난 전투에서 정예들이 모두 몰살당한 데다, 갑작스러운 정협방의 진군에 미처 동맹을 맺은 운씨세가의 도움을 받지 못했기 때문이었다.
그때 철장대협 황장곤의 목소리가 들려왔다.
내공이 가득 실려 대기를 쩌렁쩌렁 울리는 우렁찬 목소리였다.
- 지난번 회담 때 뵐 줄 알았는데 이제야 뵙게 됐습니다, 허 문주!
저 말은 아마도 산검문 쪽에서 먼저 회담을 제의해 놓고 비겁하게 기습했던 것을 비꼬는 말일 것이었다.
대꾸할 말을 찾지 못한 허경이 다시 이를 악물었다.
하지만 황장곤의 말은 끝난 것이 아니었다.
- 아, 참. 그때 대신 보내 주셨던 부문주님 소식은 혹시 들으셨는지 모르겠습니다! 먼 길 가신다고 문주님께 대신 안부 전해 달라고 했었는데 말입니다! 하하하하하!
그 기습으로 잃었던 건 이백여 명의 정예 무사들만이 아니었다.
허경과 더불어 산검문의 단 둘뿐이었던 절정 고수 분소검객 허중이 정협방을 기습하다가 오히려 사망했었던 것이다.
심지어 그는 허경의 하나뿐인 동생이기도 했다.
황장곤의 유들유들한 말에 정협방 무사들이 여유 있게 웃음 지었다.
황장곤이 말을 할수록 정협방의 기세는 점점 더 올라갔고, 반대로 산검문의 기세는 점점 더 가라앉고 있었다.
그러자 허경은 분노를 참지 못한 채 몸까지 부들부들 떨며 소리쳤다.
- 이 뻔뻔한 놈들! 정파라는 허울을 뒤집어쓴 놈들이 뻔뻔하게도 남의 집에 먼저 쳐들어와 놓고는 떳떳한 척 지껄이고 있구나! 그런 날강도 짓을 하고도 떳떳하게 얼굴을 들고 다니다니, 스스로 정협방이라고 부르는 것이 부끄럽지도 않느냐?!
허경의 반박은 그리 나쁘지 않았다.
정협방이 정파라는 이름에 걸맞지 않게 먼저 침략한 것이 사실이었으니까 말이다.
하지만 황장곤은 껄껄 웃으며 자연스럽게 되받아쳤다.
- 하하하하! 부끄러울 것이 뭐가 있겠소?! 우리 정파인의 의무가 무엇이요?! 바로 ‘척마멸사’가 아니겠소?! 그러니 사파인 산검문을 공격하는 것이야말로 바로 우리의 의무를 다하는 것이 아니겠냔 말이오?! 하하하하!
참으로 매끄러운 혓바닥이 아닐 수 없었다.
황장곤의 기름을 바른 듯한 말에 허경은 또 할 말을 잃고 말았다.
가뜩이나 상황도 안 좋은데 말솜씨까지 밀리니 말로는 도저히 대적할 수가 없었던 것이다.
그저 또다시 이만 갈 뿐이었다.
“이이익!”
게다가 황장곤의 말도 계속됐다.
그가 웃음을 그치고는 또다시 말을 이었다.
- 또한 이 황모가 알기로 사파의 율법은 ‘약육강식’이라고 알고 있었소만, 산검문의 허 문주께서 약육강식이 아닌 정과 협을 논하시다니 무척 재미있구려! 혹시 정파인으로 다시 태어나기라도 하신 게요?! 하하하하!
황장곤의 말에 정협방 무인들은 또다시 웃음을 터트렸고, 허경 역시 이번에도 얼굴만 붉으락푸르락할 뿐 대꾸하지 못했다.
그 모습을 근처에서 은신한 채 지켜보고 있던 비사영이 중얼거렸다.
“이야, 세다. 무공은 어떨지 모르겠지만 입심에선 상대도 안 되겠는걸?”
그러자 역시 함께 은신 중이던 삭무흔이 대답했다.
“그래도 무공은 만만치 않을 걸세. 허경이나 황장곤이나 둘 다 내공 칠십 년이 넘는 고수로 알려져 있으니까.”
그 말에 옆에 있던 선우진이 고개를 절레절레 저으며 말했다.
“하지만 지금은 무공보다 입심이 더 중요한 상황인 것 같군요. 안 그래도 전력에서 산검문이 훨씬 열세인데 이젠 분위기마저 정협방 쪽으로 완전히 넘어갔어요. 병력의 양과 질은 물론 사기까지 압도당했으니 오늘 승부는 힘들겠는데요? 자칫 잘못하면 오늘 산검문이 사라질 수도 있겠어요. 그럼 곤란해지는데….”
정협방을 이끌고 있는 철장대협 황장곤 또한 선우진과 비슷한 생각을 하고 있었다.
지금 저들을 친다면 엄청난 대승을 거둘 수 있을 것 같았던 것이다.
그렇기에 황장곤은 무척 아쉬움을 느끼고 있었다.
오늘부로 산검문을 끝장낼 수도 있을 텐데.
방주의 지시 때문에 공격할 수 없다는 것이 안타까울 따름이었다.
얼마 전 정협방주는 지시했었다.
‘황 호법, 다른 지시가 내려올 때까지는 산검문을 압박만 하되 절대 지워서는 안 될 것이오.’
거기에 어떤 의미가 있는지는 알 수 없었지만, 일단 명령이 내려온 이상 황장곤으로서도 어쩔 수가 없었다.
황장곤은 아쉬운 눈빛으로 흔들리고 있는 산검문의 무인들을 다시 한번 훑어봤다.
그들은 이쪽을 노려보며 전의를 높이기보단 끊임없이 웅성거리고 있을 뿐이었고, 복장이 통일되지 않은 낭인으로 보이는 자들은 지금 당장이라도 도주할 것만 같아 보였다.
하지만 황장곤은 곧 아쉬운 마음을 털어 내고는 빙긋이 웃음 지었다.
‘오늘 산검문을 지우지 못하는 건 아쉽지만, 꼭 싸우지 않더라도 산검문을 망하게 하는 것 정도는 충분히 가능할 것 같군.’
노회한 그는 사파의 생리를 잘 알고 있었다.
의리가 아닌 이익을 따라 움직이는 사파의 특성상, 승산이 전혀 없다고 생각되면 저들은 자기 살길부터 도모하게 될 것이라는 걸 말이다.
그렇기에 황장곤은 오늘의 목표를 압도적인 전력 차를 보여 산검문의 전의를 완전히 꺾어 버리는 것으로 한정 짓기로 했다.
이제 약간만 더 눌러 준다면 겁에 질린 산검문 문도들은 굳이 건드리지 않아도 스스로 무너지고 말 것이었다.
그러니 다음에 봤을 땐 굳이 싸우지 않아도 이것보다 훨씬 병력이 줄어 있지 않겠는가?
아마 반 토막은 나 있을 것이었다.
그런 생각을 하며 황장곤은 슬슬 오늘 준비한 것들을 시행해 보기로 했다.
그가 산검문을 향해 소리쳤다.
- 허나! 아무리 우리의 의무가 척마멸사라 해도 이렇게 허술한 상태로 귀하들을 상대하는 것이 예의가 아님은 잘 알고 있소! 오늘은 간단히 인사만 드리러 온 것이니 다음에 제대로 된 전력을 갖춰서 다시 만나 뵙도록 하겠소이다!
그 말을 들은 비사영이 인상을 찌푸리고 중얼거렸다.
“응? 무슨 의도지? 지금 싸우면 어렵지 않게 이길 수 있을 것 같은데, 그냥 물러나겠다고?”
그 의문에 선우진이 대답했다.
“일단 겁을 줄 생각인 것 같은데? 오늘 보여 준 전력은 아주 일부에 불과하고, 다음에는 훨씬 더 큰 전력으로 쳐들어오겠다는 뜻이잖아? 하지만 역시 의문이긴 하군. 지금 겁을 주는 것보단 직접 치는 게 훨씬 효과적일 것 같은데….”
황장곤이 의도한 대로 산검문 무사들은 안도의 한숨을 내쉬면서도 불안한 듯 웅성거리기 시작했다.
얼핏 봐도 아무런 전의도 느껴지지 않는 모습이었다.
그 모습들을 예리한 눈빛으로 훑어보며 황장곤이 다시 말을 이었다.
- 다만! 이렇게 만났는데 그냥 헤어지는 것도 아쉬운 일이 아니겠소?! 우리 간단히라도 손속을 한번 나누어 보는 것이 어떻겠소?!
그러자 오늘은 싸우지 않는다는 말에 잠시 안심했던 허경이 다급해졌다.
주변을 둘러보니 간단히 손속을 나누자는 말에도 산검문 무사들이 술렁거리고 있었다.
이미 공포가 극에 달해 있었던 것이다.
지켜보던 비사영이 한심하단 표정으로 중얼거렸다.
“어이구. 저 자식들, 황장곤이 만약 ‘공격!’이라고 소리치기라도 하면 그대로 몽땅 다 달아나 버릴 것 같구먼. 완전히 오합지졸 아냐?”
“아아, 아마 황장곤이 의도한 게 그거인 모양인데? 만약 그렇게 해서 손 하나 까닥 안 하고 산검문을 패퇴시킨다면 정말 대단하긴 하겠군.”
그러자 비슷한 것을 느낀 듯 허경이 황급히 소리쳐 반문했다.
- 뭘 어떻게 하자는 얘기냐?!
황장곤이 대답했다.
- 고래로부터 선조들께선 일대일 대결을 통해 서로 간에 힘을 견주고 아군의 사기를 끌어 올리시곤 했소! 그러니 우리도 그를 본받아 일대일 대결로 서로 간에 힘을 견주어 보는 것이 어떻겠소?!
일대일 대결이라고?
그 말을 들은 허경의 얼굴이 일그러졌다.
저들에게 황장곤을 제외하고도 정체를 알 수 없는 두 명의 절정 고수가 더 있다는 정보는 그도 익히 들어 알고 있었다.
그에 비해 산검문의 절정 고수는 이제 자신뿐.
간단히 힘을 겨루자고 하면서 이제 자신마저 일대일로 해치우겠다는 속셈이 틀림없었다.
하지만 그럼에도 허경은 황장곤의 제안을 승낙했다.
- 좋다! 황장곤! 너의 제안을 수락하겠다! 대신 조건이 있다! 한 번 이긴 사람이 계속해서 싸울 수 있도록 하자! 괜찮겠지?! 우리 쪽에선 내가 나가겠다! 자신이 있다면 당장 나와라, 황장곤!
허경의 말을 들은 비사영이 인상을 찌푸리며 중얼거렸다.
“무모한 거 아닌가? 정협방 쪽에는 알려지지 않은 절정 고수가 두 명이나 더 있다고 했었잖아?”
그 말에 삭무흔이 고개를 저었다.
“아니, 오히려 기회일 수도 있다고 생각한 모양이네. 어차피 총력전을 벌이면 필패할 상황이 아닌가? 하지만 일대일 대결이라면 이야기가 다르지. 더더군다나 한 번 이긴 사람이 계속해서 싸울 수 있다면 허경이 황장곤과 다른 두 명의 절정 고수를 차례로 이기는 것도 가능하지 않겠나?”
선우진 또한 동의했다.
“맞습니다. 지면 어차피 모든 것이 끝날 터, 이건 허경에게 도저히 놓칠 수 없는 기회겠지요. 모든 것을 반전시킬 수 있는 기회 말입니다. 황장곤은 무척 머리가 좋은 자로 보였는데, 왜 저런 기회를 주는 건지 알 수가 없군요.”
하지만 선우진의 의문에 대답해 주듯 황장곤은 다시 웃음을 터트리며 소리쳤다.
- 하하하하! 허 문주께서 마음이 급하시구려! 하지만 수뇌들이 나가서야 어디 간단히 힘을 견주어 본다고 말할 수 있겠소?! 이렇게 하는 것이 어떻겠소?! 허 문주와 나는 물론이고 절정 고수들은 대결에 나가지 않는 것으로 말이오! 가능하면 젊은이들에게 명성을 높일 수 있는 기회를 줘야 선배들의 도리가 아니겠소?!”
그의 말에 허경의 표정이 묘해졌다.
상황을 완전히 역전시킬 기회가 아니라는 점에선 좀 아쉽지만, 절정 고수들이 나오지 않는다면야 확실히 자신들이 불리하다고만 볼 수는 없었던 것이다.
오히려 이 기회에 바닥을 치고 있는 사기를 높일 수도 있을 것 같았다.
허경은 결국 흔쾌히 승낙했다.
- 좋다! 그렇게 하자!
그렇게 대결이 성사되자 선우진이 눈을 빛내며 말했다.
“이건 저희에게도 기회일 수 있겠군요.”
“응? 무슨 기회?”
“사람들의 시선이 일대일 대결에 쏠린 사이 정협방 쪽으로 침투할 수 있는 기회 말입니다.”
그 말에 삭무흔의 눈빛 또한 예리해졌다.
“그 정체를 알 수 없다는 절정 고수들을 확인해 보려는 건가?”
“예, 놈들이 혈교의 마두들인지 아닌지를 확인해 보죠. 그리고 만약 혈교의 마두들이라면….”
선우진의 말에 삭무흔과 비사영이 고개를 끄덕였다.
세 사람은 산검문의 낭인들 쪽에 섞여 있는 다른 일행들에게 계획을 전달한 후, 은신한 채 옆쪽을 빙 돌아 정협방 쪽으로 움직이기 시작했다.
같은 시각, 산검문주 허경은 대전자로서 바로 호위대의 부대주인 이공산을 지명했다.
아직 삼십 대 초반인 이공산은 젊은 나이에도 벌써 일류 중급의 무위를 가진, 이전부터 허경이 주목하고 있던 유망주였다.
“이 부대주, 이 대결이 그냥 대결이 아님을 알고 있을 거라 믿네. 반드시 이겨야만 하네!”
“예! 문주님! 맡겨 주십시오!”
허경에게 절도 있게 포권한 이공산은 바로 전장을 향해 경공을 전개하려 했다.
하지만 바로 뛰어나가려던 그는 정협방 쪽에서 나오는 사람을 보고는 그대로 굳어 버리고 말았다.
이공산이 난감한 표정으로 다시 허경을 보며 말했다.
“무, 문주님, 그런데 상대로 나온 자가….”
“응? 상대가 어쨌다는…? 뭐야? 여인이라고?!”
그랬다.
정협방에서 나오고 있는 대전자는 여인이었던 것이다.
그것도 젊고 아름다운 여인.
허경이 분노해 소리쳤다.
- 신성한 대결에 아녀자를 내보내다니! 이게 무슨 짓이냐, 황장곤?!
그러자 바로 대답이 돌아왔다.
- 하하하! 너무 흥분하지 마시오, 허 문주! 원래 식사에도 식전 요깃거리라는 것이 있지 않소?! 처음부터 우락부락한 남자들의 싸움이나 보는 것이 뭐 재미있겠소?! 우리 정협방에는 재능 있는 젊은 여협들도 꽤 많기에 분위기도 돋울 겸 먼저 기회를 줘 봤소! 혹 산검문에 여무사가 없다 해도 너무 걱정하지 마시오! 여인 같은 남자 무사를 내보내면 되는 거 아니겠소?! 하하하하!
황장곤의 대답에 허경은 또다시 이를 갈았다.
그러면 그렇지, 놈이 자신들에게 좋을 일을 해 줄 리가 없었던 것이다.
이런 양쪽의 사기가 달린 대결에서 상대가 여인이라는 것은 그리 쉽지 않은 문제였다.
일단 산검문에는 여무사가 별로 없었다.
그리고 있다고 해도 내세울 만한 실력자가 아니었다.
그렇다고 남자 무사를 내보낼 수도 없었다.
만약 남무사가 나가 이긴다 해도 본전일 텐데, 혹시라도 만약 지게 된다면 그 수치는 이루 말할 수가 없을 테니까 말이다.
게다가 저 너구리 같은 황장곤이 아무 여인이나 내보냈을 리가 없었다.
어떤 남자가 나오든 그들을 이길 수 있을 만한 실력자를 내보냈을 것이 틀림없었다.
허경의 고민이 깊어지고 있었다.
그때였다.
문득 작은 체구의 귀엽게 생긴 한 여인이 낭인들 사이에서 솟구쳐 허경의 앞에 착지했다.
타닥!
갑작스러운 그녀의 접근에 허경의 호위대가 검을 뽑아 그녀를 경계했다.
“누구냐?!”
하지만 그녀는 그런 호위대의 위협은 보이지도 않는지 생긋 웃으며 허경에게 포권했다.
“처음 뵙겠습니다, 문주님! 저는 독수 오 남매의 막내인 천주은이라고 합니다!”
그녀의 생기 넘치는 귀여운 목소리에 허경은 인상을 찌푸리며 그 이름을 되뇌었다.
“응? 독수 오 남매? 천주은이라고?”
그러자 외총관 허전삼이 급히 다가와 말했다.
“왜 제가 전에 말씀드렸지 않습니까? 그 절강성에서 힘들게 모셔 왔다는….”
그 얘기를 듣고서야 허경은 기억을 떠올릴 수 있었다. 허전삼이 갑자기 찾아와 믿을 만한 낭인들을 데려왔다며 호들갑을 떨던 모습이 기억났던 것이다.
그땐 고작 이름도 못 들어 본 낭인들을 데려와 뭘 그렇게 호들갑이냐고 속으로 생각했었는데….
허경은 문득 그녀가 지금 자신을 찾아온 이유를 대강 알 것 같아 눈을 빛내며 입을 열었다.
“그래, 만나게 되어 반갑구려, 천 소저. 근데 지금 이 순간 나를 찾아온 이유가 있을 것 같은데 말이오?”
그러자 천주은이 특유의 귀여운 미소를 지으며 대답했다.
“기회를 주신다면 제가 산검문을 대표해 정협방의 위선자들에게 가르침을 내려 주고 싶습니다!”
예상했던 그대로의 용건이었다.
바라 마지않았던 천주은의 말에 허경은 흐뭇하게 웃음 지었다.
누가 됐든 여인이 나서 준다면 거절할 이유가 없었다.
설사 진다고 하더라도 여인끼리의 대결이라면 그리 큰 의미를 두지 않아도 될 것이라고 생각했기 때문이었다.
만약 상대방의 여인이 감당 못 할 여고수라고 밝혀진다 해도 그땐 이제부터 제대로 싸우자며 남자들끼리의 대결로 유도할 수도 있을 것이 아닌가.
허경이 호탕하게 대답했다.
“좋소! 천 소저! 만약 천 소저께서 이 허모와 산검문의 체면을 세워 준다면 후히 사례하도록 하겠소!”
기다렸던 말을 들은 천주은은 생긋 웃으며 포권하고는 바로 몸을 솟구쳤다.
화악!
그녀는 순식간에 공중으로 솟구쳐 한 번에 무려 사 장의 거리를 이동했다.
그러자 그 통통 튀는 듯한 날렵한 몸놀림에 산검문의 무사들이 탄성을 내질렀다.
“오오오!”
하지만 그것 한 번으로 끝이 아니었다.
사 장을 이동해 땅으로 내려설 것 같았던 그녀는 마치 고무공이 튕기듯 땅을 통! 튕기며 다시 공중으로 솟구쳤고, 그렇게 다섯 번을 반복하자 순식간에 기다리고 있던 정협방 여인의 앞에 착지할 수 있었다.
산검문 무사들이 환호성을 터트렸다.
“우와아아아아!”
“대단한 경공이다!”
“무슨 고양이 같잖아?! 저렇게 날렵한데… 어떻게 저렇게 귀여울 수가 있지?!”
“정말 인형같이 생긴 소저로군! 소저, 예쁘오!”
자신에게 환호를 보내는 무사들을 바라보며 다시 한번 생긋 웃은 천주은은, 정협방에서 나와 자신을 기다리고 있던 여인에게 포권하며 인사했다.
“독수 오 남매의 막내 천주은이라고 합니다.”
은신한 채 정협방 쪽으로 이동하고 있던 세 사람은 대전자로 나선 천주은을 보고는 잠시 당황해 이동을 멈춰야 했다.
삭무흔이 전음으로 선우진에게 물었다.
- 저 소저, 괜찮겠나? 청연 사매나 나 소저에 비해 실력이 모자란 것으로 알고 있었는데?
선우진이나 비사영 또한 걱정이 되기는 마찬가지였다.
천주은은 등을 맡길 수 있는 동료라기보다는 칠 조의 귀여운 막냇동생 같은 느낌이 컸던 것이다.
그것은 물론 귀여운 외모 때문인 점도 있겠지만, 실력적으로도 아직 많이 모자란 것 역시 사실이었다.
하지만 선우진은 곧 걱정을 털어 내기로 했다.
- 아마 청연 소저의 허락을 받고 나온 거겠죠. 청연 소저가 괜찮다고 판단했다면 괜찮을 겁니다.
선우진은 천주은의 실력을 완전히 믿을 수는 없었지만, 해청연의 판단은 완전히 믿을 수 있었다.
선우진에게 있어서 해청연은 누구보다도 믿을 수 있는 현명한 사람이었으니까 말이다.
선우진 일행이 다시 이동을 시작하는 사이, 천주은의 맞은편에 선 상대방 또한 날카로운 눈빛으로 천주은을 노려보며 포권하며 인사했다.
“정협방 지검삼녀의 막내 지상임이에요.”
산검문주 허경이 아까 했던 생각은 정확했었다.
사천성 검의 명문 중 하나인 지검산장 출신의 세 자매 지검삼녀는 셋 모두가 사천성에서 유명한 여류 무인들이었다.
그녀들은 어떤 남자가 나오든 지지 않을 자신이 있었고, 특히 세 자매 중에서도 가장 미모가 뛰어난 막내 지상임은 이 기회에 자신의 미모와 명성을 떨치고 싶은 생각에 제일 먼저 선봉을 자원했었다.
그랬었는데….
“독수 오 남매? 그게 누구야?”
“천주은이라고? 저렇게 귀여운 여류 무인이 있었나?”
“어떻게 저렇게 귀여우면서 날렵할 수가 있지?”
주변에서 웅성거리는 소리는 지상임 자신이 아닌 오직 눈앞의 천주은에 관한 것들뿐이었다.
심지어 산검문의 무사들 쪽만 그런 것도 아니었다.
지상임의 뒤쪽, 정협방 무사들마저도 지상임 그녀가 아닌 저 앞의 꼬맹이 같은 여자에게 주목하며 술렁거리고 있었던 것이다.
지상임은 끓어오르는 질투심과 분노를 참을 수가 없었다.
‘감히 발육 부진의 꼬맹이 주제에 내가 돋보일 기회를 가로채려 하다니. 절대 용서할 수 없다. 이 자리에서 내 명성의 제물로 삼아 주마!’
지상임은 시간을 끌지 않고 바로 검을 뽑으며 외쳤다.
챙!
“바로 시작하죠!”
그녀의 말에 천주은 또한 생긋 웃고는 허리에 찬 도파에 손을 갖다 대며 발도 자세를 취했다.
자세를 낮추고 웅크린 그녀의 작은 체구가 마치 잔뜩 몸을 도사린 살쾡이처럼 보이고 있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