58화 독수 오 남매-4
천주은은 자신이 칠 조의 최약체임을 잘 알고 있었다.
다른 조원들 모두가 그녀 자신과 비교할 수도 없이 뛰어난 사람들뿐이란 것도 말이다.
처음 만났을 때부터 일류 이상의 무인이었던 설풍이나 해청연, 나서유를 말하는 것이 아니었다.
처음 전선에 왔을 때는 그녀와 똑같은 이류 무사였지만, 그녀 자신과는 재능이 아니라 마치 종족이 다른 것처럼 무섭게 발전해 마침내 절정 고수가 되어 버린 선우진 공자.
선우진 공자만큼은 아니지만 역시 초고속으로 성장해 어느새 훌륭한 일류 무인이 되어 버린, 심지어 신법만 놓고 따지면 설풍 조장까지도 한 수 접어주게 되어 버린 비사영 공자.
무공의 경지만 놓고 보면 그녀 자신과 대등하다고 할 수 있지만, 간귀 한 마리 처리하지 못하는 그녀 자신과는 달리 수십 마리의 간귀 떼를 장난감 다루듯 휘저어 버릴 수 있는 배종관 공자까지.
누구 하나 그녀가 쫓아갈 수 없는 사람들뿐이었다.
자신만 범재일 뿐 그녀의 주변엔 다들 천재들뿐이었던 것이다.
‘아니, 범재는 무슨, 둔재도 과분한 얘기지.’
그래서 무척 힘들어했었다.
모두가 동료인 칠 조에서 오직 그녀 자신만이 동료들의 보호 대상이었으니까 말이다.
쓸모없는 존재라고, 자신만 없다면 모두가 훨씬 더 편안해질 것이라는 생각도 여러 번 했었다.
하지만 그럼에도 노력하는 것을 멈추지는 않았다.
아주 조금씩이라도 앞으로 나아가려고 늘 이를 악물고 발버둥 쳤었다.
설풍 조장이나 선우진 공자보다 몇 배 더 노력할 수는 없어도, 적어도 그보다 적게 노력하는 사람은 되지 않으려 했던 것이다.
그리고 조원 모두가 그런 그녀를 응원해 줬다.
쓸모없는 자신이 너무 속상해 처음 눈물을 흘렸던 날, 마치 약속이나 한 듯 사람들이 차례로 몰래 그녀를 찾아왔었다.
제일 먼저 찾아왔던 사람은 설풍 조장이었다.
그는 자신과 눈도 제대로 마주치지 못하면서도 이렇게 말해 줬다.
‘천 소저, 내가 보기에 천 소저의 가전도법인 천은도법은 아무래도 여인에게는 조금 적합하지 않은 것 같더구려. 괜찮다면 내가 좀 개량해 줘도 되겠소?’
십삼대 최강의 절정 고수인 설풍 조장이 자신의 도법을 개량해 준다니, 너무나도 감사한 제안이 아닐 수 없었다.
그녀는 부친인 천가상이 무황총 혈사로 일찍 사망해 가전 무공을 제대로 전수하지 못한 데다, 여인치고도 체격이 작고 팔다리가 짧아 무공을 펼치는 데 어려움을 겪고 있었기 때문이었다.
그야말로 가뭄에 단비와 같은 말이 아닐 수 없었다.
두 번째로 찾아왔던 사람은 선우진이었다.
‘어, 천 소저. 이건 우연히 길에서 주운 내공심법인데, 여인들을 위한 심법이라 어차피 나는 못 익히오. 그래서 그런데 혹시 괜찮다면 이것 한번 익혀 보지 않겠소? 상음심법이라고 하오만.’
역시 일찍 사망한 그녀의 부친 때문에 제대로 내공심법을 배우지 못한 그녀에게 꼭 필요한 것이었다.
세 번째로 찾아왔던 사람은 비사영이었다.
‘흠, 흠. 천 소저가 아실지 모르겠소만 우리 비종문의 천풍신법은 그야말로 무림일절이라오. 내 입으로 말하기는 좀 뭣하지만 조장이나 진이 놈도 인정한 정말 최고의 신법이란 말이오. 그래서 말인데, 원래 절대로 외인에게 전수하면 안 되지만 사실상 내가 비종문의 장문인이나 마찬가지라서 하는 말인데, 혹시 천 소저가 꼭 배우고 싶다면 특별히 가르쳐 줄 수 있을 것 같은, 뭐 그런. 흠흠. 내, 내 말 무슨 뜻인지 알아들으시겠소?’
그들 외에도 모든 조원들이 자신에게 늘 조언을 아끼지 않았고, 마치 진짜 막냇동생 예뻐하듯 늘 보듬어 주고 격려해 줬었다.
그렇기에 천주은은 자신 있게 말할 수 있었다.
그녀 자신이 바로 칠 조원들 모두의 공동 전인이라고.
그리고 오늘이 바로 자신을 키워 준 조원들 앞에서 그 첫 번째 성과를 보여 주는 날이었다.
그러니 절대 실망스러운 모습을 보일 수 없었다.
다른 어느 때보다도 집중한 천주은의 눈이 날카롭게 상대를 주시하고 있었다.
반면 지검삼녀의 셋째 지상임은 발도 자세를 취한 채 몸을 잔뜩 도사린 천주은을 보고 내심 비웃었다.
저 자세라면 온 힘을 다한 발도 이외에는 할 수 있는 것이 없지 않은가.
‘저렇게 뭘 할지를 대놓고 알려 주다니. 바보 같기는.’
아무래도 경험이 모자란 애송이인 모양이었다.
도법은 검법에 비해 일격, 일격에 큰 힘을 싣는 것을 그 특징으로 했다.
특히 그중에서도 발도술은 더욱 큰 힘을 실어야만 하는 일격필살의 수법이었던 것이다.
하지만 그렇다는 건 한 번 빗나가게 되면 허점도 크게 드러난다는 얘기이기도 했다.
그 사실을 잘 알고 있는 지상임은 허초를 이용해 상대에게 혼란을 주기로 했다.
마침 그녀의 성명절기인 지검산장의 요란검법이 사천성에서도 알아주는 환검술이었으니 저런 애송이를 흔드는 용으론 차고도 넘칠 것이었으니 말이다.
지상임은 바로 검초를 전개했다.
“하압!”
쉬이익!
그녀의 검이 세 개의 검광으로 분열하며 천주은 주변에서 번뜩였다.
셋 중 둘이 아니라 셋 모두가 환검인 허초, 거기에 낚여 천주은이 발도하면 바로 허점을 노릴 생각이었다.
하지만 지상임의 예상과는 달리 천주은은 발도하지 않았다.
그저 몸을 웅크린 그 자세 그대로 날렵하게 삭삭 움직이며 검초를 피해 냈을 뿐이었다.
‘응?’
지상임은 당황했다.
몸을 움직여 검을 피한다고?
말이 쉽지 그건 아무나 가능한 것이 아니었다.
아무리 신법의 고수라도 검의 속도만큼 몸을 움직일 수는 없었던 것이다.
게다가 설사 그렇게 움직일 수 있다 해도 상대방의 검초를 정확히 꿰뚫어 볼 수 있는 눈이 없다면 취할 수 없는 행동이었다.
그런데 발육 부진의 꼬맹이 주제에 뒤로 물러선 것도 아니고 좌우로 몸을 움직여 자신의 검초를 피해 내다니.
지상임은 자존심이 상하고야 말았다.
“감히!”
살짝 건드려 허점을 유도하겠다는 생각마저 망각한 지상임은 이를 악물고 검초를 전개하기 시작했다.
“하아압!”
파바바바박!
지상임의 검이 이제 다섯 개의 검광을 번쩍이며 천주은의 주변을 쓸어 가고 있었다.
그 번쩍거리는 화려한 검초에 대결을 구경하던 양측의 무사들이 모두 탄성을 터트렸다.
“오오오오!”
“저런 환검이!”
“역시 지검산장의 요란검법!”
하지만 그렇게 감탄하는 무사들과는 달리 천주은의 눈에는 아무런 감정도 담겨 있지 않았다.
그저 냉정한 눈빛으로 번쩍거리기만 하는 검광을 꿰뚫고 있었다.
‘저게 대체 뭐 하는 짓이지?’
이게 지금 천주은의 솔직한 생각이었다.
차라리 제대로 공격을 할 것이지 왜 저렇게 허공에만 검을 휘두르고 있단 말인가?
설마 저걸 환검이라고 시전하고 있는 건가?
처음엔 그저 자신을 탐색하기 위해 하는 짓이라고 생각했었다.
하지만 지금은 아무리 봐도 그게 아닌 것 같았다.
정말 최선을 다해 휘두르고 있는 것 같지 않은가?
대결을 지켜보며 은신한 채 이동하던 비사영이 문득 선우진에게 전음을 보냈다.
- 늘 너의 선우십삼검과 대련해 왔으니 저런 환검이 눈에 들어올 리 없지. 결과는 이미 정해진 거 같은데?
선우진 또한 천주은의 대결을 지켜보며 빙긋이 웃음 지었다.
아무래도 걱정할 필요는 없는 것 같았다.
정협방의 무사들은 여전히 함성을 지르고 있었다.
“우와아아아! 지 소저!”
“멋진 환검이오!”
“이제 그만 끝을…. 어엇?!”
하지만 지상임을 응원하던 정협방의 무사들은 한순간 그대로 얼음이 되어야만 했다.
번쩍이는 검광들 사이로 날렵하게 몸만 이동하며 검을 피해 내던 천주은이 드디어 공격적으로 몸을 움직였기 때문이었다.
파밧!
천주은의 작은 몸이 다섯 개의 검광 사이로 순식간에 짓쳐 들었다.
지상임이 눈으로 보면서도 어떻게 대응할 수 없을 만큼 빠르고 갑작스러운 돌진이었다.
그러곤 지상임의 몸을 바람처럼 스쳐 지나가며, 천주은의 도가 차가운 백광이 되어 처음으로 그 백색의 날을 드러냈다.
샤아악!
하지만 양측의 일반 무사들은 그 발도의 광경을 제대로 볼 수조차 없었다.
그들이 볼 수 있었던 건 어느새 지상임을 스쳐 가 그녀의 일 장 뒤에 선 천주은이, 다시 천천히 도를 납도하고 있는 모습뿐이었다.
찰칵!
천주은의 도가 찰칵 소리와 함께 도집 안으로 완전히 모습을 감춘 순간, 멍하니 서 있던 지상임의 배에서 피가 뿜어져 나왔다.
푸확!
“아아악!”
지상임이 비명을 지르고 쓰러지자, 멍하니 보고 있던 산검문 무사들이 한순간 환호성을 터트렸다.
“우와아아아아!”
“정말 이겼다!”
“단 일 도로 꺾다니! 엄청나다!”
“천주은 소저! 최고요!”
천주은은 다시 생긋 웃으며 양쪽으로 포권하고는 내공을 담아 정협방을 향해 소리쳤다.
- 죽을 정도로는 베지 않았습니다! 어서 데려가 치료해 주세요!
그러자 서둘러 달려온 무인들이 지상임을 데려가고 그 뒤로 지검삼녀의 둘째 지상연이 뛰쳐나오며 사나운 눈빛을 하고 천주은을 향해 외쳤다.
“감히 내 동생을 저렇게 만들다니! 동생의 복수를 해 주마!”
하지만 그녀는 천주은의 앞까지 나올 수 없었다.
그녀의 언니인 첫째 지상화가 그녀를 막아섰기 때문이었다.
“언니?! 왜…?”
지상연의 말을 끊으며 지상화가 말했다.
“너의 상대가 아니다. 내가 가마.”
지검삼녀는 원래 나이 차이가 많이 나는 자매였다.
막내인 지상임이야 이십 대 후반이었지만, 둘째인 지상연은 삼십 대 초반, 첫째인 지상화는 삼십 대 후반이었던 것이다.
그러니 삼십 대 후반인 지상화가 아직 이십 대 초반으로 보이는 천주은을 상대한다는 것은 자존심 상하는 일이 아닐 수 없었다.
지상연이 인상을 찡그리며 소리쳤다.
“언니! 언니가 나설 만한 상대가…!”
하지만 지상화는 이번에도 그녀의 말을 끊으며 단호하게 꾸짖었다.
“내가 나서야 할 상대다! 상대의 실력도 알아보지 못하면서 어딜 나서겠다는 것이냐?!”
하지만 동생을 꾸짖고 천주은의 앞에 선 지상화는, 결국 천주은과 대결할 수 없었다.
천주은의 앞을 또 다른 사람이 막아섰기 때문이었다.
그녀가 포권하며 인사했다.
“독수 오 남매의 셋째 서유라고 합니다.”
천주은 대신 앞으로 나온 나서유였다.
그녀가 나온 것을 본 선우진과 비사영이 서로 마주 보고는 피식 웃음 지었다.
천주은 때와는 달리 아무런 불안감도 생기지 않았다.
간단히 포권한 두 사람은 곧 대결을 시작했다.
지상화의 검이 십여 개의 검광으로 분열하며 화려하게 허공을 수놓고, 나서유의 검은 흐르는 물처럼 부드럽게, 마치 검무를 추듯 우아하게 그 사이를 휘돌았다.
아름답기 그지없는 대결이었다.
그러자 평상시 볼 수 없었던 수준 높은 대결에 관전하고 있던 무사들은 열광할 수밖에 없었다.
“우와아아아아!”
지검삼녀의 맏이인 지상화의 검은 확실히 막내인 지상임과는 달랐다.
그녀는 완연한 일류 상급의 무사였고, 그녀의 환검은 실초와 허초를 구분할 수 없을 정도로 날카로웠다.
하지만 불행히도 나서유는 일류 최상급의 무사였다.
또한 선우진과 수십 번을 대결하며 환검에 대한 적응력을 키운 경험자이기도 했다.
지상화의 환검을 보며 나서유는 생각했다.
‘선우 공자의 환검은 실초와 허초가 구분이 안 가는 것이 아니라 보이는 모든 것이 실초였거든.’
마치 물이 흐르는 듯한 부드러운 검초, 무당파의 태극검이 이럴까 싶을 정도로 유능제강이 무엇인지를 극한까지 보여 준 나서유의 검초에 지상화는 결국 검을 떨구고 한숨을 내쉬어야만 했다.
나서유의 검이 자신의 목을 겨누고 있는 것을 멍하니 바라보면서 말이다.
“우와아아아아! 또 이겼다!”
“서 소저 최고요!”
“선녀 같소!”
두 번의 승부를 연이어 산검문이 가져가자 정협방의 황장곤은 똥 씹은 듯한 표정이 되었고 산검문주 허경은 이제 대소를 터트렸다.
“크하하하하하! 좋구나! 좋아!”
여인들끼리의 싸움이기에 큰 의미가 없을 거라고 생각했던 허경의 예상은 틀렸다.
아름다운 소저들의 연이은 승리에, 산검문의 무사들은 언제 사기가 가라앉아 있었냐는 듯 사기 충천한 모습으로 쉴 새 없이 함성을 지르고 있었던 것이다.
그에 반해 정협방의 무사들은 일그러진 얼굴로 조용히 대전자들을 바라보고만 있을 뿐이었다.
하지만 잠시 후, 함성을 지르던 산검문의 무사들은 그대로 굳어져야만 했다.
정협방의 무사들 또한 마찬가지였다.
심지어 그들은 찡그렸던 얼굴을 천천히 펴고는 멍하니 입을 벌린 채 한쪽을 바라보고 있었다.
그것은 모두 그녀가 걸어오고 있었기 때문에 일어난 일이었다.
방금 천상에서 내려온 듯한 여인, 해청연이 마침내 모습을 드러냈던 것이다.
그러자 이제 정협방 후방에 도착해서 절정 고수로 보이는 자를 찾고 있던 비사영이 피식 웃으며 전음을 보냈다.
- 하여간 남자란 놈들은 어쩔 수가 없다니까. 미인 좀 봤다고 정신 놔 버린 꼴들하고는. 쯧쯧.
그 말에 선우진도 피식 웃었다.
너도 똑같았다는 얘기는 굳이 해 주지 않기로 했다.
그저 해청연의 아름다운 모습을 힐끗 보고는 비사영을 재촉했다.
- 빨리 찾기나 해. 청연 소저가 주의를 끌어 주는 동안 끝내야 하니까.
- 쳇, 알았다. 응? 혹시 저자들 아닌가?
선우진들이 정협방 후방에서 절정 고수들을 찾는 사이, 해청연은 일부러 천천히 나서유와 천주은이 있는 곳까지 걸어와서는 정협방 쪽에 포권하며 자신을 소개했다.
- 독수 오 남매의 넷째, 연해라고 합니다.
그녀의 목소리를 듣고서야 많은 이들이 정신을 차릴 수 있었다.
마치 꿈을 꾼 것 같은 기분이었다.
심지어 그녀가 천천히 걸어서 나오는 동안 시간조차 멈춰 버렸던 것 같았다.
그녀가 계속해서 말했다.
- 혹 다른 여무사께서 나오신다면 이번엔 제가 상대하고 싶습니다. 또 나오실 분은 안 계신가요?
하지만 약간의 시간이 흘렀음에도 아무도 그녀 앞으로 나오지 않았다.
정협방에는 물론 지검삼녀 이외에도 다른 여무인들이 존재했다.
하지만 그녀들 중 누구도 해청연과 대결하러 나가고 싶어 하진 않고 있었다.
독수 오 남매에 속한 여인들의 실력이 대단하다는 걸 이미 앞에서 확인했기 때문이기도 하지만, 무엇보다 나가서 해청연의 옆에 서는 순간 패배자가 되어 버릴 것 같았기 때문이었다.
‘저 여자 옆엔 절대 서고 싶지 않아!’
그것이 지금 이 순간 정협방 여무사들의 공통적인 생각이었다.
노회한 고수인 황장곤은 그런 분위기를 누구보다 빨리 알아챌 수 있었다.
게다가 더 이상 여인들의 대결이 자신들에게 해가 되면 됐지 아무런 도움도 되지 않을 것이란 것도 말이다.
황장곤은 앞으로 나서 해청연에게 포권하며 말했다.
- 안타깝게도 우리 정협방에선 더 이상 대결을 할 여무사들이 없는 모양이오. 연 소저께는 죄송하게 됐소만 이제부턴 남무사들의 대결을 진행해 보는 것이 어떨까 싶소!
그 말을 들은 허경은 통쾌한 웃음을 터트리며 소리쳤다.
- 하하하하! 정 내보낼 여무사가 없다면 여인처럼 생긴 남자 무사라도 내보내지 그러느냐, 황장곤?! 으하하하하!
아까의 말을 그대로 되돌려주며 허경은 묵혀 놨던 체증이 한꺼번에 씻겨 내려가는 듯한 통쾌함을 느낄 수 있었다.
속이 뻥 뚫리는 극상의 통쾌함이었다.
반대로 황장곤은 이를 갈며 분노를 삭였다.
진짜로 남자 무사를 내보낼 생각도 안 해 본 것은 아니었다. 하지만 주변 무사들의 분위기를 본 황장곤은 어떤 젊은 무사들도 해청연과 진심으로 싸울 수 없을 거라는 걸 깨닫고야 말았다.
주변의 모든 무사들이 이미 저 연해라는 소저를 숭배하는 듯한 눈빛으로 바라보고 있지 않은가.
황장곤은 탄식했다.
‘허어, 한낱 여인의 미색 때문에 이런 사태가 벌어지다니, 어처구니가 없는 일이로구나.’
하지만 이런 상황을 만들어 낼 정도로 엄청난 해청연의 미모에 그 또한 다시금 감탄할 수밖에 없었다.
황장곤은 어쩔 수 없이 허경에게 목소리를 높여 사과할 수밖에 없었다.
- 아까 나의 농이 거슬렸다면 사과드리겠소, 허 문주! 하나 어찌 대장부들에게 아녀자와 대결하라고 등을 떠밀 수가 있겠소! 그러니 이제부턴 본론으로 들어가 제대로 된 무사들의 대결을 만들어 보도록 합시다!
사과를 하면서까지 여인들끼리의 대결은 의미가 없었음을 교묘하게 강조하는 황장곤이었다.
허경은 그가 무엇을 의도하는지는 눈치챘지만 거기에 관해선 더 이상 언급하지 않기로 했다.
황장곤이 사과를 했다는 점에서 통쾌함을 느꼈기도 했고, 그 또한 본론은 남자 무사들의 대결이라고 생각하고 있었기 때문이었다.
“그럼 저희는 이만 들어가죠.”
해청연이 그렇게 말하자, 나서유와 천주은은 그녀와 함께 천천히 산검문 쪽으로 걸어 들어오기 시작했다.
정협방 쪽에 침투해 있을 동료들에게 시간을 주기 위한 행동이었지만, 그녀들의 느릿한 퇴장에, 정확히는 해청연의 퇴장에 산검문과 정협방의 무사들은 하나같이 안타까운 표정으로 탄식하며 집중했다.
“아아….”
“연 소저….”
“들어가시면 안 되오, 소저….”
하지만 아무도 알지 못했다.
해청연이 시간을 끌어 주고, 모든 이들이 그녀에게 집중하는 사이 선우진들이 정체가 알려지지 않았다던 절정 고수들을 드디어 찾아냈다는 것을 말이다.
삭무흔이 선우진에게로 전음을 보냈다.
- 준비됐나?
- 네, 신호만 주시면 됩니다.
- 그럼 하나, 둘, 셋에 시작하지. 하나!
절정 고수로 보이는 두 명은 정협방의 최후방에서 거만한 자세로 상황을 지켜보고 있었다.
이들이 혈교의 마두인지 아닌지는 확인할 수 없었다.
일단 겉으로 마기는 느껴지지 않았지만, 혈교의 무공들 중에도 마기를 숨길 수 있는 무공은 수없이 많았으니까 말이다.
- 둘!
하지만 이들이 정파의 협객이 아닌 것만큼은 분명한 듯했다.
이들은 해청연이 나오기 전부터 대결하고 있는 여인들을 보며 자신의 물건을 주물럭거리고 있었으니까.
더군다나 해청연의 등장 후에는 그 탐욕스러운 눈빛을 숨기지도 않은 채 침을 흘리고 있었다.
그러니 설사 혈교도가 아니라 해도 더 고민할 필요가 없었다.
- 셋!
두 절정 고수의 그림자 속에서 선우진과 삭무흔의 신형이 천천히 올라왔다.
푸욱!
“흡!”
“끅!”
온 정신을 해청연에게로 집중하고 있던 두 사람은 마지막까지도 무엇이 자신의 뒷목을 꿰뚫었는지를 파악할 수 없었다.
해청연이 산검문으로 퇴장하는 사이 두 명의 절정 고수가 세상에서 퇴장당하고 말았다는 건 누구도 눈치챌 수 없는 일이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