62화 실마리-2
그날 밤 자정, 십이대주인 증악도객 만종임은 십이대 일 조원들과 함께 서쪽 숲에서 나타날 누군가를 기다리고 있었다.
일 조장 도무곤이 사방을 경계하며 나지막이 말했다.
“아무래도 너무 수상합니다, 대주님. 우리가 혈교도를 쫓고 있다는 걸 알고 있다니, 우리가 그들에게 훤히 드러나 있다는 얘기가 아닙니까? 아무래도 함정일 확률이 높을 것 같습니다.”
그러자 만종임이 코웃음을 치며 말했다.
“흥! 두려운 것이냐? 설사 함정이면 또 어떻단 말이냐? 만약 그렇다면 우리가 제대로 혈교 놈들을 찾았다는 얘기인 것을.”
그 말에 도무곤은 울컥하려는 것을 간신히 참아 낼 수 있었다.
저런 무책임한 말이라니.
이런 식으로 제대로 찾으면 뭐 한단 말인가?
그들에게 죽으면 말짱 꽝인 것을.
설마 내공 구십 년이 넘는다는 거력마 저웅원과 세 명의 절정 고수가 섞여 있다는 그 부하들을, 지금 이 인원으로 감당할 수 있다고 생각하는 건가?
게다가 혹시라도 우리를 불러낸 자들이 혈교도가 맞다면, 이건 우리가 아닌 저들이 우리를 찾아낸 것이 아닌가 말이다.
도무곤은 너무도 불안했다.
하필 만종임과 함께 왔다는 것이 새삼스럽게 너무도 후회됐다.
그런 도무곤의 속을 아는지 모르는지 만종임이 중얼거리고 있었다.
“이제 거의 삼경이 다 된 것 같은데? 어디서 나타난다는 얘기지?”
사실 그렇게 말하는 만종임도 속이 편치만은 않았다.
자신들이 거력마를 뒤쫓고 있다는 것을 알고 있다니, 대체 상대가 누구인지도 짐작도 가지 않았던 것이다.
이러다 만약 그들이 진짜 거력마의 정보를 주려는 자가 아니라면 오늘 밤은 무척 위험한 밤이 되고 말 것이었다.
‘우리의 목적을 알고 있는 자들이라면 십삼대와 십일대의 인원들. 하지만 그들일 리는 없지. 그렇다면 남는 건 아마도 무림맹이거나 혈교의 무리들일 텐데. 그것도 아니면 하오문으로부터 정보를 얻은 자들이거나….’
만종임은 사실 그중에서도 아마 하오문으로부터 정보를 얻은 이들일 확률이 높다고 생각하고 있었다.
하지만 그것을 인정할 수는 없었다.
그걸 인정해 버리면 도무곤이 만류했음에도 하오문에게 거력마의 얘기를 해 버린 자신의 책임이 되고 마는 것이었으니까.
만종임의 자존심상 그걸 인정하는 건 절대 불가능했다.
그렇게 그들이 불안해하면서도 사방을 경계하고 있을 때였다.
문득 숲 한쪽에서 ‘스스스’ 풀이 스치는 소리가 들려오기 시작했다.
인기척이었다.
무림인들, 그것도 꽤 많은 인원들이 이쪽으로 다가오는 중인 것 같았다.
만종임이 급히 속삭였다.
“십이대원들은 전투를 대비하라!”
스릉! 챵! 챵!
그의 말에 십이대원 모두가 즉시 병장기를 꺼내 들었을 때였다.
그들의 맞은편에 대략 서른 명 정도의 흑의복면인들이 도착했다.
만종임들이 감당하기엔 꽤 많은 수였다.
만종임이 이를 악물고 낮게 소리쳤다.
“누구냐?!”
하지만 그에 대한 답은 돌아오지 않았다.
대신 질문이 돌아왔다.
“혈교의 마두들을 추적하고 계신 분들이십니까?”
그 질문이 만종임의 적의를 살짝 잠재웠다.
저렇게 묻는 자들이라면 혈교도는 확실히 아닐 것 같았기 때문이었다.
그가 약간 부드러워진 목소리로 다시 물었다.
“그렇다. 그걸 아는 너희는 누구냐?”
그러자 복면인들은 잠시 대답하지 않은 채 무언가를 생각하는 듯했다.
그러곤 잠시 후 맨 앞에 선 자가 한 걸음 앞으로 나서며 복면을 벗었다.
“혈교의 마두들을 쫓고 있는 분들이시면 믿을 수 있을 것 같군요. 저는 정협방의 구유상이라고 합니다.”
복면을 벗고 나온 그의 얼굴은 어두운 밤임에도 밝게 빛나 보이는 은발과 하얀 얼굴을 가진 미남자였다.
그의 이름을 들은 만종임이 놀란 눈으로 되물었다.
“구유상이라고? 정협방의 백옥지룡 구유상 말인가?”
그러자 그가 빙긋이 웃으며 대답했다.
마치 빛을 뿜어내고 있는 듯 느껴지는 잘생긴 미소였다.
“과분하게도 그렇게 불러 주시는 분들도 있더군요. 그럼 이제 선배님의 신분을 좀 밝혀 주시겠습니까?”
정협방의 백옥지룡 구유상은 사천성에서 가장 유명한 후기지수 중 한 명이라고 해도 과언이 아니었다.
이십대의 나이에 절정의 경지에 올라 ‘용’의 칭호를 얻은 데다, 그 잘생긴 외모 덕분에 사천제일공자로 불리우고 있었던 것이다.
또한 그는 정체가 제대로 밝혀지지 않은 정협방주의 수제자로 알려져 있기도 했다.
그런 구유상을 만나자 만종임의 의심은 이제 완전히 사라지고 말았다.
정파인 정협방의 유명한 후기지수인 데다 자신처럼 혈교를 추격하고 있다는 것 같지 않은가.
그런 자라면 충분히 믿을 수 있을 것 같았다.
“오오! 이런 곳에서 정파의 후기지수를 만나게 될 줄이야! 반갑네! 나는 비룡십이대의 대주를 맡고 있는 만종임이라고 하네!”
그러자 일 조장 도무곤이 깜짝 놀라 그를 만류하려 했다.
“대주님!”
하지만 이미 늦은 상태였다.
백옥지룡 구유상이 이채를 띤 눈빛으로 물었다.
“호오, 그렇다면 비룡십이대의 증악도객 만종임 선배님이란 말씀이십니까?”
“그렇다네. 내가 바로 그 만종임일세. 혈교의 마두 거력마를 쫓아 이곳까지 왔지.”
그러자 구유상이 환하게 웃으며 대꾸했다.
“역시 그러셨군요. 과연 증악도객의 명성답습니다.”
그의 칭찬에 기분이 좋아진 만종임이 헛기침을 하며 물었다.
“흠, 흠. 뭐 허명일 뿐이지. 그나저나 자네들이 그들의 정보를 갖고 있다는 게 사실인가?”
그러자 구유상이 날카로운 눈빛으로 고개를 끄덕였다.
“그렇습니다. 얼마 전 운씨세가를 조사하던 중, 정체를 알 수 없는 고수들이 그곳으로 들어갔다는 것을 알게 됐습니다. 게다가 그들에게서 마기까지 느껴졌다는 증언이 있어 더 조사하고 있던 중이었는데, 선배님 말씀대로라면 그들이 바로 거력마 일행이겠군요.”
그 말에 만종임의 눈빛이 번뜩였다.
“그게 정말인가?! 운씨세가에 그놈들이 들어갔다고?!”
“예, 큰 체격의 거한으로 보이는 자가 이끄는 자들이었다고 했으니 아마 틀림없을 겁니다.”
구유상의 말을 들은 만종임의 얼굴은 근 며칠 중 가장 환해졌다.
“오오오! 드디어 놈들을 찾아냈군! 으하하하! 봐라, 무곤! 내가 운씨세가일 거라고 말하지 않았더냐?!”
하지만 도무곤은 여전히 의심스러운 눈빛을 풀지 않은 채 구유상에게 물었다.
“죄송하지만, 저희가 공자의 말을 어떻게 믿을 수 있겠습니까? 또 저희에 관한 정보는 어떻게 얻으셨는지 물어도 되겠습니까?”
그러자 구유상이 자신만만하게 웃으며 대답했다.
“아, 여러분들의 정보는 하오문으로부터 얻었습니다. 공교롭게도 저 역시 마침 하오문을 이용할 일이 있었거든요. 아마 인연이 닿았던 거겠죠. 그리고… 제 말의 증거는 제가 혈교도들을 쫓아 이곳까지 온 것 자체가 증거입니다만, 정 못 미더우시다면 한번 함께 확인해 보시겠습니까? 기회가 나는 대로 혈교의 마두를 추격해 습격할 계획이었으니 저희와 함께 움직이시죠. 어떻습니까, 선배님?”
구유상은 도무곤이 아닌 만종임을 보며 그렇게 제안했다.
그러자 이제 완전히 의심을 풀고는 호감 가득한 얼굴로 그를 바라보고 있던 만종임이 그것을 거부할 리 없었다.
“여부가 있겠는가?! 오히려 내 쪽에서 청하고 싶은 일일세! 으하하하하!”
도무곤은 안타까운 표정을 지었지만, 불행히도 그에게는 결정권이 없었다.
***
산검문의 낭인 구역.
일행들과 함께 있던 해청연에게 갑자기 누군가 말을 걸어왔다.
“연 소저! 소생에게 잠시 시간을 내주시겠소?!”
당당하기 그지없는 말투였다.
게다가 감히 천상미희 연해에게 시간을 내어달라니.
그 거침없는 발언에 놀란 모든 낭인들의 시선이 그에게로 집중됐다.
그리고 시선을 돌린 낭인들의 눈에 들어온 것은 웬 매끈하게 생긴 놈팽이였다.
꽤나 잘생긴 얼굴과 비싸 보이는 옷, 그리고 무척 오만해 보이는 표정을 짓고 있는 얼굴이 인상적이었다.
그를 보는 낭인들의 시선은 당연히 곱지 않았다.
자신들은 며칠간을 먼발치에서 바라만보고 있는 중인데, 갑자기 나타나서는 감히 그녀에게 시간을 내달라니.
너무나도 어처구니없는 일이 아닐 수 없었던 것이다.
하지만 낭인들은 어이없다는 표정을 지으면서도, 혹시나 싶은 마음에 불안한 눈빛으로 해청연을 바라봤다.
혹시 저 재수 없게 생긴 놈에게 그녀가 시간을 허락해 준다면 어쩌나 하는 마음에서였다.
그러자 무심한 표정으로 그를 잠깐 바라봤던 해청연이 당연하다는 듯 대답했다.
“싫은데요?”
그 단호한 대답에 낭인들이 역시나 하는 표정으로 ‘풋!’ 웃음을 터트렸다.
그러자 남자의 표정이 붉으락푸르락해지더니 굳은 표정으로 다시 말했다.
“소저, 소생에 대해 잘 모르시는 것 같은데 소생은 바로 이 산검문의 문주이신 허경 문주님의 조카 되는 사람이오!”
하지만 해청연은 여전히 무표정한 표정으로 그를 잠시 바라보다 다시 물었다.
“그런데요?”
구경하고 있던 낭인들은 이제 웃음을 참지 않았다.
그들은 이제 재밌어 죽겠다는 듯 소리 내어 큭큭 웃기 시작했고, 그러자 남자는 이제 분노한 듯 큰 목소리로 소리쳤다.
“소저는 낭인에 불과하고 나는 산검문 문주의 조카란 말이오! 그러니 소저가 이 산검문에서 잘 지내려면 나 허윤구를 무시하면 안 된다는 것을 꼭 말로 해야 알아들으시겠소?!”
그의 말에 이제 낭인들은 고개를 절레절레 저으며 중얼거렸다.
“살짝 미친놈인 줄 알았는데, 이제 보니 심하게 미친놈이었군.”
“저런 놈이 산검문주의 조카라니 아무래도 여기 망조가 든 거 아냐?”
낭인들의 눈빛은 이제 경멸에 가까워졌고, 해청연 또한 귀찮은 표정으로 그에게 뭐라고 대답해 주려 할 때였다.
갑자기 누군가 끼어들어 그녀 대신 대답했다.
“그럼 연해 소저가 산검문을 나가면 모든 게 해결되는 것이겠구려.”
그러자 갑자기 끼어든 남자의 말에 허윤구가 당황해 반문했다.
“뭐, 뭣?! 네, 네놈은 뭔데 감히 나와 소저 사이의 대화에 끼어드느냐?!”
하지만 남자는 대답하지 않고 빙글빙글 웃으며 자기 할 말만 계속 이어 나갔다.
“흠, 듣자 하니 정협방 쪽에선 지난번 전투의 복수를 위해 절정 고수 세 명과 일천의 병력을 다시 귀주성 쪽으로 보내는 중이라고 하더구려. 그에 반해 산검문 쪽에서는 운씨세가에서 오기로 한 지원 병력이 아직 여의치 않은 모양이고 말이오. 근데 이 와중에 산검문주의 조카 때문에 지난 전투의 최고 공헌자인 독수 오 남매가 산검문을 떠나겠다고 하면….”
그렇게 말한 그는 주변 낭인들을 둘러보며 말을 이었다.
“내가 장담하건대 아마 여기 모인 낭인들 중 절반 이상은 연해 소저를 보려고 산검문에 온 사람들일 것이오. 그리고 나머지 절반은 독수 오 남매의 명성을 듣고 왔겠지. 그러니 독수 오 남매가 산검문을 떠나겠다고 하면 여기 있는 낭인들도 최소한 절반 이상 사라지지 않겠소? 어쩌면 다 사라질 수도 있고. 어떻소? 그래도 괜찮겠소?”
“뭐, 뭐?”
그의 말에 허윤구는 완전히 당황했다.
그런 생각까지 해 보지는 못했기 때문이었다.
그러자 남자는 이제 하얗게 질린 허윤구에게 의미심장한 웃음을 지으며 말했다.
“산검문의 사활이 걸린 전투를 앞둔 이 상황에서, 여색을 탐한 조카 때문에 낭인들이 대거 이탈한다? 내가 만약 허경 문주라면 아마 그 조카를 오체분시한 후 연해 소저에게 사죄를 청할 것 같구려. 자, 이제 조카분의 생각은 어떠시오?”
그 질문을 들은 허윤구의 얼굴은 이제 하얗다 못해 새파랗게 질려 버리고 말았다.
“나, 나는….”
말을 더듬으며 잠시 어쩔 줄 몰라 하던 허윤구는, 이내 몸을 돌려 후다닥 달아나기 시작했다.
마치 생명이 걸린 듯한 필사적인 몸짓이었다.
그 꼴사나운 모습에 모든 낭인들이 웃음을 터트렸다.
“푸하하하하! 저 꼴 좀 보게!”
“어이! 산검문주의 조카님! 어딜 그렇게 급히 가시오?! 연해 소저와 대화를 나누셔야 할 것 아니오!”
“소저, 소생에게 시간을 좀 내주시오! 그 시간이 도망갈 시간이었나 보군! 크하하하하하!”
말 몇 마디로 그를 쫓아낸 남자 또한 빙긋이 웃으며 그의 뒷모습을 바라봤다.
그러자 해청연이 그에게 말을 걸었다.
“도와주셔서 감사해요. 생각보다 말을 잘하시더군요.”
그러자 독수 오 남매와 같이 절강성에서 온 낭인이자, 괴산사검의 막내라고 알려져 있는 점창검호 제원영이 씨익 웃으며 대답했다.
“소저나 선우 소협 만큼은 아니지만 내 머리도 그리 나쁘지는 않다오. 그리고… 진심인 곳에선 더욱 좋아지는 편이고 말이오.”
그의 의미심장한 말에 해청연이 의아한 표정으로 물었다.
“진심인 곳이요?”
그러자 깊은 눈빛으로 잠시 그녀를 바라보던 제원영이 이내 씨익 웃으며 몸을 돌렸다.
“그런 게 있소. 아마 곧 아시게 될 거요.”
알쏭달쏭한 얘기였다.
하지만 해청연은 그가 무슨 얘기를 하는지 대강 알아들을 수 있을 것 같았다.
사람의 감정에 관해서만큼은 그리 뛰어나지 않은 그녀였지만, 저런 눈빛은 워낙 많이 받아 봤으니까 말이다.
하지만 해청연은 곧 그에게서 관심을 돌리고는 다른 것에 대해 생각하기 시작했다.
이제 천상미희 연해라는 이름만 듣고도 낭인들이 구름처럼 몰려올 만큼 소문이 퍼진 상태였다.
그러니 혈교의 무리들도 아마 자신에 관한 소문을 들어 봤겠지.
해청연은 이제 조원들에게로 가서 말했다.
“떡밥을 풀어 냄새를 충분히 뿌려 놨으니, 이제 미끼를 던져 볼까요?”
그녀의 말에 설풍을 비롯한 조원들이 몸을 일으켰다.
이제 낚시를 해 볼 시간이었다.
***
독수 오 남매와 괴산사검은 함께 저녁 외출을 나갔다.
표면적인 이유는 인회의 밤거리를 둘러보며 식사를 하겠다는 거였는데, 많은 낭인들이 따라가고 싶어 하는 눈치였지만 살벌하게 그들을 훑어보는 배종관의 눈빛에 차마 따라나설 수는 없었다.
그래서 밖에 나와 드디어 그들만 남게 되자 천주은이 상쾌하다는 듯 기지개를 쭉 펴며 소리쳤다.
“아우! 이제야 좀 살 것 같네!”
팔을 쭉 펴도 웬만한 남자 키만큼도 안 되는 그녀의 앙증맞은 자태에 나서유가 귀여워 죽겠다는 눈빛으로 물었다.
“왜? 답답했어? 전에는 명성을 떨쳐 보고 싶다고 했었잖아?”
그러자 천주은이 고개를 절레절레 저으며 대답했다.
“어우, 저는 사람들의 시선이란 게 이렇게 갑갑한 건 줄은 꿈에도 몰랐어요. 얼굴 표정 하나 바꾸는 것조차 신경 쓰이더라구요.”
그렇게 말하고는 끔찍하다는 듯 몸까지 부르르 떠는 천주은의 머리를 쓰다듬으며 나서유가 말했다.
“그래도 우리가 계속 은신해 있어야 하는 선우 공자나 비 공자보다는 좀 낫지 않아?”
“네? 아, 킥킥. 그건 좀 그렇네요.”
선우진과 비사영, 거기에 삭무흔까지.
세 사람은 지금도 계속 은신한 채 일행의 주변을 맴돌고 있는 중이었다.
산검문 안에 있을 때는 그나마 한 명씩 번갈아 가며 은신해 있는 것 같았지만, 지금같이 밖으로 나왔을 때는 세 명 다 일정한 거리를 둔 채 일행들을 따라오고 있었던 것이다.
천주은이 문득 장난기 어린 표정으로 세 사람이 은신해 있을 방향을 향해 꾸벅 고개를 숙이며 말했다.
“배부른 투정을 부려 죄송합니다.”
그런 모습들을 웃으며 바라보고 있던 제원영이 문득 해청연에게 말을 걸었다.
“소저는 괜찮으시오? 사실 대부분의 시선들이 쏠리는 분은 소저신데 말이오.”
해청연은 자신에게 말을 거는 제원영의 얼굴을 잠시 바라봤다.
아까부터 그가 아닌 척 그녀의 옆을 맴돌며 그녀에게만 신경을 집중하고 있었다는 사실을 느끼고 있었기 때문이었다.
그 이유야 충분히 짐작할 수 있을 것 같았지만 일단 대답부터 하기로 했다.
“전 이런 건 좀 익숙한 편이라. 앞머리를 내리고 다닌 후로 한참 동안 벗어나 있어서 그런지 잠깐 정도는 견딜 만하군요.”
그러자 제원영이 이해했다는 듯 웃으며 말했다.
“하긴 소저의 미모라면 분명히 그랬겠구려. 무척 힘드셨겠소.”
“아니오. 부모님과 언니들 덕분에 그 정도는 아니었어요.”
무미건조한 말투였다.
소심한 남자였다면 그 차가운 말투만 듣고도 기가 죽어 물러났을 것 같을 정도였다.
하지만 제원영은 전혀 소심한 남자가 아니었다.
그는 씨익 웃더니만 다시 말을 걸었다.
“지금은 소저의 부모님과 언니들이 안 계시니 아무래도 다른 사람들이 필요하겠구려. 소저께서 불편하시지 않도록 소생이 최선을 다하겠소.”
의미심장한 말이었다.
해청연은 잠시 물끄러미 그의 얼굴을 바라봤다.
웬만한 남자들은 그녀가 이렇게 바라보는 것만으로도 부담스러워하며 눈을 피하고는 했었다.
하지만 제원영은 오히려 더 호방한 미소를 지으며 자신과 계속 시선을 마주쳤다.
오히려 말보다 눈빛이 더 직선적이고 강렬하게 느껴질 정도였다.
정말이지 엄청나게 자신감 넘치는 사내가 아닐 수 없었다.
결국 먼저 입을 연 것은 해청연이었다.
“방금 그 말씀, 무슨 의미를 갖고 하신 말씀이신지 물어도 될까요?”
그러자 제원영이 대답했다.
“말 그대로의 의미요. 최선을 다해 소저를 지켜 드리겠다는, 불편하지 않도록 해 드리겠다는 뜻 말이오.”
그 이유에 대해서도 추궁해 볼까 했던 해청연은 그냥 그만두기로 했다.
제원영은 마치 그가 익힌 사일검법 같은 남자였다.
직선적이고 솔직했으며 또한 강렬했다.
저런 성격이니 속에 구렁이 몇 마리는 들어 있을 것 같은 마유겸과 사이가 안 좋았던 것도 당연한 일이었다.
해청연은 직선적으로 찔러 오는 그의 솔직한 눈빛에 오히려 먼저 눈을 피하고 말았다.
너무도 강렬한 눈빛에 기분이 이상해졌기 때문이었다.
자신에게 호감을 표시하는 수많은 남자들과 시선을 마주해 봤지만 이런 건 처음 있는 일인 것 같았다.
해청연은 그를 보며 문득 뒤에서 은신한 채 따라오고 있을 선우진을 생각했다.
제원영과는 전혀 반대의 느낌을 주는, 자신의 진짜 얼굴을 보고도 여전히 자신을 순수한 친구처럼 대하고 있는 그를 말이다.
해청연은 이제 인정해야만 할 것 같았다.
어쩌면 자신이 거만했던 건지도 모른다는 사실을….
대부분의 남자들이 그랬듯, 선우진 또한 자신의 얼굴을 제대로 보고 나면 결코 다른 곳을 볼 수 없게 될 거라고, 오히려 좀 귀찮아지게 될지도 모른다고 생각하고 있었던 것이다.
하지만 그는 전혀 그렇지 않았다.
만났던 모든 사람들이 정신을 차릴 수 없었다는 자신의 외모도, 결국 그의 태도를 바뀌게 하지는 못했다.
마음이 복잡해졌다.
그때였다.
쿠당탕탕!
“꺄아아악!”
“어이쿠!”
갑자기 근처 주점에서 뭔가 부서지는 소리와 함께 비명 소리가 들려왔다.
“이따위 맛없는 걸 팔아 놓고 감히 내게 돈을 내라고?!”
험상궂게 생긴 낭인으로 보이는 자가 탁자와 의자를 부수며 호통을 치고 있었다.
대충 봐도 무슨 일인지 각이 나오는 상황이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