66화 묵랑
거력마가 휘두른 일장이 내 머리 바로 앞에까지 다가와 있었다.
하지만 바로 앞에까지 다가왔을 뿐 좀처럼 내 머리에 닿지 않았다.
마치 그 자리에 멈춰 버린 듯했다.
그뿐이 아니었다.
내 앞의 거력마는 물론 공중에 튀었던 흙 역시 바닥에 떨어지지 않은 채 그대로 공중에 멈춰 있었다.
거력마가 휘두른 손의 풍압에 밀려 날리던 내 머리카락 또한 마찬가지였다.
눈을 돌릴 수 없어 다른 곳을 볼 수는 없었지만 충분히 깨달을 수 있었다.
나를 포함한 이 세상 모두가 그 자리에 멈춰 버렸다는 것을.
멍하니 생각했다.
‘이게 대체 무슨 조화지?’
세상 모든 것이 멈춰 버린 가운데 내 의식만이 멀쩡히 사고를 이어 가고 있었던 것이다.
마치 도깨비에 홀린 기분이었다.
그때 아까의 착각인가 싶었던 목소리가 다시 들려왔다.
- 반갑네, 선우 공자. 두 번째 말을 거는 것이긴 한데 아마 첫 번째는 기억하지 못할 것 같군.
무척 유쾌하게 느껴지는 중년 남성의 목소리였다.
그리고 나는 이 목소리를 어디선가 들은 적이 있다는 걸 기억해 냈다.
‘혹시… 당 소저를 구했던 날?’
- 오, 기억하는군. 맞네. 그때 잠시 말을 걸었었지.
그게 진짜였다고?
그땐 그냥 꿈인 줄 알았는데?
아니, 생각하면 이것도 꿈같긴 하군.
정신이 혼란한 가운데 그에게 물었다.
‘누, 누구십니까? 그리고 이건 대체…?’
그러자 유쾌하게 웃음 지은 목소리가 대답했다.
- 하하하하! 혼란스럽겠지. 당연하리라 생각하네. 우리 형님 얘기를 듣고 따라한 거였는데 내 형님마저도 처음엔 무척 당황스러웠다고 하시더군.
‘네? 형님이요?’
- 자, 시간이 없고 또 이번에 규칙을 어겼기 때문에 한동안 만나지 못할 것 같으니 간단하게만 얘기해 주겠네.
‘…예?’
- 내 이름은… 그래, 묵랑이라고 부르면 되네.
그의 말에 나는 본능적으로 내 손에 쥐여 있는 흑색의 검을 바라봤다.
그러자 묵랑의 호수구에 조각된 늑대의 눈에서 미약한 백광이 뿜어져 나오고 있는 것을 확인할 수 있었다.
- 그래, 그 묵랑이 맞네. 예전에 나는 언젠가 자격이 되는 후배들에게 내 진전을 남기기 위해 몇 가지 안배를 해 뒀다네. 그중 하나가 이 묵랑검이었지. 아, 자세한 건 지금 묻지 말게. 자넨 시간이 멈춘 것으로 보이겠지만 사실 이건 시간을 극한까지 늦춘 상태거든. 이 상태는 곧 끝난다네.
그 말을 들으니 확실히 알 수 있었다.
내 주변의 모든 것들은 마치 멈춰 있는 듯 보였지만 완전히 멈춘 것이 아니었다.
인식하기 힘들 만큼 아주 느리게 진행되고 있었다.
흩날리는 내 머리카락도, 내 머리를 향해 휘두르는 거력마의 팔도.
- 그러니 중요한 것만 얘기해 주겠네. 나는 원래 내 시험을 통과한 후배들에게 안배해 놓은 진전을 전수할 생각이었네. 그러나 불행히도 자네는 아직 내 시험을 완전히 통과하지는 못했지. 다만 그럼에도 내가 이렇게 나온 건 자네가 묵랑을 만든 후 처음으로 보게 된 마음에 드는 후배이자 후보자이기 때문일세. 지금 죽게 하기 아깝다는 뜻이지. 그러니 한 번만 내가 정해 놓은 규칙을 어기고 자네를 돕도록 하겠네. 하지만 이번에 이렇게 하면 자네가 시험을 통과하기 전까진 다신 지금처럼 말을 걸지는 못할 걸세. 이해했나?
자세한 것까진 이해할 수 없었다.
하지만 가장 중요한 것 한 가지는 이해했다.
이 묵랑이라는 존재가 지금 나를 도와주려고 한다는 것.
그러자 묵랑이 다시 웃음을 터트렸다.
- 하하하하! 정답일세! 처음부터 그것만 말할 걸 그랬군. 그럼 잠시 힘을 빼고 지켜보도록 하게. 아, ‘영역’이 풀리면 작별 인사를 할 기회가 없을 듯하니 지금 미리 하도록 하지. 다음에 보세, 선우 공자. 꼭 시험을 통과하기 바라네. 내가 하고 싶어 이렇게 된 것이긴 하지만 이렇게까지 심심할 줄은 몰랐거든, 하하하하!
그 말을 끝으로 시간이 원래의 속도로 급가속됐다.
그러자 거력마의 커다란 손바닥이 바로 내 머리를 후려쳤다.
부아아아앙!
“우와아앗!”
깜짝 놀란 내가 비명을 지를 때였다.
내 몸이 저절로 움직이기 시작했다.
거력마에게 잡힌 묵랑검을 놓더니만 머리를 뒤로 젖혀 놈의 공격을 부드럽게 흘려 냈던 것이다.
“?!”
깜짝 놀란 내가 상황을 파악하지 못했을 때 다시 목소리가 들려왔다.
- 천풍신법의 오의는 바람 그 자체가 되는 것이지. 그렇다면 굳이 그것이 보법이어야 할 필요가 있는가?
머리를 뒤로 젖혀 거력마의 공격을 흘려 낸 나는 그 경력을 이용한 것처럼 부드럽게 뒤로 한 바퀴를 회전해 다시 검을 잡았다.
정말 바람에 휘날린 꽃잎이 빙글 회전하는 것 같은 움직임이었다.
그리고 다시 묵랑검을 잡았을 때 검날에서 미약한 보라색 검강이 얇게 뿜어져 나왔다.
슈우욱!
“큭?!”
신기한 일이었다.
아까는 거력마에게 잡혀 꿈적도 하지 않던 검이 가볍게 뽑혀 나왔던 것이다.
심지어 강기를 뿜어내며 검을 꽉 잡고 있던 거력마의 손에선 얇게 피가 배어 나오고 있었다.
머릿속에서 또 목소리가 들려왔다.
- 批大卻(비대각) 導大窾(도대관) 因其固然(인기고연) 틈이 있는 곳에 칼을 넣어 베는 것이니 그것은 본래 그러한 것을 따를 뿐이다.
그 문구는 본 적이 있었다.
그건… 장자에 나왔던 말이잖아?
베어져 피가 흐르는 손바닥을 힐끗 본 거력마는 이제 분노한 얼굴이 되어 다시 내게 몰아쳐 왔다.
“이놈!”
푸화아아아아악!
놈의 일장이 해일과 같은 기세로 몰려왔다.
너무 근거리라 어떻게 피해 볼 수도 없는 공격이었다.
‘이런!’
내 눈빛이 막막해졌을 때 몸이 또 알아서 움직였다.
사일검법 일초.
일시사일.
‘지, 지금 이걸?!’
빛살이 된 내 검이 몰려오던 해일 한가운데를 꿰뚫었다.
푸욱!
“크아악!”
내 검이 관통한 것은 놈의 손목이었다.
장력을 뿜어내던 손 바로 아래로 검이 박혀 들어갔던 것이다.
- 중요한 것은 얼마나 빠르게 찌를 수 있느냐가 아니라네. 무엇을 볼 수 있고, 언제 어디를 찌르느냐지.
다음 순간, 검강을 미약하게 뿜어내는 것만으로 놈의 두꺼운 손목이 가볍게 떨어져 나갔다.
푸화악!
손목이 떨어지며 그 자리에서 피가 뿜어져 나오자 거력마가 비명을 질러 댔다.
“으아아악! 이 개자식!”
고통스러운 표정의 거력마가 자신의 손목을 바라볼 때였다.
이번엔 내 검이 먼저 놈을 덮쳐 갔다.
선우십삼검 일초.
신응비상.
검영으로 만들어진 빛의 날개.
내가 가장 많이 써 왔던 선우십삼검의 일 초식이었다.
하지만 당황한 내가 속으로 비명을 질렀다.
‘이, 이런 초식으론 놈을 상대할 수가…!’
과연 내 공격을 본 거력마는 코웃음을 쳤다.
놈은 멀쩡한 팔을 가볍게 휘둘러 환검의 날개를 광폭하게 찢어 버리며 소리쳤다.
“이따위 것…?!”
하지만 놈의 손은 내 신응비상을 찢지 못했다.
놈을 향해 덮쳐 가던 검영의 날개가 물결치듯 그 손을 살짝 피하더니만 재차 덮쳐 갔던 것이다.
마치 진짜 새의 날갯짓 같은 움직임이었다.
“어억?!”
푸화악!
“크으으윽!”
빛의 날개가 놈을 덮치자 놈은 사력을 다해 몸을 팽! 회전시키며 뒤로 물러섰다.
하지만 그럼에도 피하지 못한 검영들에 온몸이 피범벅이 된 상태였다.
장난스러운 말투의 목소리가 들려왔다.
- 검은 자유로워야 한다네. 마음에 한계를 두면 검초에도 한계가 생긴다네.
당황스러웠다.
지금 내 몸을 움직이는 것은 내 의지가 아니되, 거력마를 압도하고 있는 것은 어디까지나 내 몸이었다.
이제 갓 절정의 경지를 넘은 내 육체 말이다.
그런데 정확한 시기에 필요한 움직임을 한다는 것 하나만으로 내 몸이 초절정을 바라본다는 거력마를 압도하고 있었던 것이다.
믿기지 않는 일이었다.
- 이제 마지막 선물을 줘야겠군. 다시 만나기 전까지 부디 보중하시게.
내 몸이, 믿어지지 않는다는 듯 경악한 눈빛을 하고 있는 거력마에게로 달려들었다.
그리고 휘두른 검영이 수십, 수백 개로 분열했다.
파바바바바바밧!
아까도 사용했던 선우십삼검의 십삼초, 환검경이었다.
수많은 검영들이 자신의 사방을 둘러싸자 거력마가 이를 악물며 코웃음을 쳤다.
“또 이따위 잔재주냐?!”
그러곤 다시 양손을 교차해 힘을 집중했다.
아까처럼 공력을 방출해 날려 버리려는 모양이었다.
하지만 그때였다.
놈의 주변을 둘러쌌던 수백 개의 환검들이 한순간 실체가 되어 놈을 덮쳤다.
푸화아아아아악!
“끄어어어어어억!”
수십, 수백 개의 검이 모두 놈의 몸에 꽂히자 고슴도치가 된 놈은 숨넘어가는 듯한 비명을 질러 댔다.
놈뿐만 아니라 그걸 해낸 나조차도 믿기지 않는 광경이었다.
온몸을 난도질당한 거력마는 넋이 나간 눈으로 잠시 나를 바라봤다.
그러고는 마침내 그대로 힘없이 무너져 버렸다.
쿠웅!
즉사였다.
잠시 후 어느새 내 몸이 다시 내 통제 하에 들어왔다는 걸 느낄 수 있었다.
하지만 그럼에도 움직일 수 없었다.
넋이 나간 듯 놈의 시체를 바라보며 중얼거렸다.
“이건… 공즉시색이잖아?”
방금 묵랑이라는 그가 내 몸을 통해 펼쳐 낸 것은 선우십삼검의 십오초, 아무리 연습해도 아직 어떻게 펼쳐야 할지 감조차 잡지 못하고 있던 바로 그 초식, ‘공즉시색’이었다.
헛웃음이 나왔다.
“허, 허허, 허허허.”
마치 꿈을 꾼 것 같은 기분이었다.
피를 흘리며 절명해 있는 거력마의 모습만이 이게 꿈이 아니었다는 것을 증명해 주고 있었다.
그때 담장을 넘어 누군가 날아들었다.
“이노옴! 내가 상대...! 응? 선우 소제?”
비장한 표정으로 날아들다 깜짝 놀라 착지한 사람은, 여인을 데리고 도망쳤던 삭무흔 형님이었다.
여인을 어디다 숨겨 놓고 다시 돌아왔던 모양이었다.
돌아와 봐야 거력마에겐 어쩔 수 없다는 걸 알고 있었을 텐데, 굳이 나를 구하겠다고 돌아와 주다니, 마음이 따뜻해지지 않을 수가 없었다.
반가운 마음에 소리쳤다.
“삭 형님!”
하지만 그는 내가 아닌 거력마의 시체를 멍한 얼굴로 바라보며 물었다.
“저게… 어떻게 된 건가? 설마….”
“예? 아, 저건 그러니까, 어, 그게 갑자기 전대의 선배님께서 나타나셔서 저놈을 해치워 버리시고는 가 버리셨습니다.”
무심코 한 말이긴 하지만 맞는 말 아닌가?
갑자기 나타난 전대 고수가 놈을 해치우고 사라진 거 맞잖아?
그래, 딱히 거짓말은 아니지.
적어도 내가 각성해서 거력마를 간단히 해치웠다고 말하는 것보단 설득력이 있을 것 같았다.
하지만 삭 형님은 피에 절어 있는 내 묵랑검을 잠시 바라보더니만 기계적으로 고개를 끄덕이며 대꾸했다.
“아아, 그랬군. 자넨 정말 이 세상 최고의 행운아인 모양이네.”
***
무림맹 군사부.
콰앙!
주먹으로 서탁을 내리친 제갈지강이 분노한 표정으로 구겨진 서신을 노려봤다.
이 서신은 전선으로 내려간 천의검성 해운백에게서 온 것이었다.
“해! 운! 배액!”
제갈지강의 꽉 쥔 주먹이 부들부들 떨리고 있었다.
얼마 전, 전선에서부터 거력마의 북상에 관한 보고를 들은 제갈지강은 이것을 이용해 검성을 다시 위로 불러오겠다는 생각을 했었다.
거력마가 민간 백성들을 학살했다는 거짓 소식을 전한다면 당장이라도 다시 달려올 것이라고 생각했던 것이다.
하지만 돌아온 검성의 답은 제갈지강의 기대와는 전혀 다른 것이었다.
답신에 제일 처음 적힌 내용은 그의 딸 해청연의 행방을 찾지 못했다는 내용이었다.
그 분노가 글씨에서도 느껴지는 것 같았다.
그리고 혈교의 마두들이 전선의 근무자들을 납치하는 일이 이제껏 수없이 있어 왔었다는 사실을 알게 되었고, 이 사실이 왜 무림맹에서 공론화되지 않았는지, 왜 이제껏 아무런 대책도 마련하지 않았는지에 대한 분노 섞인 성토가 적혀 있었다.
그걸 읽은 제갈지강은 안타까운 얼굴로 눈을 질끈 감았다.
“결국….”
하지만 내용은 거기서 끝나지 않았다.
그 다음으로는 근무자들의 열악한 처우를 개선해 달라는 요구도 있었다.
목숨을 걸고 혈교도와 싸우고 있는 근무자들에 대한 보상이 왜 이리 박한지, 휴가는 또 왜 이렇게 짧고 근무 환경은 왜 또 이렇게 열악한지를 성토하는 내용이었다.
그걸 읽은 제갈지강은 눈살을 찌푸리며 신음 소리를 냈다.
“으으음.”
전혀 관심을 두지 않았던 부분이었다.
어차피 전선의 근무자들이 소모품에 불과하다는 인식 때문이었을 것이었다.
하지만 그 모든 내용 중에서도 무엇보다 제갈지강의 가슴을 섬뜩하게 했던 것이 있었다.
그것은 근무 기간을 모두 채우고 전역한 근무자들의 행방이 묘연하다는 내용이었다.
전역자들의 의견을 듣기 위해 수소문해 봤는데 어디에서도 전역자들을 발견할 수 없었다는 내용이 서신에 적혀 있었던 것이다.
그걸 읽은 제갈지강은 부들부들 몸을 떨었다.
“운백, 자네가 결국….”
제발 몰랐으면 해 줬던 사실에 검성은 결국 접근하고야 말았다.
이토록 짧은 시간 동안, 그는 전선을 모조리 파헤칠 듯 전방위적으로 조사를 진행하고 있었던 것이다.
이대로는 음영대에 관한 사실이 드러나는 것도 시간문제인 것 같았다.
그리고 마지막으로 검성은 지금은 도저히 다시 돌아갈 수 없지만, 맹에 돌아가게 된다면 이 모든 사실들에 관해 심도 깊게 의논해 보자며 끝을 맺었다.
“심도 깊은… 의논이라고?”
말은 의논이라고 했지만 제대로 책임을 추궁하겠다는 얘기라는 것은 굳이 직접 듣지 않아도 알 수 있었다.
제갈지강은 분노했다.
아니, 사실은 두려웠다.
그가 전선에 관한 모든 것을 알게 되는 것이, 그리고 그것을 만천하에 공개하는 것이.
이제껏 어떻게든 그를 빨리 다시 돌아오게 할 생각만 했었는데, 그건 제갈지강의 큰 착각이었다.
검성은 절대 다시 무림맹으로 돌아와선 안 됐던 것이다.
뭔가 대책이 필요했다.
한동안 고민하던 제갈지강은 붓을 들어 서신을 쓰기 시작했다.
바로 혈마에게 보내는 서신이었다.
처음 내용은 거력마의 북상에 관한 항의였다.
이런 일이 반복되면 상호협정에 관해 신뢰할 수 없으니 혈교 쪽에서 알아서 해결하는 성의를 보여 달라는 것이었다.
하지만 잠시 망설이다 그 다음으로 적은 내용은, 바로 천의검성에 관한 것이었다.
제갈지강은 마침내 그의 친구인 검성을 치워 버리기로 결심했던 것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