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68화 적하신검
그러자 정연 소저가 놀란 눈으로 반문했다.
“뭐? 화 사형에게?”
“네, 화 사형이라면 절대 저희 말을 무시하시지 않을 거예요. 그분이 청성을 움직여 주신다면 사문의 어른들도 무시하실 수 없을 거구요.”
화 사형?
우리는 의아한 눈빛으로 서로 시선을 교환했다.
여인들의 문파인 아미파에 사형이란 존재가 있을 수 있는 건가?
게다가 청성을 움직여?
역시 답답함을 참지 못하는 비사영이 물었다.
“그 화 사형이라는 분이 대체 누굽니까?”
그러자 정안 소저가 마치 첫사랑을 떠올린 소녀같이 환한 얼굴이 되어 대답했다.
“그분은 너무 멋진 분이세요! 아미의 모든 여제자들이 사모하고 있는 분이시기도 하죠!”
음, 이분도 당황스럽군.
그런 걸 물은 게 아니었는데….
일단 남자인 건 확실한 모양이었다.
응? 근데 비사영 녀석, 표정이 좀 이상하네?
살짝 당황한 것처럼 보이는데?
녀석은 첫사랑을 생각하듯 두 손을 꼭 모아 쥔 정안 소저를 보며 살짝 불편한 표정을 짓고 있었다.
다른 사람이라면 모르겠지만 나는 그 표정 변화를 명확하게 눈치챌 수 있었다.
이 녀석 설마?
그때 정연 소저가 자기 사매의 설명에 한숨을 내쉬고는 다시 설명했다.
“그분은 청성파의 문도십니다. 그것도 청성파 청광진인의 제자분이시죠.”
청광진인? 어디서 들어 봤던….
응?! 청광진인이라고?!
그 이름에 우리는 깜짝 놀라 반문했다.
“청광진인이라면 설마…?!”
그러자 정연 소저가 고개를 끄덕이며 확인해 줬다.
“네, 천하오괴 중 청성괴선이라고 불리시는 그분이 맞습니다.”
세상에!
생각보다 너무 거물이어서 당황스러웠다.
일제 이왕 삼성 사마 오괴 중 오괴의 일인인 청성괴선 청광진인의 제자라니.
청성괴선은 우리가 만나 봤던 여령색마 손은상, 무림맹주이신 협왕 모용검, 혈교의 사혜혈마 전무광과 동급의 인물이었던 것이다.
그리고 이어진 정연 소저의 설명은 더욱 놀라웠다.
괴선 청광진인의 네 번째 제자인 적하신검 화영빈은 십여 년 전 당시의 아미검봉이자 사천제일미인이라 불리던 정선 소저의 연인이었다고 했다.
협객행 중 우연히 마주쳤던 두 사람은 순식간에 사랑에 빠졌고, 그 후로 이어진 몇 년의 교제 끝에 각자의 사문으로부터 혼인까지 허락받을 수 있었다.
그 얘기를 듣던 중 나도 모르게 중얼거렸다.
“괴선의 제자와 아미검봉의 결합이라니. 어마어마한 일이었겠군요.”
그러자 정연 소저 또한 무겁게 고개를 끄덕였다.
“엄청난 일이었죠. 청성파 제일 기재와 아미파 제일 기재의 혼인이었으니까요. 그때의 전 어렸지만, 당시 장문인께서 두 분의 혼인을 허락하셨을 때 온 산이 시끌벅적했던 것이 아직도 기억이 납니다.”
그때까진 누구도 아미파와 청성파 제일의 인재들이 결합해 행복하게 살게 될 것이라는 걸 의심하지 않았다.
하지만 세상은 한 치 앞도 알 수 없는 것, 하필 그들이 혼인을 앞두고 있을 때 정혈대전이 일어나고 말았다.
아미파는 여인들의 문파이기에 수많은 제자들이 혈교의 마두들에게 희생당했던 과거를 갖고 있었다.
그렇기에 절대 정혈대전을 좌시하지 않았고, 전력을 기울여 혈교 정벌을 준비했다.
당시 아미파의 장문인이었던 결허 사태는 물론, 다수의 장로들까지 참전했을 정도이니 결허 사태의 제자였던 정선 소저가 참전하는 것은 너무나도 당연한 일이었다.
하지만 연인인 그녀가 참전했음에도 적하신검 화영빈은 참전하지 않았다.
아니, 참전하지 못했다.
“사랑하는 여인이 참전했는데 정작 남자가 참전하지 않았다고요? 왜죠?”
이유를 묻는 비사영에게 정연 소자가 설명해 줬다.
“지금도 그렇지만 청성파는 하나의 문파라기보다는 여러 무맥들의 연합체와 같은 성격이 강합니다. 그러다 보니 청성파의 장문인은 저희 아미파의 장문인처럼 문파의 방향을 정하는 결정권자라기보다는 여러 무맥들의 의견을 조율하는 조율자 같은 역할을 하곤 하구요. 그러니 각 무맥들이 어떻게 행동하는가에 대해서는 거의 참견할 권리가 없었던 것이지요.”
그 말을 들은 나는 문득 조금 신기한 기분을 느낄 수 있었다.
구대문파의 장문인이기에 마치 무소불위의 권력자처럼 느껴졌었는데, 청성파의 장문인이란 자리는 내가 상상하던 그런 자리가 아니었던 것이다.
정연 소저가 계속해서 말을 이었다.
“당시 청성의 장문인이셨던 청원진인께선 무림맹과 그리 우호적인 관계가 아니셨다고 합니다. 그래서 청성파는 원래 정혈대전에 참전할 생각이 없었지만, 그다음 장문인이 되셨던, 그러니까 현 장문인이신 청명진인께서 추종자들과 함께 독립적으로 참전하셨습니다.”
“그럼 적하신검 화영빈 대협께선 그쪽과 계열이 다르셨던 모양이군요.”
“네, 다른 것이 아니라 완전히 반대편이었죠. 지금도 청성 장문인이신 청명진인과 괴선 청광진인이 서로 앙숙에 가깝다는 것은 유명한 얘기입니다.”
전혀 몰랐던 얘기였다.
청성파의 장문인이 청성파 최고의 고수이자 무림의 절대자 중 한 명인 괴선과 앙숙이라니.
문파의 자랑인 최고수와 장문인이 서로 앙숙인데도 문파가 굴러갈 수가 있나?
구대문파에 속한 곳들이라면 다들 비슷비슷할 거라고 생각했는데, 역시 세상은 넓고 다양한 모양이었다.
문득 이제껏 들었던 얘기를 정리해 봤다.
“아무튼 그래서 혼인을 약속했던 두 사람 중 정선 소저는 정혈대전에 참전했고, 화영빈 대협은 참전하지 못했다는 거로군요. 그런데 정혈대전이 끝나고 정선 소저가 돌아오지 못했을 테니 혼인은 자연스럽게 이루어지지 못했을 거구요.”
내 말에 두 소저 모두가 침통한 표정으로 고개를 끄덕였다.
비단 정선 소저뿐만이 아니라 정혈대전에 참전했던 아미파 문도들이 아무도 돌아오지 못했으니, 아미파 제자인 그녀들에겐 아마 세상에서 가장 비극적인 사건이 아니었을까 싶었다.
너무 침울한 표정을 하고 있어 먼저 말을 꺼내기가 좀 망설여졌는데, 다행히도 정연 소저가 먼저 마음을 추스르고 다시 얘기를 이어 갔다.
“화영빈 대협, 화 사형께선 그렇게 사랑하는 연인을 잃어버리셨지만, 그 후로도 아미파에 대한 의리를 저버리시지 않으셨습니다. 십 년이 지나도록 오직 정선 사저만을 그리워하시며 마치 진짜 처가를 대하듯 늘 아미파의 어려움을 신경 써 주시고 도와주시곤 하셨어요. 그런 그분은 지금의 아미파에게 있어선 세상에서 가장 감사한 은인이라고 할 수 있습니다. 그분마저 안 계셨다면 아미파의 제자들이 얼마나 막막했을지…. 그래서 아미파 제자들은 감사한 마음과 친근한 마음을 모두 담아 그분을 화 사형이라고 부르곤 합니다.”
“아아아.”
놀라운 얘기였다.
죽은 지 십 년이 지난 정인을 잊지 않고 여전히 마음을 간직한 채 살고 있다니.
심지어 그녀에 대한 마음만이 아니라 그녀의 사문에 대해서까지 계속해서 신경을 쓰며 살고 있다니.
너무 비현실적이어서 이야기 속에서나 나오는 사람같이 느껴지지 않는가.
하지만 그 사람이 훌륭한 분이라는 건 일단 그렇다 치고 나는 조금 더 현실적인 부분에 집중하기로 했다.
무려 무림의 절대자인 괴선의 제자이자 구대문파인 청성파의 문도이고, 거기다 아미파의 일을 자기 일처럼 신경 써 주는 사람이란 말이지?
좋은데?
거기다 한 가지 조건만 더 충족되면 좋았을 텐데.
나는 문득 눈을 빛내며 정연 소저에게 물었다.
“아까 괴선께서 청성파의 현 장문인과 사이가 좋지 못하다고 하셨죠? 그럼 괴선의 제자이신 화 대협도 청성에서의 영향력이 그리 높지는 않겠군요.”
하지만 내 말에 두 소저는 단호하게 고개를 저었다.
“아니에요. 청성은 장문인이신 청명진인을 추종하는 파벌보다 오히려 괴선 청광진인을 추종하는 파벌이 더 크답니다. 그래서 청성에서 화 사형의 영향력은 오히려 청명진인보다도 더 높을 거예요.”
…최곤데?
너무 완벽하잖아?
주먹과 손바닥을 팡! 맞부딪치며 말했다.
“그럼 됐군요! 그분을 찾아갑시다! 그분에게 이 상황을 말씀드리고 청성을 움직여 달라고 부탁드립시다!”
그러자 정연 소저가 살짝 망설이며 물었다.
“하지만… 아미산에도 보고를 드리긴 해야 할 텐데요.”
씨익 웃으며 대답해 줬다.
“보고는 당연히 하셔야죠. 단, 서신으로 합시다.”
“…네?! 서신으로요?!”
사문에 올리는 보고를 서신으로 하라는 소리에 무척 당황하는 그녀에게, 납득할 수밖에 없는 이유를 설명해 주었다.
“때론 직접 보고하는 것보다 서신이 더 효과적일 수도 있습니다. 서신을 보내면 적어도 사문의 명령을 어긴 제자에 대한 징계보단, 그 제자가 말한 내용에 좀 더 신경을 쓰게 될 것이 아닙니까? 거기에 증거만 약간 첨부해서 보내 주면 아무리 정협방과 친하고 싶은 분들이라고 해도 일단 움직이기는 해야 할 겁니다. 더군다나 만약 저희가 아미파 제자를 구하기 위해 청성을 움직일 수만 있다면 더더욱 열심히 움직이게 되실 거구요.”
그러자 그간 묵묵히 듣고만 있던 삭무흔 형님이 내게 물었다.
“그럼 자네는 이 소저들과 함께 움직일 생각인가?”
아무래도 검성께 청연 소저의 호위를 부탁받은 삭 형님은 청성까지 가야 한다는 것이 별로 내키지 않는 모양이었다.
그에겐 웃으며 말해 줬다.
“삭 형님께선 돌아가셔서 이 일을 조원들에게 좀 알려 주시면 감사하겠습니다. 그리고… 발신인을 바꿔서 무림맹에도 보고해 주실 수 있겠습니까?”
그러자 그가 날카로운 눈빛으로 반문했다.
“맹도 끌어들일 생각인가?”
“예, 대응 방법은 많을수록 좋으니까요. 그들도 정협방이 혈교의 전진기지라는 것을 알게 되면 어떤 식으로든 움직이겠지요.”
만약 움직이지 않는다면 그땐 진짜 그들이 혈교의 북상을 묵인했거나, 아니면 아예 한통속일지도 모른다는 의심까지 해야 한다는 것은 굳이 말하지 않았다.
그리고 서둘러 한마디를 덧붙였다.
“아, 그리고 만종임 대주께는 반드시 이 사실을 알려 달라고 전해 주십시오. 혹시라도 정협방이 혈교라는 것을 모르는 그분이 뭔가 사고를 치시지 않을까 걱정되는군요.”
내 말에 삭 형님이 피식 웃으며 대답했다.
“설마 그래도 무림의 명숙인데 그렇게까지야 하겠나. 어쨌든 알겠네. 난 그럼 일단 사매에게 돌아가 있겠네.”
삭 형님은 가는 길에 나머지 여인들도 자신이 돌려보내 주겠다고 말하며 떠났다.
하지만 이때는 알 수 없었다.
그 일 때문에 하루가 늦어 버리고 말았다는 사실을….
***
그날 밤.
귀주성 금사에 위치한 운씨세가.
십이 대주인 증악도객 만종임과 십이 대 일 조원들은 운씨세가에 침투하기 위해 담장 그늘에 숨어 있었다.
십이 대 일 조장 도무곤이 만종임에게 물었다.
- 대주님, 이게 정말 잘 하는 짓일까요?
그러자 만종임이 지긋지긋하다는 표정으로 대답했다.
- 대체 뭐가 그렇게 불안한 것이냐?! 그저 운씨세가에 혈교의 무리들이 있는지 확인만 하고 빠져나오자고 하지 않았더냐?! 그것도 우리만 가는 것도 아니고 세 군데의 의심 가는 장소 중 구소협의 정협방 인원들이 두 군데, 우리가 한 군데만 조사해 보자는 것이다! 그런데 대체 뭐가 그렇게 불만이란 말이냐?!
신경질적인 만종임의 대답에 도무곤은 더 이상 말을 꺼내지 못했다.
만종임의 말대로 계획 자체에는 무리가 없어 보이긴 했다.
다만 도무곤이 불안한 것은 그 모든 계획이 정협방의 백옥지룡 구유상, 그의 머릿속에서 나왔다는 것에 있었다.
그가 수립한 계획을 자신들은 그저 따라서 움직이기만 하고 있었던 것이다.
물론 백옥지룡 구유상이 소문대로 뛰어난 기재라는 것까지는 틀림이 없었다.
관옥 같은 미남자에 무공도 강하고 지략과 지도력도 갖춘 듯했으니 말이다.
‘하지만… 아직 그를 믿을 수가 없다.’
문제는 바로 이 부분에 있었다.
아직 신뢰할 수 없는 이에게 너무 많은 것을 맡겼다는 느낌을 도무지 버릴 수가 없었던 것이다.
너무도 불안했다.
하지만 결정권자가 도무곤 자신이 아니기에 어쩔 수가 없었다.
그런 도무곤에 비해 만종임 대주는 만난 지 얼마 되지도 않는 구유상을 전적으로 신뢰하고 있는 것 같았다.
그 근거가 그저 정파인 정협방의 신룡이라는 것뿐이라는 점이 도무곤을 더욱 불안하게 만들고 있었다.
그때 만종임이 전음을 보냈다.
- 이제 대충 삼경이 된 것 같군. 침투하도록 하자.
도무곤은 내심 한숨을 내쉬면서도 조원들에게 수신호를 보냈다.
이왕 여기까지 왔으니 어쩔 수가 없었다.
싸우는 것도 아니고 그저 정찰만 하고 돌아갈 생각이니 큰 문제가 생길 것 같지도 않았고 말이다.
그렇게 그들은 모두 운씨세가의 담장을 넘었다.
그러자 만종임이 운씨세가의 허술한 방비를 비웃으며 도무곤에게 전음을 보냈다.
- 야간 침입에 대한 방비가 허술하기 그지없구나. 보초를 이따위로 세우다니, 하여간 사파의 놈들이란, 쯧.
이 와중에도 사파를 비웃는 것에 여념이 없는 만종임이었다.
하지만 그의 말을 한 귀로 흘리며 도무곤은 안도의 한숨을 내쉬었다.
이런 방비라면 별문제 없이 정찰을 끝내고 돌아갈 수 있을 것 같지 않은가.
정말 다행이었다.
그러나 잠시 후, 그들이 구유상이 알려 준 내부 지도를 따라 깊숙한 곳까지 침입했을 때였다.
전각들 사이를 지나가고 있을 때 갑자기 주변 담장에서 불이 환하게 타올랐다.
화아아악!
깜짝 놀란 만종임이 소리쳤다.
“뭐, 뭐냐?!”
그것은 수많은 횃불이었다.
그들을 완전히 둘러싼 수많은 횃불들이 어느새 사방을 포위하고 있었던 것이다.
그때 누군가가 외쳤다.
“정보대로 진짜 살수들을 보냈구나! 더러운 정협방 놈들! 모두 쏴라!”
그 말을 들은 도무곤이 경악했다.
뭐라고?! 정보대로라고?!
도무곤은 자신의 불길한 예감이 맞았다는 것을 깨달을 수 있었다.
하지만 지금 깨달아서는 아무런 의미가 없었다.
만종임을 비롯한 조원 모두가 경악해 어쩔 줄 몰라 하고 있을 때, 사방에서 그들을 향해 화살과 암기가 쏟아지기 시작했던 것이다.
퓨슈슈슈슈슉!
피피피피피핑!
그곳은 지옥이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