69화 청성파로-1
“…그래서 두 사람은 아미파의 두 소저와 함께 청성파로 향하고 있는 상태네.”
아침 일찍 찾아온 삭무흔의 얘기가 끝나자 모여서 듣고 있던 사람들 중 천주은이 고개를 끄덕이며 말했다.
“역시 정협방이었네요.”
그러자 제원영이 어이없다는 듯 허탈하게 웃으며 중얼거렸다.
“하, 그럼… 소면마군 얘기도 사실이겠군요.”
그의 말에 삭무흔의 표정이 의아해졌다.
분위기를 보니 어쩐지 정협방이라는 것을 알고 있었던 것 같지 않은가.
게다가 소면마군은 또 뭐고?
제원영의 말에 조원들의 분위기가 침중해지자 삭무흔은 의아한 얼굴로 물었다.
“정협방이라는 걸 알고 있었나? 게다가 소면마군이라니, 그건 또 무슨 얘긴가?”
그의 질문에 설풍이 대표로 설명하기 시작했다.
“사실은….”
선우진과 비사영, 삭무흔이 거력마의 마두들을 쫓아간 후 남은 사람들은 주점에서 난동을 피우고 있던 자를 붙잡을 수 있었다.
자신들의 시선을 돌리는 역할을 한 혈교도임에 틀림없다는 해청연의 판단 덕분이었다.
그자가 혈교도라는 사실은 그가 사용한 무공을 통해서도 바로 확인할 수 있었고, 그래서 조원들은 그를 고문해 정보를 빼냈다.
그런데 거기서 상상치 못했던 놀라운 이름 하나가 튀어나오고 말았다.
바로 소면마군 사원양, 정혈대전 때 수많은 정파인들을 참살한 초절정의 마두인 그가, 바로 정협방의 정체가 알려지지 않은 방주라는 사실이었다.
너무 엄청난 이름에 조원들은 일단 판단을 보류하기로 했다.
혈교도가 죽기 전에 거짓 정보를 내뱉은 걸 수도 있다는 판단 때문이었다.
그런데 이번에 삭무흔이 알아 온 정보대로라면 그자의 말대로 정협방이 진짜 혈교의 전진기지가 맞다는 얘기가 아닌가.
그렇다면 소면마군 사원양에 대한 얘기도 맞을 확률이 높을 것 같았다.
삭무흔이 경악한 얼굴로 되물었다.
“소면마군 사원양이라고?!”
소면마군 사원양은 거의 구대문파의 장문인급 고수로, 예전에 설풍이 간신히 버텨 낼 수 있었던 탐혈마군 지광옥보다도 오히려 더 높이 평가받는 자였다.
심지어 그때 지광옥이 처음부터 최선을 다하지 않았기에 버틸 수 있었다는 걸 생각하면, 지금 전력으로 사원양을 상대하는 건 거의 불가능하다고 보는 것이 옳을 것이었다.
사람들의 얼굴이 점점 더 어두워질 때 해청연이 무표정한 얼굴로 입을 열었다.
“너무 비관적으로만 생각할 필요는 없어요. 우리만으로 상대할 수 없는 자임엔 분명하지만, 선우 공자가 청성파를 움직일 수만 있다면 또 그렇게 대단한 자도 아닐 거니까요. 또 삭 오라버니는 선우 공자 말대로 무림맹에 정보를 좀 흘려주세요. 맹 수뇌부가 제정신이라면 이번 일이 상호불가침 협정을 깬 일이고, 혈마를 압박할 수 있는 기회라는 걸 알 거예요. 절대 이 기회를 놓칠 리 없어요.”
하지만 그렇게 말한 해청연은 속으로 중얼거렸다.
‘물론 제정신이라면 얘기겠지만요.’
그녀 또한 선우진의 생각처럼 이 모든 게 무림맹의 묵인하에 벌어진 일일 수도 있다는 가능성을 무시할 수 없었던 것이다.
그때 문득 천주은이 물었다.
“근데, 그러면 우리는 이제 어떻게 해야 돼요? 거력마가 죽고 정협방이 혈교의 전진기지라는 것을 알았으면 굳이 계속 여기에 있을 필요는 없는 거 아닌가요?”
그녀의 말도 일리가 있었다.
애초에 산검문에 들어왔던 이유가 혈교의 무리가 아닐 것이라고 확신한 산검문에서 거력마의 일당들을 끌어내기 위함이 아니었던가.
그러니 산검문에 들어온 목적은 이미 모두 다 달성된 것이나 다름없었다.
그녀의 말에 제원영이 고개를 끄덕이며 동의했다.
“맞는 말이군요. 게다가 만약 나갈 거라면 빨리 나가는 것이 좋을 것 같습니다. 정협방에서 보낸 무사 천 명 이상이 귀주성 방향으로 집결 중이라고 하지 않습니까. 그것도 절정 고수 세 명과 함께 말이지요.”
지난번 싸움에서야 이런 저런 상황이 맞아 쉽게 이길 수 있었지만, 원래 이백 명의 병력으로 오백 명의 적과 싸우는 일이 그렇게 쉬울 리가 없었다.
그땐 정말 천운이었던 것이다.
하물며 천 명의 적을 상대로 싸워야 한다면 아무리 절정 고수들이라 해도 생명을 장담할 수 없을 것이었다.
그러자 나서유가 불편한 얼굴로 말했다.
“하지만 우리 목적을 이뤘다고 해서 바로 이 사람들을 버리는 건 좀 마음에 걸려요. 그래도 그간 함께 지냈던 사람들인데…. 우리마저 없으면 이들은 정말 몰살당하게 될지도 모르잖아요.”
그 말에 씨익 웃은 제원영이 대답했다.
“역시 나 소저는 정이 많으시군요. 하지만 그렇게 걱정하진 않으셔도 될 겁니다. 이제 곧 운씨세가의 병력들과 합류한다고 하지 않습니까? 산검문의 병력도 이제 거의 사백 가까이 되니 만약 운씨세가와 합류한다면 천 명까지는 안 되도 싸워 볼 만큼은 될 겁니다. 절정 고수의 수 또한 운씨세가의 두 명이 더해지면 모자라지 않을 거구요. 그러니….”
제원영이 그렇게 얘기하고 있을 때였다.
갑자기 저쪽에 모여 있던 낭인들의 분위기가 술렁거리기 시작했다.
그들의 경악한 외침이 따로 떨어져 있는 이곳까지 들려오고 있었는데, 그 내용이 심상치 않았다.
“뭐라고?! 운씨세가가 습격을 받았다고?!”
“운악검이 죽어?!”
“그럼 어떻게 되는 거야?!”
들려오는 외침에 서로 시선을 교환한 조원들은 먼저 무슨 일인지부터 알아보기로 했다.
그리고 설풍이 가서 그들에게 듣고 온 사실은 충격적인 것이었다.
지난밤, 십여 명의 정협방 살수들이 운씨세가를 습격했는데 그들 중 놀라운 실력자가 포함되어 있었다는 것이었다.
무려 팔십 년 이상의 내공을 지닌 것으로 보이는 그 습격자는 운씨세가의 정예들을 백 명 이상 참살했고, 운씨세가에 소속된 절정 고수도 두 명 중 한 명을 살해했다는 모양이었다.
그러니 운씨세가의 입장에선 단 한 번의 습격을 당한 것만으로 전력이 반파되고 만 것이었다.
아직 정확한 소식은 전해지지 않았지만 이대로라면 운씨세가의 합류는 불가능할 것 같았다.
그 소식을 들은 제원영이 헛웃음을 지었다.
“하, 이렇게 공교로울 때가…. 이젠 나 소저 말씀대로 우리가 떠나면 이들은 다 몰살당하고 말겠구려.”
그때 해청연이 심각한 표정으로 중얼거렸다.
“내공 팔십 년 이상의 절정 고수라면…. 설마?”
그러고는 평범한 낭인무사로 꾸민 채 합류해 있던 삭무흔에게 황급히 말했다.
“삭 오라버니! 그 습격자들의 정체와 생사에 대해서 좀 알아봐 주시겠어요?!”
그러자 갑작스러운 해청연의 부탁에 살짝 놀랐던 삭무흔이 선선히 고개를 끄덕였다.
“그들에 대해? 그래, 알았다.”
평소 같지 않게 굳어진 해청연의 표정에 설풍이 의아한 얼굴로 물었다.
“왜 그러시오, 해 소저? 그 습격자들에 대해 뭔가 짐작 가는 거라도 있으시오?”
그러자 입술을 깨물었던 해청연이 입을 열었다.
“아무리 정협방에 고수가 많아도 내공 팔십 년 이상의 고수를 일개 살수로 쓴다는 건 쉽지 않은 일이에요. 그리고 무엇보다도…. 우리는 내공 팔십 년 이상의 고수를 한 명 알고 있잖아요? 그것도 운씨세가를 탐색하고 있던.”
모두의 머릿속에 순간 십이 대주 만종임의 얼굴이 떠올랐다.
해청연이 누구를 말하는지를 바로 깨달은 조원들의 얼굴은 순식간에 창백해지고 말았다.
“서, 설마, 아무리 그래도….”
“그러니 빨리 확인해 봐야죠.”
하지만 해청연의 예상은 이번에도 틀리지 않았다.
삭무흔이 알아 온 소식에 따르면 그들은 만종임 대주와 십이 대 일 조원들이 분명한 모양이었다.
그리고 그들은 그 싸움으로 결국 몰살당했고 말이다.
삭무흔은 착잡한 표정으로 이렇게 말했다.
“도주하고자 하면 얼마든지 도주할 수 있었다는데, 동료들이 죽자 내공 팔십 년 이상으로 보였던 그 고수는 마지막까지 광분해서 날뛰었다는군. 숨을 거두는 순간까지도 사파를 저주하는 욕설을 날리면서 말일세.”
“하아.”
모두가 무거운 한숨을 내쉬었다.
그리 마음에 드는 동료는 아니었지만, 그렇다 해도 사망한다는 건 전혀 다른 얘기였다. 더군다나 그의 고집에 의해 끌려다니던 십이 대 일 조원들도 모두 함께 사망했다는 얘기가 아닌가.
동료들의 죽음에 익숙한 비룡대원들이라 해도 침통한 마음이 드는 것은 어쩔 수 없었다.
그 와중에 해청연이 인상을 찌푸리며 말했다.
“만 대주님은 마지막까지도 큰 사고를 치고 가시는군요. 하필 이 시기에 운씨세가의 전력을 반파해 버리다니. 덕분에 산검문의 운명도 풍전등화가 되어 버렸어요. 이번에도 결국 선우 공자의 예상이 정확했군요. 한발 늦어서 그렇지.”
냉정한 얘기였지만 그녀의 말은 분명 사실이었다.
덕분에 현재 그들이 속해 있는 산검문의 운명은 이제 풍전등화가 되어 버리고 말았던 것이다.
모두의 분위기가 침중해진 가운데 천주은이 조심스럽게 물었다.
“근데…. 그러면 저희는 어떻게 해야 하죠?”
쉽지 않은 질문이었다.
해청연도, 설풍도, 쉽게 대답할 수가 없었다.
***
나와 비사영, 정연과 정안 소저는 서둘러 청성파를 향해 달려가는 중이었다.
하지만 아직 두 소저의 몸 상태가 완전히 회복되지 않았기에 그리 속도가 나진 않았다.
그녀들은 반 시진도 경공을 전개하지 못한 채 지친 기색이 역력해졌고, 그러자 정연 소저가 고통스럽게 숨을 몰아쉬며 우리에게 사과했다.
“하아, 하아, 죄송합니다. 저희 사저를 구하기 위한 일인데 두 분 소협께 오히려 짐이 되는 처지라니….”
그러자 옆에 있던 정안 소저가 애써 씩씩하게 웃으며 말했다.
“그래도 저희 걱정은 마시고 계속 가셔도 돼요. 보기엔 이래도 아미의 제자들은 엄청 튼튼하답니다! 하하하!”
하지만 그렇게 말하는 정안 소저의 얼굴은 핏기 하나 찾아볼 수 없이 창백해져 있었다.
비사영이 안쓰러운 표정으로 말했다.
“그런 얘기는 비틀거리지 말고 하셔야 하는 거요, 소저.”
“아, 보이나요? 아하하! 들켰네요.”
그렇게 말하며 웃던 정안 소저는 갑자기 균형을 잡지 못하고는 다리가 풀린 듯 픽 쓰러졌다.
“에구!”
“정안아!”
하지만 그녀의 앞에 있던 이는 속도 하나만 놓고 봤을 땐 설풍 조장조차 접어주는 신법의 귀재 비사영이었다.
비사영은 어느새 정안 소저의 옆으로 이동해 쓰러지던 그녀의 팔을 붙잡아 줬다.
턱!
갑자기 나타나 자신을 부축해 준 비사영에게, 정안 소저가 놀란 표정으로 감사의 인사를 전했다.
“아! 감사… 합니다. 엄청 빠르시네요.”
그러자 미세하게 얼굴이 붉어진 비사영이 그녀의 눈을 피하며 꾸짖듯 말했다.
“그런 몸 상태로 대체 어떻게 이동하겠다는 거요?! 진! 오늘은 객잔을 잡고 그냥 쉬는 게 낫겠다!”
그의 말에 정안 소저가 풀 죽은 표정으로 사과했다.
“아, 죄, 죄송해요.”
음, 저 서툰 녀석.
굳이 저렇게 말할 필요가 있었을까 싶지만.
뭐, 틀린 얘기는 아니었다.
나는 부드럽게 웃어 주며 그녀들에게 말했다.
“사영의 말마따나 오늘은 객잔으로 가서 푹 쉬시지요. 먼저 몸부터 제대로 회복시키시는 게 일정을 더 단축시킬 수 있는 지름길일 것 같습니다.”
내 말에 정연 소저가 깜짝 놀라서 황급히 고개를 저었다.
“아, 아닙니다! 그냥 노숙을 해도 돼요! 그렇게까지 안 하셔도…!”
그러자 비사영이 답답하다는 듯 약간 짜증을 내며 말했다.
“노숙을 했다가 몸이 더 안 좋아지고, 그래서 사저를 구하지 못하게 돼도 후회하지 않을 자신이 있으시오?”
“네, 네?”
비사영의 말에 정연 소저의 얼굴이 당황의 빛으로 물들었다.
하지만 비사영은 거기서 멈추지 않았다.
“뭐가 더 중요한지를 생각하시오. 소저의 체면이요, 사저의 안위요?”
“그, 그건….”
나는 비사영에게 그만하라는 눈짓을 하고는 그의 말을 부드럽게 이어 받았다.
“지금 당장의 신세는 나중에라도 갚으실 수 있습니다. 하지만 소저들의 사저에겐 나중이 없을 수도 있지 않겠습니까? 가장 중요한 것이 그것이라면 나머진 일단 미뤄 두셔도 됩니다.”
“아….”
정연 소저가 붉어진 얼굴로 고개를 푹 숙이고는 아무 말도 못 하자 비사영이 툭 내뱉듯 말했다.
“내가 먼저 가서 방을 잡고 음식을 시켜 놓을게. 소저들을 데리고 천천히 따라와. 아, 오늘 비용은 죽다 살아난 기념으로 내가 쏜다. 와서 맘껏 먹어라.”
그러고는 바로 몸을 날려 순식간에 사라졌다.
비사영의 말을 들은 나는 문득 깨달을 수 있었다.
‘아, 이 소저들에겐 지금 돈이 없겠구나’라는 걸.
아마 그래서 객잔으로 가자는 말에 그렇게 기겁했던 모양이었다.
아니나 다를까, 소저들이 뭐라고 말은 못 한 채 우물쭈물하고 있었다.
녀석, 은근히 섬세한 구석이 있다니까.
아니면 마음에 드는 여인이 있어 섬세해진 건가?
빙긋이 웃으며 그녀들에게 말했다.
“오늘 저 녀석이 거력마에게 죽을 뻔하다 살아났거든요. 덕분에 포식하겠네요. 소저들도 마음껏 드시지요. 저 녀석 돈 많습니다.”
물론 비사영의 돈 대부분이 내가 흑상방을 털어서 벌어 준 것이긴 했지만, 그래도 많은 건 사실이지 않은가.
어쩐지 뿌듯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