71화 청성파로-3
여인들이 납치된 것이 정협방의 짓일 거란 얘길 듣고 처음 떠오른 생각은 ‘그럼 구해야 하지 않을까?’라는 생각이었다.
하지만 정연 소저가 침중한 얼굴로 고개를 저었다.
“안타깝지만 지금 저희가 여기에 매달려 있을 수는 없어요. 저들이 정말 그때 그들과 같은 자들이라면 이번 역시 철저하게 숨어 있을 테고, 그들을 찾아내기 위해선 많은 시간이 필요할 테니까요. 정인 사저는…. 그렇게 오랜 시간 동안 기다리시지 못할 거예요.”
그렇게 말한 정연 소저는 고개를 푹 숙였다.
그런 얘기를 해야 하는 자신이 무척 비참한 모양이었다.
그녀의 마음이 이해가 갔다.
소중한 사저를 구하는 것이 물론 우선시되어야 하겠지만, 정파의 기둥 중 하나인 대아미파의 제자로서 자신의 사저를 구하기 위해 다른 사람을 외면해야 한다고 말하는 것이 떳떳하게 느껴지진 않을 테니 말이다.
그래서 우리는 그 결정에 관해서 더 말하지 않았다.
다만 그때의 일에 관해 물어봤다.
“그때 얘기를 좀 해 주시겠습니까? 어떻게 정협방의 꼬리를 잡게 된 겁니까?”
그러자 그녀가 해 준 얘기는 그랬다.
“그건 사실…. 천운이 따랐다고밖에는 말 할 수가 없는 일이었어요.”
납치 사건이 주기적으로 반복되자 아미파에서는 장로 한 명과 다수의 제자들을 파견해 조사를 했었다.
하지만 한 달 이상의 시간이 지나도록 어떠한 꼬리도 잡지 못하고 있었는데, 막 사문 어른들의 말씀을 어기고 수련동을 몰래 뛰쳐나온 아미검봉 정인 소저와 함께 했던 두 소저들이 우연히 지나가다 납치 현장을 목격하게 되었던 것이다.
“아마 그들은 이미 저희 조사대의 움직임에 대해서 다 읽고 있었던 게 아닌가 싶어요. 그래서 조사대와 다르게 움직인 저희의 정보를 몰랐고 결국 발각되고 만 것이죠.”
납치 현장을 목격한 정인 소저는 바로 뛰어나가려고 했으나, 정연 소저가 그녀를 만류했다.
그들의 본거지까지 미행하기 위해서였다.
그리고 납치범들을 쫓아간 그녀들은 경악하고 말았다.
“납치범들이 들어간 곳은 관음장이란 곳이었어요. 정파의 오랜 명문이자, 심지어 아미파의 속가 문파이기도 한 곳이었죠.”
인근에서 가장 존경받고 있는 데다 아미파와도 좋은 관계를 유지하고 있는 관음장이기에, 그녀들은 함부로 그 안에 난입할 수가 없었다.
그래서 일단 물러나서 더 조사를 해 보기로 했다.
그리고 인근 하오문으로 가서 최근 관음장의 활동에 대해 정보를 문의해 봤다.
그러자 벌써 일 년 정도를 관음장이 눈에 띄는 외부 활동을 하지 않았고 관음장의 장주 또한 모습을 보이지 않았다는 사실을 알 수가 있었다.
또한 관음장이 그렇게 되기 직전에 정협방의 백옥지룡 구유상의 방문을 받았었다는 것도 말이다.
“심지어 최근에도 계속 정협방의 인물들이 주기적으로 관음장을 방문하고 있다고 했어요. 관음장이 다른 외부 활동을 하지 않고 있었는데도 말이죠. 정인 사저와 저희들은 바로 정협방이 배후라는 사실을 확신했어요. 안 그래도 정인 사저가 금족령을 받게 된 이유가 정협방이 야금야금 아미파의 영역을 갉아먹고 있는 것에 대해 성토했기 때문이었거든요. 관음장이 있는 지역도 그런 영역들 중 하나였죠.”
하지만 그렇게 정협방이 배후임을 확신하고 관음장 내부를 조사해 보려고 했을 때, 그녀들은 갑자기 정체를 알 수 없는 자들의 습격을 받고는 모두 사로잡히고 말았다.
내가 신음처럼 중얼거렸다.
“하오문이겠군요. 그들이 정보를 제공했어요.”
내 말에 정연 소저가 무겁게 고개를 끄덕였다.
“저도 잡혀 있는 동안 그럴 거란 생각을 했어요. 하지만 이해는 안 돼요. 하오문이 대체 왜 그랬던 걸까요? 혹시 그들도 혈교에게 포섭된 걸까요?”
그녀의 질문에 내가 고개를 저으며 대답했다.
“무림 전역에 퍼져 있는 하오문의 규모를 봤을 때 그렇게까지는 아닐 겁니다. 다만 그쪽 지부와 거래를 했겠죠. 자신들에 관해 정보를 캐는 자들이 있다면 그것을 알려 달라. 뭐 그런 종류의 거래를요. 하오문은 거래자를 가리지 않으니까요.”
그러자 정안 소저가 화난 표정으로 말했다.
“정말 너무하군요! 아무리 그들이 정파가 아니어도 그렇지 혈교의 무리들에게 협력하다니!”
“뭐, 그들에게 정사마는 그리 중요한 가치가 아니니까요. 아무튼 그래서 어떻게 됐습니까?”
지금까지 나온 얘기만으론 적들의 배후에 정협방이 있다고 확신할 수는 없었다.
그러니 정연 소저가 확신하는 것처럼 그들이 정협방이 분명하다면 뭔가 다른 증거가 더 있을 거란 생각이 들었다.
그러자 과연 정연 소저의 다음 말에 그 증거가 있었다.
습격자들 가운데 그자가 있었던 것이다.
바로 사천제일공자라고 불리우는 정협방의 백옥지룡 구유상이….
“그자는 복면을 쓰고 있었지만, 이전에도 몇 번 그자를 만날 일이 있었던 정인 사저가 바로 그자를 알아보셨어요. 그의 체형과 눈매를 알아보셨던 거겠죠. 사저가 구유상이라는 그자의 이름을 외치자, 그자가 복면을 벗으며 사저의 머리카락을 움켜잡고 탐욕스럽게 말했어요. 자기를 알아본 것을 후회하게 해 주겠다고.”
거기까지 말한 정연 소저는 그날의 일이 떠오르는지 몸을 가늘게 떨며 더 말을 잇지 못했다.
우리는 그녀에게 더 말을 시키지 않고 방으로 올라가 쉬도록 했다.
그 후 비사영과 함께 방에 올라온 후 나는 한참을 골똘히 생각에 잠겨 있었다.
그러자 비사영이 내게 물었다.
“너, 무슨 생각을 하고 있는 거냐?”
녀석의 질문에 씨익 웃으며 대답해 줬다.
“너랑 같은 생각?”
그러자 비사영은 고개를 절레절레 저으며 한숨을 내쉬었다.
“그래, 그럴 줄 알았다. 하지만 나도 구하고 싶기는 한데 정연 소저 말대로라면 힘들지 않을까? 너무 정보가 없잖아? 아까 얘기를 들으니 정인 소저를 빨리 구해야 하는 것도 맞는 얘긴 것 같았고 말이야.”
그 말대로였다.
우리는 이곳의 여인들을 구하기 위해 시간을 쓸 수 있는 상황이 아니었다.
하지만…. 만약 시간을 그리 쓰지 않아도 된다면?
예를 들어 오늘 밤 안에 할 수 있다거나, 그럼 별 상관 없는 거 아닐까?
게다가 내게는 그녀들을 무시할 수 없는 이유가 하나 더 있었다.
바로 묵랑이라는 분이 말했던 그 시험이라는 것.
그 시험이 뭔지는 정확히 알 수 없었지만, 그간 계속 생각해 본 결과 그의 목소리가 들렸을 때는 모두 내가 누군가를 구하기 위해 움직였을 때였다.
그렇다면 그 시험도 협심, 또는 누군가를 구조하는 것과 관계가 있지 않을까?
게다가 그는 분명 내가 이제껏 만난 후보들 중 가장 마음에 든다고 했었다.
그게 설마 이제껏 묵랑검을 사용한 사람 중 내가 가장 고수라는 뜻은 아닐 것이었다.
절대 그럴 리가 없겠지.
그러니 분명….
거기까지 생각한 나는 비사영에게 입을 열었다.
“물론 정인 소저를 빨리 구해야 하니 여기서 시간을 보낼 순 없겠지. 하지만 딱 오늘 밤만 움직인다면 상관없지 않겠어? 어때? 몸은 아직도 별로야?”
내 질문에 비사영이 살짝 놀란 표정을 짓더니만 이내 피식 웃으며 대답했다.
“뭔가 또 떠올렸구나? 나야 이제 멀쩡하지. 오히려 아까 모든 것을 흘려 버렸더니 최근 중 가장 가벼운 몸이 된 게 아닌가 싶다. 그래서? 무슨 감을 잡은 거야?”
역시 마음이 통하는 친구가 있다는 건 참 좋은 일이었다.
나는 씨익 웃으며 내가 했던 생각에 대해 얘기하기 시작했다.
“정연 소저가 해 준 얘기를 듣고 생각한 건데, 놈들은 아마 그 지역에서 가장 신망을 받고 있는 문파를 점거해 그곳을 거점으로 여인들을 납치하고 있는 게 아닐까 싶어. 그러니 만약 같은 놈들이 한 짓이라면 수법도 비슷하지 않을까?”
내 추리에 비사영이 고개를 끄덕였다.
“음, 그럴 수도 있겠군. 하지만 우리가 이 지역에서 가장 신망을 받고 있는 문파를 어떻게 알겠어? 사람들에게 물어봐야 하나?”
녀석의 의문에 빙긋이 웃으며 말해 주었다.
“아까 그 사람에게 들었잖아? 딸이 없어지자마자 관청 다음으로 찾아간 곳이 있다며?”
“…과검문?”
“그래. 그 정도면 가장 신뢰받고 있는 곳이라고 할 수 있지 않을까?”
우리는 소저들이 모르게 딱 과검문만 살펴보고 만약 아니라면 미련을 버리기로 했다.
그러곤 옷을 입은 후 창문을 열어 밖으로 나갔다.
비사영이 먼저 땅에 가볍게 착지해 앞으로 튀어 나가며 말했다.
“빨리 갔다 와야 하니 속도를… 헉! 저, 정안 소저?!”
비사영이 깜짝 놀라 신형을 급정지했다.
나 또한 마찬가지였다.
창문 밖에는 이미 정연 소저와 정안 소저가 우리를 기다리듯 서 있었던 것이다.
정안 소저가 생글생글 웃으며 말했다.
“거봐요, 사저. 두 분이 분명 가만히 있지 않을 거라고 했죠?”
진심으로 깜짝 놀랄 수밖에 없었다.
***
반 시진쯤 지난 후 우리는 과검문 부근의 나무 그늘에 숨어 과검문의 정문을 바라보고 있었다.
정안 소저가 상기된 표정으로 속삭여 물었다.
“이제 어떻게 하죠? 정면으로 쳐들어가서 납치한 여인들을 내놓으라고 하실 건가요?”
어쩐지 기대감에 가득 차 보이는 그녀의 말에 나는 ‘그럴 리가요’라고 말하고 싶은 황당한 표정을 애써 감추며 설명해 줬다.
“아니오. 일단 조용히 들어가 여인들이 있는지를 확인해야 합니다. 과검문이 확실히 혈교의 무리들이라고 밝혀진 것은 아니지 않습니까?”
“아아.”
이해했다는 듯 고개를 끄덕인 그녀가 바로 다시 물었다.
“그럼 몰래 담장을 넘어 침투하는 건가요? 도둑이나 살수들처럼요?”
그렇게 묻는 정안 소저의 눈빛이 어쩐지 부담스러울 정도로 반짝반짝거리고 있었다.
그러자 우리를 따라오는 것이 조금 힘들었던지 옆에서 호흡을 정리하고 있던 정연 소저가 설명해 줬다.
“사매는 예전부터 비밀 임무를 수행하거나 몰래 협객행을 벌이는 것에 대해 환상을 좀 갖고 있었어요. 이해해 주세요.”
그 말에 정안 소저가 맹렬히 고개를 끄덕이며 말했다.
“맞아요, 맞아요. 저 꼭 그런 걸 해 보고 싶었어요. 그래서 정인 사저와 함께 관음장에 침입하는 걸 엄청 기대하고 있었는데, 막상 해 보지도 못하고 습격당해 잡히는 바람에 너무 실망했지 뭐예요? 그런 가슴 떨리는 협객행도 한 번 해보지 못하고 죽게 되나 싶어서요.”
협객행과 몰래 침투하는 건 좀 다른 얘기일 텐데….
이 소저, 뭔가 이상한 소설들을 읽고 꿈을 키운 모양이었다.
역시 독특했다.
문득 비사영의 반응을 보고 싶어 표정을 살펴보자 녀석이 사랑스럽다는 표정으로 그녀를 바라보고 있었다.
고개가 절로 절레절레 저어졌다.
하지만 이런 것과는 별개로 아까 객잔에서 우리가 몰래 나갈 거란 걸 미리 예상했던 이가 바로 이 정안 소저였다.
‘그래서 정말 깜짝 놀랐었지.’
늘 침착하고 현명해 보이는 정연 소저도 아닌 좀 독특하고 철부지 같아 보이던 정안 소저가 우리 행동을 정확히 예측하다니, 원래 청연 소저만큼 뛰어난 사람인데 내가 드러난 행동만 보고 착각하고 있는 게 아닐까 고민했었는데.
아마도 그건 아니었던 모양이었다.
‘그저 협객행이 너무 하고 싶어 우리의 행동에 기대를 걸었던 모양이로군.’
원래 두 소저들 없이 비사영과 나만 오려고 했던 건 그녀들의 체력이 회복될 시간을 주기 위해서였다.
하지만 우리를 기다렸던 그녀들은 강경하게 따라갈 뜻을 밝혔었다.
‘저희는 아미파의 제자들인 걸요. 이런 일에 빠질 수는 없죠! 그리고 아미파에서 제 별명이 ’비연‘이에요. 신법엔 꽤 자신 있는 편이니 저 때문에 일정이 늦어질까 걱정하진 않으셔도 될 거예요.’
이렇게 말한 것이 정안 소저.
‘사실…. 아까 사저를 구하기 위해서 그녀들을 외면할 수밖에 없다고 말한 제가 너무 부끄러웠어요. 이런 제가 아미의 제자가 될 자격이나 있는 건지 의심스러웠구요. 아마 사저도 제가 사저를 위해 다른 여인들을 포기했다는 걸 알면 화를 내실 거예요. 전 사매처럼 신법이 뛰어나진 않지만 두 분께 방해가 되지 않도록 최선을 다하겠습니다. 부디 함께 갈 수 있도록 해 주세요.’
그런 얘기까지 듣고 따라오지 말라는 얘기를 할 수는 없었다.
그래서 결국 함께 오기는 했는데, 마침내 도착한 과검문은 예전의 흑상방만큼은 아니어도 꽤나 거대한 규모를 자랑하는 장원이었다.
게다가 경계마저도 꽤나 철저했다.
정문의 수문 무사들뿐만이 아니라 담장 뒤에서 돌아다니는 무사들의 기척들도 여기저기서 느껴지고 있었다.
비사영이 물었다.
“경계가 꽤 철저해. 어쩔 셈이야? 전처럼 한 명이 시선을 끌 때 나머지 사람들이 침투하는 걸로 할까?”
그 말에 정안 소저의 얼굴이 환하게 밝아졌다.
침투한다는 말만 들어도 좋은 모양이었다.
하지만, 그것도 확 와닿지는 않았다.
결국 비상영의 말대로 할 수밖에 없을 것 같긴 한데, 시선을 끄는 것도 그리 쉽지 않을 것 같았던 것이다.
게다가 규모가 생각보다 너무 커 정보도 없이 저들의 내부에서 여인들이 갇혀 있는 곳을 찾을 수 있다는 생각이 들지 않았다.
정보가 필요한데….
그렇다고 하오문을 이용할 수도 없는 거고.
흠, 전에 배종관에게 주문한 것처럼 과검문에 입문하겠다고 억지라도 부려야 하나?
내가 그런 생각들을 하고 있을 때, 정연 소저가 문득 말했다.
“제가 혼자 저들에게 접근해 보면 어떨까요? 저들이 만약 혈교의 무리들이라면 저 또한 납치하려고 들지 않을까요?”
“네?”
그녀의 제안은 무척 끌리는 것이 아닐 수 없었다.
그녀가 미끼로서 일부러 저들에게 잡힌다면, 저들이 혈교도인지 아닌지는 물론 잡힌 여인들을 어디다 가뒀는지도 훨씬 빨리 알아낼 수 있을 테니 말이다.
하지만….
고개를 저으며 대답해 줬다.
“너무 위험합니다. 소저 혼자 저들에게 잡혔을 때 어떤 일을 당하게 될지도 모르고, 또 적들의 전력이 생각보다 강할 경우 구해 내지 못하고 오히려 인질이 될 수도 있습니다.”
“아, 그렇겠군요.”
하지만 그렇게 정연 소저의 의견을 반려한 후 마땅한 방법이 나오지 않았다.
시간만 계속 흐르고 있었다.
그때 비사영이 문득 의견을 냈다.
“정연 소저의 의견 자체는 괜찮은데 너무 위험해서 걱정인 거잖아? 그럼 정연 소저가 아닌 네가 여자인 척하는 건 어때?”
“응? 내가 여자인 척한다고?”
무슨 말도 안 되는 소리를 하냐는 얼굴로 인상을 찌푸렸다.
배종관과 함께 외공을 익힌 내 몸은 우락부락할 정도까진 아니지만 다부진 근육질이 된 지 오래였다.
바보가 아닌 다음에야 이런 몸으로 여자인 척을 한다고 속아 줄 리가 없지 않는가.
하지만 비사영의 말은 끝난 것이 아니었다.
“왜 있잖아? 지난번에 보여 줬던 축골공. 그걸 사용하면 되지 않을까?”
“…축골공?”
아버지의 서재에서 익혔던 잡기들 중 축골공에 관한 것도 있었다.
딱히 사용할 일은 없었지만 전에 장난을 치며 배종관과 비사영에게 보여 준 적이 있긴 했는데, 그걸 기억했던 모양이었다.
흠, 축골공을 사용해 체격을 줄여 여자인 척한다?
아주 가능성이 없어 보이진 않았지만….
“안 돼. 체격이야 줄일 수 있어도 얼굴을 보이거나 말 한 마디만 해도 들키게 될걸? 목소리를 바꾸는 방법은 모르니까.”
그러자 축골공이란 말을 듣고 눈이 동그래진 정안 소저가 급히 말했다.
“아니에요! 선우 공자의 얼굴이라면 여인인 척해도 잘 어울리실 것 같아요! 워낙 잘생기셨잖아요!”
아니, 잘생겼다고 말해 준 건 고맙지만 그렇다 해도 목소리가….
그러자 정연 소저가 말했다.
“선우 공자 혼자서라면 들킬 수밖에 없겠지만, 저랑 함께 가면 되지 않을까요? 선우 공자가 부상을 입어서 말을 할 수 없다고 하면요.”
“아니, 그건….”
그때 비사영이 환한 얼굴로 대답했다.
“그거 멋지구려. 둘이 함께 가면 서로 도와줄 수도 있으니 덜 위험할 테고, 또 진이가 부상당한 걸로 하면 저들도 진이에 대해 덜 경계하게 될 것이 아니오.”
등에서 식은땀이 흘러내렸다.
이대로는 손도 써 보지 못하고 여자인 척해야만 할 것 같았다.
“아니, 잠깐만. 그건 별로 좋은 생각이 아닌 것 같아. 더 좋은 생각이….”
비사영이 의미심장하게 웃으며 내게 물었다.
“더 좋은 생각? 그게 뭔데?”
…젠장.
그런 게 있을 리 없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