75화 적하신검-2
절정 초입의 무사 두 명을 간단히 정리하고 시선을 돌렸을 땐 이미 마장도를 격살한 적하신검 화영빈이 내 쪽을 바라보고 있었다.
이야기를 들어 보니 그 또한 여인들의 납치에 관한 얘기를 듣고 조사 중이었다는 모양이었다.
그러다 도무지 실마리를 찾을 수 없어 과검문의 도움을 청하기 위해 왔다가 우연히 우리를 목격했다고 했다.
우리는 나머지 얘기는 나중에 하고 일단 과검문으로 먼저 돌아가기로 했다.
비사영과 정안 소저가 괜찮을지 걱정됐기 때문이었다.
하지만 과검문의 정문으로 돌아간 우리는 거기서 무사히 나오고 있는 세 명의 사람들을 만날 수 있었다.
비사영과 정안 소저, 그리고 처음 보는 한 명이었다.
“화 사형!”
적하신검 화영빈을 본 정안 소저가 세상 환한 표정으로 그에게 달려오고 있었다.
그런 그녀를 보며 비사영이 씁쓸한 표정을 짓고 있는 것 또한 눈에 들어왔다.
하지만 달려와서 안길 듯 맹렬한 기세로 돌진해 오는 그녀를 보고도 화영빈은 그저 빙그레 웃으며 말할 뿐이었다.
“여전히 밝아 보여 좋구려, 정안 소저. 별일 없이 무사해서 다행이오.”
그런 그를 보고 나서야, 나는 이제껏 두 소저들이 했던 얘기들을 비로소 이해할 수 있었다.
십 년이 넘는 시간 동안 죽은 연인을 그리며 아미파를 위해 봉사해 왔다는, 그 현실 같지 않은 남자에 대한 얘기들을….
어째서인지는 모르지만 빛이 날 것처럼 잘생긴 얼굴로 빙그레 웃는 그의 표정이, 어쩐지 너무도 슬퍼 보이고 있었던 것이다.
그냥 보는 것만으로도 알 수 있었다.
‘아마 저 사람은 행복하지 않겠구나’라는 걸.
그러다 문득 완전히 같지는 않지만 저 비슷한 느낌의 표정을 전생에도 본 적이 있다는 걸 기억해 냈다.
‘전생에 조장의 눈빛이 꼭 저랬었지.’
비사영, 배종관 같은 내 친구들이 모두 죽고, 마침내 나 소저까지 독사귀에게 잃은 후의 설풍 조장이 꼭 저런 느낌이었다.
평소와 다름없이 행동하며 겉으론 농담도 잘 하고 웃기도 잘 하지만, 눈빛 어딘가에 채우지 못할 공허함이 깃들어 있는 것 같은….
전생에는 그저 동료들을 잃은 슬픔과 무거운 책임감 때문이라고 생각했었는데, 어쩌면 조장도 도저히 잊을 수 없는 무언가를 잃었던 것인지도 모르겠다는 생각이 들었다.
그리고 그건 어쩌면….
내가 그런 생각을 하고 있을 때 문득 비사영의 옆에 있던 남자가 내게 웃으며 말을 걸었다.
“처음 뵙겠습니다. 청성의 이건이라고 합니다.”
퍼뜩 정신을 차리고는 그에게 답해 줬다.
“아, 반갑습니다. 비룡대의 선우진이라고 합니다.”
얼핏 여인인가 싶을 정도로 아름다운 얼굴의 미청년이었다. 그리 크지 않은 체격에 해맑은 미소, 무엇보다도 꼭 감고 있는 눈이 인상적이었다.
그러자 그가 다시 웃으며 말했다.
“제가 장님이라서요. 이해를 부탁드립니다.”
너무 아무렇지도 않게 말해 내가 더 민망했다.
“아, 이해라니요. 제 시선이 혹시 무례했다면 죄송합니다.”
“전혀 무례하지 않았습니다. 그저 미리 말씀드리지 않으면 다들 궁금해하시더라구요.”
그렇게 대화를 나누며 한 가지를 깨달을 수 있었다.
그가 전혀 장님 같아 보이지 않는다는 사실을 말이다.
그는 마치 앞이 다 보이는 사람처럼, 아니, 오히려 그보다 더 많은 것을 보고 있는 사람처럼 행동하고 있었다.
한 가지만큼은 확실히 알 수 있었다.
‘고수다. 설풍 조장? 어쩌면 그 이상의 고수야.’
그때 옆에 있던 화영빈이 입을 열었다.
“그는 내 사제라네. 무공은 강하지만 이번에 무림에 처음 나온 풋내기지. 자네들이 좋은 친구가 되어 주면 좋겠군.”
그러자 정연 소저가 놀란 얼굴로 물었다.
“화 사형의 사제라면?! 소문만 무성하던 청광진인님의 다섯 번째 제자로군요?!”
정안 소저 또한 깜작 놀라며 말했다.
“아, 그래서 청운적하검을…!”
하지만 그 말에 나와 정연 소저가 더 깜짝 놀라고 말았다.
“예?! 청운적하검이라고요?!”
놀란 눈으로 그를 바라보자 그는 그저 쑥스럽게 웃고 있었다.
아마 진짜인 모양이었다.
정연 소저가 멍하니 말을 내뱉었다.
“세상에….”
무림에는 청성파에 관해 전해 내려오는 유명한 말이 하나 있었다.
‘청운과 적하를 합일할 수 있다면 신화경에 도전할 수 있으리라.’
그것은 물론 청운적하검에 대한 얘기였다.
청성파의 긴 역사 속에서도 청운적하검을 익힌 무인은 열 손가락 안에 꼽을 정도라고 했다.
그리고 그들은 모두 다 무림의 절대자들로 칭해졌었고 말이다.
그 대표적인 예가 바로 현재의 괴선 청광진인이었다.
하지만 괴선 청광진인도 청운적하검을 구현해 낸 것은 사십 대 이후로 알고 있었는데….
아직 이십 대 초반으로 보이는 이 사람이 벌써 청운적하검을 구현해 냈단 말이지?
그럼 정말 백 년 전 무신, 마신, 뇌신, 검신 이후로 끊어진 신의 칭호를 잇게 될 수도 있는 건가?
근데 지난 삶에선 그런 사람에 관한 얘기를 들어 본 기억이 없는데?
새삼 해맑아 보이는 그의 예쁘장한 얼굴을 다시 바라봤다.
그러자 그가 민망한 얼굴로 말했다.
“아직 청운과 적하를 완전히 합일시키지는 못했습니다. 그저 흉내 내기일 뿐이지요. 그래서 스승님도 일 년만 쉬었다가 다시 폐관에 들어가라고 하셨습니다.”
폐관이라.
혹시 그래서 전생에 들어 보지 못했던 건가?
문득 그에게 물었다.
“그렇군요. 그럼 폐관수련은 청운적하검을 완성하실 때까지 하시게 되나요?”
그러자 그가 곤란한 듯 고개를 저으며 대답했다.
“스승님께선 신화경을 엿보기 전까지는 나오지 말라고 하시더군요.”
“아아, 네. 신화경이요.”
세상에.
목표가 정말 검신이었군.
뭐라 더 할 말이 없었다.
***
과검문의 혈교도들을 모두 정리하고 여인들을 구해 내 집으로 돌려보냈을 땐 이미 아침이 밝아 오고 있는 중이었다.
관청과 인근 문파들에도 과검문이 납치 사건의 진범이며 이미 예전에 혈교도들에게 점령당했었다는 얘기를 해 놨기에 뒤처리는 더 이상 신경 쓰지 않아도 될 것 같았다.
우리는 화영빈에게 정협방과 그들에게 잡혀 있는 정인 소저에 관한 얘기를 해 줬다.
그러자 그가 신음하듯 말했다.
“정협방이 혈교의 전진기지였다고? 백옥지룡 구유상 그놈이 혈교도였어?”
화영빈은 그와 친분이 있었던 듯 무척 충격받은 표정이었다.
하지만 이내 마음을 추스르고는 살기 어린 눈빛으로 말했다.
“그토록 찢어 죽이고 싶었던 혈교 놈들이 바로 내 옆에 있었다니, 믿을 수가 없군.”
그러고는 자신의 사제인 이건에게 말했다.
“너는 지금 당장 청성으로 돌아가 스승님께 이 사실을 말씀드려라. 정협방을 쓸어버릴 인원을 모아서 보내 달라고 말이다. 아마 스승님께선 귀찮아하실 테니 청원 사백께 부탁드리면 될 것이다.”
그러자 사제인 이건이 물었다.
“그럼 사형은요?”
“나는 정인 소저부터 구하러 가도록 하겠다. 시간이 촉박할 것 같구나.”
나는 비사영과 시선을 교환하며 흐뭇하게 웃었다.
그의 판단 하나하나가 그렇게 마음에 들 수가 없었다. 빠르고 현명한 것이 듣고 있는 것만으로도 마음이 든든해지는 기분이었다.
하지만 그 다음 말이 나오자 우리의 표정은 싹 달라지고 말았다.
그가 이렇게 말했던 것이다.
“정협방은 현재 산검문을 습격하는 데 전력을 집중한 상태라고 하니, 빠르면 빠를수록 일이 쉬워진다는 것을 꼭 명심하시라고 전해 드려라.”
뭐?
우리는 깜짝 놀라 그에게 물었다.
“정협방이 산검문을 습격했다고요?”
그러자 그가 고개를 끄덕이며 설명해 줬다.
“산검문을 상대하기 위해 모였던 천여 명의 인원들이 어제저녁부터 은밀하게 산검문 쪽으로 이동한 것 같더군. 아마 새벽에 들이치기 위해서겠지. 정보를 모으려고 하오문에 갔다가 알게 된 사실일세.”
비사영과 내 눈이 마주쳤다.
꿀꺽.
녀석의 눈빛이 풍랑을 만난 것처럼 흔들리고 있었다.
아마 내 눈빛도 비슷할 것 같았다.
***
“척마멸사! 사파의 잡졸들을 싹 쓸어버려라!”
정협방의 유명한 절정 고수인 도강패도 경가등은 제일 선두에 서서 산검문의 담장을 넘었다.
그러곤 바로 거도를 휘둘렀다.
푸학!
“크아아악!”
“적습이다! 으아악!”
경계무사들을 해치우는 데는 두 번의 칼질도 필요하지 않았다.
가장 선두에서 담장을 넘은 그의 뒤로 천여 명의 정협방도들이 노도와 같이 담장을 넘고 있었다.
“아무도 살려 두지 마라! 사파의 잡졸들을 모두 죽여 황장곤 대협의 넋을 위로하리라!”
“우와아아아아!”
지난번 싸움으로 죽은 철장대협 황장곤과 호형호제하는 사이였던 그는 산검문의 누구도 살려 둘 생각이 없었다.
산검문의 외곽이 송곳에 찔린 종이처럼 가볍게 돌파당하고 있었다.
***
비사영이 내게 물었다.
“돌아가 봐야 하는 거 아닐까?”
머릿속에 조원들의 얼굴 하나하나가 떠오르자 심장부터 머리까지 확 뜨거워지는 기분이었다.
그들 중 누구도 죽게 할 수 없었다.
얼굴도 본 적 없는 아미파의 정인 소저와 그들 중 누가 더 중요한지는 더 말할 필요도 없었다.
하지만 잠시 생각하던 나는 깊게 심호흡을 하고는 고개를 저었다.
“어차피 지금 가도 늦었어. 게다가….”
머릿속에 두 사람의 얼굴이 떠올랐다.
내가 세상에서 가장 신뢰하고 있는 두 사람의 얼굴이.
여전히 불안한 눈빛을 하고 있는 비사영에게 말해 줬다.
“산검문엔 조장과 청연 소저가 있잖아? 그 두 사람이라면 최악의 경우라도 조원들에게는 아무 일 없도록 해 줄 거야.”
비사영의 표정이 잠시 동안 여러 번을 변했다.
하지만 결국 그 또한 애써 웃으며 말했다.
“하긴. 그 두 사람이 있다면 오히려 정협방 놈들을 다 때려잡았을지도 모르지. 그래, 우리는 이쪽 일을 먼저 해결하자. 그게 현명한 행동이겠지?”
나 또한 애써 웃으며 고개를 끄덕여 줬다.
“그래, 그게 우리 역할이니까.”
정인 소저를 구해 낼 수만 있다면 아마 아미파도 끌어들일 수 있을 것이었다.
그리고 청성파와 아미파의 힘을 얻을 수만 있다면 아무리 정협방의 세력이 크다 해도 바람 앞의 등불에 불과할 테고 말이다.
적하신검 화영빈과 합류한 우리는 빠르게 정인 소저가 붙잡혔다는 관음장으로 향하기 시작했다.
***
무림맹 만청각.
무림맹의 정보 기관이자 암영대의 본부인 그곳에서 제갈지강은 심각한 표정으로 새로 올라온 보고서를 읽고 있었다.
“거력마 저웅원이 숨은 곳이 사천성의 정협방이고, 그 정협방이 혈교의 전진기지라…. 이게 정말 확실한 얘기인가?”
그러자 제갈지강의 앞에 서서 대기하고 있던 만청각주가 고개를 숙이며 대답했다.
“아직 확인하지는 못했습니다. 다만 보고서와 함께 전달된 것은 분명히 혈교의 비급이었습니다.”
제갈지강은 만청각주가 건네주는 찢어진 비급을 받아 확인해 봤다.
선우진이 삭무흔을 통해 보내게 했던 반으로 찢어진 혈교의 비급이었다.
삭무흔이 지난번에 쓸어버린 음영대 팔 조의 전서구를 이용해 무림맹에 보고를 올렸던 것이었다.
마침내 사실일 가능성이 매우 높다고 판단한 제갈지강은 분노한 눈빛으로 이를 갈며 말했다.
“혈마, 그자가 감히…!”
만청각주가 조심스럽게 물었다.
“정협방으로 무력대를 파견하시겠습니까?”
하지만 잠시 턱을 매만지며 고민에 잠겼던 제갈지강은 이내 고개를 저으며 대답했다.
“아니, 그래도 사실인지를 확인하는 것이 먼저겠지. 사천성의 문파들에게 전서를 보내게. 정협방이 혈교의 전진기지인지를 확인하고 만약 그것이 사실이라면 철저하게 지워 버리라고.”
“예! 알겠습니다!”
그러곤 예리한 눈빛으로 추가 지시를 했다.
“또한 전선에 가 있는 검성에게도 같은 내용으로 전서를 보내게. 이 차 정혈대전이 벌어질 수도 있는 심각한 일이라는 말을 추가해서 말일세.”
그 말에 만청각주의 얼굴이 심각하게 굳어졌다.
“이 차… 정혈대전이라고 하셨습니까?”
“만약 이게 사실이라면 충분히 그럴 만한 명분이 되겠지. 하지만 너무 걱정하진 말게. 그렇게 되기 전에 해결할 수 있을 테니까.”
“예! 알겠습니다, 군사!”
말을 마친 제갈지강은 문득 찢어진 혈교의 비급을 바라보다 물었다.
“근데 이 비급은 왜 찢어진 채로 왔나?”
“그건 저도 잘….”
제갈지강은 다시 생각에 잠겼다가 물었다.
“이 보고를 한 것이 음영대 팔 조라고 했던가? 팔 조가 얼마 전 거력마의 북상을 보고했던 조였지?”
“예, 맞습니다, 군사.”
“내 기억이 맞다면 우리는 음영대에게 거력마의 추적을 지시한 적이 없건만, 그들이 거력마를 쫓다 못해 정협방과의 관계까지 확인했단 말이지?”
“예, 예. 그런 것 같습니다.”
그러자 제갈지강은 날카로운 눈빛으로 만청각주를 바라보며 말했다.
“아무래도 좀 이상하군. 그들을 맹으로 소환하도록. 그리고 그들에 관한 정보와 그동안 그들이 올렸던 보고서도 모두 내 집무실로 가져오게.”
“예! 알겠습니다!”
제갈지강은 칼에 베일 듯 날카로운 눈빛으로 멀리 전선이 있는 쪽을 바라봤다.
혈마 그자가 불가침협정을 지킨 채 얌전히 있을 자가 아니라는 건 진작에 알고 있던 사실이었다.
전선 이북에 괴뢰를 만들어 놓고 있을 거라는 점도 어느 정도는 짐작하고 있었다.
하지만 그도 그 괴뢰가 정협방 정도의 거대 문파일 거라곤 미처 짐작하지 못했었다.
게다가 구대문파인 아미파의 여인들을 납치하다 걸리다니, 이건 선을 넘어도 한참은 넘은 일이었다.
집무실로 돌아온 그가 조용히 중얼거렸다.
“운남성만으론 만족하지 못하겠다는 얘기겠지? 후후후, 차라리 잘됐군. 이 기회에 혈마의 세력도 깎고 빚도 제대로 지워 놓을 수 있겠어.”
만청각주에겐 제이 차 정혈대전으로 갈 수도 있는 사안이라고 얘기했지만, 아마 절대 그렇게 되지는 않을 것이었다.
왜냐하면 자신이 그렇게 되도록 만들지 않을 테니까 말이다.
제갈지강은 오히려 빙긋이 웃음 지었다.
정협방을 쓸어버림으로써 혈마가 심혈을 기울였을 전진기지를 박살 내고, 또한 그에게 큰 빚을 지워 놓기까지 할 수 있다면 대단히 만족스러운 일이 아니겠는가.
겸사겸사 검성의 일도 해결하고 말이다.
그의 머리는 벌써 이 일을 어떻게 이용하면 이득이 될까를 고민하는 중이었다.
잠시 생각에 잠겼던 그는 마침내 붓을 들어 혈마에게 보낼 서신을 직접 작성하기 시작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