76화 산검문의 위기-1
“산검문주 허경은 어디 갔느냐?! 당장 나와라!”
정협방의 절정 고수 도강패도 경가등은 산검문 내부를 거침없이 내달렸다.
새벽이라 그런지 경계를 서고 있는 무사들조차 별로 없어 거의 무인지경을 달리는 듯했다.
그나마 가끔 마주치는 경계무사들은 경가등의 일도조차 버티지 못하고 있었다.
푸화악!
“크아아악!”
“어디 갔느냐, 허경?! 네놈의 목을 따러 이 경가등이 왔다!”
광폭한 기세로 산검문주 허경을 찾아 본전으로 향하는 경가등의 뒤로 두 명의 절정 고수와 천여 명의 정협방 무인들이 뒤따르고 있었다.
실로 압도적인 광경이 아닐 수 없었다.
경가등의 뒤를 따르던 정협방의 절정 고수 쌍류비표 냉구언이 문득 고개를 저으며 중얼거렸다.
“경 대협은 늘 기운이 넘치시는군요. 굳이 저렇게까지 서둘지 않으셔도 산검문의 멸문은 기정사실일 텐데 말입니다.”
천여 명의 무인들, 세 명의 절정 고수, 적이 눈치채지 못하도록 새벽에 들이친 기습. 산검문이 오늘을 넘길 수 있는 확률 따위는 일 할도 채 되지 않을 것이었다.
그렇기에 냉구언은 조급해 보이는 경가등을 이해할 수 없었다.
그러자 그의 옆에서 달리는 금천쾌극 홍만숙이 빙긋이 웃으며 대꾸했다.
“지난 전투 때 돌아가신 황장곤 대협과 각별한 사이셨지 않소. 복수를 다른 이에게 양보하고 싶진 않겠지요. 그나저나….”
이제 산검문 내부의 전각들 사이로 진입한 홍만숙이 주변을 둘러보며 말했다.
“아무리 기습이었다 해도 지나치게 한산하구려. 좀 부자연스럽다고 생각될 정도로 말이오.”
그의 말에 냉구언이 코웃음을 쳤다.
“흥! 사실 이미 모두 도망쳐 버렸던 건지도 모르겠군요. 사파 놈들이 하는 짓이야 어차피….”
그때 선두로 달리던 경가등이 마침내 산검문의 본전 건물 안으로 진입했다.
“이놈! 허경! 어디에 있느냐?!”
그의 뒤를 따라 정협방의 무인들이 본전 안으로 속속들이 진입하고 있을 때였다.
갑자기 본전과 인근 건물들에서 불길이 치솟아 올랐다.
화아아악!
“뭐, 뭐야?!”
“갑자기 불길이?!”
처음부터 사납게 불타올랐던 불은, 건물들에 뭘 발라 놨는지 맹렬하게 퍼지더니 얼마 지나지 않아 건물 전체를 불길로 뒤덮고 말았다.
노도와 같이 돌진해 왔던 정협방 무인들은 갑작스러운 사태에 당황할 수밖에 없었다.
“불이다!”
“불길이 너무 셉니다! 일단 여기서 빠져나가야 합니다!”
본전에서도 산검문주 허경을 발견하지 못하고 오히려 건물만 불길로 뒤덮이자 도강패도 경가등이 분노한 얼굴로 소리쳤다.
“허경 이놈! 어디 갔느냐?! 비겁하게 숨지 말고 당장 나와라!”
반면 쌍류비표 냉구언은 어이가 없다는 표정으로 금천쾌극 홍만숙에게 말했다.
“도망갈 거라는 생각은 했지만 사파 놈들이 하는 짓이란 정말 상상을 초월하는구려. 아무리 무섭다고 자기 집을 불태울 생각까지 하다니.”
하지만 홍만숙은 굳은 표정으로 사방을 살피며 말했다.
“아직 도망쳤다고 단언할 순 없습니다. 일단 불을 지른 자들이라도 이 근처에 남아 있을 것이 아닙…!”
그가 거기까지 말했을 때였다.
문득 뭔가를 느낀 홍만숙은 퍼뜩 고개를 들어 하늘을 쳐다봤다.
그러자 하늘을 까맣게 덮을 정도의 화살이 머리 위에서 날아오는 것을 볼 수 있었다.
게다가 그가 발견했을 땐 이미 하늘 높이 올라갔던 화살이 떨어져 내리고 있는 중이었다.
홍만숙이 다급하게 소리쳤다.
- 화살이다! 모두 피해!
하지만 내공을 실은 그의 웅혼한 목소리는 불길로 뒤덮여 소란스러워진 산검문 내부의 무사들에게 잘 전달되지 못했다.
또한 너무 늦은 외침이기도 했다.
그나마 홍만숙의 목소리를 인지한 무사들이 고개를 들어 하늘을 보는 순간, 우왕좌왕하고 있는 정협방 문도들의 머리 위로 화살비가 쏟아져 내렸다.
푸푸푸푸푹! 퍼퍼퍽! 푸푸푸푹!
“크아아아악!”
“으아아악!”
“뭐, 뭐야?! 으아악!”
워낙 많은 수의 인원들이 좁은 공간에 몰려 있다 보니 화살에 적중되는 인원들의 수도 많았다.
불타고 있는 산검문의 내부는 순식간에 아수라장이 되고 말았다.
“아아악! 살려 줘!”
“내 눈! 내 눈!”
“다리가! 다리가!”
단 한 번의 화살 세례만으로 백 명 이상의 정협방 무사들이 죽거나 다쳐 고통스러운 신음을 흘리고 있었다.
게다가 한 번으로 끝도 아니었다.
피피피피피핑!
다시 한번 하늘 위를 까맣게 메운 화살들이 날아오는 것을 본 홍만숙이 소리쳤다.
“이파가 온다! 모두 여기서 빠져나가! 적들이 불난 곳을 목표로 화살을 쏘고 있다!”
그의 독려에 정협방 무인들은 사력을 다해 산검문을 이탈하려 했다.
하지만 일반 무인들의 속도가 화살보다 빠를 리 없었다. 사력을 다해 달리기 시작한 그들의 머리 위로 다시 한번 화살들이 쏟아져 내렸다.
푸슈슈슈슈슈슉!
“아아아아악!”
“끄아아아악!”
“으아아아악!”
광분한 도강패도 경가등은 도를 휘둘러 쏟아지는 화살들을 쳐내며 소리쳤다.
가장 선두에서 달렸던 그는 이제 막 산검문의 본전에서 다시 빠져나온 상태였다.
- 서쪽이다! 서쪽 숲에서 화살을 쏘고 있다! 정협방도들은 모두 서쪽을 향해 돌진하라! 놈들을 살려 두지 마라!
그의 우렁찬 목소리에 산검문을 이탈하던 정협방 문도들이 모두 방향을 바꿔 서쪽을 향해 달리기 시작했다.
움직일 수 있는 무사들이 모두 서쪽을 향하고 있음을 확인한 경가등이 자신 또한 서쪽으로 몸을 날리려 했다.
그때였다.
불타고 있던 산검문 본전 건물을 뚫고 갑자기 누군가 뛰쳐나왔다.
“가긴 어딜 가느냐, 경가등?!”
그는 바로 허경, 산검문의 문주인 허경이었다.
분광검객이란 별호를 얻은 그의 쾌검이 경가등의 등 뒤를 쾌속하게 덮치고 있었다.
깜짝 놀란 경가등은 황급히 뒤돌아 그의 쾌검을 방어하며 외쳤다.
“허경, 이 쥐새끼 같은 놈!”
채채챙!
부하들을 먼저 보내고 혼자 떨어져 있는 그를 보며, 허경의 머릿속에 문득 천상미희 연해와 나눴던 대화가 떠올랐다.
어느 날 허경을 찾아왔던 그녀는 다짜고짜 이렇게 얘기했었다.
‘조만간 적들이 기습해 올 것입니다. 문주님께선 대책이 있으십니까?’
그간 독수 오 남매의 활약으로 그들의 말에 큰 신뢰를 갖게 된 허경이었지만, 그 말은 그리 믿기지 않았다.
아무리 그래도 적들은 체면을 목숨보다 중요시하는 정도의 문파 정협방이었던 것이다.
그들이 병력도 우세한 상황에서 기습을 해 올 것 같지는 않았다.
하지만 그런 허경에게 천상미희 연해는 이렇게 말했다.
‘그들의 수뇌부는 사실 정파가 아닌 혈교의 마두들입니다. 그들 자신도 어느 선까지 알고 있을지는 모르겠지만 적어도 정협방의 수뇌부는 그런 체면을 신경 쓰지 않을 것입니다.’
그러고는 그 증거로 혈교의 비급을 보여 주었다.
삭무흔이 아직 그것을 무림맹으로 보내기 전이었다.
게다가 연해는 자신들이 사실 혈교의 마두들을 추적하고 있던 무림맹의 암행무사들이며, 정협방이 의심스러웠기에 반대편인 산검문으로 잠입했다고도 말했다.
허경은 그들의 말을 믿을 수밖에 없었다.
혈교의 비급도 그렇지만 무려 절정 고수가 세 명이나 섞여 있는 그들의 무위에 더는 의심할 수가 없었던 것이다.
하지만 이제 그들의 말을 믿게 됐어도 천 명이 넘는 정협방 무인들의 습격에 대한 대책이 없었던 허경에게, 천상미희 연해는 이렇게 말했다.
‘사백 명도 안 되는 병력이 정면으로 맞붙어 천 명을 이길 수 있는 방법 따위는 없습니다. 하지만 정면으로 맞붙지만 않는다면… 가능할 수도 있겠죠.’
그리고 알려 준 방법이 지금 이 광경이었다.
허경은 사실 그리 내키지 않았었다.
자신이 피땀 흘려 키운 산검문의 본전을 태워야만 하는 작전이라니, 너무 가혹하지 않은가.
하지만 그럼 다른 방법이 있냐는 질문에 결국 그는 대답하지 못했다.
그 결과를 눈앞에서 보고 있는 허경은 피가 거꾸로 솟을 것만 같았다.
불타는 산검문의 건물들.
이게 모두 다 정협방 놈들 때문이었다.
악에 받친 허경의 검이 여러 개의 빛줄기가 되어 경가등을 찔렀다.
“죽어랏!”
슈슈슈슈슉!
하지만 경가등 역시 만만치는 않았다.
“어딜?!”
채채채채챙!
뒤로 물러서며 자신의 도로 허경의 예리한 공세를 모두 막아 낸 경가등은 이제 반격을 준비하며 외쳤다.
“이 쥐새끼! 오늘이 네 제삿날이닷!”
하지만 허경은 코웃음 치며 소리쳤다.
“네 뒤통수나 조심해라! 멍청아!”
“무슨 개소리냐?!”
허경의 말을 무시한 경가등이 도를 휘두르며 돌진하는 동안 허경의 눈은 다른 곳을 보고 있었다.
옆 건물에서 허경처럼 불길을 뚫고 나온 누군가의 창이 경가등의 등을 뇌전처럼 찔러 가는 것을 말이다.
푸욱!
“커헉!”
그가 불길을 뚫고 나와 경가등의 등을 꿰뚫을 때까지 걸린 시간은 찰나에 불과했다.
경가등이 자신의 가슴 앞으로 뚫고 나온 창두를 보며 경악한 눈빛으로 숨을 거둘 때, 허경 또한 꿀꺽 침을 삼켜야만 했다.
기습이라곤 하지만, 설사 기습이 아니었다고 해도 막을 수 있었을까 싶은 초고속의 찌르기였던 것이다.
독수 오 남매는 첫째인 철신유성 배종관과 넷째인 천상미희 연해의 이름이 가장 유명하지만, 사실 가장 무서운 건 이 둘째 재림자룡 창혁이란 자였음에 틀림없었다.
그때 경가등의 죽음을 목격한 금천쾌극 홍만숙이 크게 소리치며 되돌아 달려오고 있었다.
“경 대협! 이놈! 허경!”
불길 가득한 이곳으로 되돌아오는 홍만숙과 그의 뒤를 따라오는 쌍류비표 냉구언, 그리고 아직 이곳으로 되돌아오지 못하는 정협방의 무인들을 바라보며 허경은 천상미희 연해의 계략이 완벽하게 들어맞았음을 인정할 수밖에 없었다.
연해가 했던 말이 바로 이것이었으니까 말이다.
‘병력이 압도적인 적을 상대로 이길 수 있는 방법은 머리를 쳐내는 것뿐이겠죠. 다시 말해 저들의 절정 고수만 먼저 빠르게 제거할 수 있다면 충분히 이길 수 있습니다.’
‘하지만 천여 명의 무인들과 함께 움직일 그들을 어떻게 먼저 제거할 수가 있단 말인가?’
‘간단합니다. 이 본전을 불태우면 돼요.’
‘…뭐라고?!’
허경은 이제 다른 무인들과 유리되어 있는 홍만숙을 향해 몸을 날렸다.
다른 무사들이 돌아오기 전에 절정 고수들을 모두 정리해야 했다.
하지만 몸을 날리던 허경은 자신과는 비교도 안 되는 속도로 홍만숙을 덮쳐 가는 독수 오 남매 둘째 창혁의 등을 바라볼 수밖에 없었다.
또한 그의 눈에 한 가지가 더 들어왔다.
파아악!
불타고 있던 건물 속에서 뛰쳐나온 또 다른 남자의 검이 암기를 던지려던 쌍류비표 냉구언을 덮쳐 가는 모습이었다.
“하아압!”
슈슈슉!
“헉?!”
갑작스러운 기습에 쌍류비표 냉구언의 얼굴이 당황의 빛으로 물드는 것이 보였다.
본전 주변의 건물에 불을 질렀던 그는 괴산사검의 막내라고 했었다.
그가 원래 점창파의 고수인 점창검호 제원영이라는 것까지는 허경으로선 알 수 없는 사실이었다.
창혁이 창을 찔러 가자 사천의 손꼽히는 창수인 금천쾌극 홍만숙이 코웃음을 치며 극을 휘둘렀다.
“감히 창으로 나와 대적하려 하다니!”
슈슈슈슈슉!
창혁의 창이 다섯 개의 빛줄기가 되어 찔러 가자 홍만숙의 극 끝이 살아 있는 것처럼 휘어져 회전하며 창혁의 창을 걷어 냈다.
따다다다당!
그러곤 마침내 창혁의 창대를 쳐 허공으로 튕겨 내며 소리쳤다.
“빠르긴 하다만 아직 창술이 덜 익었구나!”
그리고 바로 창혁을 찔러 가려고 할 때였다.
창을 놓쳐 버린 창혁이 망설임도 없이 호조수로 홍만숙의 창대를 후려쳤다.
퍼어어엉!
“큭?!”
엄청난 충격에 홍만숙은 순간 자신의 극을 제어할 수 없었다.
그의 애병이 마치 살아 있는 뱀처럼 진동하며 그의 손을 뛰쳐나가려 하고 있었다.
그리고 그 순간, 너무도 유연하게 창대를 타면서 접근해 온 창혁을 보며 홍만숙은 경악해 소리쳤다.
“네, 네놈, 사실 창수가…?!”
퍼억!
다음 순간 얼굴을 강타한 창혁의 정권에 홍만숙은 정신을 잃고 말았다.
희미해지는 정신 속에서 홍만숙은 상대가 창을 놓친 것이 아니라 일부러 버린 것이었음을 이제야 깨달을 수 있었다.
순식간에 홍만숙을 제압한 창혁, 설풍은 한시도 지체하지 않았다.
그의 다음 목표는 제원영의 습격에 간신히 버티고 있는 쌍류비표 냉구언이었다.
이번 작전이 완전하게 성공하려면 천여 명의 무사들이 돌아오기 전에 절정 고수들을 모두 정리해야만 했다.
하지만 암기술을 특기로 하는 냉구언은 이미 근거리에서 기습당해 접근전을 허락한 순간부터 상황이 심각해졌다는 것을 깨닫고 있었다.
아직 젊은 놈으로 보이는데 도저히 자신의 하수로 보이지 않는 검수였던 것이다.
그래서 어떻게든 도망칠 틈만을 노리고 있던 중이었는데….
냉구언의 눈에 순식간에 홍만숙을 제압한 다른 젊은 놈이 맹수처럼 덮쳐 오는 것이 보였다.
그는 자기도 모르게 중얼거려야만 했다.
“이런 젠장.”
지금 상대하고 있는 검수만도 버거운데, 저자까지 합세하게 되면….
냉구언은 발작적으로 가지고 있던 모든 암기를 한꺼번에 뿌렸다.
“이야아아압!”
푸슈슈슈슈슈슈!
“이런?!”
제원영은 재빨리 물러서며 검을 원형으로 빠르게 회전시켰다.
사일검법의 오초, 회풍삭이었다.
위이이이이잉!
채채채채채챙!
그의 검이 회전하며 원형 방패처럼 암기들을 튕겨 내는 사이, 냉구언은 사력을 다해 달려오고 있는 정협방 무사들에게로 몸을 날렸다.
그가 살 길은 그것뿐이었다.
아무리 강력한 적이라도 저 정도 인원으로 천 명이 넘는 무사들을 상대할 수는 없을 테니까 말이다.
제원영이 달아나는 냉구언을 안타깝게 바라보며 달려온 설풍에게 사과했다.
“미안하오, 설 조장! 내가 책임졌어야 하는데….”
이제 천 명이 넘는 무사들의 파도 속에 몸을 감춘 냉구언이 광소를 터트리며 소리쳤다.
“으하하하! 쳐라! 적들은 고작 세 명뿐이다!”
“우와아아아아!”
정협방의 무사들이 노도와 같이 돌진해 왔다.
제원영이 이를 갈며 말했다.
“내가 계획을 망치고 말았구려! 구심점이 될 절정 고수를 한 명 놓치다니! 일단 피합시다, 설 조장! 적이 너무 많소!”
그렇게 말한 제원영은 먼저 몸을 날렸다.
이쪽으로 오고 있던 산검문주 허경은 벌써 몸을 돌려 달아나고 있는 중이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