77화 산검문의 위기-2
하지만 달아나는 그들을 한 번 바라본 설풍은 다시 해일처럼 몰려오는 무인들에게로 시선을 돌렸다.
피해야 하는 것이 당연하지만, 그러고 싶지 않았다.
문득 도주하던 제원영이 당황한 얼굴로 그를 불렀다.
“설풍 조장?!”
제원영에겐 말하지 않았지만 사실 작전은 아직 실패한 것이 아니었다.
몰려오는 적들 사이에는 삭무흔이 섞여 있을 테니까 말이다.
해청연은 처음부터 그들만으로 세 명의 절정 고수를 깔끔하게 해치우는 것은 무리일 것이라 생각했었다.
그래서 삭무흔의 진정한 정체를 모르는 제원영에게 말하지는 못했지만, 은신해 있던 삭무흔이 나머지를 암살하는 것이 원래의 계획이었던 것이다.
하지만 설풍이 도망치지 않는 이유는 그것 때문만은 아니었다.
설풍은 몰려오는 무사들의 해일을 보며 과거의 기억을 떠올렸다.
사방에서 몰려오던 무사들, 피와 불길로 가득했던 그의 집, 부상당한 채 자신을 안고 도주하시던 어머니와 피투성이가 되어 악전고투하시던 외조부의 모습.
늘 떠올리고 싶어 하지 않았던 그 기억들을.
설풍이 처음 전선으로 왔던 이유는 다른 조원들처럼 복수심이나 의협심 때문이 아니었다.
‘단지… 도망치고 싶었기 때문이었지.’
그랬었다.
설풍은 도망치고 싶었다.
복수를 해 달라는 외조부의 유언으로부터, 그리고 그 외조부도 미처 알지 못했던 자신의 핏줄로부터.
문득 청연의 아버지 검성 해운백이 해 줬던 충고가 떠올랐다.
‘자네는 이미 다음 단계로 나아갈 모든 준비를 갖췄네. 다만 벽을 넘지 못하는 것은 자네의 몸이 아닌 마음에 벽이 있기 때문인 것 같군. 무슨 사정인지는 모르겠지만 자신의 내면을 좀 더 관조해 보도록 하게. 그럼 실마리를 찾을 수 있을 걸세.’
그는 설풍을 정확히 꿰뚫어 봤었다.
설풍은 습관처럼 자신을 몰아붙이며 늘 미친 듯이 수련에 매진했지만, 마음 한편으로는 자신의 무위가 상승하는 것을 두려워하고 있었던 것이다.
자신의 무위가 충분히 상승했을 때 결국 무엇을 해야 할지를 알고 있었기 때문이었다.
그에겐 그것이 너무도 부담스러웠고, 또 두려웠다.
그래서 그저 비룡십삼대의 칠 조 조장인 설풍으로만 살고 싶었다. 그게 가능한 일이라면 말이다.
‘하지만….’
설풍은 또한 알고 있었다.
자신이 계속 벽을 깨지 못하고 제자리에만 머물게 된다면 비룡십삼대 칠 조 조장으로서도 계속 살아갈 수 없게 될 거라는 걸.
비록 도망쳐 온 곳이었지만, 이젠 그에게 너무도 소중해져 버린 모든 것들을 언젠가 잃어버리게 되고 말 것이라는 사실을 말이다.
그러니 이젠 선택해야 했다.
운명에서 도망치기 위해 이 자리에 머물러 있을 것인지, 아니면 소중한 것들을 지키기 위해 앞으로 나아갈 것인지를.
그리고 그가 무인인 이상 답은 처음부터 정해진 것일 수밖에 없었다.
설풍은 그 어느 때보다도 진중한 눈빛으로 밀려오는 무인들의 파도를 바라봤다.
그리고 선언하듯 중얼거렸다.
“나는… 더 이상 도망치지 않겠다.”
다음 순간, 정협방 무사들의 해일이 그를 삼켜 버렸다.
“이야아아아아압!”
“죽어랏!”
“하아아아압!”
사방에서 쏟아져 내리는 병장기들 속에서, 설풍은 제일 먼저 자신의 머리를 쪼갤 듯 내리쳐 오는 도의 옆면을 부드럽게 밀어냈다.
그러자 사선으로 빗나가는 도격, 균형을 잃고 앞으로 기울어지는 무사의 상체를 다시 툭 밀었다.
“어억?!”
다음 순간, 자신도 모르는 사이 동료들을 향해 몸을 날리게 된 무사의 몸이 내리쳐 오던 동료들의 병장기에 난자당하고 말았다.
푸화아악!
“끄아아아악!”
졸지에 동료의 몸에 병장기를 박아 넣게 된 무사들이 멈칫했을 때, 그들의 옆에서 도끼를 날리던 무사 한 명도 영문을 모르는 채 동료들을 향해 날아가고 있었다.
그리고 그 또한 몸으로 동료들의 병장기를 막아 내야만 했다.
푸화아악!
“꺼어억!”
기묘한 일이었다.
설풍을 덮쳐 가던 무사들이 뭐가 어떻게 된 것인지도 모른 채 동료들과 상잔하게 됐던 것이다.
하지만 이것은 시작에 불과했다.
설풍 주변의 무사들이 마치 항거할 수 없는 흐름에 휘말리듯 다시 동료들을 향해 내던져지고 있었다.
마치 용권풍에 휘말린 것만 같았다.
그리고 이것은 늘 맹수와 같이 역동적인 움직임으로 적들을 학살하던 설풍의 모습과는 궤를 달리하는 싸움이었다.
설풍의 머릿속에 검성 해운백이 해 줬던 조언의 나머지가 떠올랐다.
‘지금 자네의 무공은 지나치게 동에 치우쳐 있네. 그게 나쁘다는 것은 아니나 정이 없는 동은 산만해질 수 있지. 정중동의 묘리를 깨우칠 수만 있다면 눈앞의 벽뿐만이 아니라 그 다음 단계도 불가능하지는 않을 걸세.’
설풍의 발이 땅에 뿌리를 박은 듯 움직이지 않고 있는 가운데, 그의 주변으로 달려드는 무사들이 용권풍에 휘말린 듯 사방으로 날아갔다.
그리고 그 용권풍은 시간이 지날수록 위력을 더해 가고 있었다.
“저, 저런, 미친!”
뒤에 물러선 채 일반 무사들을 돌진시키고 있던 냉구언은 점점 위력을 더해 가는 설풍의 모습에 이를 갈았다.
아무래도 자신이 손을 보태야만 할 것 같았다.
‘멀리서 암기만 날린다면 그리 위험하지는 않겠지?’
설풍이 좀 무섭긴 했지만 발을 움직이지 않고 있는 그의 모습에 그렇게 판단한 냉구언이 설풍을 향해 조심스럽게 다가갔다.
설풍은 지금 무아지경에 빠진 듯 눈마저 감은 채 그의 주변에 사람으로 이루어진 용권풍을 발생시키고 있었다.
냉구언은 부하에게서 빼앗은 암기들을 설풍에게 겨누며 공력을 집중시켰다.
“이놈…. 죽어랏!”
퓨슈슈슉!
냉구언의 온 공력을 집중한 네 개의 암기가 설풍을 향해 쏘아졌다.
빛살 같은 빠르기, 웬만한 무사들로선 감지조차 못할 속도였다.
설풍의 눈 또한 여전히 감겨 있는 것을 보면 아직 눈치채지 못한 모양이었다.
냉구언은 득의한 웃음을 지으며 암기가 설풍에게 꽂히는 것을 지켜보았다.
하지만 바로 다음 순간 그 암기들이 다시 자신을 향해 날아오고 있다는 걸 깨닫고선 경악하고 말았다.
퓨슈슈슉!
“?!”
대체 무슨 일이 일어난 건지 이해할 수도 없었다.
하지만 지금은 이해보단 몸을 움직여 저것들을 피해야만 할 때였다.
자칫 잘못하면 자신의 암기에 자신이 죽게 될지도 모를 상황인 것이다.
“이익!”
황급히 몸을 날려 암기를 날리려던 냉구언은 문득 하체에 따끔한 통증을 느꼈다.
“윽?!”
잠깐 따끔하더니 하체에서 힘이 풀려 버리는 느낌.
몸을 날릴 수가 없었다.
“뭐, 뭐냐?!”
대경한 냉구언은 급히 팔을 들어 암기를 막기라도 하려고 했다.
하지만 팔 역시 움직이지 않는다는 것을 바로 깨달을 수 있었다.
“어, 우어억?!”
경악해서 소리친 그 괴성이 냉구언이 남길 수 있었던 마지막 말이었다.
다음 순간 네 개의 암기가 그의 가슴과 목을 꿰뚫었기 때문이었다.
푸욱!
“꺼억!”
그걸 본 주변의 무사들이 경악해 소리를 질렀다.
“냉 대협!”
“내, 냉 대협이 돌아가셨다!”
“저, 절정 고수가 모두 죽었어?!”
정협방의 무사들이 혼란에 빠지기 시작했을 때, 은신해 있다 냉구언을 기습했던 삭무흔은 다시 정협방 무사들 사이로 몸을 숨겼다.
그러곤 무아지경에 빠진 표정으로 인간 용권풍을 만들고 있는 설풍을 바라봤다.
언제 봐도 대단한 자였지만 오늘은 평상시와도 뭔가 격이 달라 보이고 있었다.
마치 무림의 절대자들처럼 말이다.
***
운남성 점창산.
과거 구대문파의 하나였던 점창파의 본산인 이곳은 현재 혈마교의 본진이 되어 있는 상태였다.
그리고 혈교의 현 지도자이자 영웅인 사혜혈마 전무광은, 점창파 장문인의 집무실에서 홀로 편안히 앉아 제갈지강이 보낸 전서를 읽고 있었다.
전서를 다 읽은 그는 청수한 문사와도 같이 빙긋이 웃음 짓고는 문득 입을 벌려 말했다.
“정협방이 드디어 발각된 모양이군.”
그러자 아무도 없는 허공에서 목소리가 들려왔다.
“생각보다는 오래 버텼습니다, 지존”
빙긋이 웃은 혈마가 물었다.
“그래서, 씨앗은 충분히 뿌려졌겠지?”
“충분합니다, 지존.”
“그래, 그럼 이제 정리하자꾸나. 척강과 사유를 데리고 네가 다녀오너라.”
그러자 잠시 대답이 없던 목소리가 약간 당황한 듯한 말투로 다시 말했다.
“속하만 가도 충분합니다, 지존. 특히 척강, 그 미친 멧돼지 같은 자를 데리고 가라 하심은….”
수하의 곤란한 목소리에 혈마는 너털웃음을 터트렸다.
“어허허허허! 기음, 너도 척강만큼은 곤란한가 보구나. 너희 셋을 함께 보내는 건 그 일이 아닌 검성 때문이다.”
“…검성 말씀이십니까?”
“그래, 제갈지강이 천의검성을 치워 줬으면 하는 모양이더구나. 이번에 정협방 쪽으로 보낼 모양이다. 어떻게, 검성도 너 혼자서 해결할 수 있겠느냐?”
목소리는 차마 그렇다고 대답하지 못했다.
그가 모시는 지존인 혈마에게 비할 자는 아니겠지만, 그래도 자신보단 한 차원 높은 고수라는 것을 알고 있었기 때문이었다.
그러자 다시 빙긋이 웃은 혈마가 말했다.
“게다가 이번 일을 해결하는 것도 정파인들이 보는 앞에서 공개적으로 처리되어야만 한다. 그래야 제갈지강도 나중에 다른 소리를 못할 테니 말이다. 그러니 사실 너보단 척강이 더 적합하겠지. 너를 보내는 것은 그저 그 녀석이 선을 넘지 않도록 관리하라는 뜻이다.”
혈마의 말이 끝나자 어쩐지 아까보다 힘이 빠진 듯한 목소리가 대답했다.
“존명, 지존의 뜻대로 될 것입니다.”
잠시 후, 그림자에 숨어 있던 수하의 기척이 사라지고 다시 고요하게 앉아 있던 혈마는 문득 한숨을 내쉬었다.
멀리서 익숙한 발자국 소리가 들려왔기 때문이었다.
바로 딸인 전희금의 발자국 소리였다.
그의 유일하게 남은 가족이자 그로 하여금 혈교에 몸담을 수밖에 없게 만들었던, 그래서 마침내 되찾을 수 있었던 소중한 딸 말이다.
하지만 그런 소중한 딸이 오고 있음에도 혈마의 표정은 그리 밝지 않았다.
그녀가 왜 오는지 잘 알고 있었기 때문이었다.
혈마는 잠시 기다리다가 전희금이 문 앞에 도착했을 때 무형지기를 이용해 문을 열어 주었다.
그러자 문밖에서 삼십 대 정도로밖에 보이지 않는 아름다운 여인이 들어왔다.
젊었을 적엔 더욱 아름다웠을 거라 예상되는 미모의 여인, 하지만 혈마를 바라보는 그녀는 눈물을 글썽거리고 있었다.
혈마가 따듯한 미소를 지으며 그녀에게 말했다.
“어서 오너라, 희금아.”
하지만 혈마의 따뜻한 말에도 전희금은 여전히 눈물을 글썽거리며 단도직입적으로 물었다.
“아버지, 아직도 유겸이의 소식이 없는 건가요?”
그러자 혈마는 마침내 한숨을 내쉬며 대답했다.
“비룡대에서 나온 것은 분명히 확인됐으니 아마 오는 중일 것이다. 다만 마음을 좀 정리하고 오지 않겠느냐? 점창파와 너에 관한 진실이 녀석에게 충격이었을 테니 말이다.”
그러자 마침내 전희금의 눈에서 눈물이 주르륵 흘러내렸다.
“아버지, 만약 유겸이가 잘못된다면 저는 도저히 살 수 없을 것 같아요.”
그 말에 혈마는 인상을 살짝 찌푸리며 말했다.
“어허! 이미 절정의 경지를 넘은 아이다. 너한테나 아이지 어엿한 절정 고수인 그 아이에게 어디서 무슨 일이 생길 수 있단 말이냐? 곧 좋은 소식이 들려올 테니 마음을 추스르고 있도록 해라. 그 아이를 다시 만났을 때 초췌한 모습을 보여 줄 수는 없지 않겠느냐?”
혈마의 다독임에 전희금은 눈물을 닦았다.
그리고 애써 웃으며 말했다.
“아버지 말씀이 맞아요. 다시 만났을 때 좋은 모습을 보여 주려면 제가 이래선 안 되겠죠. 수련에 더 집중할게요.”
하지만 그렇게 말하고 다시 밖으로 나가려던 전희금은 문득 발걸음을 멈춘 채 물었다.
“제가… 아버지를 믿어도 되는 거겠죠?”
세상에서 유일하게 사랑하는 딸의 질문에 혈마는 내심 한숨을 내쉬며 대답했다.
“믿거라. 다시는 너를 속이는 일이 없을 테니.”
그 말을 끝으로 전희금은 집무실 밖으로 나갔다.
딸이 밖으로 나간 후, 혈마의 얼굴은 드물게 분노의 빛으로 물들어 있었다.
‘역시 마가의 피가 섞인 놈이라 그런지 처음부터 끝까지 말썽이로군.’
혈마는 자신의 외손자이긴 하지만 원수인 마가장의 피가 섞인 마유겸을 처음부터 혈육으로 인정해 줄 생각이 없었다.
그래서 처음에, 딸인 전희금을 다시 찾았을 때부터 혈마는 그녀에게 마유겸은 이미 죽었다고 얘기했었다.
그 후로 한참을 힘들어하던 전희금은 몇 년이 지난 후에야 다시 기운을 차릴 수 있었다.
그리고 최근엔 아버지인 자신을 돕겠다며 이런저런 활동을 시작했었는데, 그것을 용인했던 것이 실수였다.
전희금이 죽은 아들에 관한 정보를 찾아보다 그가 멀쩡히 살아 있다는 것을 알게 됐던 것이다.
그간 쌓아 왔던 부녀간의 신뢰가 무너지는 것은 한순간이었다.
그래서 혈마는 이미 다른 곳으로 예정되어 있던 무림맹주와의 회담을 부랴부랴 비룡십삼대로 바꿀 수밖에 없었다.
‘그 모든 게 마가의 애송이 놈을 데리고 오기 위한 안배였는데…’
그 후의 모든 일은 혈마가 설계한 대로 잘 진행됐다.
마유겸에게 암시를 건 것도, 그래서 그가 혈교의 무공을 익히고 비룡대에서 벗어날 수밖에 없게 된 것도. 모든 것이 혈마의 안배대로였다.
근데 모든 일이 잘 진행되던 중, 한 가지 예상치 못했던 일이 생기고 말았다.
정작 모든 안배를 받아들인 마유겸이 혈교로 오지 않았던 것이다.
오히려 비룡대에서 나갔기에 행방조차 파악할 수가 없게 된 상태, 이것만큼은 뱀의 지혜를 가졌다는 사혜혈마 전무광으로서도 전혀 예상치 못했던 결과였다.
혈마는 후회했다.
차라리 그냥 납치해 올 것을.
아니, 딸인 전희금이 알기 전에 미리 죽였을 것을.
하지만 지금 그는 잘 알고 있었다.
마유겸을 다시 찾아오지 않는 이상 딸과의 관계는 영영 회복되지 않을 것이라는 걸.
한 번 속인 전적이 있기에 만약 마유겸의 행적이 완전히 사라진다면 딸은 결국 자신이 그놈을 죽였다고 생각하게 되리란 것을 말이다.
혈마는 집무실 밖으로 나가 바로 눈에 띄는 아름드리나무 한 그루를 바라봤다.
그러자 한순간 나무가 폭발하듯 불타오르기 시작했다.
화아아악!
격렬한 화염에 휩싸인 나무가 가루로 흩어져 버리는 것은 고작 한 호흡 만이었다.
분노한 혈마의 시선 한 번으로 일어난 일이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