87화 묵랑
청성파와 당문은 일단 정협방을 모두 정리한 후 다시 서로의 이권에 대해서 논의해 보기로 결정했다.
보다 못해 끼어들어 양쪽을 중재한 화영빈 덕분이었다.
나는 화영빈에게 비사영이 여인들을 구했다는 사실과 현재 그들이 있을 위치를 전음으로 전달하고는 구석에 빠져 있었다.
굳이 여기서 내 존재를 알리는 것이 바람직하지 못하다는 판단 때문이었다.
그런데 상황이 좀 묘했다.
원래는 은신이라도 하고 있어야 하는 거 아닐까 생각했었는데, 전혀 그럴 필요가 없었던 것이다.
양측의 사람들이 내 존재를 전혀 신경도 쓰지 않고 있었기 때문이었다.
화영빈이나 얼굴을 아는 그의 사제 이건도 수뇌부 사이를 중재하느라 바빠 나를 신경 써 주지 못했고 말이다.
수많은 사람들이 여기저기 왔다갔다하며 건물의 불을 끄고 정협방의 잔당들을 구속하고 있었는데, 그들 중 누구도 내게 시선을 주거나 말을 걸지 않는 기분은 굉장히 묘했다.
‘마치 눈에 안 보이는 존재가 되어 버린 것 같군.’
무시당하는 걸 기분 나빠 해야 하는 건지, 편히 있을 수 있는 걸 좋아해야 하는 건지 헷갈릴 정도였다.
그때 수많은 사람들 중 처음으로 내게 말을 거는 사람이 나타났다.
“어이! 거기 너!”
너무나도 허물없는 말투에 처음엔 나를 부르는 것인지도 몰랐다.
그래서 아무 생각 없이 쳐다봤더니 웬 젊은 무인들이 나를 바라보고 있었다.
물끄러미 그쪽을 바라보자 그중 맨 앞에 있는 자가 분노한 얼굴로 내게 다가오며 소리쳤다.
“네놈 귀가 먹기라도 한 것이냐?! 지금 네놈을 부르지 않았느냐?!”
헛웃음이 나올 만큼이나 거침없는 말투였다.
어이없는 얼굴로 바라보고 있자 그자가 내게 다가오며 물었다.
“청성파 문도는 아닌 것 같은데, 어느 문파에 속한 자냐?!”
슬쩍 그자와 그자 뒤에서 팔짱을 낀 채 이쪽을 바라보고 있는 이들을 훑어봤다.
대략 칠, 팔 명의 젊은 무인들.
당가의 무인들과 함께 있던 이들인데, 옷 색깔이 녹색이 아닌 것이 아무래도 당가에 속하지는 않은 다른 세력의 무인들인 모양이었다.
그리고 아무래도 내게 말을 건 놈은 똘마니고 우두머리는 저 중간에 팔짱을 끼고 있는 거만한 표정의 남자인 모양이었다.
일단 순순히 대답해 줬다.
“딱히 속한 문파는 없소만.”
그러자 놈이 그럴 줄 알았다는 듯 비릿하게 웃으며 말했다.
“역시! 예상대로 낭인놈이었구나.”
굳이 정정해 주지 않았다.
이자가 왜 이러는지 궁금해졌기 때문이었다.
그러자 내 침묵을 어떻게 해석했는지 놈이 거만한 얼굴로 내게 말했다.
“나는 사천의 명문인 홍사검문의 제자 노지왕이라고 한다. 그리고 저 뒤에 계신 공자는 문주님의 장자이신 홍사검룡 온제웅 공자시다. 곧 당씨 성을 하사받을 분이시지.”
홍사검문? 홍사검룡?
아마 당연히 알 거라고 생각하고 자랑하듯 말한 것 같은데 미안하게도 전혀 모르는 문파와 인물이었다.
다만 검룡이란 칭호가 붙은 것을 보면 젊은 나이에 절정의 경지에 오른 후기지수이긴 한 모양이었다.
게다가 당씨 성을 받는다라.
당문의 양자나 데릴사위가 된다는 얘기일까?
아무튼 그래서 어쩌라는 거냐는 표정으로 바라보고 있자 놈이 내 검 묵랑을 가리키며 말했다.
“우리 온제웅 공자께서 네놈의 검에 흥미를 보이셨다. 낭인 따위가 들고 다니기엔 과한 기물이라고 하셨지. 그러니 그 검을 팔도록 해라. 값은 후하게 쳐주도록 하마. 아마 낭인인 네놈으로선 평생 일해도 얻을 수 없는 돈일 것이다.”
어디까지 하나 가만히 듣고 있던 나는 상상도 못 했던 얘기에 결국 입이 떡 벌어지고 말았다.
아무리 그래도 당가와 함께 왔다면 정파인일 텐데 무인에게 검을 팔라고 협박하다니, 상상을 초월하는 행태가 아닐 수 없었던 것이다.
헛웃음을 지으며 물었다.
“지금 무인에게 검을 내놓으라고 하신 거요?”
그러자 놈이 당당하게 웃으며 고개를 끄덕였다.
“그렇다! 우리 공자께서 관심을 가져 주신 것을 영광으로 생각하거라!”
놀라운 사고방식이 아닐 수 없었다.
혈교가 아닌 놈들 중에도 이런 기가 막힌 사고방식을 지닌 놈들이 있다니.
역시 세상은 넓은 모양이었다.
웃는 얼굴로 놈에게 물었다.
“무인에게 병기는 생명과도 같다는 건 알고 계시오?”
그러자 놈이 피식 비웃으며 대답했다.
“하! 그거야 진짜 무사들 얘기지 네놈 같은 낭인 따위가… 컥!”
콰악!
놈의 목을 꽉 움켜잡아 가볍게 들어 올리고는 멀리서 보고 있는 온제웅이라는 놈을 향해 사납게 웃으며 말했다.
“알고 있다니 억울하지는 않겠군. 남의 생명을 빼앗으려 했으니 죽어도 할 말은 없을 테니까 말이야. 안 그런가?”
“꺽! 꺽!”
숨이 막힌 놈이 꺽꺽거리고 있자, 멀리서 보고 있던 온제웅이라는 놈과 그 무리들이 굳은 얼굴로 내게 다가오려 했다.
하지만 그때 다른 이가 먼저 내게 다가오며 말을 걸었다.
“무슨 일인가, 선우 소제?”
적하신검 화영빈이었다.
그를 향해 어이없다는 표정으로 웃으며 말했다.
“아, 화 대협. 이자가 제 검을 팔라고 협박을 하더군요. 무슨 홍사검문 소속이라고 했었는데….”
그러자 화영빈 또한 어이없는 얼굴로 놈을 바라보며 말했다.
“검을 팔라고 협박을 했다고? 그것도 선우 소제에게 말인가?”
그러고는 한심하다는 듯 고개를 절레절레 저으며 말했다.
“일류나 간신히 됐을까 싶은 자가 소면마군과 결전을 치렀던 선우 소제에게 그따위 소리를 하다니, 상대를 보는 눈이 이렇게 없는 자가 어찌 무림에서 살아왔는지 놀라울 정도군. 죽어도 할 말이 없겠어.”
그의 말에 숨을 잘 못 쉬어 시뻘게져 있던 놈의 얼굴이 창백해졌다.
이제야 위기감을 느낀 모양이었다.
나는 환하게 웃는 얼굴로 놈을 바라보며 대답해 줬다.
“네, 그래서 죽일 생각입니다.”
그러자 놈의 눈에 금세 눈물이 맺혔다.
그러고는 쥐어짜듯 말했다.
“커컥! 사, 살, 려, 컥! 죄, 죄송!”
문득 고개를 돌려보니 온제웅이라는 자와 그 일행들은 이미 이쪽을 외면한 채 급히 다른 곳으로 가고 있었다. 아주 신속한 방향 전환이 아닐 수 없었다.
너무나 깔끔하게 동료를 버리는 행동에 감탄이 나올 정도였다.
아, 동료라고 생각지도 않았던 건가?
문득 내 손에 잡힌 이놈이 불쌍해지는 기분이었다.
나는 놈에게 자리를 피하고 있는 동료의 모습을 보여 주며 물었다.
“네 소속이 어디라고?”
“그, 그런….”
놈의 눈동자에 맺힌 눈물이 주르륵 흘러내렸다.
혀를 찬 나는 놈을 그냥 땅에다 집어 던졌다.
쿠당탕탕!
“크어억!”
그러곤 비에 젖은 쥐새끼 같은 몰골로 내 눈치를 살피는 놈에게 귀찮은 듯 말해 줬다.
“꺼져라. 다음에 봤을 때도 비슷한 모습이라면 그때 네 목숨을 거두겠다.”
“가, 감사합니다! 감사합니다, 대협!”
나와 화영빈은 그가 꽁지 빠지게 도망가는 것을 잠시 지켜봤다.
그러다 문득 화영빈을 향해 조심스럽게 물었다.
“괜찮으십니까?”
여러 가지 의미가 담겨 있는 질문이었다.
그러자 잠시 도망가는 자를 바라보고 있던 화영빈이 엷게 웃으며 대답했다.
“글쎄, 그런 것 같네. 하늘이, 어쩌면 그녀가 아직 내가 오는 것을 원하지 않는다고 생각하니, 남은 삶은 좀 더 열심히 살고 싶어지더군.”
그렇게 말하며 웃는 그의 표정은, 여전히 한구석에 슬픔이 남아 있는 듯했지만 그래도 예전보다는 훨씬 개운해 보였다.
아마도 한번 죽음에서 돌아온 것이 오히려 삶의 의욕을 불러일으켜 준 모양이었다.
다행이었다.
그가 빙긋이 웃으며 내게 물었다.
“자네, 오 년 이내로 혈교를 공격하겠다고 했었나?”
오 년 이내로 혈교를 공격한다.
내가 늘 입버릇처럼 해 왔던 말이었다.
하지만 방금 전까지 무척 고민하고 있었던 말이기도 했다.
‘그게 과연 가능할까?’
사원양에게 처참하게 깨지고, 또 척강의 엄청난 무위까지 본 지금 그 목표는 하늘에 닿는 것만큼이나 무모해 보였기 때문이었다.
혈교를 무너뜨리기는커녕 아무것도 못해 본 채 개죽음당할 확률이 훨씬 높을 것 같았다.
하지만 이내 씨익 웃으며 고개를 끄덕였다.
“네, 그럴 겁니다.”
설사 그렇더라도, 아무것도 이루지 못한 채 개죽음을 당하더라도 나는 반드시 오 년 이내로 혈교를 공략해야만 했다.
어차피 그것은 가능하면 하고, 불가능하면 안 하고의 문제가 아니었으니까.
만약 혈교를 무너뜨리지 못한다면 결국 지난 삶처럼 모든 것을 잃게 될 것이 아닌가.
그러니 반드시 해내야만 했다.
나를 위해서도, 내 소중한 사람들을 위해서도.
그러자 화영빈이 그를 본 후 처음 보여 주는 뜨거운 눈빛으로 내게 말했다.
“그래, 어쩐지 자네라면 할 수 있을 것도 같군. 그때 나도 꼭 끼워 주지 않겠나? 지금보단 훨씬 더 힘이 될 수 있도록 최선을 다해 노력해 보겠네.”
늘 어딘가 비어 보였던 그의 눈빛이 전혀 생각나지 않을 만큼 활활 타오르는 눈빛이었다.
그 뜨거운 눈빛을 보며 문득 그런 생각이 들었다.
어쩌면 가능할 수도 있겠다고.
나 혼자가 아닌 이런 사람들과 함께할 수만 있다면, 정말 가능할 수도 있을 것 같다고 말이다.
내 가슴도 그의 눈빛과 함께 뜨거워지는 것 같았다.
장난스럽게 웃으며 말해 줬다.
“뭐, 지금은 좀 부족하지만 노력하신다는 말을 믿어 보도록 하겠습니다.”
그러자 그 또한 활짝 웃으며 대답했다.
“그래, 고맙군. 최선을 다해 보겠네.”
우리는 뜨거운 눈빛을 교환하며 서로의 손을 꽉 움켜잡았다.
서로의 손에서 느껴지는 뜨거운 열기가 심장까지 뜨겁게 달궈 주는 듯했다.
그러다 화영빈이 문득 생각난 듯 내게 물었다.
“아, 참. 이 얘기를 꼭 해 주고 싶었네. 자네의 그 검 말일세. 혹시 그 검에 대해 알고 있는 것이 있는가?”
“예? 제 검이요?”
나는 방금 전에 홍, 뭐라는 놈이 탐냈던 내 검 묵랑을 바라보며 되물었다. 그러자 그가 심각한 얼굴로 대답했다.
“그래, 자네의 검. 내 기억이 틀리지 않다면 나는 그것과 비슷한 것을 전에도 본 적이 있다네. 색은 다르지만 그 모습은 거의 똑같은 검이었지.”
그의 말에 묵랑의 비밀을 알고 있는 나는 깜짝 놀랄 수밖에 없었다.
묵랑과 똑같이 생긴 검이라고?
그리고 이어진 그의 얘기는 더욱 놀라운 것이었다.
“그리고 그 검을 갖고 계시던 분은 바로 검제셨네.”
“…예?! 검제라구요?!”
“그래, 적랑검제 또는 혈랑검제라고 불리고 계신 천하제일인 검제 반중양. 그분 말일세.”
입이 다물어지지 않았다.
혈랑검제 반중양.
그는 일제, 이왕, 삼성, 사마, 오괴로 지칭되는 열다섯 명의 절대자 중에서도 제일 첫 번째 자리에 위치한 자였던 것이다.
그러니까 이른바 천하제일인이었다.
느닷없이 튀어나온 그의 이름에 놀란 나는 그저 침만 꿀꺽 삼켜야 했다.
그리고 그의 다음 얘기를 기다렸다.
하지만 화영빈이 이어서 해 준 얘기는 조금 뜬금없게도 백여 년 전의 무림인에 대한 이야기였다.
“자네도 백 년 전 칠성검신에 대해 알고 있겠지?”
무신, 마신, 뇌신, 검신이 거의 동시대에 활동했던 백 년 전은 지금 무림인들에게는 신화로 기억되어 있었다.
그들 이후 다시는 무림에 ‘신’의 칭호를 얻은 이가 출현하지 못했고, 무신, 뇌신, 검신이 등장했던 절강성은 지금도 신지라고 불리며 무림인들의 성지로 추앙받고 있었던 것이다.
근데 그 마지막 신이었던 칠성검신의 얘기가 지금 나오다니, 설마?
두근거리는 심장 박동을 느끼며 고개를 끄덕였다.
“예, 물론입니다.”
“근데 그분이 칠성검신이란 별호 이외에도 천랑, 또는 천랑검신이라고 불리셨던 것도 알고 있나?”
천랑, 하늘의 늑대라고?
“천랑… 검신이요? 아니오. 들어 보지 못했습니다.”
그렇게 대답하며 문득 내 검 묵랑을 바라보았다.
호수구에 선명하게 새겨진 늑대의 머리를.
“검신께선 입적하시기 전 자신의 진전을 이을 만큼의 재능 있는 제자가 없음을 안타까워하시며 그렇게 말씀하셨다고 하네. 자신의 진전을 생전에 쓰던 물건에 남길 터이니 그것을 통해 후대의 인연에게 전해질 것이라고 말일세. 하지만 검신께선 그 물건이 무엇인지는 알려 주시지 않았지.”
침이 꿀꺽 넘어갔다.
그것이 얼핏 소문으로만 듣던 검신의 유산.
나도 모르게 중얼거렸다.
“피바람이 불었겠군요. 설마 검신혈사가 그래서?”
화영빈이 고개를 끄덕였다.
“그래, 바로 그래서 일어난 게 검신혈사라네. 무려 십 년이나 이어진 엄청난 피바람이었지. 생전에 그분이 쓰시던 붓 하나, 종이 하나마저도 수많은 생명을 앗아 갔다고 하더군. 하지만 그 피바람은 십 년쯤 지나자 언제 그랬냐는 듯 잠잠해지고 말았다네.”
“잠잠해졌다고요?”
그건 좀 이상한 얘기였다.
보통 보물에 대한 탐욕이 사그라드는 경우란 없었다.
더군다나 그게 검신의 진전과 관련이 있다면 십 년은커녕 인간들이 존재하는 한 무궁토록 피바람을 몰고 다닐 귀물임에 틀림없었다.
그런데 고작 십 년 만에 잠잠해졌다라.
생각을 정리하고는 천천히 입을 열었다.
“검신의 진전이란 것이 없었던 거군요.”
화영빈이 훌륭하다는 듯 웃으며 고개를 끄덕였다.
“정확하네. 그 피바람을 보다 못한 당시 사왕께서는 검신이 쓰시던 물건을 모두 모아 정파의 고수들 앞에서 하나하나 검증해 보이셨다네. 당시의 사왕께서는 지금의 사왕과는 달리 정사 모두의 존경을 받던 훌륭한 분이셨다고 하더군. 또한 검신의 지인이기도 하셨고 말일세.”
그건 무척 신기한 얘기였다.
현재 천하 이왕 중 한 명인 만사련의 련주 냉혈사왕 냉규람은 비록 사파인답지 않게 정정당당한 승부를 좋아한다는 평이 있기는 했지만, 그럼에도 천마, 혈마와 더불어 천하에서 가장 잔인한 자로 불리고 있었기 때문이었다.
그런 사왕의 선조가 만인의 존경을 받던 인물이었다니, 어쩐지 잘 상상이 가지 않았다.
화 형님의 설명은 계속 이어졌다.
“그런데 그런 분이 모든 유품을 모아 확인했음에도 그 어디서도 검신의 진전을 발견할 수가 없었다는 걸세. 아무도, 무엇도 찾을 수가 없었지. 그래서 결국 사람들은 결론을 냈다네. 검신께서는 자신의 유품에 탐욕을 부릴 자들을 상잔시키기 위해 그런 유언을 남기신 거라고 말일세. 실제로 그 이후 몇십 년간 무림에는 큰 혈사가 일어나지 않았다고 하지. 물론 그럼에도 대부분의 사람들은 검신께서 당신의 진전을 다른 어딘가에 감춰 놓았다고 믿고 있었지만 말일세.”
검신의 유산을 아무도 발견하지 못했다.
가슴이 두근두근거리고 있었다.
그렇다면, 어쩌면….
그때 화영빈이 말을 이었다.
“그런데 이십 년 전, 그분이 세상에 나타나신 거지. 평범한 낭인 무사였다가 어느 순간 무림의 절대자이자 천하제일검이 되어 버리신 혈랑검제 반중양. 그분께서 말일세.”
그의 말에 나는 침을 꿀꺽 삼키며 물었다.
“그럼 설마…?”
“그래, 몇 년 전 그분과 친분이 있으신 스승님과 함께 찾아뵀을 때 그분은 분명히 인정하셨다네. 당신께서는 분명히 검신의 진전을 이으신 것이 맞다고. 그리고 그렇게 말씀하시던 그분은 흐뭇하게 웃으시며 당신의 검을 바라보고 계셨지. 바로 자네의 검과 똑같이 생긴 붉은 검, 혈랑검을 말일세.”
그의 말을 들으며 멍하니 내 묵랑을 바라봤다.
심장이 터질 듯 두근거리고 있었다.
그렇다면 그 ‘묵랑’이라는 분의 정체가….
“물론 전혀 상관없는 검일 수도 있네. 또한 검신께서 남기신 검이 맞다고 하더라도 그저 잘 베어지는 보검일 뿐일 수도 있지. 하지만 항상 조심하게. 누군가가 그 검을 알아보는 이가 있다면 그는 분명히 그 검에 탐심을 드러낼 테니까.”
묵랑에 비밀이 있다는 사실을 알고 있는 내게, 그의 충고는 무엇보다 무겁게 다가오고 있었다.